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경고

  종교영화 혹은 어떤 영적인 계시에 관한 영화인줄 알았다. 그런데. 가족영화라고. 정말이지 내내 영적인 영화로서 받아들이던 내게,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서도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이 영화를, 어디까지 참아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영화관람의 중점이 되었다. 끝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채로 엔딩 크레딧 올라가더라.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의 위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대개 영화는 무슨 영화인지 자세한 내역을 모른 채 봐야 제맛이지만 이 영화는 시시콜콜 다 알고 봐야 이해할 수 있다.



* 친절하고 자상한 아버지 혹은 어머니는 자식입장에서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관심이냐 간섭이냐. 

  미국에는 실제로 영화에서와 같이 '내셔널 스펠링 비'라는 철자 맞추기 대회가 있는데, 이는 만 16세 이하의 청소년들이 참가하여 순전히 집중력과 기억력에 의거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대회라고 한다. 영화 속에서 종교학 교수인 아버지 사울은 그의 딸 엘리자가 어른들도 모르는 글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기억해내는 능력을 발견하고선 이 대회에 참가시킨다. 그는 믿고 있다. 딸이 자신에게는 없는 어떤 영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신과 대화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사울에 딸과 철자대회를 준비하면서 아내와 아들에게 소홀해지고, 아내와 아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외된 자신을 드러낸다. 아내는 남편이 항상 되뇌이는 말마따나 신비한 빛의 조각들을 모으는데 주력하고, 아들은 유대교를 배신하고 힌두교에 몰입함으로써 '이유있는' 반항을 한다. 화목했던 네 명의 '가족구성원'은 이제 각자가 관심갖는 것들을 위해 하루를 살아내고 '가족'은 무너져간다.



* 화목한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 가정의 평화는 사소한 부분에서 깨어진다. 그리고 어긋남은 지속되기 쉽다.

   영화는 잔잔하게 화목한 가정이 서로 어긋나고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느누구도 이 영화가 그런 메세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영화를 접하게 된다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황당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감독은 새로운 형식의 가족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 같지만 이 영화는 아무런 메세지도 전달하지 못했고, 그다지 볼 거리도 없다. 종교와 영적인 교류 등등을 끄집어내어 뭔가 있어보이는 영화를 만들려했지만 하나도 안 있어보이고, 양념이 되어야 할 것이 주가 됨으로써 주요내용은 사라지고 양념은 정체를 드러내지 못한 채 뒤섞였다.

  스코트 맥기히와 데이비드 시겔, 두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는 이번이 첫번째가 아니다. 2001년 <딥 엔드>라는 아직 보지못한 -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 영화를 함께 만들었고, 이번이 두번째 공동작이었으나 역시 실패했다. 볼거리가 없다면 메세지라도 뚜렷해야 하는데 메세지도 없고 볼거리도 없고 영화의 장르조차 의심케 만든다. 처음엔 스릴러일줄 알았다. 잔잔하게 다가다 이 딸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구나, 싶었는데 그도 아니었다. 참 애매하고 모호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유일하게 내 시선을 주목한 것은, 리처드 기어. 나는 그의 얼굴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푸근함이 좋다. 사람이 참 따뜻하다, 라는건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체조장학생으로 메사추세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다가 2년 뒤 연기에 뜻을 두고 곧장 뮤지컬에 몸을 던졌으며, <그리스>의 주연으로 주목받기 시작해 영화에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참 많은 영화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다지 흥행한 작품은 많지 않고 내가 그를 접한 것조차 <귀여운 여인>과 <자칼>이 전부다. 이제 50대 후반을 달리는 그지만 연기에 나이가 따로 있으랴. <다섯번째 계절> 이후 <플록>이라는 영화에 출연했던데 이건 개봉했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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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품절


'국민성'이라는 말 뒤에 붙는 술어는 대개 편견을 담고 있다. 개인차를 무시하고 몇몇의 예만 갖고 전체의 특성을 구성해내는 '일반화의 오류', 한 사회가 발전하는 단계에서 겪는 성장의 고통을 간단히 그 민족의 유전자 탓으로 돌리는 '인종주의 심리', 그저 문화적 차이에 불과한 것을 곧바로 미개함의 지표로 간주해버리는 '제국주의 논리' 등. 자기와 다른 인간에 대한 편견을 생산하는 기제는 다양하다. -10쪽

이 책의 의도는 '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정체성'이라는 낱말은 다분히 이념적이어서, 한국인이 마땅히 수립하고 보존해야 할 어떤 가치 체계를 함축한다. 가치관이 다양해진 시대에, 과연 한국의 문화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어떤 양식 같은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정체성' 담론은 종종 특정인의 주관적 가치관을 사회의 객관적 규범으로 제시하는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한국인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국민성' '정체성' 보다 이 책의 의도에 더 적합한 것이 있다면, 아마 '하비투스'라는 개념일 것이다. 우리말로 흔히 '습속'이라 번역되는데, 거칠게 말하면 특정 사회 성원들의 사고방식, 감정구조, 행동양식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11쪽

"회화가 색채의 조형예술이듯, 정치는 국가의 조형예술이다. 대중을 재료로 국민을 주조하는 것. 국민을 재료로 국가를 주조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언제나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참된 정치였다." (요제프 괴벨스, 1929) -58쪽

"옳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은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데카르트 , <방법서설>) -104쪽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많은 잘못된 견해들을 참된 것인 양 받아들였고, 그렇게 불안정한 원칙들을 근거로 해서 내가 쌓아올린 것이 불확실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학문에서 어떤 확고부동한 것을 이룩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견해를 벗어나 아주 기초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얼마 전부터 깨달았다." (데카르트, <방법서설>)-105쪽

수직적 예법의 과잉은 수평적 예법의 결여를 낳는다. 언젠가 독일문화원의 선생이 우리에게 "왜 한국인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사를 해도 안받느냐?"고 묻는다. 자신이 "헬로"라고 해도 멀뚱이 얼굴만 쳐다볼 뿐 대꾸가 없어 민망했다는 것이다. 하긴, 독일에선 모르는 사람에게도 "구텐 탁"이라고 했던 나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한마디도 인사를 안 건넨다. 이 어색함, 이 머쓱함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주는 예법이 없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수직적 위계를 위한 예법이 매우 복잡하게 발달된 한국 사회, 수평적 교제를 위한 예법에는 이렇게 구멍이 나 있다. 원래 전통 예법 자체가 신분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데다가, 근대화마저 군대를 모델로 하여 이루어지다 보니, 예법이 주로 수직적 위계를 세우는데에 소용된 것이다. 그 결과 개인과 개인의 평등한 교제를 규제하는 품위있고, 격조 있는 시민적 예법은 발달할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낯선 사람과 마주칠 때 한국인이 느끼는 어색함은 거기서 비롯된다.-122-123쪽

한마디로 한국인은 근거리 지각에 따르는 쾌, 불쾌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일단 내가 불쾌해야 남도 불쾌할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지 않겠는가. 자신이 불쾌하게 느끼지 않는 행동은 당연히 남에게도 별 생각 없이 하게 된다. 한마디로 이것은 '배려'의 문제이기 이전에 먼저 '감각'의 문제다. 이른바 에티켓의 전제가 되는 것은 바로 불쾌를 불쾌로 느끼는 미적 취미다. -141쪽

죄책감은 죄를 짓는 순간 발생하나, 수치심은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에 비로소 시작된다. -172쪽

한국에서는 이를 '연대책임은 무책임'이라 표현한다. 이는 똑같은 현상에 대한 군사주의적 표현이다. 신의 눈길은 인간에게 죄책감을 안겨주고, 인간들의 눈길은 사람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주체 형성이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자기반성의 능력을 갖춘 '개인'의 형성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남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성원'의 형성으로, 때로는 연대로만 책임을 지는 '대원'의 형성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173쪽

이런 문화(남의 눈치를 보는 문화)에서 윤리를 형성하는 감정은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이다. 신 앞에 떳떳하지 않은 이도 사람들 앞에선 떳떳하고, 신 앞에 떳떳한 이도 사람들 앞에선 부끄러울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의 신고율이 낮은 것은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이렇게 윤리가 타인의 눈에 맞춰져 형성된 사회에서는 죄도 드러나지 않는 한 떳떳하고, 죄가 아닌 것도 드러나는 한 부끄러운 것이 된다. -174-175쪽

한국은 뜨겁다. 개인주의가 강한 서구에서는 서로 논쟁을 벌이다가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으면 "유감이네요"하고 논쟁을 멈춘다. 하지만 모든 성원이 가치관을 공유하는 공동체 정서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견해의 차이는 참을 수 없는 것. 그 차이를 없앨 때가지 한국인은 가망 없는 논쟁을 집요하게 이어간다. 월터 옹은 구술문화에 사는 사람들은 어조가 논쟁적이라고 지적한다. 토론을 할 때 사안의 논리적 해결보다는 인격의 명예를 건 승패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인터넷 문화와 더불어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것이 이른바 '논객'들. 논객이라는 말은 어쩔 수 없이 '검객'을 연상시킨다. 구술문화에서는 어떤 이가 주장하는 논리보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의 솜씨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런 사회의 논쟁은 대개 '논리의 대결'이라기 보다는 ;검객의 결투'로 치러진다. 사안의 해결보다 중요한 것이 승부를 통해 결정되는 명예의 감정. 여기서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논쟁이 합리적이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인터넷은 고수들이 명멸하는 무협지 속의 '강호'. 혹은 검투자들이 사투를 벌이던 고대의 아레나다. 인터넷은 무림의 고수를 지향하는 수많은 네티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한국 사람이 목숨 걸고 인터넷을 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얼마전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내 이름이 영광스럽게 거론된 기사를 발견했다. 논쟁을 바라보는 이 사회의 코드를 그대로 보여준다.
"글 싸움에서 시사평론가 진중권 씨에게 이길 사람이 없다면, 말싸움에서 유시민 씨에게 이길 사람은 없어 보인다." -194-195쪽

토론 사이트에 의견을 올리고, 홈페이지에 제 이야기를 쓰고, 사실 오늘날처럼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하는 시대도 일찍이 없었다. 하지만 그로써 문자문화가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글쓰기는 구술문화에 가깝다. 오랜 사색으로 정제해낸 생각을 주옥같은 언어에 담는 독백적 글쓰기가 아니라, 반응이 오가는 상황에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곧바로 글자로 옮겨 적는 대화적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쓰기의 범람 속에도 글쓰기는 위기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211쪽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란 다름 아닌 이 '디지털 실어증'의 산물이다. 그 위기는 사회가 문자문화에서 영상문화로 이행하는 데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다. 21세기는 사회의 주요한 소통매체가 문자에서 영상으로 바뀌는 이른바 '도상적 전회'의 시대다.
[...중략...] 인문학의 위기는 구체적으로 '이미' 영상문화에 속하는 학생과 '아직' 문자문화에 있는 교수 사이의 세대 차이로 나타난다. 그림에 익숙한 학생들은 더 이상 선생의 문어체적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에 익숙한 선생들은 학생들의 영상적 신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2차 영상성의 문화가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이라고 할 때, 학생과 선생 모두 어느 한쪽만을 갖고 있어 서로 결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의 뇌는 '진보'가 덜 됐고, 선생의 몸은 '진화'가 덜 됐다.
-212-214쪽

'개인'이라는 말은 in+dividual,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라는 뜻이다. 하지만 컴퓨터에 여러 개의 창을 열어놓을 때, 정신은 다양한 관심사로 분할이 된다. 이로써 전통적 의미의 '개인'은 해체된다. 기성세대가 주의력이 산만한 젊은 세대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미디어의 홍수에 노출된 한국의 어린 세대에게서 '개인'의 해체라는 현상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속하고 파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220쪽

라이프니츠는 인간(의 정신)을 '창없는 단자'라 불렀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사방으로 창을 열어놓고 산다. 개인이 근대인의 조건이라면, 분열자는 탈근대적 인간의 조건이다. '조건'이란 거부할 수 없는 환경을 뜻한다. 현대인은 어차피 분열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중에서 디지털 통각을 가진 이는 멀티태스커로 진화할 것이고, 그것 없이 그저 산만하기만 한 이들은 넓은 정보의 바다를 표류하다가 해체되어 사라질 것이다. -221쪽

한국인의 신체가 아무리 그로테스크해 보여도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은 바로 그 몸이다. 다만 그 신체는 급조된 근대화에 따르는 부작용으로 고통 받고 있고, 미래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서 아직도 과거의 타성에 사로잡혀 있다. 오늘의 고통을 제거하고 미래를 준비하려면 한국인의 몸을 이루는 세 가지 역사적 층위가 최적의 배합을 이루도록 재배치해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존재의 미학, 즉 요소들을 선택하는 테크네와 그것들을 배치하는 메트릭이다.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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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0735 2007-01-31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도 많이도 치셨네~ ^^
이 책 리뷰도서로 떠서 신청하고 싶었는데... 못했습니다.
다음달쯤 여유되면 사서 읽어볼게요. 밑줄만 봐도 좋아보이는군요. ^^

마늘빵 2007-01-31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을 많이 치면 -_- 여기에 쓸 때 힘들어요. 리뷰 쓰는게 더 쉽겠어요. 곧 리뷰 써야지.

승주나무 2007-02-02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 많이 쳐주세요. 논술문제 만들 때 써먹게 ㅋㅋ
 
현명하게 세속적인 삶
복거일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6년 12월
품절


당연히, 우파 지식인들 사이의 논쟁들을 건전하게 만드는 일은 시급하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몇 가지 점들을 지켜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싸움에서 한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때로 논쟁의 상대방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짜증이 일더라도, 그들이 같은 편이고 그들과 심각하게 다투는 것은 진정한 적을 돕는 일임을 자신에게 일러야 한다.
다음엔, 우리는 모두 사회적 믿음과 정책적 견해에서 아주 동질적이라는 점을 잊지말아야 한다. 때로 차이가 부각되더라도, 그것이 크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일러서 지엽적 문제가 근본을 흔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논쟁을 믿음과 견해라는 비인격적 차원에서 진행해야 한다. 논쟁이 개인들의 행적이라는 인격적 차원에서 진행되면, 어쩔 수 없이 논쟁이 거칠어지고 당사자들 사이의 감정적 골은 깊어진다.
중요한 것은 믿음과 견해지 과거의 행적과 현재의 정치적 입지가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깨우침을 줄 수 있는 것은 당의 고승 위산 스님의 말씀이다. 그의 제자 앙산 스님이 행실에 대해 묻자, 위산은 "자네 눈 바른 것만 귀하게 여길 따름, 자네 행실은 보려하지 않네"라고 대답했다. 믿음과 견해가 올바르다면, 행적과 입지에서의 사소한 차이들은 큰 장애가 될 수 없고 거기서 나오는 의견의 편차는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논의를 통해 좁혀질 수 있을 터이다.
넷째, 논쟁에선 되도록 표현을 부드럽게 하려고 애써야 한다. 논쟁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흔히 내용보다 표현이다. 체스터필드 백작이 말한대로 "상처는 모욕보다 훨씬 빨리 잊혀진다." 화가 났을 때 나오는 대로 쏘아붙이는 대신 화를 삭이고 나서 보다 부드러운 표현을 쓰는 일은 일반적으로 인식된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40-41쪽

세계성의 시대에선 민족주의적 편향이 든 역사 해석은 특히 큰 문제들을 부른다. 해외에 나갔을 때, 자신이 받은 민족주의적 교육과 세계 현실이 너무 달라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시민들이 많다. 우리가 크게는 외교에서 작게는 외국인들과의 교류에서 서툰 까닭은 민족주의적 편향이 든 역사 해석도 큰 몫을 했다.
유난히 씁쓸한 반어는 우리 사회를 뒤덮은 민족주의적 태도가 실은 우리의 전통이 아니라 유럽의 전통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선조들은 민족에 그리 집착하지 않았고 우리보다 훨씬 세계적이었다. 지금 우리가 받아들인 민족주의는 원래 근대 유럽에서 비롯했다. 유럽 문명이 다른 문명권들로 수출한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은 기독교, 과학, 그리고 민족주의라 할 수 있는데, 그 셋 가운데 민족주의가 가장 성공적 수출품이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민족주의적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외세에 대한 저항"이 역사 해석의 중심적 가치가 된 역사 교육을 오래 받아왔으므로,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그런 기준에 따라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 현실에 접근한다. 그런 편향된 판단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리에게 이로울 수 없다. -50쪽

그래서 우리는 나름으로 삶의 설명서들을 열심히 찾는다. 그런 설명서로 쓸모가 큰 것이 문학이다. 특히 소설이 그렇다. 사람들의 삶에서 본질적인 부분들을 이야기로 꾸며 들려주므로, 소설은 삶의 본질과 살아가는 길에 대해서 성찰할 기회를 독자들에게 준다.
소설 작품들은 그럴 듯한 이야기들이다. 삶에 별다른 연관성이 없는 특수한 사실들을 버리고 삶의 본질에 연관된 것들만을 뽑아냈으므로, 소설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인식된 것보다는 훨씬 큰 보편성을 지닌다. 신문 사회면에 나오는 현실이 소설 속의 현실보다 훨씬 특수하고 기괴하다. 사람들의 삶에 관해서 '보편적 진실'이라 불릴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많이 담긴 곳이 바로 소설이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소설을 거짓말과 같은 뜻으로 쓰는 우리 사회의 관행은 참으로 불행하다. "소설을 쓴다"는 표현에 "거짓말을 지어낸다"는 뜻을 처음 담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길 없지만,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무지를 드러내고 우리 사회의 비속함을 상징한다. 근대 이후에서 가장 중요했던 예술 형식을 거짓말과 동의어로 만든 사회가 어떻게 건강하고 세련될 수 있겠는가?-52-53쪽

"자연은 우리에게 장점들을 주고, 우연은 그것들이 일하도록 한다"
"혼자서 현명해지려는 것은 크게 어리석은 일이다"
(라 로쉬푸코)

"그럴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현명해져라. 그러나 그들에게 그것을 말하지는 말아라."
(필립 체스터필드) -60-61쪽

"첫째, 신과 사람에 대해 너의 의무를 해야하니, 그것 없인은, 다른 모든 것들이 뜻이 없다; 둘째, 많은 지식을 얻어야 하니, 그것 없이는 비록 네가 매우 정직한 사람일지라도 매우 경멸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우 좋은 태도를 지녀야 하니, 그것 없이는 비록 네가 정직하고 박식한 사람일지라도 매우 마음에 맞지 않고 불쾌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필립 체스터필드) -62쪽

만일 당신이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면, 착한 사람인 척 하는 것이 긴요하다. 세상은 위선을 좋게 여기지 않는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위선이야 말로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사람은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 누구도 천성이 온전히 착할 수는 없고,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빼놓으면, 천성이 온전히 악할 수 없다. 그래서 모두 크든 작든 위선적 행동을 통해서 사회 환경에 적응한다. 위선은 사람이 자신의 비열한 천성을 극복하려는 안타까운 노력이다. 자연히, 가장 인간적이고, 그런 뜻에서, 타고난 선보다 오히려 위대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착한 천성에서든 위선을 통해서든 착한 행동을 하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실제로 조금씩 착해진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마음은 태어날 때 고착된 것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서 다듬어지도록 되었다.-63쪽

"현명하게 세속적이어라, 세속적으로 현명하지 말고"
(콸스)-64쪽

상업활동을 통해서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다. 아울러 물질적 가치를 창출해서 사회에 공헌한다. 이 점에서 상업활동은 본질적으로 위치재를 놓고 다투는 정치활동과 다르다. 모두 돈을 많이 벌면, 사회적 위치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도, 물질적 풍요의 절대적 수준은 높아지므로, 가치는 창출된다.
현대 사회가 빠르게 발전하고 그런 발전에서 기업가들이 그리도 큰 역할을 한 것은 상업 활동이 직접 위치재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 가치를 창출하고 사회적 지위는 간접적으로 얻어진닫는 사실 때문이다. 반면에, 위치재를 직접 겨냥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는 과정에서 가치를 비교적 적게 창출한다. 번영한 사회에서 기업가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다는 점은 우리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훌륭한 기업가들은 "현명하게 세속적"인 사람의 전형이다. 젊은이들이 기업가보다는 관료나 정치가를 선망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것은 모두가 깊이 새겨야 할 화두다. -66-67쪽

주목을 덜 받지만 정작 중요한 점은 외국의 기업가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자선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주주로 지배하고 경영하는 기업들의 자산으로 자선을 하지 않는다. 이점에서 외국의 자선가들과 우리 자선가들이 뚜렷이 대비된다.
아무도, 지배적 주주들도 최고경영자들도, 기업의 자산을 자선에 쓸 도덕적 권위를 지닐 수 없다. 기업의 목적은 주주들을 위해서 이윤을 되도록, 즉 법과 도덕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많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윤은 주주들에게 배당이나 청산을 통해서 돌아가야 한다. 자선은 그렇게 투자에 대한 보상을 받은 주주들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자선만이 정당할 뿐 아니라 원래 자선의 뜻에 맞는다. 남의 돈으로 하는 자선은 어쩔 수 없이 자선의 뜻을 덜어낸다. 기업은 법인이다. 원래 인격을 갖춘 무엇이 아니지만, 인격을 지닌 것처럼 여기는 것이 사회적으로 좋으므로, 그렇게 법적으로 인격을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법인은 마음이나 양심이 있을 수 없다. 마음도 양심도 없는 존재를 통해서 그리고 본질적으로 자신의 소유도 아닌 재산으로 이루어지는 자선이 과연 얼마나 깊은 뜻을 지닐 수 있겠는가? 자선은 남의 돈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으로 해야 하는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70쪽

그(프리드먼)는 자본주의 사회들에서만 자선이 나올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중앙 권력이 충분한 정보를 지니고 처리해서 사회의 움직임들을 다 통제하는 사회주의 사회들에선 개인들의 판단에 의한 자선은 들어설 틈이 원천적으로 없다. 만일 자선이나온다면, 그것은 계획이 틀려서 자원이 남는 개인들과 모자란 개인들이 나왔다는 사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사회들에선 자선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과 자본주의를 가장 충실히 따르는 미국에서 자선이 가장 왕성하다는 사실은 맥락이 통한다. 자선에 바쳐진 자원에서 가장 큰 성과를 얻기 위해서 현대 기업의 기법들과 기업가 정신을 결합하는 '자선자본주의'가 미국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선은 인간의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고 사회와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인 '상호적 이타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포장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해롭다. -72쪽

좋은 참고서들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늘 지적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그것들을 잘 쓸 줄 아는 사람들에겐 뜻밖의 선물들도 준다. 그런 선물들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 좋은 물음을 던질 줄 아는 능력'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은 터라, 우리 학생들은 모두 주어진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한 지적 활동이라는 생각을 지녔다. 창조적 노력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어진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물음을 던지는 능력이다. 풍요로운 결과를 약속하는 주제를 고르는 일에서부터 새로운 각도에서 문제를 살피는 일에 이르기까지, 창조적 노력의 모든 단계들을 떠받치는 것은 스스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이다.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집적된 참고서들은 그런 물음들을 찾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107쪽

우리 교과서들을 열악하게 만든 직접적 원인은 교과서의 기능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다. 실제로 교과서에 대한 편견과 경멸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학자들이 드물지 않다. 좋은 책들을 뽑아 상을 주는 일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해보면, 심사기준이 아예 '교과서는 제외한다'는 조항이 들어간 경우도 있다.
교과서는 '어떤 주제의 원칙들과 어휘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책'을 뜻한다. 따라서 교과서들은 그 사회의 '공식적 지식 체계'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바로 거기에 교과서의 근본적 중요성이 있다. 공식적 지식 체계는 한 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풍부하고 체계적인 지식 체계이며 사회의 구성과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고 효과적이다. 어떤 대체적 지식 체계도 공식적 지식 체계에 비길 만큼 풍부하고 체계적이지 못하다. 자연히, 좋은 교과서들이 존재하는 사회에선 시민들이 사회의 구성과 움직임을 잘 이해하게 된다.
교과서들은 또한 재발견의 위험을 줄인다. 이미 남들이 발견해서 잘 다듬어놓은 지식을 혼자 애써서 원시적 형태로 얻는 일처럼 딱한 일도 드물다. 지식의 발전과 축적이 점점 가속되는 지금, 재발견에서 나오는 개인적, 사회적 손실은 점점 커질 수 밖에 없다. 재발견을 피하려면, 지식이 뻗어나가는 맨 앞쪽으로 가장 빨리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 일에서 교과서는 가자 좋은 길잡이다. -113-114쪽

어쩔 수 없이 나는 복원 사업의 득실을 마음 속으로 헤아렸다. 복원에 든 비용은 작지 않을 터였다. 느닷없이 집과 생계를 잃은 가족들의 손해라는, 보이지 않는 비용은 더 클 터였다. 반면에, 얻은 것은 분명치 않았다. 실은 무엇을 얻은 것이 아니라 절터의 폐허를 그냥 잃어버린 것이었다.
폐허는 폐허 다워야 한다. 폐허마다 세월의 손길에 다듬어진 나름의 모습이 있어서 찾는 사람들에게 그 세월을 얘기해준다. 그래서 폐허다움은 폐허의 자산이다. 그것을 큰 돈을 들여 걷어내다니.
사람의 몸과는 달리, 폐허는 성형 수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젊음을 찾지만, 문화재들은 나이들었다는 점이 바로 본질적 자산이다. 지금 우리는 '문화재 복원'이란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폐허의 파괴에 너무 무심한 것은 아닌지. -134쪽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얼마나 하찮은가. 그러나 내가 그것들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볼테르) -193쪽

사람은 천성적으로 마약을 찾게 되어 있고 아주 오래 전부터 갖가지 마약들을 써왔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거의 모든 인류 사회들은 몇가지 마약들을 허용해왔다. 그렇게 허용된 마약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물론 알코올이다. 니코틴과 카페인도 대부분의 사회들에서 허용된 마약들이다. 비록 이제 니코틴은 점점 괄시를 받지만.
일반적으로, 알코올, 니코틴, 그리고 카페인을 포함하는 술, 담배, 커피, 차 같은 것들은 마약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취급은 사회적 이유 때문이지 화학적 기준 때문은 아니다. 그런 마약들이 허용되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관행이 이미 사회 조직 속으로 깊이 들어가 있고 사회가 그것들의 사용에 대처하는 길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지, 그것들의 영향이나 해독이 다른 마약들에 비해 작기 때문이 아니다. -214쪽

세상이 어지러우면, 보통 사람들의 일상도 힘든 판단들의 연속이 된다. 도덕과 규칙의 필요와 정당성을 부인할 사람은 드물 터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도덕과 규칙을 가볍게 어기는 상황에선, 혼자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짐이 되고 때로는 손해가 된다. 그래서 여느 때라면 무심히 내릴 일상적 결정들이 힘든 도덕적 판단을 거치게 된다.
여기 실린 글들 밑에 자리 잡은 전언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어기는 것보다 낫다는 얘기다. 적어도, 옛 말씀에 있듯이, 도덕적 삶은 자체로 보답이다. 이 말은 부도덕한 삶에 대해선 할 수 없다.
[...] 사람은 자연선택의 효율적 손길에 의해 다듬어진 '도덕적 동물'이다.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대신 남을 속이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사람들보다 삶에서 얻는 것이 적었고 그래서 밀려났다. 우리는 모두 상당히 도덕적이었던 사람들의 후손이다. 자연히, 도덕적 삶은 우리에게 유리할 뿐 아니라 우리의 천성을 충족시켜서 깊은 즐거움을 준다.
비록 짧고 가벼운 글들이지만, 여기 실린 글들엔 그런 생각이 스며있다. 책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세속적으로 현명한' 것보다는 '현명하게 세속적인' 것이 삶의 본질에 맞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주 어지럽다. 그래도 나는 '현명하게 세속적인' 태도가 적응적이라고 독자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후기에서)
-22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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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7-01-28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복거일아저씨한테 꽂혔군요. ^^

마늘빵 2007-01-28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네. 아직 한 권 더 있습니다. 안읽은거. 다른건 새로 구입해야하고요. 이 책 괜찮군요. 복거일에 대해 개인적인 관심이 없어도 괜찮은 책입니다.
 



* 스포일러 경고

  아 정말 포스터 야하다. 누가 다 벗고 나온 것도 아니지만 세 자매가 한 남자를 두고 하나는 뒤에서 껴안고 하나는 풀어헤친 가슴 사이로 손 집어넣고 또 하나는 그의 아래에서 관능적인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누구나 비밀은 있다. 나도 비밀이 있다. 그러나 비밀은 비밀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 나의 입을 통해 누군가의 귀로 전달된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비밀은 나만이 알고 있다.  



   - 재즈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재즈보컬리스트 미영은 자유연애주의자이다. 그녀는 매달리는 남자 싫고, 돈 많고 부티도 좀 나고 잘생기고 튕기는 남자를 좋아한다. 오늘도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어디 잘 생기고 뽀대 좀 나는 남자 없나 물색하고 있다. 에이 오늘은 영 꽝인데. 어 가만가만 지금 들어오는 저 남자 좋은데? 저 주문하시겠어요? 남자가 이럴 때 데낄라 한잔 딱 주문해야지. 저 데낄라 주세요. 네? 좋아 감이 좋아. 제 전화번호에요. 오빤 내 남자야.

 

 "사랑은 원래 벼락처럼 다가와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

  - 나는 대학원생이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책이 좋아 책 속에 파묻혀 사는 삶이 좋으며, 시를 읽고 시를 논하는 그럼 남자를 만나고 싶다. 잘생겼으면서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남자라면 오케이다. 그런데 내 주변엔 그런 남자가 없다. 그런 남자가 언니 주변에 왜 있어. 좀 남자를 찾으려면 돌아다녀야지 집구석에서 책만 보고 있는데 남자가 어디서 나타나?! 아니야 사랑은 벼락처럼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오는거야. 그런게 바로 사랑이야. 나에게 벼락처럼 사랑이 다가왔어요. 동생의 그 남자가.  근데... 섹스는 어떻게 하는거죠? 막내동생 방에서 몰래 비디오를 가져와서 봐야겠어요. 책도 보면서 연구도 좀 하고요.



"세상에 사랑하고 좋아하는 두 가지 감정 뿐이라고 생각하세요?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걸 몰라요?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요. 지금 내 마음이 어떤가가 더 중요한거 아닌가요. 나중에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아닌."

  -  아휴 배만 잔뜩 뿔룩 튀어나와가지구는 쇼파에 드러누워 킁킁 코를 골고 씻지도 않아 냄새나고 입에는 먹다남은 안주거리 묻혀놓고 자는 저 남자 내 남편입니다. 내 남편은 나보고 가족끼리 섹스를 어떻게 하느냐고 그럽니다. 그래 너같은 남자랑은 섹스하고픈 마음도 안생긴다. 저러고 있는데 어떻게 섹스할 생각이 드니. 뭐 결혼이 다 그런거죠. 그렇게 그렇게 살고 그러다 늙고 가는거죠. 결혼이 별건가요. 나는 나보다 내 남편과 내 아이를 지키고 보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에 만족하렵니다. 그런데 귀엽다 이 남자. 나보고 이쁘댄다.

- 이제부터 저는 그들의 마음 속에 잊지 못할 비밀 한 가지씩을 만들어줄거에요. 미영이? 좋아해요. 사랑스럽고 이쁘고 귀엽잖아요. 애교도 많고 몸매도 이쁘고. 하지만 미영이 언니 선영이도 매력적이에요. 아무 것도 모르는 처녀인데다가 한번 당겨주면 그냥 다가올거 같아요. 이런 여자 쉽죠. 하지만 순수한 매력이 있어요. 아 미영이의 결혼한 첫째 언니 진영씨요? 진영씨 이쁘죠. 사랑받고 싶어하는 여자에요. 사랑에 굶주렸어요. 남편과 아이에게 시달리며 자신의 사랑을 잊어버린거죠. 이런 여자요 쉬워요. 몇마디 칭찬과 위로면 충분히 넘어오거든요. 거봐요. 벌써 제 위에 올라와있잖아요.

   <누구나 비밀은 있다>는 비밀에 관한 영화다. 사랑에 관한 영화다. 사랑의 비밀에 관한 영화다. 내 친구의 애인을 좋아해본 적이 있나요. 애인이 있는 줄 알면서 접근해본 적 있나요. 짝사랑하는데 말도 못하고 혼자 마음 졸이며 삭히고 있지는 않나요. 결혼한 여자인데 나의 첫사랑인데 왜 아직도 포기못하고 마음 속에 간직하는걸까요? 사랑에 관해선 무수히 많은 비밀들이 가능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드러내지 않은 자기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륜이건 사랑이건 아니면 하룻밤의 쾌락이었건 어떤 식으로 이름붙이건간에 모두 비밀이다. 쉿.  

  <누구나 비밀이 있다>는 자유롭고, 도발적이고, 권태감을 느끼는 각각의 세 여자들이 '이상적인 너무나 이상적인' 한 남자와 느끼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 말한다. 영화는 사람들이 지겨운 일상생활로부터 벗어나고픈 욕망을 대리만족시켜주는 리얼리티 티비 프로그램과 같다. 머리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그런 생각들을, 때로는 섹시한 여자, 때로는 지적인 여자, 때로는 누군가의 소유물이 된 것만 같은 여자를 골고루 사귀어보고픈 남자들의 욕망을 자극한다. 또 여자들 역시 마음에 들지만 내 동생 혹은 내 친구의 애인인 그를 내 남자로 만들고 싶은데 도리상 그리 할 수는 없고 감추어진 속마음을 영화를 통해 투영하고 바라보며 대리만족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영화 속 수영에 의한 세 여자와의 치정극은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걸 알기에 그만 우리의 꿈으로부터 '깨몽'한다.

  누구나 비밀을 안고 살고, 그것이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사람들은 마음 속에 겹겹이 꼭꼭 싸매고 감추려든다. 그 비밀을 말하는 순간 나는 누군가로부터 머리 쥐어 뜯길 수도 있으며, 유치장에 들어갈수도 있으며,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으며, 친구와 절교를 해야할 수도 있으며, 또다른 차원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버리고 떠나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밀이 나중에라도 발각될 우려가 있다면, 그것이 두렵다면,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닐 때의 사태가 무섭다면, 어쩌면 비밀을 살짝 내놓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닐 때 일어날 사태를 내가 감당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비밀을 간직할 자신이 없다면 솔직한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다만 이 또한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상대방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어야 한다. 때로는 비밀보다는 솔직함이 상대방에게 한 발 더 다가서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 (영화 속에서와 같은 비밀은 털어놓으면 복구불능의 사태를 불러오긴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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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1-28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나름 좋아해요. 이병헌의 매력이 잘 풍겼던 영화 같아요. ^^
요즘 나온 영화에선 좀 덜하더군요.

마늘빵 2007-01-28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괜찮게 봤습니다. ^^ 각기 다른 세 여자의 연애관과 처지도 재밌고, 중간에서 그들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병헌의 매력도 돋보이고요.
 



* 스포일러 경고

  대개의 미래사회를 그린 영화들이 그렇듯 에디슨 시티 또한 범죄율 0%를 자랑하는 미국 최고의 살기 좋은 도시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범죄를 미리 예상하는 집단이 있었더랬고, <이퀼리브리엄>에서는 사람들에게 감정을 없애는 약을 주입함으로써 평화를 달성했고, <브이 포 벤데타>에서는 국가의 주도 하에 모든 역사와 사건이 조작되고, 이들의 공권력으로 시민들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줬더랬다. 그 외에도 미래 사회를 그린 영화들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또 앞서 언급한 어떤 영화는 평화로운 미래사회보다는 통제받는 미래사회에 촛점이 맞추어졌다고 하지만, 대개의 미래사회를 그린 영화들은 평화롭다. 오늘날과 같은 범죄가 난무(?)하는 사회는 예상할 수 없다.  



* 영화에서 가장 무자비한 요원으로 나왔다. 인정머리라곤 조금도 없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가지쳐야 한다는  사고방식. 심리적인 불안감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그가 저지른 행위의 결과로 인해 죽음을 맞는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느니.

  범죄율 0%의 사회를 평화로운 사회라고 볼 수 있을 때 '에디슨 시티'는 매우 평화롭다.  영화 <에디슨 시티>의 범죄율 0%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F.R.A.T는 워낙 영화 속에서 순식간에 지나갔던지라 무엇의 약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비밀경찰조직과 같은 것이다.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극비다. 그들은 범죄가 일어나는 곳이면 어디든 출동하고, 어떤 방식을 사용하여 현장을 제압하는가 하는 것은 순전히 그들에게 달려있다. 야구방망이를 쓰고 싶다면 쓰는 거고, 총을 사용하고 싶다면 총을 사용하는거고, 그냥 주먹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주먹을 사용하는거다. 사건을 어떤 식으로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것은 현장에 출동한 비밀경찰 프랫 각각의 개인들에게 달려있다.

  어느날 프랫이 연루된 살인사건이 재판에 회부되고, 이 지역신문 신참기자 폴락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낌새를 챈다. 신문사 편집장인 애쉬에게 도움을 청해보지만 애쉬는 공권력에 다가가서는 안된다고 충고한다. 그저 추측으로 일관한 기사는 기사가 아니라 소설이라며 정말 기사다운 기사를 쓰고 싶다면 취재를 하라고 한다. 현장을 발로 뛰며. 애쉬의 조언으로 현장 취재를 하던 폴락은 슬슬 잊혀지던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게 되고, 그 와중에 여자친구와 함께 길거리에서 딱 죽지 않을 만큼 폭행을 당한다. 주먹 몇 방에 이렇게 만들 수 있는건 그들 뿐이다. 여자친구는 혼수상태로, 자신은 위험을 피해 지역 검사의 버려진 시골집으로 가지만 역시 안전하지 않다.



* 헐리우드 최고 관록의 배우와 헐리우드 초짜 배우의 만남.  정말 화려한 출연진이다. 모건 프리먼. <쇼생크 탈출>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부터 <딥 임팩트> <하이크라임> <블루스 올마이티> <드림캐쳐> <더독>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 배우가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건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였다. 주연이라 할 수는 없지만 주연 못지 않게 비중있는 역할을 맡았더랬다. 늙은 체육관장과 나이든 여자 복서와의 매개 역할이랄까. 두 배우도 멋있었지만 나에겐 모건 프리먼이 더 멋있게 보였다.

* 오른쪽엔 2000년 빌보드 선정 최고의 그룹이라던 '엔싱크'의 리드보컬 저스틴 팀버레이크. 그는 이후 솔로활동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혔지만, 여자친구인 카메론 디아즈의 영향으로(지금도 사귀고 있는지는 나도 의문) 영화계에도 눈독들이다가 <에디슨 시티>로 화려한 신고식을 마쳤다.  영화에선 뭐 저런 별 배우같지도 않은 (헐리우드 남자배우들은 잘생겨야한다는 편견은 버려) 애가 나왔담 했는데 그가 저스틴 팀버레이크라니. 근데 정말 볼품 없게 생겼다.

  진실은 캐면 캘수록 점점 커다란 몸체를 드러내고 진실을 캐는 폴락의 목숨은 더 위험해진다. 사건의 증인이 교도소에서 살해당했으니 이제 증거라고는 없다. 하지만 비밀경찰 프랫에 몸담은 이 중 그들의 행태에 동조하지 못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이가 있었다. 폴락은 그와 비밀스럽게 접촉을 해 프랫을 쓰러뜨릴 자료를 받게 되지만 프랫은 이를 눈치채고 두 사람 모두 사지로 몰아넣기 시작한다. 신체 180센티 이상, 90킬로그램 이상, 모두 미혼에, 사격명중율 100%를 자랑하는 이들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기존의 영화 속에서, 언뜻 보기엔 평화로운 미래사회는 그 안에 항상 겉으로 보이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 있었다. <에디슨 시티>의 평화는 프랫이란 비밀경찰의 무자비함 때문이었으며, 사람들은 그들이 무서워서 피했던 것이지, 각각의 사람들의 자발적인 동의와 공감을 얻어 평화가 달성된 것이 아니었다. 평화는 자발적으로 달성될 수 없는 것일까. 한 사회와 국가를 비롯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자발적 동의와 공감을 얻어 달성된 평화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말 그대로 이상향일 것이다. 인간이 모두 악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은 원래 선하게 태어났는데 사회와 환경의 영향으로 악하게 변한 것일까. 성악설이든 성선설이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확실한 것은,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평화가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평화를 원한다고 하지만, 정말 그들은 순도 100%의 평화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원하고 원하지 않고의 차원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원에서 본다면 말이다.

  영화 <에디슨 시티>의 그 동일 이름의 도시 또한 평화로운 사회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범죄율 0%와 동의어로 사용했을 때의 평화이지 순도 100%의 평화는 아닐 것이다. 범죄는 없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프랫이란 비밀경찰을 두려워하며 벌벌떨고 프랫은 여자와 마약과 무기와 돈을 끼고 자신들이 하고싶은 대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범죄율 0%는 달성되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거리의 폭력과 무자비한 살해는 남아있다. 단지 그것이 '범죄자'라 지칭된 이들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프랫'이란 국가공권력인 비밀경찰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 행위의 주체는 달라졌을지 모르나 행위의 현실은 변함이 없다. 이렇게 본다면 맨 처음 '범죄율 0%' 와 '평화'를 동일시 했던 명제는 깨져버린다. 진실된 의미의 평화는 사람들 개개인의 자발적 의지로부터 나와야 할테지만 이를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막연하고 희망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관상의 평화를 위해 국가에 의해 또다른 폭력이 자행된다면 이는 또다른 불필요한 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폭력에 의한 폭력의 방지'를 통한 평화는 더 이상 평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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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1-2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스틴이 나온다는 것 자체만으로 관심대상에서 제외된 영화였던 기억이 납니다.
아쉽죠 모건 프리먼에 거기다가 케빈스페이시 까지 나왔는데...^^
하지만 무엇보다도..저 배우들 얼굴 4명 들이댄(?) 전형적인 포스터가 가장 거슬렸어요..^^

마늘빵 2007-01-28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생각보다 괜찮은 영화입니다. 저스틴은 저도 눈에 거슬렸지만 - 그가 저스틴 이라는걸 모르고 본 동안에도 - 모건 프리먼을 보는 맛으로 즐겼습니다. 영화 스토리도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