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구판절판


"우리들은 우리가 억압하려 애쓰는 의견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확신할 수 없으며 설사 그렇게 확신한다 하더라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일은 여전히 악일 것이다...... 일체의 토론을 억압하려는 것은 자기의 절대무오류성, 즉 절대로 자기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존 스튜어트 밀)-51쪽

똘레랑스는 부정의 논리인 동시에 긍정의 논리다. 완전함을 부정하는 한편 자발성을 긍정한다. 절대적인 완전함이 없다고 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자발성과 독창성을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보편적인 진리가 무너졌다고 해서 개인의 자발성이 함께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똘레랑스는 완전함을 부정하면서도 자발성을 최대한 실현할 것을 요구한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최대한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은 소중한 것이다. 그래야 침묵하고 복종하는 사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52-53쪽

양심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이다.(필리프 사시에)-54쪽

밀은 진리와 관련해 침묵을 강요할 수 없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논증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기에 침묵을 강요하는 의견도 진리일 수 있다는 것, 둘째 침묵을 강요당한 의견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 셋째 대중 사이에서 널리 인정받는 의견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진리의 전부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활발한 논쟁이 허용되지 않거나 실제로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의견은 편견처럼 비쳐져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기회가 상실되리라는 것, 넷째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가르침 그 자체의 의미가 상실되거나 약화되어 그 의견은 사람의 인격과 행위에 미치는 생기발랄한 영향력을 잃어버릴 위험에 빠진다는 것이다. -55-56쪽

'똘레랑스'에 부정하는 의미의 접두어를 붙인 형태인 '앵똘레랑스'는 표면적으로는 똘레랑스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앵똘레랑스는 인종, 피부색, 종교, 성적인 취향을 이유로 타인의 행동이나 신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이성적이고 정당하지 않은 반대를 가리킨다. 그것은 "네 생각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따라서 네 생각을 파괴하고 네가 쓴 책을 불태우고 나아가 너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똘레랑스 속에 담긴 앵똘레랑스는 이성적인 반대를 뜻한다. 이때의 앵똘레랑스는 어떤 것은 더 이상 받아들이면 안될 뿐 아니라 그럴 수 없음을 의미하며 특정한 상황에서 도덕적 의무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똘레랑스 속에 담긴 앵똘레랑스는 일반적인 앵똘레랑스와 의미가 다르다. -56-57쪽

똘레랑스는 때로 공익을 위해 사적인 이익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만 거기에 강압을 사용하면 안된다. 아무리 공익을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강제나 차별을 동원하면 강제하는 자나 차별하는 자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일로 비칠 수 있다. -62쪽

"똘레랑스는 비대칭 불균형의 태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에게 행해지는 악을 악 그대로 돌려주지 않아야 할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무장해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승 작용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대화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용인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먼저 용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환대'의 사상이 있습니다. 화합되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항상 적대하던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모험입니다." (필리프 사시에)-67쪽

똘레랑들은 극단을 부정하는 앵똘레랑스를 예로 들며 비폭력을 무조건 고집하지 않는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그렇다해도 똘레랑들에게는 폭력이 앵똘레랑스라는 예외적인 경우로 한정되는 반면 힘없는 약자에게는 일상이 폭력이다. 약자의 비폭력은 상대의 압도적인 힘을 감당할 수 없기에 나타나는 무기력일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의 불평등한 모순을 지속시키려는 폭력이 아니라 그 모순을 없애려는 폭력은 야만스러운 폭력과 다르다. 폭력과 대항 폭력은 몸통이 붙어 있지만 머리가 떨어져 있는 샴쌍둥이와 같다. 어느 한쪽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도 같이 소멸해야 한다.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93쪽

"참된 철학 운동이란 몇몇 소수의 지식인 집단 사이에 특수한 문화를 창조하는데 그칠 것인가, 아니면 '상식'보다 우월하며 과학적 정합성을 갖는 사상 형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조차 '순진한' 대중과의 연관성을 결코 잃지 않고 또 바로 그 속에서 실로 자신이 탐구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그람시)-115쪽

똘레랑스는 공적인 토론에서 원칙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그 원칙은 상대방의 의견을 냉정하게 듣고 정직하게 진술할 것, 반대자에게 불리한 일을 과장하지 말고 그들에게 유리한 일을 감추지 말 것이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이런 원칙은 현실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다. 특히 극단주의자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잘 지키지 않는다. 그들은 토론 자체를 거부하거나 설사 토론을 하더라도 자기들보다 약한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방을 무시하면서 '무식하다', '교양없다', '부도덕하다' 같은 딱지를 붙인다. 밀은 이런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진리와 정의를 위하려면 우세한 편에서 욕설의 남용을 억제하는 것이 반대 의견을 가진 편의 욕설 남용을 억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116쪽

우리는 기득권 세력이 허위 의식을 만들기 시작할 때, 또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퍼뜨리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즉 허위 의식을 기르는 말과 이미지를 쓰려 할 때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그들의 선전을 가만히 놔둔다면 그들은 압도적인 돈과 힘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킬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며 적당히 조절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전을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120쪽

" '정의'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닐세. '정의'란 각자에게 걸맞는 가치를 되돌려주는 것을 말하네. 각자는 거울이 비추어주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 그러므로 정의란 각자에게 자기자신을 되돌려주는 것을 모두가 동등해야 한다고 주장만 하는 것은 허위 의식을 심어줄 뿐이다. 오히려 동등함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올바르다.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차별은 정당하다. 차별하는 똘레랑스는 똘레랑스를 실천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121-122쪽

우리는 그 존엄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존엄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존엄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에 품어야 힘을 가진다. 결탁이 강자들의 추태라면 만남은 약자들의 희망이다. 존엄하게 사는 길은 끊임없이 존엄을 추구하는 것이고, 존엄을 위해 죽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내 " '정의'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닐세. '정의'란 각자에게 걸맞는 가치를 되돌려주는 것을 말하네. 각자는 거울이 비추어주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 그러므로 정의란 각자에게 자기자신을 되돌려주는 것을 뜻하지. 죽음을 주고, 비참한 고통을 주고, 착취하고, 우월하다며 오만하게 굴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우쭐대고 잘난 체했던 이들에겐 그에 상응하는 불행과 고통을 주어 그들이 새로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고, 생의 활력을 주고, 일을 주고, 저항하게 도와주고, 형제가 되었던 사람은 그에 마즌 대가로 얼굴과 가슴을 환하게 밝혀주고 그가 걸어갈 길을 밝혀줄 빛을 얻게 되는 것이지." (안토니오 할아버지)-135-136쪽

우리는 그 존엄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존엄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존엄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에 품어야 힘을 가진다. 결탁이 강자들의 추태라면 만남은 약자들의 희망이다. 존엄하게 사는 길은 끊임없이 존엄을 추구하는 것이고, 존엄을 위해 죽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내 영역에서, 당신은 당신의 영역에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일상 속에서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때로 힘들어 쓰러질지라도 다시 일어서서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존엄은 그 길의 끝에 놓여있는 선물이 아니라 길 위에 뿌려지는 바로 그 땀이다.-138쪽

각주98) 조정환은 똘레랑스가 중도를 지향한다고 비판한다. "똘레랑스는 두 개의 앵똘레랑스 극단 사이에 놓여 있다. 그것은 중간의 지대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양극단을 배제하는 중도, 중용의 태도를 지향한다. 이 태도에서 양쪽 극단의 질적 차이는 무시된다. 똘레랑스는 오직 앵똘레랑스와의 차이를 통해서만 정의될 뿐이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와 마찬가지로 동일화를 향한 강한 추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고 다름을 확인하고 다름을 견디는 태도이지 다름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생산하려는 태도는 아니다." (조정환, <'똘레랑스'의 윤리 정치학 비판>,[모색] 3호, 122쪽)-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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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읽어볼 만한 구절 : 35절 불관용자에 대한 관용
    from 자유를 찾아서 2007-10-22 21:14 
      "지금부터는 과연 정의가 불관용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 것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어떤 조건 아래서 그러한지를 고찰해보기로 하자."   "몇 가지 문제가 구분되어야 한다. 첫째, 불관용하는 종파가 자기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할 명분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 어떤 조건 아래에서 관용적인 종파가 불관용적인 종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제 그들이 관용을
 
 
 
왜 똘레랑스인가
필리프 사시에 지음, 홍세화 옮김 / 상형문자 / 2000년 12월
품절


<옮긴이 서문>

"견해의 대립을 통해 이성을 눈뜨게 하지 않으면, 인간을 오류와 무지로 몰아가는 자연적 성향이 지체없이 진리를 이기게 된다." (바나주 드 보발) -13쪽

<대담>

사시에 - 똘레랑스한다는 것, 그것은 견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워진 부담을 견디는 것처럼 말입니다. 추상적 의미로서 똘레랑스 한다는 것은,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의 의견이나 생각을 바꿀 수도 있지만 그대로 용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똘레랑스는 의도적인 자세입니다. 또한 용인이되 의도적인 용인이라는 점에서, 무관심이나 포기와 다른 것입니다. 앵똘레랑스로 말하자면, 그것은 "네 생각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따라서 네 생각을 파괴하고 네가 쓴 책을 불태우고, 나아가 너를 없애겠다."는 것이지요.-16-17쪽

사시에 - 대화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용인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먼저 용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환대'의 사상이 있습니다. 화합되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최소한의 '접촉'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들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인공적이지만, 똘레랑스란 그런 것 입니다. 그것은 항상 적대하던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모험입니다. 물음은, 그만큼 위험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있습니다. 가령 중동의 예를 봅시다. 중동 평화를 위한 첫번째 조건은 접촉입니다. 벽이 가로막혀 있다면 서로 보지 못합니다. 보지 못하면 항상 가장 나쁜 쪽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서로 볼 때에는 사람들이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똘레랑스의 시작은 서로 같은 걱정을 하고 있음을 의식하면서부터입니다.-20-21쪽

<한국어판 서문>

"그러나 만일 존재의 저 깊은 곳에서 인간이 자유롭다면, 다시말해, 자발성과 무상성의 능력을 갖추었다면, 그 부분이 말하도록 놔두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 자체이며 새롭고 뜻밖인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위하여 이 똘레랑스는 유일하며, 유달리 엄격하면서 복합적인 하나의 한계를 규정한다. 곧 나의 자유가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똘레랑스는 나의 자유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남의 자유도 인정할 때에만 실천될 수 있다. 그리하여, 똘레랑스는 무관심이나 단념과 정반대가 된다. 똘레랑스는 하나의 윤리이며, 각 개인이 보다 우월한 원칙을 위하여 자신의 이해관계에 반하여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진정한 덕목이다. 똘레랑스는 투쟁에서의 무기이며, 성숙된 덕목이다." (필리프 사시에)-25쪽

<여기서부터 본문>

'견디다, 참다'를 뜻하는 라틴어 tolerare 에서 온 똘레랑스라는 말은 16세기 초에 처음 등장했다. 그 뒤 5세기 동안 이말의 정의는 끊임없이 확대되었다. 처음에 똘레랑스는 종교에 대한 군주의 구체적인 태도를 가리켰다. 오늘날처럼 남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개인적인 정신자세를 가리킨 것이 아니었다. 종교개혁 시기, 기독교적 진리의 단일성이 산산조각나고 국가 권력이 확립될 무렵, 신앙의 다양성에 직면한 국가 권력이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가 문제로 제기 되었다. 군주는 그의 신민들에게 진리에 동참하도록 강제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놔둘 것인가, 라는 물음에 직면했던 것이다. 당시의 똘레랑스는 공적이 소관 사항으로서, 종교의 진리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탄압하지 않는 정치와 그런 정치를 실행하는 군주의 개인적 태도를 가리켰다. ... 중략 ... 그리하여 18세기 말에 이르면 똘레랑스는 국가의 처신을 계속 지칭함과 동시에 오늘의 "인간 관계의 바람직한 방식"으로서의 개인적 태도로도 지칭하게 되었다.-29-30쪽

행위를 삼가는 것으로서의 똘레랑스는 결국 행위로서의 똘레랑스 이전의 단계, 즉 정신의 행사로서 생각하기를 삼가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30쪽

볼테르는 앵똘레랑스를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자를 선험적으로 유죄라고 평가하도록 유도하는 정신적 자세로 보았다. 앵똘레랑스를 폭력적 행동 이전에 가장 분명하게 내면화된 것으로 본 사람은 틀림없이 루소였다. "나는 자기가 믿는 모든 것을 믿지 않으면 선의의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또 자기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자들 모두에게 냉혹하게 저주를 내리는 모든 사람을 앵똘레랑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31쪽

에라스무스는 언제나 승리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열정을 야심에 결부시키면서, 진리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말고 자기애를 버리라고 호소했다. 대체로 인간은 잘못된 견해와 싸우기보다는 자기와 반대되는 견해와 싸운다. 카스텔리옹은 "흔히 우리들과 의견이 같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이단으로 간주한다"고 기록했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사면을 허용한 앙부아즈 칙령(1563)을 지지했던 어느 팸플릿은 훨씬 더 직설적으로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갖는 사람들한테서만 죄와 악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파성"을 지적하였다. 몽테뉴는 진리를 지킨다고 열의를 보이는 사람들의 "열렬한 자기애"와 "오만"을 비난했다. 그는 앵똘레랑이란 "자기의 견해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그 견해를 위해서는 공공의 평화를 무너뜨리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수많은 악을 가져오고 관습의 무시무시한 타락을 가져오는 것도 [...] 심지어는 국가의 교체까지도 주저하지 않게"된 사람이라고 말했다.-45-46쪽

로크에게 그 이유는 분명한 것이었다. 즉,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자부심과 자만심에서 온다는 것이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써서 로크의 뒤를 따랐다. "인간을 구원하려는 열정이 절대로 박해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박해의 원인은 바로 자존심과 오만이다." -46-47쪽

루소는 인간에게, 특히 일반 평민에게, 너그러운 자세를 취할 것을 호소했다. 왜냐하면, 평민은 스스로 '숭고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니고 있으면 그 진리는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한다. 루소에 따르면, 하느님의 존재는 조금이라도 숙고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보이는 사실이기 때문에, "무신론의 철학자는 악의적이거나 맹목적 자만심을 가진 논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시에서 추방해야 마땅하다. 명백한 것 앞에서 잘못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70쪽

인간이 믿는 진리의 대부분은 가능성에 불과하므로 각자의 무지에 대하여 서로 이해해야 한다고 로크는 결론 내렸다. <백과사전>의 <똘레랑스> 항목에서도 이렇게 추론하였다. 즉, "대립관계가 없는 분명한 진리란 결코 없으며, 인간의 이성은 정밀하고 확정된 척도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이성을 잣대로 제시할 수 있는 권리가 없고 또 누군가를 자신의 소신에 따르도록 주장할 권리도 없다." -71쪽

로크는 사법관의 종교 문제 개입권을 부정했다. 종교 문제가 세속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처럼 사법관도 "[최상의 선]에 도달하기 위해 이용해야 할 길에 관해 확실하고도 완벽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에 관해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진리'란 없다. 루소는 이점을 반복해서 말했다. 종교적인 앵똘레랑스는 종교에 관한 진리가 너무나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73쪽

크렐이나 스피노자는 앵똘레랑스가 견해의 다양성이라는 자연적 질서에 반대된다고 판단하였다. "인간은 전혀 동일한 정신유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견해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79쪽

스피노자는 사상을 탄압하는 법이 평화 대신에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그 법이 '사물의 질서'(당연지사)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인간은 그 자신에 집착하듯이 자신의 견해에 집착한다는 것과 사상이란 본래 다양한 것임에 따라, 그 사상을 좌지우지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폭력과 무질서만 가져올 뿐이다.-81-82쪽

똘레랑스는 세계 질서가 더 이상 이중인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순간부터 그 타당성을 잃는다. 하늘늘 믿지 않는 자는 지금 이 땅에서 모든 것을 기대하고 모든 것을 요구해서는 안되는가? 사고가 물질의 단순한 발현으로 이해되거나, 혹은 가장 내밀한 사유가 단지 외부적 영향의 결과에 불과할 때에, 두 세계가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주장하는 똘레랑스는 부질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똘레랑스의 옹호자들은 똘레랑스가 상호간의 무관심 - 이미 부질없는 근거가 된 - 이 아니라, 최상의 목적 - 이 목적이 천상적이든 세속적이든 - 을 달성케 하는 도구임을 입증하도록 권고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똘레랑스는 '사물의 질서'(당연지사)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지 않고 유용성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101쪽

똘레랑스의 지지자들은 "가장 정당한 전쟁보다는 가장 부당한 평화를" 선택해야 하며 무질서는 잘못의 지속보다 더 큰 죄악이라고 반박하였다. -116쪽

스피노자와 바일은 똘레랑스가 보다 깊이 있게 각자의 사고와 행동을 이성에 따르도록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두려움과 모든 증오로부터 해방된 인간은 폭력, "분노, 계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내면의 질서를 마음 속에 세울 수 있다. 견해의 자유는 아무 것이나 할 수 있는 면허장이 아니다. (교황의 회칙 <미라리 보스>가 주장하게 되듯이) 견해의 자유는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사회 질서를 이성에 맡김으로써 그 질서를 강화시키자는 것이다.-137쪽

루소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19세기 표현의 자유 옹호자들은 16세기 기독교도의 통일 지지자들과 적어도 하나의 확신을 공유하였다. 즉, 인간은 똑같이 생각할 때만 진정으로 단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사회 질서는 모든 사람을 하나의 진리에 재집결시키는 데에 있다. 비종교적 이상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을 집결시키는 진리에 도달케 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똘레랑스는 비종교적 이상에 속하는 하나의 기본 요소가 된다. "만일 진리가 보편적이고 우리 모두가 동일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여러 사상 사이의 자유로운 상호침투는 우리로 하여금 생각과 마음을 통하여 조금씩 서로에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 확신은 적절하면서 친밀한 방식으로 밝혀진 진리에 우리의 사고를 일치시키며, 확신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마음 속 깊이, 그리고 활기찬 방식으로 단결시킨다." -138-139쪽

"개인들이 그들의 자유를 어떻게 활용할지 우리가 모르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에게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게 아주 중요하다. [...] 자유를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이 자유를 모든 사람들에게 허용함으로써만 자유를 활용할 미지의 사람에게도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하이에크, <자유의 구성>) -142쪽

그레구아르와 루소에게 있어서 차이란 차이 그대로 인정하자는 게 아니다. 궁극적으로 진리가 승리함에 따라 차이를 없애자는 것인데, 이것은 '사회적으로 유익'하려면 더욱 절대적이다. 오늘날도 계속 상대론의 영향을 받은 외형상의 똘레랑스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목소리들은 언론의 자유가 절대로 필요한 까닭은 모든 주장들이 가치가 있다거나 모든 것이 불확정적이라거나 또는 진리가 무수히 많기 때문이 아니라 찾아내야 할 하나의 진리가 존재하기 때문임을 상기시킨다. 마르쿠제에게 "똘레랑스는 목표의 진리이다." 배링턴 무어는 "과학적이기를 바라는 모든 참된 똘레랑스 개념은 하나의 이념의 진실성을 시험하는 데 사용되는 수단들의 개선과 발전을 추구한다." 라고 썼다. 그러므로, 똘레랑스는 진리로 이끄는 단계로써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즉, 진리는 똘레랑스의 "유일한 참조점이자 계류지점"이다. -148쪽

똘레랑이란 우선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삼가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정신에 대한 강제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149쪽

사상이 서로 대립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지식은 서로 마찰하면서 서로 비교되고 보충된다. 이제 개인 혼자서 한 시대의 모든 학문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빛'의 교환 개념이 중요성을 갖게 되었고 지적인 전투라는 비유 옆에 자유 거래라는 비유가 아주 넓은 의미의 '교제'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들의 부싯돌은 마찰함으로써 빛이 난다" (볼테르)-167쪽

모를레에 따르면, 토론은 사물을 다른 견지에서 보게 하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견해를 수정, 보완시키는 사상을 탄생시킨다. "검토하고 토의하고 공격하고 방어하면서 우리는 사상과 견해의 충격에서 빛이 탄생하는 것을 본다" 그 점에서 잘못된 사상에게도 자유가 필요하다. 오류의 변태를 감내하고 그 변태를 단계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오류, 체계적인 오류를 거쳐야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모든 의견이 자유로운 순간부터, 즉 참된 의견이 잘못된 의견과 똑같은 자유를 누릴 때부터는, 유일하고 같은 목표인 진리와 행복에 대한 자연적 성향이 인간의 내심에서 "작용하도록 놔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성적이고 가장 총명한 의견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당한 대의를 옹호하려는 학식 있는 사람을 항상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168쪽

"인간 정신의 불완전한 상태 안에서 진리의 이해관계는 다양한 의견을 요구한다." (존 스튜어트 밀)-170쪽

"인간의 권리, 따라서 똘레랑스는 모든 인간 안에 있으며 인간이 되게 하는 자유 속에 뿌리박고 있다. 이 자유는 우리가 어원학적 의미로서는 그 놀라운 성격을 말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물리적 법칙이 강요하기 때문이거나, [...] 또한 살아 있는 세계에서 우리가 '자연'이라 부르는 것에서 다양한 종들 간에 힘의 분쟁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 가장 강한 자가 가장 약한 자를 잡아먹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 세계는 예외적인 세계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만이 물리적 인과관계 법칙이나 원칙상으로 가장 강한 자의 지배를 통해 [...] 지배당하지 않고 각자 인간은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잔느 에르쉬)-178쪽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그 첫번째 권리가 자유인 인간의 영원불멸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으므로, 강제는 오직 자유의 행사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때 그것을 피할 목적으로써만 행사될 수 있다." (로크,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 -180쪽

"인간에게 강제로 믿게 하지는 못할 것인 바,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대로 믿거나 이해하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봉신부)-186쪽

양심의 자유는 인간의 복종 가능성으로 규정된다. 존 롤즈가 오늘날 내세우는 것도 이 내면의 강제에 보내야 될 존중이다. 그는 어떠한 유용성의 원칙도 도덕적 의무감을 "절대적으로 구속하는" 성질과 경쟁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똘레랑이 되어야 하는 까닭은, 자기 자신과 마주한 의무 -도덕 - 가 각자 그것에 공존히 복종하도록 놔두어야 할 만큼 충분히 진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똘레랑스는 인간을 그 자신의 내면의 확신에 복종하게 놔두는 것이다. -196쪽

인간은 외부의 모든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 그에게는 오직 내면의 법(양심)으로부터 받을 명령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유일한 법이기 때문이다."(피히테)-196쪽

스스로 결정하기 위하여 인간은 천성적으로 이성의 모든 수단을 행사하기 때문에 똘레랑이 되어야 한다. 칸트는 그 점에서 사고의 스승이다. 즉, 자유는 이성의 행사이며, 이성은 도덕법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개인의 견해나 행위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그를 그 자신에게 맡겨지게 놔두는 것은, 그의 자유가 모든 인간에게 공통인 이성의 행사와 합류하는 데 따른다. 모든 인간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선을 향해 나아간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197쪽

칸트는, 자유란 "이성이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법 이외에는 그 어떤 법에도 복종하지 않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자유롭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자는 모든 이성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자유의 반대인 "동물적 충동"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각과 열정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기 때문이다.-198쪽

츠베탄토도로프로 말하면, 그는 정당한 제약에 관한 아주 오래 된 기준들과 거의 동일한 기준을 재발견하였다. "무제한인 똘레랑스의 권리는 약자들을 해치고 강자들에게 도움을 준다. 강간범들에 대한 똘레랑스는 여성들에게는 앵똘레랑스를 의미한다. 만일 호랑이가 다른 동물과 한울 안에 있는 것을 똘레랑스한다면, 그것은 후자를 전자를 위해 희생시킬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체력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약자는 무제한적인 똘레랑스의 희생자이다. 약자를 공격하는 자들에 대한 앵똘레랑스는 약자들의 권리이지 강자들의 권리가 아니다." 자유의 원칙이 고발당할 만큼 극단적 한계에 이르러서, 우리는 자유 자체의 이름으로 절대적 똘레랑스의 원칙에 조종을 울려야만 한다. 마르쿠제, 폴랭, 료타르나 토도로프는 각자 그들 방식대로 라코르데르의 불굴의 문구인,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탄압하는 것은 자유이고 자유롭게 하는 것은 법이다."를 다시금 진술하였다.-236쪽

헬베티우스는 앵똘레랑스를 폭행이나 남의 자유에 대한 구체적 침해라는 강력한 의미로 보았다.

오늘날의 앵똘레랑스는 순전히 정신 자세를 말하는 것이어서, 앵똘레랑스에 대한 우리의 앵똘레랑스는 다른 모습을 제공한다. 요컨대 불균등하게 안심시키는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의 앵똘레랑스는 지적인 '항의'에 지나지 않고 틀림없이 매체의 힘을 빌리기 때문에 스스로를 진리 자체로서, 약하기만 하기 때문에 오히려 강하다고 믿을 수 있다. 또 다른 면에서, 그것은 의도와 단념을 탐색하기 위해 정당화되고 있다. 즉, "무관심에 대해서는 앵똘레랑이 되어야 한다. 앵똘레랑스에 앵똘레랑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앵똘레랑스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 앵똘레랑이 되어야 한다." 느긋하게 앉아있는 인간은 싸우는 똘레랑스의 견해 덕분에 '덕목으로서의 앵똘레랑스'가 그것의 참된 이름의 몫을 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을 발견하는게 분명한가?

아무튼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성을 이루는 것은 다름아닌 "똘레랑스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정신이다.-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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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7-09-22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가 많은 걸 보니 무척 괜찮은 책인가 보네요 ^^

마늘빵 2007-09-22 20:04   좋아요 0 | URL
음, 생각만큼은 아녀요. 좀 어수선하달까요. 잘 안들어와요. 어수선한건 대충 술술 넘기고 읽어볼만합니다. :)
 
관용론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
볼테르 지음, 송기형.임미경 옮김 / 한길사 / 2001년 9월
구판절판


<인간 정신의 자유에 대한 옹호> (송기형, 임미경)

우리에게 법을 가르쳐준 위대한 스승인 고대 로마인들은 불관용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그리스도교들을 박해한 것은 단지 사회의 질서와 국가의 안녕을 위해서였다. 당시 로마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도들은 사회를 교란하는 불순세력이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초기 그리스도교도들도 신앙에 앞서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법과 관습을 존중해야 할 의무는 있지 않았던가.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무엇을 믿거나 믿지 말아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의 신념의 자율적 행사는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 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17쪽

"종교는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리고 죽은 후에도 행복해지기 위해 만들어졌다. 내세에 행복한 삶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현세의 삶을, 우리 인간의 비뚤어진 본성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행복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관용을 알고 베풀 줄 알아야 한다."(볼테르) -18쪽

이성이 진정 그 가치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효율성과 합리화와 더불어 관용의 정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20-21쪽

관용(tolerantia)이란 소극적 인정과 방임을 넘어 다른 종류의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승인하는 태도를 말한다. -21쪽

내가 아무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관용의 전제 조건이다. 또한 관용은 모든 것을 관대하게 대하는 중립적 관찰자의 태도가 아니라, 나와 다른 존재 안에서도 가능한 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권리를 부여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관용은 어떤 인간도 결코 오류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통찰에, 모든 사람은 자기 관점에 얽매일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21-22쪽

<관용론 본문>

그러나 어쨌든 그들이 하나의 신을 정신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섬기는 데 만족하지 않고 기존의 종교에 대해 격렬하게 맞섰던 이상, 그 종교가 아무리 어리석은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부정한 것이다. -98쪽

"종교에서 사람들로부터 자유를 빼앗아 각자가 자신이 섬길 신을 선택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일이다. 강요된 복종을 달가워할 인간이 없듯이, 그 어떤 신도 강요된 숭배를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 <호교서>, 24장) -167쪽

"강요된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강요할 것이 아니라 설득해야 한다. 신앙은 명령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락탄티우스, 제3권)-167-168쪽

우리가 지켜야 할 교리가 적을수록 논쟁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논쟁이 줄어들면 그만큼 참화를 겪을 일도 없어질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종교는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리고 죽은 후에도 행복해지기 위해 만들어졌다. 내세에 행복한 삶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현세의 삶을, 우리 인간의 비뚤어진 본성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행복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관용을 알고 베풀 줄 알아야 한다.

형이상학적 문제에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주 터무니없는 욕심일 것이다. 한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의 정신을 예속시키고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무력으로 세계를 굴복시키는 편이 훨씬 쉬우리라.
-201쪽

결국 이 거룩한 작가(옮긴이 주 : 말보 신부. 볼테르의 <관용론>이 나올 당시 정반대의 의견을 피력한 <종교적 불관용에 대한 신앙과 인도적 정신의 일치>라는 책이 나왔다)는 불관용이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 이유란 "예수 그리스도가 불관용을 명시적으로 비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파리 온사방에 불을 지른 자들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로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 방화자들을 칭찬할 이유가 된다는 말인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편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온유하고 자비로운 목소리로 관용을 설득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 본성의 적인 광신이 광포하게 포효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들이 평화를 밎아할 때마다 불관용이 그것을 무너뜨릴 자신의 무기를 벼리고 있는 것이다. 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권자들이여, 당신들은 유럽에 평화를 가져왔으니 이제는 다음의 문제를 결정할 때요, 평화와 화합의 정신과 불화와 증오의 정신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지 말이오.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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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8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 칼국수.. 아니 장 칼라스 사건에서 볼테르에게 반했죠.

마늘빵 2007-09-18 16:57   좋아요 0 | URL
오홋, 테츠님 아시는군요. 아니 어떻게 사건 이름까지. 저도 이 책 2001년에 읽고 다시 읽은건데 확 반해버렸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로크가 쓴 관용에 관한 책이 있는데 이건 번역이 안되었나보더군요. <에밀>이나 <통치론>, <시민정부론>은 있는데...

비로그인 2007-09-18 20:17   좋아요 0 | URL
칼라스 사건과 관련해서 또 하나 중요한 저작이 있는데 (아마 아실테지만)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추천입니다. 요 사건때문에 썼다고 하는데. 사형폐지론의 고전이죠..줄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마늘빵 2007-09-18 20:23   좋아요 0 | URL
테츠님은 아는 것도 많으셔. 이건 몰랐던거에요. 찾아볼게요. 땡큐 :)

가넷 2007-09-18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라고 하면 학술진흥재단에서 지원을 받은 책이란게 아닌가요? 항상 볼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지원받은 책이 왜 저렇게 비싸 싶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살까 싶었는데 비싸기가 엄청...;ㅁ;

마늘빵 2007-09-18 21:08   좋아요 0 | URL
음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역자가 생활비를 받고서 번역작업을 하는게 아닐까요. 책값엔 그게 반영되진 않을듯. 덕분에 첨 듣는 책 한번 검색해서 구경해봤습니다. :)

2007-09-19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9-19 09:56   좋아요 0 | URL
장 칼라스 사건은 볼테르가 살던 당시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인데, 당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대립하던 시절 - 카톨릭의 우세 - 카톨릭 교도가 아니면 변호사 시험을 칠 수 없게 되어있었고, 장 칼라스 씨의 아들 중 하나가 변호사 시험을 치려하는데 종교의 제약으로 막히자 고민 끝에 자살한 사건이었어요. 근데 동네 카톨릭 교도 주민들 중 하나가 "개종을 하려하자 죽인거다!"라고 소리쳐서 장 칼라스씨와 그의 아들, 하녀, 엄마, 놀러온 아들의 친구를 살인범으로 몰아 결국 장 칼라스씨가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했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지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볼테르가 나중에 이 사건을 알고는 문제제기를 했고, 사건 딱 3년 뒤에 무죄판결이 났고 국왕이 보상금까지 쥐어줬답니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는 사지를 찢겨 죽었고, 가족은 이미 뭉개질대로 뭉개진 상태였죠.

로크의 관용론에 관한 책은 번역이 안되었어요. 아직 읽어보지 못했답니다. 그의 관용론이 언급된 책으로는 홍세화 씨가 번역한 <왜 똘레랑스인가> 라는 책이 있고, 한남대 철학과 김용환 교수가 쓴 <관용과 열린사회>를 참조하시면 돼요.

지금 논문 관련해서 살짝 엿보고 있는 중인데 - 직접적인 관련은 없고 - 아직 구체적으로는 모르고요, 간단히만 말하자면, 종교의 관념적 진리의 '불확실성'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다른 견해에 대해서 관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혹시라도 이 관념적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불확실하다면 우리의 견해가 아닌 다른 견해가 진리일수도 있다고 했답니다. 곧 타자의 견해가 명백히 틀린 것으로 밝힐 수 없는 한, 그 견해를 탄압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제가 읽은 논문의 한 부분에 따르면,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 <관용에 관한 편지>에 보면 "그 문제에 대한 판단은 오직 모든 인간의 최고 주재자이신 하느님에 속한 것이고, 그에게만 그릇된 자의 처벌권도 속한다"라고 했답니다.

볼테르의 관용과 어떻게 다른지는 저로서는 잘 모르겠는데, 개인적인 생각을 물으신다면, 볼테르의 그것과 로크의 그것은 큰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볼테르는 철학으로서 관용을 대했다고 보기보다는 하나의 삶의 태도로서 넓게 말한거 같고, 그의 <관용론>에도 철학적 분석이나 해석 작업보다는 장 칼라스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한 고전으로부터의 인용과 장문의 편지와 같은 글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로크의 책은 안봐서 모르겠고요. -_-
 
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구판절판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가 '용납'보다 소극적인 표현인 것은 사실이나 관용 개념의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소극적 표현이 보다 유용할 것이다. 부정(반대)하면서 동시에 긍정(용납)하는 관용의 공식에서 생길 수 있는 모순과 역설적인 느낌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용납이라는 개념의 모호성을 피하기 위해서 용납이라는 말 대신에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로 대체하는 것이 적절하다.
-26쪽

반대하는 것(대상)에 대해 부정적인 행위를 자발적으로 중지했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용납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인종 차별 정책에 대해 반대, 저항 같은 부정적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용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용납은 '복종', '강제적 시인', '묵인' 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관용 이외의 유사한 개념들로부터 관용을 뚜렷하게 구별하는 일을 곤란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관용은 본래 자발적 행위 또는 자유와 관련되어 있는데 복종, 강제적 시인, 묵인은 자유의 결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허가나 허용은 권리 개념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자유의 확대라는 관용의 기능과 어울리지 않으며 관용이 상호 교환적 행위임에 비해 일방적이다. 따라서 관용을 정의할 때 외연의 양이 많은 용납보단느 내포의 양이 증가된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를 택하는 것이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서도 바람직할 것이다.-26-27쪽

관용되는 것에 대해 우선적으로 내려지는 부정적 평가(반대)는 개인의 존재론적 결점 같은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불충분한 정보의 제공, 통치 집단에 의한 이데올로기적인 조종, 사회적 관습 같은 외부적인 요인들 때문에도 생겨난다. 실제로 사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ㅇ가하는 일과, 갈등을 일으키는 사물, 이념, 가치 체계들에 대해 불편부당하기란 곤란하거나 불가능하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어떤 대상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적 평가를 내리거나 그것에 대해 전면적인 거부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30-31쪽

"도덕적으로 말해서 관용은 보다 많은 도덕적 자각을 제공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우리의 도덕적 공감을 확대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관용은, 인간을 목적으로서 그리고 존엄성과 고유한 가치를 지닌 합리적 존재로서 간주하도록 명령하는 칸트의 정언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일과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토마스 헌) -37쪽

... 관용과 불관용의 문제가 발생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의견, 행위 또는 행위가 예상되는 신념들이 동시에 주장되어야 한다. 충돌이 없이 서로 다른 의견을 단지 개진하는 한 관용과 불관용의 선택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둘째,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다르고 이해 관계도 서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 다른 의견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동시에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막거나 제거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57쪽

관용은 '권리'의 일종이 아니며 권위를 바탕으로 해서 A가 B에게 제공하는 '허가'(PERMISSIVENESS)의 일종도 아니다. 관용은 자유와 관련되어 있으며 자유를 확대하는데 목적이 있다. 자유없이는 관용도 있을 수 없다. 또 관용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반대'와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라고 했을 때 자발적 중지 속에는 이미 관용하는 사람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종교적 관용을 말할 때 이는 종교적 자유와 동일시될 수 있으며 근대 이후의 자유주의의 신장과 종교적 관용에 대한 활발한 논의는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77-78쪽

"정치적 행위들은 선한 삶에 대한 경쟁적 개념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는 서로 다른 기질과 포부 그리고 종교적 신념들과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립성의 요구는 사람들에게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요구이며, 정부는 특정한 집단에 더 우호적이어서는 안된다."(수잔 멘더스)-81-82쪽

우리는 '다양성의 원리'로부터 한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우월하다는 독선주의가 그릇되며, 제도나 문화가 여러 가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독점적이고 유아적인 종교관을 고수하는 일이 위태롭다는 것을 배운다. -87쪽

가치 상대주의는 다양한 가치를 서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나의 가치도 다른 사람의 가치 못지 않게 옳고 좋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변화시킬 필요가 없고 또 그런 가치에 근거를 둔 자신의 삶의 방식도 바꿀 필요가 없다고 믿게 만든다. 이런 믿음은 정체성을 띠기 쉽고 그런 정체성은 자기 반성력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반성력의 결핍은 '완전주의'로 나가게 만들며,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던 원래의 태도에서 오히려 배타적인 태도로 변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가치 다원주의는 상대적 가치들을 충돌시키고 비교하고 검토해서 보다 나은 가치의 창출을 기대한다.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 가치의 탐구를 지속하려는 것이 가치 다원주의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상대주의에 머무는 순간 진보는 중단되고 논의는 정체되고 만다. 어떤 가치 판단도 완전하지 않다는 고백을 해야 하고 보다 나은 판단이나 이론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관용은 이런 가치 다원주의가 상대주의로 빠지지 않고 지속적인 실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117쪽

각주 6) 완전주의라는 말은 '어떤 사람 또는 그의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삶의 방식보다 본질적으로 더 열등하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본질적 차이와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평등주의와 대립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열등한 사람이나 삶의 방식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불관용적 태도가 이미 완전주의자의 의식 안에는 자리잡고 있다. - vinit haksar, Equality, Liberty, and Prefectionism, Oxford. 1979, p.1. -117쪽

규모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최선의 의사 결정 방식은 다수결의 원칙이다. 그러나 이 다수결의 원칙이 종종 '다수의 전제'(tyranny of majority)로 전락하는 이유는 소수에 대한 정당하고 공정한 고려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소수 집단에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언젠가는 소수도 다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아야 한다. 그럴 때에만 다수결의 원칙이 그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119쪽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란 달리 말하면 종교 선택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리고 선택은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지 강요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주의는 종교를 정통과 이단, 유일신 종교와 다신 종교, 토착 종교와 외래 종교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종교는 자율적 존재인 각각의 개인들이 자기의 양심과 성향에 따라 결정하는 선택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 경우 선택의 행위는 배타적 행위가 아니라 선택되지 않은 것과의 공존 관계가 반드시 성립되어야만 하는 포괄적 선택 행위인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적 자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교적 공존이 선행되어야 하고 모든 종교는 끊임없이 선택을 기다리는 열려진 상태로 남아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은 1회 이상 종교적 선택을 할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한다.-141쪽

'무한 경쟁 시대', '경쟁력 강화'라는 현실 인식이 개인의 생존 방식으로 강요되었을 때 발생하는 세 가지 도덕적 결함은 공통적으로 관용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배타적이고 불관용적인 경쟁의 논리를 극복하는 길은 관용을 실천함으로써, 그리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움으로써 가능하다.

첫째 무한 경쟁 또는 경쟁력 강화의 논리는 최소한의 생존이나 타자와 함께 공존하겠다는 방책이 아니라 '죽기 살기 경쟁'이며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겠다는 이기심과 탐욕을 그 바탕에 감추고 있는 전술이다. ... 중략 ...

둘째, 경쟁이라는 결정 방식 자체에 결함이 있다. 즉 경쟁은 불공정하기 쉽다는 점에서 비도덕적이다. 처음부터 경쟁은 공정한 게임이 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의 경우 그 게임의 규칙은 경쟁자 개인들의 차이성과 개별성을 대부분 무시한다는 점에서 비도덕적이라 비판될 수 있다. ... 중략 ...

셋째, 현실은 무한 경쟁의 시대이며 경쟁력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냉혹한 적자 생존의 법칙은 평등한 분배의 원칙 또는 분배적 정의 실현의 당위성을 희석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도덕적 결함을 가진다.-143-145쪽

대부분 이들이 보이는 배타성과 불관용성은 자기 충족적 확신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배제하고 불관용하는 것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거나 무엇이 사실인지를 보다 명확하게 판단하려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 그 불관용성과 배타성은 강화된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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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자의 글쓰기 - 책이나 논문을 쓸 때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낼 것인가?
하워드 S.베커 지음, 이성용ㆍ이철우 옮김 / 일신사 / 2006년 3월
품절


퇴고를 수없이 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은 초고의 엉성함과 일관성 결여에 대해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초고는 발견을 위한 것이지 발표를 위한 것은 아니다.-45쪽

개요는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개요를 가지고 글을 시작하면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개요에 의존하여 시작하는 대신에, 모든 것을 적어 가면서, 가능한 한 빨리 아이디어를 토해내는 방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 - 당신이 작업해야만 하는 미완의 부분은 당신이 방금 적어놓은 다양한 것들이다 - 을 발견할 것이다.-100쪽

'가장 쉬운 것부터 하라'는 원칙을 지킨다. 가장 쉬운 부분부터 쓰고, 논문들을 분류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허드렛 일들을 먼저 하는 것이다. ... 중략 ... 우선 당신이 써온 것에 관해 메모를 하고, 각각의 생각을 카드에 적는 것부터 시작하라. 원고에 적혀 있는 어떤 생각도 없애버리지 말라. 그런 생각들은, 그 순간에는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 수 없을지라도, 여러 가지로 유용하다. –-101-102쪽

연구자는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기본적인 생각을 명료하게 해놓아야 한다. 연구자의 생각이 명료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은 이미 영향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최고 또는 최악으로 만들어 준다.-198쪽

* 여기서부터는 <한국 사회과학자의 존재 이유>(이성용 역자후기)에 관한 밑줄긋기입니다.
-0쪽

각주 : 그 강사는 저서의 변환과정을 아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모른다고 하자, 그것은 '번역물->편저->저서'라고 웃으면서 말했다(이한우, 1995 : 311-314는 번역물이 저서로 바뀐 책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우선 교수는 대학원생과 박사실업자에게 논문을 나누어주고 번역을 시킨다. 이것이 번역물이 생성되는 첫번째 단계이다. 두번째 단계에서 박사실업자는 번역물을 총괄적으로 다듬는 역할을 수행한다. 여러 사람들이 번역했기 때문에 출판사에 편저로 출판하기로 결정한다. 책이 출판될 무렵, 원고가 괜찮다고 생각되면 교수는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저서로 바꾸라고 말한다(우리는 교수업적의 평가에 있어 번역물, 편저, 그리고 저서가 차지하는 점수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교수의 행위가 얼마나 합리적(?)인 행위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논문을 진짜로 번역해 주었던 사람들에게 저서를 작성하는데 도움을 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머리말에 적는다. 교수가 저서에서 진짜로 작성한 글은 머리말 뿐이다. ... 중략... 이것은 우리 학계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교수의 권위주의적 폭력과 비양심적 자세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278쪽

학자들은 왜 표절과 짜깁기로 글을 쓰는가? 나는 전공에 대한 자부심의 결핍과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의무를 망각하는 도덕적 해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학문세계가 없는 사이비학자들이 주도권을 잡은 학계에서는 표절과 짜깁기로 쓰여진 글들이 판치기 쉽다.-280쪽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사이비 학자가 자신의 상품을 과대 포장할 수 있도록 '간판'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있다. 간판의 정당성은 우리 사회의 피라밋 유형 구조에 의해 합리화되고, 교육제도에 의해서 강화되어 왔다. 사실상 우리 나라 사람이 한국 사회에서 차지할 수있는 위치의 상당한 부분은 일차적으로 대학입시에 의해 결정된다. 고졸자보다 대졸자가, 그리고 비일류대학의 졸업생보다는 일류대학 졸업생이 좋은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한국 사회에서 부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문제는 개인 또는 집단이 간판 또는 그 간판이 중심이 된 집단을 악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부당하게 챙긴다는 데 있다. 최근 교육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고학력자일수록 학연과 같은 연고에 집착하고 질서의식과 비판의식도 떨어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똑똑한 자일수록 자신의 연고를 이용하여 자신의 밥그릇을 더 확실하게 챙긴다는 것이다.-282쪽

우리 학계 피라밋의 최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일류대 교수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은 대개 일류대 출신이고 박사학위는 한국의 일류대나 외국의 유명대학에서 취득한 자들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일류 대학에 입학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우리 나라의 일류대학은 매년 그 당시에 가장 똑똑한 고등학교 학생들을 선발하여 정원을 채워왔다. 이렇게 선발된 똑똑한 대학생 가운데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 대개 대학원에 진학한다. 대학원 과정에서도 경쟁에 승리한 자만이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국내 박사는 이렇게 치열한 경쟁을 통해 학위를 취득한다. 한편 외국 박사는 학부시절부터 외국어 공부를 하고, 외국의 유명대학에서 유학하여 학위를 취득한다. 일류대학의 교수는 이렇게 뽑고 또 뽑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한 일류대학 출신 박사학위자 가운데에서 또다시 선발된다. 이러한 과정 때문에 일반 사람(특히 비일류대학의 학생)은 일류대학의 교수를 거의 신적인 학문의 권위자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저술한 교재 또한 거의 '성경'처럼 생각한다. -283쪽

사이비 전공자는 자신의 성품을 '내용'으로 팔면, 고객이 자신의 상품이 불량품인 것을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책의 내용보다는 자신의 업적과 지위를 강조하는 '껍데기'(또는 간판)로 자신의 상품을 선전한다. 자신에 대한 비판 역시 비판 내용보다는 비판 자체를 가지고 반박한다. "내가 누군데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비판해." 이와 같이 사이비 교수는 오직 '껍데기'(결과)만 중요시하지 '내용'(과정)은 중요시하지 않기 때문에,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암기식 교육을 선호하기 쉽다. 게다가 이치를 따지고 창의력을 강조하는 교육을 하다보면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기 쉽다. 자신의 지식을 최대한 포장함과 동시에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교육을 시킨다. 이러한 교수한테 교육을 받은 학생은 논리적 모순을 발견하고 표절과 짜깁기를 비판할 수 있는 '감시의 눈'을 가질 수 없다. 결과적으로 사이비 교수는 학계의 피라밋 구조뿐만 아니라 교육방식까지도 악용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시켜 왔던 것이다.-286쪽

각주 10 : 한국사회에서 교재의 질은 주로 조직의 힘에 의해 평가되지, 교재의 '내용'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 것 같다. 출판사는 일류대학 교수의 권위와 연줄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저서를 출판하기를 희망하고, 또한 책의 출판을 결정할 때, 책의 내용보다는 저자의 간판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많다. 출판사의 이러한 행위는 비도덕적인 교수와 합세하여 독자를 기만하는 행위이다. 고객은 과대포장에 한번 속지 그 이상은 속지 않는다. 출판사는 편집과정에서 글이 표절과 짜깁기로 일관되었거나, 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출판사는 저자의 간판보다는 저자가 쓴 내용을 가지고 출판 결정을 해야 한다. 저자 역시 출판사에게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하지 말고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286쪽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한다. 이 말의 이면에는 교육이 잘못되면 그 나라의 국민은 100년 이상 고통의 나락 속에 빠질 수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혼과 그것을 유지하고 창조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자들은 부실경영을 해서 회사를 부도낸 기업가들에게 사재를 털어 노동자에게 보상을 하라는 주장을 많이 해 왔다. 이제는 교수 자신이 부실교육을 한 대가에 대해 과연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온 것 같다.

각주 11 : 학계가 공멸할지라도 자신은 정년이 보장되어있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교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교수조차 기억해야 할 법원의 판결이 있다. 자유당 말기, 많은 여성을 농락한 박인수 사건에서, 판사는 "법은 보호해줄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해 줄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교수의 정년보장도 학생과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려고 노력하는 교수를 위한 것이지, 학생과 국민을 기만하고 자신만의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사이비 교수를 위한 것은 아니다.-289쪽

학계에서 논문의 질은 주로 논문이 실린 곳이 어디인가에 근거해서 평가한다.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출판된 경우 학술지에 실린 글에 최고 점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국내 학술지보다는 외국 학술지에 실린 글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평가방법에는 고려되어야 할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하나는 사회과학자의 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글인가? 사회과학자인가 아니면 사회과학에 관심있는 일반 대중인가?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과학자의 논문은 '해외수출용'보다는 한국인의 이익을 위한 '내수용'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291쪽

왜 대부분의 학술지들이 동료학자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글로 가득차 있을까? 학술지는 주로 학회회원들에게만 배부되고, 사회과학에 관심있는 일반 대중들은 구입하기 매우 어렵다. 그 결과 학술지의 주고객은 '국민'이 아닌 '학술지 회원'이 된다. 학술지 회원은 동료이지만 보이지 않는 경쟁자이다. 경쟁에서는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 진짜 전공자가 드문 사회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서구에서 개발된 '최신 무기'를 과시하여 상대방의 기를 죽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이비 전공자들은 그 최신 무기가 제대로 사용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고, 최신 무기를 보여준 사람을 어설프게 공격하다가는 자신의 정체가 들통날 수 있다는 두려움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최신 무기를 가지고 남에게 폼을 잡고 싶은 마음으로 최신 무기를 소개한 신진학자들에게 입발린 칭찬을 하기 쉽다. 바로 이것이 학술지가 온갖 '서구의 최신 무기'들이 난무하는 학자들의 '지식과시의 전투장'으로 전환된 이유일 것이다. -291-292쪽

미래의 지식사회는 평생직장보다 평생직업이 강조되는 사회이다. 평생직장이 강조되는 현대 산업사회는 자신의 학문세계가 없는 학자일지라도 직장이란 울타리를 통해 자신의 일자리를 보존할 수 있다. 하지만 평생 직업이 강조되는 미래 사회에서는 학문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는 자신의 무기가 없는 학자는 생존할 수 없다. 따라서 대학원생들이 자신의 무기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교수와 과목을 찾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사이비 전공자도 학생에게 생존무기를 내용대신 '간판'으로 줄 수 있다. 이는 미래 한국 사회에도 사이비 학자들이 영속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의미한다. 반면 진짜 전공자는 '내용'으로 학생의 무기를 만들어주며, 학계의 도덕성을 회복시켜 탄탄한 미래의 지식사회를 형성해주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제 학생들은 자신의 무기를 형성할 요인이 '간판'인가 아니면 '내용'인가를 결정할 중대한 시기에 왔다. 이러한 학생들의 결정에 따라 우리 나라의 미래는 크게 좌우될 것이다.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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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9-12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다, 글도, 아프님도.

마늘빵 2007-09-13 00:17   좋아요 0 | URL
이 책 본문 보다는 역자의 후기가 더 멋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