한국 교육 거듭나기 SERI 연구에세이 61
박정수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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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정부는 사회의 수요에 걸맞은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대학에 가야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엄격하게 분류하는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여 교육 과잉이 가져오는 비극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다른 선진국처럼 실용적인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경쟁력 있는 직업학교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반드시 대학 교육이 아니더라도 각자가 적성을 살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평생교육의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고, 이를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19쪽

그러나 일년에 한 번 국가적으로 치루는 시험에서 대대적인 부정이 행해지고, 휴대전화, mp3 소지만으로 다음 해 입시 자격까지 박탈하는 현실은 한번의 대학입시로 한 사람의 인생 행로가 판가름나는 학력만능주의 사회의 폐단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현행 평가제도는 학생에게 능력 신장의 기회를 주기보다는 점수에 따른 우열 가리기, 한 줄 세우기라는 부정적인 인상을 지울 수 없다. -62쪽

수능 본래의 취지는 학생이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이 있는가를 진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능평가체제에는 학생의 적성이나 특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내용이 결여되고 있고,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대학에서의 수학능력을 예측하는 기능보다는 학생을 대학에 배치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제 7차 교육과정에서는 이러한 수능의 단점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각 대학에서 수능 점수에 상관없이 학생을 선발하는 특별전형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평가자에 대한 신뢰만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현재의 획일적인 평가방법에서 벗어나 다양한 평가 능력을 지닌 학생들 각자의 개성과 재능을 제대로 평가하고, 교육을 정상화시키는 제도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정부는 2008년도부터 대학입학 수능평가체제에서 내신의 비중을 높이고, 대학의 논술과 면접 점수 비중을 높이겠다고 발표했다. 고교 3년간 학생을 꾸준히 지켜본 교사의 평가를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사의 평가를 중심에 두고, 수능은 본래 목적에 맞게 기본적인 수학능력을 갖췄는가를 진단하는 수준에 머물러야 한다. -64쪽

학교 교육 자체가 대학입시라는 선발 평가에 예속되고, 학생들의 학습목표는 대학입시에 맞춰져 있다. 대학입시에서 수능이 주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한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은 거기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단위학교는 교육을 위한 평가가 아닌 수능을 위한 평가, 평가를 위한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험으로 학생을 평가하려면 지금보다 헐씬 더 구체적이고 세심한 방식의 평가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험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학과 성적뿐 아니라 적성과 잠재력까지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시험, 단순한 선발기제가 아닌 학생에게 능력 신장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시험으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 -65쪽

우리는 지금의 평가방식에 대수술을 감행해야 한다. 창의력과 문제해결능력, 리더십을 요구하는 지식사회에서 객관성 확보나 성적 처리의 편의를 이유로 낡은 평가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고전적인 평가방법에만 매달리지 말고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를지라도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시험성적만으로 학생을 평가하고, 그것이 입시뿐 아니라 사회적인 성공을 보장하는 현실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시험점수는 점수일뿐인데 그것을 한 사람의 인격, 노력, 실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다. 한 줄 세우기를 위한 시험이 아닌 학생 각자가 스스로를 평가하고 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시험, 시험을 통해 배움이 가능한 시험이 되어야 한다. -66쪽

교육현장에서 선택형 평가와 같은 선발형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수행평가와 같은 충고형 평가를 택할 것인가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 선택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교수 학습의 질을 개선하고, 학생들의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며, 창의성이나 문제해결능력 등 고등사고기능을 신장시키고, 학생 개개인의 전인적 성장발달을 돕기 위해서는 수행평가와 같은 충고형 평가제도의 정착이 요구된다. -67쪽

자질 부족 교원에 대한 검증은 필연적인 사회적 요구다. 교원평가체제는 학생의 학습권 보호 차원에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교원평가체제가 교원의 승진 여부 평가도구롬나 운용되어서는 안 되며, 교원의 저문성 촉진과 발달 기능을 포함한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현행 교원평가는 정보 제공 경로가 막혀 있어서 학교조직운영의 효과성을 증진하고, 조직을 발전적으로 이끄는 데 활용되지 못하고 행정적, 재정적 낭비만 초래했다. 평가 결과는 학교의 효과성 증진을 통한 교육의 질 개선에 활용되기보다는 과열된 승진 경쟁의 풍토 속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각종 인사관리상의 잡음을 차단하기 위한 통제적 수단으로 이용되어왔다.

이로 인해 교사들 사이에 교원평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었고, 결국 교원들의 의식구조를 왜곡하여 평가 자체를 적대시하는 풍토를 만들어냈다고 하겠다. -71-72쪽

하지만 학교 내신과 대입 준비를 위해 기존의 사교육은 그대로 유지한 채 EBS 수능방송을 플러스알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고3의 현실이다.

따라서 공교육의 수준을 높여가면서 사교육은 부수적으로 활용되도독 유도하는 게 이상적인 방법일 것이다. 학교교육만으로 충분하다면 자연스레 사교육을 찾는 학생들이 줄어들 것이다. 현재와 같이 단기적 대책만 앞세운다면 학생들의 부담만 가중된다.

지방의 몇몇 학교에서는 원어민 교사, 컴퓨터 강사, 예체능계 전문가를 초빙하는 등 지역 실정에 맞게 프로그램을 개발, 편성하고 있다.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는 학교 경영자의 확고한 의지와 교사와 학부모의 의식전환이 필요하다. 양질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학생들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내용이 투여되면 사교육은 차츰 줄어들 것이다. -83-84쪽

중요한 것은 문제해결력을 기르고, 자기주도적인 학습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에 걸맞게 교육과정의 양을 대폭 줄여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는 쪽으로 교육과정을 개편해야 한다. 이때 교사에게 교육내용과 평가의 재량권을 부여하면 사교육비 경감의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학교 교육의 내실화를 위해서는 교육여건 개선을 통해 모든 학교의 수준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키면서, 동시에 학교 간 격차도 완화시키는 '상향평준화'를 실현해야 한다. 모든 학교에 동일한 교육과정, 교사 기준, 학생선발방식을 요구하던 기존의 획일화된 평준화정책에서 탈피하여 학교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되 모든 학교에 일정 기준의 책무성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을 검토해야 한다. -84-85쪽

수능시험의 변별력을 강조하는 대학 측의 주장에도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변별력은 대학별 전형 과정에서 확보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수능시험은 고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내용을 제대로 배웠는가에 대한 기초적인 평가로 이루어져야 한다. -92쪽

입시철마다 입학전형료 수입으로 잔치를 벌이는 사립대학들, 이제 적절한 입시 시스템 마련을 위한 투자에 관심을 기울이자. 지금까지의 대입제도는 학생선발기준으로 성적을 내세웠는데, '성적'이 학력의 순서를 정하고, 상위에서 하위까지 일렬종대로 서열화하는 문제가 파생되면서 이러한 대입제도는 더 이상 합리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뢰할 만한 현실적인 학생선발기준은 무엇일까? 우선 학생들이 창의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고려한 평가 기준, 결과보다 과정을 통해 학생의 자질을 평가하는 기준을 생각해야 한다. -94쪽

학벌이란 특정한 학교를 나오거나 특정한 학파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조성하고 있는 파벌이다. 이 특정 그룹에 속해 있으면 개인의 능력과 무관하게 사회,경제적인 처우가 달라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며, 이는 현대판 신분제라고 말할 수 있다.

... 중략 ...

여기서 나온 결론을 종합해보면 비명문대 출신 학생들이 사회적 불평등을 겪고 있는데, 이러한 불평등을 겪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비명문대, 지방대라는 이유로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에 나와서 취업할 때 겪는 문제로부터 학벌문제는 시작된다. 이들이 천신만고 끝에 사회에 진출하더라도 내부에서 승진을 할 때 또 한 번 불이익을 받게 된다. 집단의 능력을 동일시해서 A라는 대학을 나온 학생들은 모두 동일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간주하는 학벌 내지 학벌주의 현상에서 탈피해야 한다. -111-112쪽

대학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학생들이 경쟁적으로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 또한 학벌이다. 예컨대,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들은 어쨌든 졸업이 보장되기 때문에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할 인센티브가 없다.

반면에 하위권 대학 학생들은 졸업을 해도 취업이 어렵기 때문에 입학하자마자 상위권 대학으로의 편입시험을 준비하거나 공무원시험, 토플 등을 준비하므로 대학 강의실이 공동화되어 있다. 대학교육이 공동화되어있는 마당에 기업 움직이듯 대학을 움직인다고 경쟁력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교육문제는 초중등교육 안에서 혹은 대학 안에서 풀 수 있는 성격이라고 보기 어렵다. 바깥의 힘인 학벌, 학벌주의, 대학 서여레제가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거 풀어야 보통교육의 정상화나 대학교육의 경쟁력을 얘기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113쪽

"학생들의 내면에서 최선의 것을 이끌어내는 것, 바로 이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진정한 교육은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정보를 학생들 머릿속에 억지로 채워넣는 방식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런 식의 교육은 오히려 학생들의 독창성을 파괴하고 학생들을 단순한 기계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참으로 쓸모없는 짓이 될 뿐이다." (마하트마 간디, <간디, 나의 교육철학>. 고병현 역, 문예출판사)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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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6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 중소도시 기준으로 평준화 고등학교의 내신교육과 그에대한 평가는
딱할 정도로 무의미한 수준입니다. 단편적 지식들을 교육하고 그것을 평가합니다.
수능평가는 그것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수능과 내신.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정보를 학생들 머릿속에 억지로 채워넣는 방식"
간디옹의 말씀대로이지요.
아이가 트라이한 한양대의 자연계 논술은 문제가 꽤 좋더군요.
아이의 과학적 소양을 수준별로 제대로 평가할 수준있는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한양대 이과 교수들의 능력을 다시 보게 되었답니다.
최소한 3년간을 투자한 보람을 느낄 만큼 평가의 방식도 성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잘코군 2007-11-26 17:49   좋아요 0 | URL
저 역시 현행 학교 교육이 단편적 지식을 주입하고 암기토록 한다는데 대략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게 교과서 구성이 그렇게 되어있고, 안에 있는 내용을 가르쳐야만 하는 교사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교과서 자체가 주입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내신시험은 그 안에서만 낼 수 밖에 없어요. 다른데서 뽑아와서 내거나 생소한 지문을 던져놓으면 아이들의 불평불만이 이어지고, 아마도 열혈 학부모들은 시험문제에 대해 항의를 하거나 하겠죠. 가르치지 않은 내용이 나왔다고.

학교 입장에서도 이런 불만을 접수할 가능성이 있는 쪽을 선택하느니, 그냥 무난하게 '교과서 중심으로' 따를 수 밖에 없고요. 심지어는 수행평가까지도 자율적으로 하기 무섭습니다.

수능은 자격고사로 하고, 내신은 일단 교과서부터 좀 자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서 암기식, 주입식 수업과 시험을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근데 수능을 자격고사화했을 때의 문제점이 이번 대입의 상황과 같겠죠. 그것 외에 별다른 판단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등급제 안개 안에 갇혀버린 형국이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논술 고사를 선호합니다. 수행평가에서도. 근데 논술 답안을 평가하는 기준 역시 정해져있다고는 하나 매우 주관적이죠. 그래서 또 문제가 되고. -_- 하다못해 중학교 수행평가로 논술을 보더라도 왜 자기는 이것 밖에 못받느냐고 따지러 오는 애들이 꽤 있습니다. 그럼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죠. 그래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긴 마찬가지에요.

 
학교에서 평등을 말하다 SERI 연구에세이 51
곽해룡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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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이 강한 학교사회에도 신선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서울 D고에서는 교사들의 출신대학별 모임이 자진 해체됐다. 학연이 직장 분위기를 해친닫는 인식 아래, 1년에 몇 차례씩 모이던 동문 회동을 구성원의 합의하에 해산했다는 소식이다. 학교장이 앞장서 자신의 출신대학 모임을 부추긴 경우와 얼마나 대조되는가. 교사들의 이러한 자정 노력이 확산되었으면 좋겠다.-44쪽

늘 예외적인 특별 대우를 원하는 사회, 공정한 경쟁보다는 불공정한 논리가 일상적으로 적용되는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은 공정한 게임에 익숙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준법정신을 말로만 떠들고 실제로 법을 지키는 사람은 바보 취급당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58쪽

왜냐하면 학교는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학생에게 실제로 여러 가지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규율 사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전보다 학생들의 자기주장이 강해져 교사의 영향력이 다소 약화된 감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교사가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입시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학생과 학부모에게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때로는 이러한 말들이 부메랑이 되어 학부모나 학생들이 교사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역이용되기도 하고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미명이나 명분을 벗긴 실체는 보잘것없는 경제적 욕심에 불과할 때가 많으며, 이를 눈치 챈 학생들에게 교사는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62쪽

요즘 아이들은 사람보다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컴퓨터에 애착을 느낀다. 나와 생각이 다른 친구와 어울리면서 말다툼을 벌이기보다는 내 맘대로 되는 컴퓨터와 친구하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인간 친구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학교에서도 친구와의 의견 조정을 통한 협력을 기피하고 각자 자기주장만을 내세워 상호간에 소통이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현 입시 제도의 부정적 측면인 개인별 경쟁을 부추기는 경향으로 인해 친구 없는 아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이, 온종일 컴퓨터만 가지고 노는 자폐적인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놀이와 생활을 공유하는 또래집단의 의미가 약화, 변질되고 있다.-75쪽

"만남이 교육에 선행한다"는 볼노의 말처럼 교육 이전에 '어떤 학생'이 '어떤 교사'를 만나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었느냐 하는 것이 교육의 수준을 결정하고 인생의 방향을 좌우한다.

사제 간의 인격적 만남은 질적인 교육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필요조건이다. 인성 교육을 배제한 지식교육은 그 효과가 의심스러우며, 지식을 탐욕 추구의 도구로만 사용하는 '불량시민'을 양성할 위험성이 높다-85쪽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거나 자신이 부모의 결정을 무조건 따르는 의존적인 인간이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스스로 판단하여 신중하게 선택한 것을 추구하면서 느끼는 성취감의 진수를 맛보지 못하고 있다. 교사는 학생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선택에 따른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86쪽

교사 평가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체와 매너리즘에 빠진 교직 사회를 자극하여 교사의 자질 향상 및 교육에 대한 교사의 적극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정한 평가 기준과 객관성을 담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평가를 강행하는 것은 교육적 목적 보다는 다른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게 한다.-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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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과 학부모들이 바라는 선생님은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아이에게 필요한 기초적 지식을 잘 가르쳐 주는 선생님입니다.
간명하지요. 또 그런 선생님들이 실제로 많이 계십니다.
정치적인 관점은 전혀 관련이 없지요.
부족한 선생님들께서 자위책으로 정치적 관점을 내세우는 것 같습니다.
동문서답인거 같아서 딱하답니다.
아이들이나 부모들이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체제도 아니고..
군소리 말고 주는대로 받아 먹어라인 것만 같답니다.

하는 수 없이 안되는 학교, 도저히 안되는 선생님들의 교육에 절망하고
학생과 학부모들은 유학을 가거나 학원에 가거나 과외를 받거나 합니다.
한국의 교육 현실은 정말 참담한 지경입니다.
아프락사스님.


이잘코군 2007-11-26 17:58   좋아요 0 | URL
교사평가제에 있어서 여러 문제가 생길 거 같은데, 평가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에요. 교장이 하면 교장에게 아부해야하고, 학부모가 하면 평소 학부모에게 잘 보여야하고, 학생이 하면 학생에게 수업내용과는 상관없이 인기를 받으려고 잘 놀아주는, 또 점수도 막 퍼주는 상황을 피할 수 없어요. 대학에서도 교수평가를 하면서 학점이 짠 교수들은 상대적으로 짠 평가를 받게 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목격하죠. -_- 평가는 참 어렵습니다.

사실상 교사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어디에도 얽매이거나 구속되지 않고. 하지만 영 부실한 교사들이 많다보니 그들을 어떻게든 걸러내고 개선시키고자 이런 평가를 기획하는 것이고, 멀쩡한 다른 교사들과 그렇지 않은 부실한 교사들이 함께 거부권을 행사할 수 밖에 없는 형국을 만들고 있는거죠. -_-

저는 아직 정식 교사도 아니고, 실력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실력있고 인격적으로 괜찮은 교사라 할지라도 이런 평가는 매우 거북스러울 거 같습니다. 내가 멀쩡하니 그래 평가를 받자, 가 아니라, 나를 교단에 세웠으면서 믿지 못하고 평가하려는 것을 거부하는거죠. 어느 쪽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아야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 제 스스로가 생각하는 올바른 방식으로 학생들과 관계 맺을 수 있을 거에요.

이와는 별개로 다른 말인데, 저는 학부모와 학생에게 학교를 선택하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전에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원하는 다양한 학교의 신설이고요. 외고를 원하면 외고에 보내주고, 컴퓨터고를 원하면 컴퓨터고에 보내주는 식으로. 중학교 전체 성적으로 기준을 나눌 것이 아니라, 그쪽에 재능이 있고 간절히 원하는가가 우선시 되어야 할거에요. 가령 외고를 희망하는 학생은 외국어 성적과 국어 성적 등을 기준으로 나누고, 컴퓨터고 쪽은 실기시험을 보거나 컴퓨터 교과 성적을 기준으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지식인마을 23
이양수 지음 / 김영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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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입장은 말하자면 일종의 생각을 통해 각각의 입장의 우열을 가려보자는 것이다. 실제로 현실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속에서 어떤 입장이 다른 입장보다 나은지를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우열을 가리기 위한 가장 단순한 방법은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하고, 그 조건하에서 어떤 결정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 결정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월함을 보여줄 수 있는 기준과 절차이다. 그래서 원초적 입장은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적인 실험일 뿐이다. 그러나 이 가상적인 사유실험이 중요한 이유는 현대의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공리주의 정의원칙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보다 우월한 정의원칙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35-36쪽

개인마다 삶의 목표와 계획은 다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잣대로 그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는 모두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즉, 각각의 개인들은 모두 상이한 자기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인격적으로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합리성의 차이가 인간의 삶에서 근원적인 갈등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인간들은 갈등한다. -51쪽

민주주의 사회란 각자의 의견과 개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능률적이고 생산적인 사회관계를 모색하는 체제다. 당연해 보이는 말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순투성이다. 능률적인 생산체제가 되기 위해선 어느 정도 개인의 희생이 필요하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려면 생산적인 사회체제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62-63쪽

정의에 관한 우리의 직관적인 믿음은 무엇인가?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원칙이든 보편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보편적이란 자기의 선입견이나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흔히 이성적으로 말할 때 쓰는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사회제도의 정의로운 원칙은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사회의 정의원칙은 사회 성원들의 선택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도덕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 정의원칙은 우리의 도덕적 평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다만 이때 중요한 것은 도덕적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정한 상황이다. 굳이 공정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공정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이미 도덕적인 선택의 기회가 박탈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평가를 위해서는 공정한 상황 못지 않게 공정한 절차의 수립 또한 중요하다. 공정한 상황에서도 절차가 공정하지 못하면, 얼마든지 잘못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정의원칙의 도덕적 선택은 원칙적으로 공정한 상황과 공정한 절차를 요구한다. -67쪽

한 사람이 공리적 이유로 윤리적 판단을 했다고 해도 도덕적으로 비난할 근거는 없다. 그 사람의 도덕적 사유의 자율성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판단이 사회적 판단의 정초라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사회적 판단은 한 개인의 동의가 아닌 사회 성원 모두의 동의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104쪽

롤스의 출발점은 철저히 현대 사회가 당면한 현안들이다. 더욱이 그 해결 방법은 사회의 부당한 관행과 정의롭지 못한 제도를 철폐함으로써 그 사회에 살고 있는 개인들이 진정으로 사회 협동을 이룩하면서 자신의 것을 찾아가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 즉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비춰줄 수 있는 일종의 횃불이었다. 물론 이 횃불이 구체적인 제도와 관행의 문제점을 드러내기엔 역부족일 수 있다. 그러나 롤스는 방향성의 제시만으로도 사회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폭력적인 사회를 혐오하는 것도, 그 절차의 비민주적인 측면을 부정하는 것도, 정의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롤스의 해결책은 유토피아적인 색채가 강하다. 그러나 그는 정의원칙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다보면 결국 유토피아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론을 실현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109-110쪽

공리주의의 실질적인 문제는 사실 사회가 수많은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혀 다른 개성과 삶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점을 잠시 잊고 있다는 데 있다. 개인의 개성이 다른 만큼 그 생각의 차이도 크다. 이 같은 차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다원성의 핵심이며 동시에 그것은 사회생활의 공통전제다. 그러나 공리주의자들은 이 같은 생각의 차이보다는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는 공평하고 불편부당한 개인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에는 물론 근대 과학적 사유의 전형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이성을 통해 자연법칙을 알아낼 수 있듯이, 사회와 인간관계에 관한 법칙도 이성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깊게 뿌리박혀 있다.

-118-119쪽

(위에 이어서)

그러나 이와 같은 사유는 각 개인들이 상이한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그 개성의 차이가 사회협력 과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은 분명 이상적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사횐는 사실 어떤 생산적인 활동도 없다. 모두가 같은 능력,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상상해보라.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롤스는 사회협력을 위해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용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런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는 제한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제1 정의원칙을 충족시키면서도, 각 개인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공정하게 부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기회가 공정하게 부여되지 않는 경쟁에서 그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과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119쪽

매킨타이어의 주장에 따르면 원초적 입장은 일종의 개인의 태도변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다. 이 장치 안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이익이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용인받을 수 있는 관점에서 모든 사안을 판단할 것이다. 자신의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관점을 이미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각종 사회 제도의 근간이 될 분배정의의 원칙을 찾을 수 있다.

... 중략 ... 특히 미완성적 인간이 삶을 통해 자신을 완성시켜가는 '배움의 과정'과 '인격완성'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삶의 완성은 근대인의 이상과 다르게 오직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더불어 사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고, 공동체 없이 어떤 윤리적 삶도 가능하지 않다. -145쪽

롤스는 분명 이런 형태의 덕(밑줄그은이 주 : 습관적 행동을 통해 가꿔나가는 덕)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인간 행위의 정의로움을 직접적으로 평가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제도가 인간의 행위에게 영향을 미치는 파장이 한 개인의 도덕적 삶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제도의 정의로움이 인간 행위의 그것보다 중대하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 행동과 그 실천적 덕을 추종한 덕 철학보다는 개인과 사회제도와의 관계에서 정의문제를 고찰하려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롤스는 정의개념을 결국 개인과 사회제도를 연결시켜주는 핵심 개념으로 본 반면,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연결고리가 매우 추상적인 인간을 전제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결국 그 강조가 서구 근대철학의 전통을 전적으로 수용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148쪽

롤스의 가정은 옳음의 관점이 각 개인의 삶의 구체적 내용과 방향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고, 매킨타이어의 가정은 그 옳음의 관점이 보편타당한 영원의 진리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구체적인 가치를 통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인간들의 삶의 방식 속에서 정당화된 합리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51쪽

사회 재와의 불평등 문제가 사회악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개인의 도덕적 완성보다도 사회제도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 보다 중요한 것은 사횢데도가 정의롭지 않고도 과연 그 사회제도에 얽매여 살아야 할 사람들이 정의롭게 살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분명한 것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정의로운 인간은 더욱 그리워진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정의로운 인간이 되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롤스는 만일 사회가 정의로울 수만 있다면, 비록 도덕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인간들도 별 다툼없이 사이좋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정의로운 사회의 제도가 인간 삶을 제대로 규제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다. 사회악을 송두리째 뿌리 뽑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일관된 정책이 필요할지라도 말이다. -153-154쪽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우리 생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자신과 관련된 모든 조건을 잠시 잊고 오로지 사회가 필요한 이유와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을 생각하면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정의원칙에 도달할 수 있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해, 원초적 입장은 모든 사람들이 돋거적 관점에 들어설 때 가능한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원초적 입장은 도덕적 관점을 대변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롤스의 원초적 입장의 사유실험은 일상생활의 이해관계에 갇혀버린 개인들이 사회생활에 필요한 관점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실 인간의 도적적 능력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자기 욕망에 갇혀 타인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타인을 진정한 타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도덕적 삶인 것처럼, 원초적 입장은 사회의 필요와 그 효율성을 위해 조정해가는 원칙을 도덕적 관점에서 추론하여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다. -154-155쪽

법치주의는 각 개인이 지닌 윤리적 선택의 중요성을 도외사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법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일반적인 상황을 언급한 것이지 구체적인 인간들이 행해야 할 행동규범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던지는 의사의 선의의 거짓말을 법으로 금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엄밀하게 말하면 법은 우리 삶의 일반적인 방향성을 언급할 뿐이지, 특정 상황에서 특정 인간이 다르게 행동할 여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윤리적 선택과 행동은 사실 모호한 상황과 이유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점에서 상황에 맞는 윤리적 행위를 하는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60쪽

"과연 원초적 입장의 관점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가?"

이 물음 속에는 강한 거부의 메세지가 담겨있다. 이상적인 인간 관점의 전횡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규범으로, 형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규범은 무엇인가? 단순히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지시하고 있지 않을까? 매킨타이어 입장에(서) 보자면 도덕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잘못되었다. 도덕규범을 찾으려는 근대의 도덕적 질문은 '무엇을 해야마 하는가?'였다. 이 물음은 개인의 도덕적 정체성의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 항상 도덕적 행위의 근간이나 원칙을 묻게 된다. 사회규범이 무엇보다 우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매킨타이어는 반문한다. 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가? 이 물음을 통해 매킨타이어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의 원칙보다는 도덕적 행위를 할 사람의 도덕적 성품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분명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인격적인 성품이고, 이 성품이 그 사람의 유덕함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162-163쪽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지금 우리 상황에서 요구되는 도덕적 논의는 도덕적 성품을 지니고 사회의 가치를 바꾸어가려는 인간들의 육성이다. 서구의 전통에서 보자면, 이러한 도덕적 이상의 완성은 서구 근대성과는 다른 전통에 호소할 때 가능하다. 그 전통에 의하면 도덕적 인간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유덕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다. 도덕적 인간에게 중요한건 구체적인 상황에서도 올바른 행우를 할 수 있는 능력과 관행이지, 단순히 불편부당한 관점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롤스 철학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서구 근대성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도덕철학에서 잃어버린 전통은 유덕한 성품을 통해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고,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다. 이러한 전통을 되살리는 것 또한 중요한 도덕 철학의 과업 중 하나다. -165-166쪽

공동체주의자들에 따르면 도덕성은 타인의 이익에 대해 무관심하면서도 항상 자기 합리성을 추구할 줄 아는 특정한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마주치는 보통 사람들에게 요구된다. 보통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러나 이 불완전함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의 도덕적 함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불완전함이다. 따라서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을 굳이 도덕적 인간의 대변자라고 볼 이유가 없다. 설령 그들이 도덕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해도 그 입장이 반드시 실제의 인간들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거센 환경의 변화에도 굳건함을 잃지 않는 덕성이다. 이러한 덕성을 지닌 사람들은 비록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하고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줄 아는 구체적인 인간들이다. -172-173쪽

사회가 생산할 수 있는 총합은 사회 성원들의 협력의 차이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사회 생산의 총합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 많은 경우 사회협력은 와해된다. 사회협력이 와해되었다는 것은 그 사회체제 내에서 성원들의 능력의 차이가 차별이나 불평등으로 심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 사회체제 내에서의 불평등의 심화는 궁극적으로 사회성립을 위태롭게 한다. 불평등의 심화는 결국 사회구성체의 핵시인 사회 성원의 자발적 차며를 가로막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협동이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불평등을 제거해야만 한다. 불평등은 단지 일시적으로 모든 사회 성원들에게 동일한 몫을 제공한다고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협동을 공정한 원리와 절차에 따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정의의 원칙은 각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 사회에서의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는 조건을 찾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공정할 수 있는 조건을 찾는 것이다. -190-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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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4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정성, 보편성을 판단하는 능력은 '얼마간' 본능에 내재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간'을 위 문장에 삽입합니다. 하하
침팬지 집단의 행동양상을 관찰한 결과를 보면
리더가 공정하지 않으면 다른 침팬지들이 그걸 받아들이지 않더군요.


이잘코군 2007-11-24 11:37   좋아요 0 | URL
음, 롤즈는 공정성의 기준을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장치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매킨타이어는 롤즈의 시도에 동의하면서도 롤즈가 바라보지 못한 현실 속의 인간 개개인을 바라본 것이죠. 현실을 사는 개개인들이 원초적 입장에 놓여진 당사자들이라면 롤즈의 공정성은 쉽게 확보되겠지만 그렇지 않아서 문제에요.
 


  처음으로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곳. 대형병원에 딸려있는 장례식장은 10개 가량의 작은 방으로 구성되어 각기 다른 죽어간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건물의 내부구조는 꼭 강촌이나 대성리에서 볼 수 있는 일렬로 쭉 늘어선 그런 집과 같았다. 또 개방된 모텔방 같은 느낌도. 같은 지붕 아래 다닥다닥 붙어있지만 옆방에 있는 다른 이들이 뭘하고 노는지, 그들이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는다. 10개의 방에 걸려있는 사진 속 주인공들은 다른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고, 그들의 성별과 연령대를 비롯해 살아온 인생사도 확연히 다를 것이다.

  어제, 내가 들렀던 방의 주인공은, 어머니의 이모의 남편분이었다. 이분은 아직 한국남성의 평균 수명에 못미친 연세로 세상을 뜨셨다. 육십다섯이라 했던가. 듣기로는 평소 술을 굉장히 좋아해서 매일같이 마셨다고 하는데 병명은 들었으나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 속이 간질간질하다. 본래 어머니의 이모분만 몸이 안좋으셔서 병원에 다니고 요양원에 다니고 하셨다. 이틀전 병원에 간김에 남편분도 살짝 안좋아서 검사를 받고는, 그곳에서 큰 병원으로 한번 가보라고 했다는데, 병원에 가는 길에 차안에서 갑자기 돌아가신거다.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나는 그 분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어릴 때에도. 내가 지금보다 훨씬 어린 시절 명절 때면 - 흔히 구분하는 방식에 따르면 - 친가에 들러 친척들의 얼굴을 보곤 했지만, 외가에 들른 적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외가에 무심했고, 가아끔 어머니를 따라 역곡이고 어디고 가서 낯선 사람들을 보며 인사했던 기억만 남아있다. 동생은 나보다 기회가 더 잦았고, 그래서 어제 그 자리가 나만큼 어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보는 사람마다 누군지 기억하고 있었고, 그들의 관계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반면, 나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지 못했다.

  얼굴을 알지 못하는, 만난 적도 없고, 그저 핏줄로만 연결된 고인의 죽음은, 내겐 그저 오랫만에 외가쪽 친척들이 만나는 자리였을 뿐이다. 나뿐 아니라 그곳에 모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랫만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짓고 안부를 묻고 할 말 없는 대화를 나눈다. 관계도 복잡해서 일일히 기억할 수 없다. 또다른 이모 할머니의 딸의 남편은 내게 어떻게 되는지, 돌아가신 분의 딸의 남편은 나와 어떤 관계인지 따지는건 머리 아프다. 그냥 다 똑같이 내 건너건너 핏줄의 남편으로 기억할 뿐.

  어릴 때 가끔 가서 놀던 형아(어릴적 느낌 때문인지 이렇게 불러줘야만 할거 같은)는 이제 나와 같이 나이 들었다. 듣기로는 나보다 한 살 많다 했다. 어릴 땐 아주 가끔이었지만 같이 비행기며 자동차며 가지고 놀았던 사람과 나는 그간의 세월의 힘으로 서로에게 말조차 건넬 수 없는 어색한 처지가 되었다. 그 형아의 누나도 마찬가지. 하지만 대략 얼굴은 옛날 그 형태가 남아있다, 고 애써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끼워넣는다. 어머니와 이모들을 제외한 나머지 앉아있는 이들에게 그 자리는 침묵의 공간이었다. 7시쯤 도착해 빈소 뒷편으로 마련된 가족들이 쉬는 공간에서 육개장이며 떡이며 도라지며 오징어며 주워먹고는 10시쯤 되어 그곳을 나왔다.

  장례식장은 영화만큼이나 슬프지 않았고, 숙연하지도 않았다. 칸칸이 일렬로 나열되어있는 병원 내부의 구조가 그러했고, 빠르게 각 방으로 옮겨지는 음식물들이 그러했고, 고인의 죽음보단 오랫만에 만난 친척들 간의 반가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건너편 방에서 나온 20대 초반의 청년 세 명은 가운데 마련된 공동의 휴게장소에서 장례식장 떠나가라 시끌벅적 떠들며 웃고 있었고, 심지어 한 청년은 일어나 자신이 말로 설명한 것을 몸으로 액션을 취하며 보여주기도 했다. 장례식장은 고인을 떠나보내는 장소보다는 평소 만날 수 없던 지인들이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반가움을 표하는 그런 장소가 되어버렸다. 고인은 그곳에서 소외되어있었다. 하지만, 이게 그리 나빠보이지는 않는다. 

p.s. 어떤 대형병원은 12시가 되면 모두들 가도록 지시한다고 한다. 상주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이건 아마도 병원의 편의를 먼저 생각한 발상에서 나온 거겠지만, 장례식장을 지키는 이들에겐 '어쩔 수 없는 고마움'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밤을 새며 그곳을 지키고 있는건 너무도 피곤한 일이고, 병원 측의 방침이 그렇다면 모른 척 받아들여 쉴 수 있는 핑계를 댈 수 있으니 그들에겐 고마운 일이다. 모든 것이 편의 위주로 돌아가는 것 같아 씁쓸하면서도 내일을 살아야 하는 남아있는 이들에겐 참 고마운(?)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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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2007-11-23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는 마지막 길은 북적북적 소란스러운게 좋다고 하더라구요...
재가 생각해도 그게 나은거 같아요...

비로그인 2007-11-2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저도 예전에 장례식장을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몇년 전에.
하지만 상사의 부모님 장례라 ...느낌이 없었습니다. 슬픔과 기쁨은 사람과의 거리에
따라 유무가 결정되는 것..게다가 우는 사람도 없더군요.
다들 조용히 음식들을 먹을 뿐.

웽스북스 2007-11-2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례식장이 처음이라는 게 신기하네요 ^^ 저는 재작년쯤부터 엄청 다녔어요, 1년에 다섯번씩은 갔던 것 같아요- 근데 역시나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참, 어렵죠-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잘 모르겠고, 그냥 전 아무말도 안하고 그래요- 제일 침울했던 장례식은 회사 팀장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였는데, 그 땐 정말 다들 망연자실이었어요

잉크냄새 2007-11-2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자식,아내나 남편의 시신을 곁에 두고서도 국그릇을 들듯 상가집의 담론은 언제나 삶이죠.
 


  이번주 시사IN엔 프랑스의 제 1 경제지가 루이뷔똥에 흡수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미 루이뷔똥 측은 제 2 경제지를 먹어치운 상황에서 1 경제지까지 흡수한거라고 하는데, 게다가 꼭대기에 앉은 회장이 사르코지의 친구라고. 해당 언론사의 프랑스 기자들은 지금 파업 중이다. 다 들고 일어나서 절대 안된다, 고 외치다가 편집권 독립을 외치고 있다고 하는데, 루이뷔똥이 들어줄리 없지.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해당 언론사의 기자들 뿐 아니라 모든 기자들이 다 들고 일어나서 외치고 있는 형국인데, 얘네 보고 있으면 프랑스는 참 '파업'과 '연대'가 자연스럽다는 느낌이다.

  얼마 전에도 파업으로  - 지금도 하고 있을듯 - 버스, 지하철, 택시 등의 모든 대중교통이 정지된 상황이었는데 티비로 본 시민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차분했고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아예 꼼짝도 못할 상황인데도 그들의 파업을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는 종로에서 시위 때문에 잠깐만 차 막혀도 같은 기사 아저씨들이 승객들 들으라고 이런 미친 엑스엑스들 때문에 차가 못나가잖아, 라고 툴툴 대는데, 얘네는 출퇴근을 못하는 시민들이 당연히 여기니 어찌 이상하지 않으랴.

  현재 프랑스에서는 자전거가 동났다고 한다. -_- 헐. 이건 예전부터 환경오염 문제 때문에 자발적으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미미한 정도였고, 지금은 출근 수단으로 자전거를 이용해야만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다들 자전거를 구입한게다. 시에서 마련해준 대여용 자전거를 빌리고 반납하는데만 한 시간이 걸리는데 아무런 불평불만도 없다. 또 헐, 이다. 게다가 더더더욱 놀라운 건 회사 차원에서 자전거를 구입해 직원들에게 하나씩 대여해줬다는 사실. 또 헐, 이다.

  난 프랑스 예찬론자는 아니지만 정말 여기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저 먼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으랴. 어쩌면 루이뷔똥이 먹어버린 신문사로부터 편집권 독립을 주장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프랑스 기자들 아자! 사르코지 바보, 루이뷔똥 바보

  참, 이번주 시사IN에도 작게 실렸고, 며칠전 알라딘에서도 내오랜꿈님이었나, 아니면 다른 분이었는지 모르겠는데, <프레시안> 후원에 관한 글을 봤다. 나는 프레시안의 존재만 알고 있지 사실 사이트를 들어가 본 적은 거의 없는데 - 아마도 포탈에 연결된거 타고서 두 서너번 들어간듯 -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줄은 몰랐다. 한미 FTA 반대 기사를 썼더니 정부 광고가 끊겨버렸고, 타결을 앞두고서 정부에서 10배 이상의 금액을 제시하며 찬성 광고를 실어달라 했다고. 이 쓰다듬어주고 싶은 언론은 이걸 거절했다. 아 이런 멋쟁이. 박인규 발행인 왈 그 이유는 "기자들을 굶길 수는 있어도 울릴 수는 없다"는 것. 아 이런 또 멋쟁이.

  정부가 이런 식으로 언론 조작을 꾀하는구나 라는 생각도 하고, 이 불쌍한 인터넷 언론 후원해주고픈 마음도 간절. 사실 구 시사저널도 난 한번인가 밖에 안사봤는데 - 한겨레21 만 봤고 - 지금의 시사IN 기자들의 눈물겨운 항의과 투쟁을 보면서 가슴이 아려서 올 겨울을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통장잔고를 가지고 - 그러면서 또 지를건 다 질러요 - 덜컥 정기구독까지 해버리지 않았냐. 나눠서 내고 있긴 하지만. 어떤 돈 많은 의식 있는 사장님이 프레시안같은 언론 영구 후원해주면 안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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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1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지군요.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신념 강한 자들'의 모습이 이 현대에 생생하게
있다니 새삼 감동스럽니다.^^

마노아 2007-11-2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프레시안 열심히 봤는데, 요샌 알라딘에 퍼와지는 것만 보고 있어요. 크흑...ㅠ.ㅠ

미즈행복 2007-11-22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감동이네요. 아, 세상은 넓고 돈 쓸 데도 많구나... 쓸 돈은 어서 조달하지?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