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품절


'국민성'이라는 말 뒤에 붙는 술어는 대개 편견을 담고 있다. 개인차를 무시하고 몇몇의 예만 갖고 전체의 특성을 구성해내는 '일반화의 오류', 한 사회가 발전하는 단계에서 겪는 성장의 고통을 간단히 그 민족의 유전자 탓으로 돌리는 '인종주의 심리', 그저 문화적 차이에 불과한 것을 곧바로 미개함의 지표로 간주해버리는 '제국주의 논리' 등. 자기와 다른 인간에 대한 편견을 생산하는 기제는 다양하다. -10쪽

이 책의 의도는 '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정체성'이라는 낱말은 다분히 이념적이어서, 한국인이 마땅히 수립하고 보존해야 할 어떤 가치 체계를 함축한다. 가치관이 다양해진 시대에, 과연 한국의 문화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어떤 양식 같은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정체성' 담론은 종종 특정인의 주관적 가치관을 사회의 객관적 규범으로 제시하는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한국인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국민성' '정체성' 보다 이 책의 의도에 더 적합한 것이 있다면, 아마 '하비투스'라는 개념일 것이다. 우리말로 흔히 '습속'이라 번역되는데, 거칠게 말하면 특정 사회 성원들의 사고방식, 감정구조, 행동양식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11쪽

"회화가 색채의 조형예술이듯, 정치는 국가의 조형예술이다. 대중을 재료로 국민을 주조하는 것. 국민을 재료로 국가를 주조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언제나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참된 정치였다." (요제프 괴벨스, 1929) -58쪽

"옳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은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데카르트 , <방법서설>) -104쪽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많은 잘못된 견해들을 참된 것인 양 받아들였고, 그렇게 불안정한 원칙들을 근거로 해서 내가 쌓아올린 것이 불확실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학문에서 어떤 확고부동한 것을 이룩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견해를 벗어나 아주 기초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얼마 전부터 깨달았다." (데카르트, <방법서설>)-105쪽

수직적 예법의 과잉은 수평적 예법의 결여를 낳는다. 언젠가 독일문화원의 선생이 우리에게 "왜 한국인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사를 해도 안받느냐?"고 묻는다. 자신이 "헬로"라고 해도 멀뚱이 얼굴만 쳐다볼 뿐 대꾸가 없어 민망했다는 것이다. 하긴, 독일에선 모르는 사람에게도 "구텐 탁"이라고 했던 나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한마디도 인사를 안 건넨다. 이 어색함, 이 머쓱함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주는 예법이 없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수직적 위계를 위한 예법이 매우 복잡하게 발달된 한국 사회, 수평적 교제를 위한 예법에는 이렇게 구멍이 나 있다. 원래 전통 예법 자체가 신분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데다가, 근대화마저 군대를 모델로 하여 이루어지다 보니, 예법이 주로 수직적 위계를 세우는데에 소용된 것이다. 그 결과 개인과 개인의 평등한 교제를 규제하는 품위있고, 격조 있는 시민적 예법은 발달할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낯선 사람과 마주칠 때 한국인이 느끼는 어색함은 거기서 비롯된다.-122-123쪽

한마디로 한국인은 근거리 지각에 따르는 쾌, 불쾌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일단 내가 불쾌해야 남도 불쾌할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지 않겠는가. 자신이 불쾌하게 느끼지 않는 행동은 당연히 남에게도 별 생각 없이 하게 된다. 한마디로 이것은 '배려'의 문제이기 이전에 먼저 '감각'의 문제다. 이른바 에티켓의 전제가 되는 것은 바로 불쾌를 불쾌로 느끼는 미적 취미다. -141쪽

죄책감은 죄를 짓는 순간 발생하나, 수치심은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에 비로소 시작된다. -172쪽

한국에서는 이를 '연대책임은 무책임'이라 표현한다. 이는 똑같은 현상에 대한 군사주의적 표현이다. 신의 눈길은 인간에게 죄책감을 안겨주고, 인간들의 눈길은 사람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주체 형성이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자기반성의 능력을 갖춘 '개인'의 형성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남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성원'의 형성으로, 때로는 연대로만 책임을 지는 '대원'의 형성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173쪽

이런 문화(남의 눈치를 보는 문화)에서 윤리를 형성하는 감정은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이다. 신 앞에 떳떳하지 않은 이도 사람들 앞에선 떳떳하고, 신 앞에 떳떳한 이도 사람들 앞에선 부끄러울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의 신고율이 낮은 것은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이렇게 윤리가 타인의 눈에 맞춰져 형성된 사회에서는 죄도 드러나지 않는 한 떳떳하고, 죄가 아닌 것도 드러나는 한 부끄러운 것이 된다. -174-175쪽

한국은 뜨겁다. 개인주의가 강한 서구에서는 서로 논쟁을 벌이다가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으면 "유감이네요"하고 논쟁을 멈춘다. 하지만 모든 성원이 가치관을 공유하는 공동체 정서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견해의 차이는 참을 수 없는 것. 그 차이를 없앨 때가지 한국인은 가망 없는 논쟁을 집요하게 이어간다. 월터 옹은 구술문화에 사는 사람들은 어조가 논쟁적이라고 지적한다. 토론을 할 때 사안의 논리적 해결보다는 인격의 명예를 건 승패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인터넷 문화와 더불어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것이 이른바 '논객'들. 논객이라는 말은 어쩔 수 없이 '검객'을 연상시킨다. 구술문화에서는 어떤 이가 주장하는 논리보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의 솜씨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런 사회의 논쟁은 대개 '논리의 대결'이라기 보다는 ;검객의 결투'로 치러진다. 사안의 해결보다 중요한 것이 승부를 통해 결정되는 명예의 감정. 여기서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논쟁이 합리적이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인터넷은 고수들이 명멸하는 무협지 속의 '강호'. 혹은 검투자들이 사투를 벌이던 고대의 아레나다. 인터넷은 무림의 고수를 지향하는 수많은 네티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한국 사람이 목숨 걸고 인터넷을 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얼마전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내 이름이 영광스럽게 거론된 기사를 발견했다. 논쟁을 바라보는 이 사회의 코드를 그대로 보여준다.
"글 싸움에서 시사평론가 진중권 씨에게 이길 사람이 없다면, 말싸움에서 유시민 씨에게 이길 사람은 없어 보인다." -194-195쪽

토론 사이트에 의견을 올리고, 홈페이지에 제 이야기를 쓰고, 사실 오늘날처럼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하는 시대도 일찍이 없었다. 하지만 그로써 문자문화가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글쓰기는 구술문화에 가깝다. 오랜 사색으로 정제해낸 생각을 주옥같은 언어에 담는 독백적 글쓰기가 아니라, 반응이 오가는 상황에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곧바로 글자로 옮겨 적는 대화적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쓰기의 범람 속에도 글쓰기는 위기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211쪽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란 다름 아닌 이 '디지털 실어증'의 산물이다. 그 위기는 사회가 문자문화에서 영상문화로 이행하는 데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다. 21세기는 사회의 주요한 소통매체가 문자에서 영상으로 바뀌는 이른바 '도상적 전회'의 시대다.
[...중략...] 인문학의 위기는 구체적으로 '이미' 영상문화에 속하는 학생과 '아직' 문자문화에 있는 교수 사이의 세대 차이로 나타난다. 그림에 익숙한 학생들은 더 이상 선생의 문어체적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에 익숙한 선생들은 학생들의 영상적 신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2차 영상성의 문화가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이라고 할 때, 학생과 선생 모두 어느 한쪽만을 갖고 있어 서로 결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의 뇌는 '진보'가 덜 됐고, 선생의 몸은 '진화'가 덜 됐다.
-212-214쪽

'개인'이라는 말은 in+dividual,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라는 뜻이다. 하지만 컴퓨터에 여러 개의 창을 열어놓을 때, 정신은 다양한 관심사로 분할이 된다. 이로써 전통적 의미의 '개인'은 해체된다. 기성세대가 주의력이 산만한 젊은 세대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미디어의 홍수에 노출된 한국의 어린 세대에게서 '개인'의 해체라는 현상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속하고 파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220쪽

라이프니츠는 인간(의 정신)을 '창없는 단자'라 불렀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사방으로 창을 열어놓고 산다. 개인이 근대인의 조건이라면, 분열자는 탈근대적 인간의 조건이다. '조건'이란 거부할 수 없는 환경을 뜻한다. 현대인은 어차피 분열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중에서 디지털 통각을 가진 이는 멀티태스커로 진화할 것이고, 그것 없이 그저 산만하기만 한 이들은 넓은 정보의 바다를 표류하다가 해체되어 사라질 것이다. -221쪽

한국인의 신체가 아무리 그로테스크해 보여도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은 바로 그 몸이다. 다만 그 신체는 급조된 근대화에 따르는 부작용으로 고통 받고 있고, 미래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서 아직도 과거의 타성에 사로잡혀 있다. 오늘의 고통을 제거하고 미래를 준비하려면 한국인의 몸을 이루는 세 가지 역사적 층위가 최적의 배합을 이루도록 재배치해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존재의 미학, 즉 요소들을 선택하는 테크네와 그것들을 배치하는 메트릭이다. -289쪽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d0735 2007-01-31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도 많이도 치셨네~ ^^
이 책 리뷰도서로 떠서 신청하고 싶었는데... 못했습니다.
다음달쯤 여유되면 사서 읽어볼게요. 밑줄만 봐도 좋아보이는군요. ^^

마늘빵 2007-01-31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을 많이 치면 -_- 여기에 쓸 때 힘들어요. 리뷰 쓰는게 더 쉽겠어요. 곧 리뷰 써야지.

승주나무 2007-02-02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 많이 쳐주세요. 논술문제 만들 때 써먹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