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을 위한 철학통조림 매콤한 맛 1318을 위한 청소년 도서관 철학통조림 1
김용규 지음, 이우일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1월
구판절판


"모든 사람의 자발적인 행위의 목적은 자신에 대한 어떤 선이다." (홉스) -35쪽

"따져보지 않은 삶은 무가치하다" (소크라테스) -46쪽

"어떤 슬픔도 한 시간의 독서로 풀리지 않은 적은 내 생애에 한 번도 없었다."
(몽테스키외)-47쪽

"만약 도덕법칙에 조금이라도 예외를 인정해 버린다면, 의무의 법칙은 동요되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칸트)-70쪽

키케로는 첫째, 자신에게 극단적인 불이익이 돌아올 경우, 둘째, 상대방에게 역시 극단적인 불이익이 될 때, 셋째, 약속이 사기나 폭력으로 맺어졌을 경우, 넷째, 상대방이 불성실할 경우에는 약속을 어길 수 있다고 했어요. -75쪽

"이것들(자신의 저서)은 단지 복사본에 불과하며, 커다란 수고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단지 전해 오는 풍부한 말들을 거기에 적어 놓았을 뿐이다." (키케로)-76쪽

"공익 증진을 의도적으로 목적할 때보다도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이익에 기여한다." (스미스 <국부론>)-89쪽

니체도 마찬가지로 이타주의를 부정하고 이기주의를 옹호했다. 니체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마치 노예가 그 주인에게 사랑을 바침으로써 먹고 입을 것과 잠잘 곳을 얻는 것처럼, 단지 자신이 허약하기 때문에 상대에게서 투쟁을 통해서 얻을 수 없는 사라을 통해 얻어내려는 얄팍한 이기주의적 수법이자 노예근성이라고 보았다. -89-90쪽

돈벌이란 원래 가정에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기 때문에, 그것은 목적이 가진 본래의 의미인 '가정의 행복'에 의해 제한받아야 한다는 거야. 바꾸어 말하자면, 가정의 행복이라는 목적에 어긋나는 돈벌이는 옳지 못하다는 말이지. 그런데 세상엥는 돈벌이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정의 행복을 해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즉 어떤 사람은 돈벌이가 가정 운영의 목적 그 자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한도 끝도 없이 재산을 모으거나, 적어도 재산을 잃지 않는 것이 인생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여 가정의 행복을 깨뜨린다는 거지.
마찬가지로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온갖 기술과 재능을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거야. 그들은 돈벌이가 목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은 이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거지. 그 결과 가정의 행복도, 자신의 기술과 재능도 모두 잃고 만다는 거야.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저자의 서술)-105-106쪽

"이기주의와 자기사랑은 일치하기는커녕 정반대다. 이기주의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적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자기를 찾는 인간>) -108쪽

"언젠가 많은 것을 말해야 할 이는 많은 것을 가슴 속에 쌓는다. 언젠가 번개에 불을 켜야 할 이는 오랫동안 구름으로 살아야 한다." (니체)-116쪽

따라서 공리주의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공리'가 '정의'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공리주의자들은 "공리의 원칙을 만족시키는 것은 정의의 원칙도 만족시킨다." 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벤담은 "류마티스에 걸린 왕"이라는 논법을 제시했따. 즉, 류마티스에 걸린 왕은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놓아도 행복할 수 없듯이, 분배가 평등하지 않으면 최대 다수의 행복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칙에는 이미 평등의 원리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밀도 "사회 정의나 분배적 정의는 공리의 의미 바로 그 속에 내포되어 있거나, 혹은 최대 행복의 원리에 함축되어 있다"라며 이에 동조했다. -179쪽

"바다는 악을 원치도 않고 선을 원치도 않는다. 물결은 바람과 달에 따라 일어난다. 내가 돛을 펼치면 바람은 각도에 맞추어 돛을 밀어 준다. 인간은 바람의 힘으로 바람을 거슬러 나아가면서, 자기의 돛을 조종하고 방향키에 의지한다." (알랭)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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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사랑, 그리고 평화를 향한 참지식인의 길 청소년 철학창고 10
묵자 지음, 박영하 옮김 / 풀빛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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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에서 정의론 수업을 받던 때였던거 같다. 동서양의 철학자들의 정의론을 공부하고 배우던 중 이 묵자란 녀석이 내 마음에 들어와버렸다. 사실, 학부시절에도 묵자를 접하긴 했지만 그땐 공자도, 맹자도, 순자도, 한비자도, 묵자도 별로 내 마음을 끌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철학은 필수과목만 듣고 주로 서양철학의 세례를 받았더랬다.

  그런데, 대학원 논문 주제는 서양의 한 철학자를 잡아놓고, 지금 내 마음에 들어와있는건 그가 아니라 묵자다. 요새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를 읽고, 이어 묵자까지 읽고 있다. 공자의 <논어>도, 맹자의 <맹자>도, 노자의 <도덕경>도, 장자의 <장자>도, 그 어느 것도, 부끄럽게도, 아직까지 일차 완역본으로 읽은 것이 없다. <묵자>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철학사 와 기타 다른 국내 철학자의 책을 통해서만 접했지 정식으로 그를 만나진 못했다.

  풀빛에서 나온 <묵자>는, 사실 원문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청소년 철학창고' 시리즈이기 때문일까. 그저 묵자의 글을 쉬운 한국어로 풀어놓고 각각의 장 뒤에 풀어쓴 이가 덧붙여 자신의 생각을 넣은 것이 다다. 저자를 탓할 것도 아니고, 묵자를 탓할 것도 아니다. 풀빛에서 애초 기획된 이 시리즈의 구조가 그리 되었던 것을. 이 시리즈는 매우 부담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다. 부담감없이 묵자와 공자, 맹자를 읽을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得'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뭔가를 바랬던 나로서는, 이 책 이후에 제대로 해설이 들어간 김학주의 <신완역 묵자>(전 2권)를 읽기로 마음 먹었다. 값이 매우 비싼 것으로 보아 - 더군다나 두 권 - 꽤나 두꺼울 것으로 예상되지만, 묵자에 대한 내 사랑은 이미 여기까지 왔다.

  유가의 공자와 동시대를 살진 않았지만 공자의 이론에 맞섰던 묵자, 공자의 이론을 강도높게 비판했기 때문에, 이후에 사랑받았던 공자의 애제자 맹자가 주도권을 잡았을 당시 묵자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졌고, 그 덕분인지 <묵자>의 71편이 모두 전해지지 않고, 현재 양계초의 분류에 따라 5부 15권 53편만이 전해지고 있다. 나머지는 어디로 증발했나. 묵자라는 인물에 대해 전해지는 것은 모두 추정일 뿐이다. 그가 목수였다는 말도 있고, 그래서 신분간의 차별과 구별을 넘는 사랑인 겸애를 주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그의 피부가 검었기 때문에 묵자라 하기도 하고, 사상이 불순(?)해 묵형을 받았다는 데서 묵자라 칭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 어느 것도 명확히 그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다만 전해지는 것은 그의 제자들이 엮어놓은 <묵자>라는 책을 통해서 그를 추정할 뿐이다.

  공맹과 노장만이 기억되고 있는 오늘날, 묵자의 색다른 주장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예나 법이냐 그도 아니면 무위자연이냐, 를 넘어 묵자의 겸애는 또다른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한다. 원문은 전혀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부담없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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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3-24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자, 읽으셨군요. 전 전에 장자를 받아두고선 아직 안 썼네요. 청소년철학시리즈로
좋은 책이더군요^^

마늘빵 2007-03-25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풀빛 장자요. 다른 책들도 한번씩 쭉 보고 싶더라구요. '부담없이'. 풀빛 시리즈에서는 얻어낼 부분은 별로 없지만 대략 줄거리를 파악하기는 좋을거 같아요.
 
묵자, 사랑, 그리고 평화를 향한 참지식인의 길 청소년 철학창고 10
묵자 지음, 박영하 옮김 / 풀빛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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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는 유교의 지나친 형식주의와 지배자 위주의 논리에 반기를 들고 독자적인 사상을 만들었다. 그 결과 유학의 최대 적수이자 반대 세력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그러므로 묵자가 말하는 수신의 내용은 유학에서 말하는 수신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말하는 수신은 천자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인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인 데 반해, 묵자가 말하는 수신은 매우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생활 언리로 제시되고 있다.
(풀어쓴 이 생각) -26쪽

나라에는 일곱가지 재앙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첫째 성곽이나 해자(垓子, 방어를 위해 성벽 안에 판 연못)로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궁궐만 크게 짓고 치장하는 것이다.
둘째 적국의 군사가 국경에 이르렀는데도 사방에 있는 어느 이웃나라에서도 지원군을 보내 구해 주지 않는 것이다.
셋째 백성들의 힘을 쓸데 없는 일에 다 써버리고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 그리고 손님을 접대하느라 나라의 재물을 다 써버리는 것이다.
넷째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보전하려고 패거리를 지어 교제하는 데만 힘쓰고, 군주는 법을 함부로 고쳐서 신하를 질책하고, 신하는 군주가 두려워 감히 거스르지 못하는 것이다.
다섯째 군주가 자신을 스스로 지혜로우며 성인답다고 여겨서 나라 일을 다른 사람과 의논하지 않고,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여 나라를 수비하지 않으며, 이웃 나라들이 침략을 도모하는데도 이를 모르고 경계하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 군주가 믿는 사람들은 충성스럽지 않고, 충성스런 사람들은 군주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일곱째 생산된 식량이 백성들이 먹기에는 부족한 양이고, 대신들이 군주를 섬기기에는 능력이 부족하며, 백성들에게 상을 내려도 상을 받는 사람이 기뻐하지 않으며,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어도 벌이 합당하지 않아 죄지은 사람을 제압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라에 이러한 일곱 가지 재앙이 있으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아무리 성을 지키고 방어한다 해도 적이 공격해 오면 그 나라는 반드시 적에게 넘어갈 것이다. (七患 中)-28-29쪽

오늘날 성대한 장례와 삼년상을 주장하는 사람의 뜻대로 정치를 한다고 해보자. 군주와 부모, 아내, 큰 아들이 죽으면 모두 3년 동안 상을 치르게 되고, 그 다음으로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 형제, 작은 아들이 죽으면 모두 1년 동안 상을 치른다. 또한 가까운 친족이 죽으면 5개월, 고모, 누이, 조카, 외삼촌 등이 죽으면 3개월로 애도하고 슬퍼해야 하는 기간이 제도로 정해지게 된다. 그러면 결국 상을 당한 사람의 얼굴은 야위고 검어지며, 눈과 귀는 잘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고, 손과 발은 힘이 빠져 아무 일도 못하게 된다. 또한 높은 사대부가 상을 당했을 경우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일어설 수 있고, 지팡이를 짚어야 걸을 수 있게 된다. 이런 생활을 3년이나 해야 하니 배고픔에 시달리고 힘이 없어 무기력한 의존하는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겨울이면 추위를 견딜 수 없고, 여름이면 더위를 견딜 수 없어 병에 걸려 죽는 사람들의 수는 이루 헤어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럴 경우 출산을 위한 남녀 관계도 크게 방해받을 것이니 이렇게 하고도 인구를 늘리려는 것은 마치 사람을 칼날 위에 엎드려 있게 하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인구를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나라는 가난해지고 백성들의 수는 줄어들 것이며, 형벌과 행정은 문란해질 것이다. (節裝 中) -119-120쪽

기독교의 하느님 개념은 인간과 만물의 창조자로서의 하느님이자 인간을 주재하는 인간과 유사한 존재로서의 하느님, 즉 의인화된 하느님이다. 이에 비해 중국 고대의 하늘이란 천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창조자라는 측면은 비슷하나 인간과 유사한 존재는 아니다. 여기서 하늘은 생명력의 근원,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고 성장하고 죽는 과정 뿐만 아니라 사계절과 해와 달, 땅과 별의 운행을 주재하는 근본 원인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다만 유가에서는 인간이 하늘의 기운을 타고난 존재이므로 스스로를 갈고 닦으면 하늘과 통하는 존재, 즉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는데 비해 묵자는 하늘이 인간의 잘잘못을 가려 상벌을 내리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측면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풀어쓴 이 생각)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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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 맹자 : 유학의 변신은 무죄 지식인마을 3
강신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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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자체가 매우 신선한 시리즈다. 지식인 마을, 이라 하여 우리가 따로따로 알고 있는 철학자와 과학자들을, 관련이 있다 싶은 구석이 있는 녀석들만 묶어서 흐름을 파악한 책인데, 꽤나 깊이있고 동시에 재밌다. 깊이와 재미를 동시에 추구하기는 쉽지 않다. 시리즈 중 한 권을 읽고서 전체에 대해서 평가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공자&맹자> 만큼은 매우 잘 쓰여졌다고 봐야겠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기획한 '이지 고전' 시리즈를 몇 권 읽었더랬는데, 이지 고전 시리즈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고, 또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대학 입시 논술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나 혹은 사유의 연습 측면에서나 철학이 강조되고 있고, 강남의 어딘가에서는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나도 아직 읽지 못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힌다는 등 부작용의 목소리도 심하지만, 사유를 강조한다는 면에서는 바람직하다고 본다. 철학적 사유방식을 강조하다보니 아무래도 쓰이는 텍스트 또한 철학의 내용들이 많은데, 이에 따라서 많은 출판사들이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는 철학서들을 내놓는 작업이 활발하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이지고전' 시리즈와 김영사 기획의 '지식인 마을' 시리즈, 또 풀빛에서 계속 나오고 있는 '청소년 철학창고' 시리즈는 모두 이런 마인드에서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이와 더불어 철학의 대중화 작업들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딱딱하고 어려운 학술적인 번역서들이 아닌 일상의 친근한 언어로 풀어쓰는 작업도 함께 이뤄지고 있다.

  <공자&맹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가철학자의 대표자 공자와 맹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고, 그들과 함께 거론되는 순자와 한비자 등 과도 어떠한 점에서 다른지, 또 이들 이후의 신유학 주희는 공맹을 어떻게 읽는지, 나아가 한국 땅에 들어온 유학에 대해 정약용은 어떻게 읽어내는지 등 관련된 주제를 가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따라서 공맹으로 대표되는 유학의 흐름을 책 한권으로 파악하기가 수월하며, 더불어 칭찬하고픈 점은, 그것을 철학사상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호주제' '인성론' '강제된 도덕' 등의 테마를 가지고 다시 한번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철학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어떤 가르침과 도움을 주기 때문인데, 그런 점을 '이슈 지식' 에서 다뤄줌으로써 공맹철학의 의의를 살피고 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되 내용이 빈약하지 않고 깊이있으며 재미까지 안겨준다. 지식인과의 만남 - 지식ㅌ크, 테마토크 - 이슈 지식- 징검다리 로 이어지는 구성 또한 기획단계에서 신경을 많이 쓴 냄새가 난다. 비록 공자&맹자 한권 밖에 아직 보지 않았지만, 다른 시리즈 서적 또한 이런 구성으로 이뤄져있다면 한 권으로 꽤 많은 부분을 잡아낼 수 있으리라 본다.

* 풀빛에서 나온 '청소년 철학창고' 시리즈는 아주 단순하게 고전을 쉬운 말로 풀어썼다는 것 말고는 주목할 만한 부분이 없으며, 원문과 풀어쓴이의 생각글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아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원문이 꼼꼼하게 나와있는 정식 해설서를 보는 것이 더 낫겠다 싶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기획하고 삼성출판사에서 찍은 '이지고전' 시리즈는 한 철학자의 사상을 한눈에 쉽게 정리하고, 원문을 토대로 소개했다는 점에서 꽤 알차다. '지식인 마을' 시리즈보다 더 쉽게 쓰여졌고 쉽게 읽을 수 있다. '지식인 마을' 시리즈는 청소년이 읽기에는 너무 많은 내용을 깊이있게 다뤘다. 하지만 일반 교양철학서로는 매우 유익히라리 본다. 단순히 한 철학자의 삶과 사상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공자와 맹자가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분에게, 그것이 갖는 철학적 의미 내용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이에게 적합한 책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나온 '이지고전' 시리즈를 읽고 '지식인 마을' 시리즈를 읽는 것이 정리하기에 도움이 많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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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23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맹자가 읽었던 논어, 다산이 읽은 논어, 현대의 젊은 학자가 읽는 논어..
각자 살았던 시대와 관점이 다른 만큼 해석도 다르겠지요.


마늘빵 2007-03-23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읽는 이마다, 읽는 시대마다 각기 다르게 읽히겠지요. 그래서 <논어>를 직접 읽는것도, <논어>를 읽은 이들의 책을 읽는 것도 재밌습니다.
 
공자 & 맹자 : 유학의 변신은 무죄 지식인마을 3
강신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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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교육을 통해 주례(周禮)를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자연스럽게 익힐 것을 권고했다. 모든 사람이 서(恕)의 정신을 발휘할 것을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맹자에게 있어서 예는 결코 외부에 존재하는 학습 대상이 아니었으며 우리 마음의 본성에서 기원한 것이다. 즉 우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사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예라는 덕목이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맹자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유학의 이론을 내재화하고 규정하기 시작했다. -22쪽

분명히 공자는 양을 훔친 잘못보다는 효의 정신을 높이 사고있다. 이것은 그가 국가의 법질서를 지키는 것보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더 강조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그렇다고 공자가 법질서를 폐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의 생각은 훨씬 더 깊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도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자애로움으로 표현되는 가족질서가 회복된다면, 가족 안의 어떤 구성원도 법질서를 어기는 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결국 공자는 가족질서로 대변되는 예만 회복한다면 가족 내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들도 점차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셈이다. 이와는 달리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수단으로 형벌만을 긍정했던 한비자는 공자와는 대립되는 입장을 보인다. -32-33쪽

위대한 공자에게도 어찌할 수 없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던 셈이다. 그 하나가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피지배층, 즉 '소인'이라면 다른 하나는 육체적 관계를 통해 자식들을 낳는 '여자'다. 공자에게 있어 바로 이 소인과 여자가 서(恕)의 윤리원칙에 손쉽게 적용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타인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절대적 규범인 예의 바깥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57-58 쪽

배우기(學)만 하고 생각하지(思) 않으면 얻는 바가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의혹이 생길 것이다.
(논어, 위정편)

측은지심은 사람이 모두 가지고 있고, 수오지심은 사람이 모두 가지고 있고, 공경지심은 사람이 모두 가지고 있고, 시비지심은 사람이 모두 가지고 있다. 측은지심은 인이며, 수오지심은 의이며, 공경지심은 예이며, 시비지심은 지이다. 인의예지는 외부에서 나에게 새겨진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다만 그것을) 생각하고(思) 있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구하면 그것을 얻고 버리면 잃을 것이다.
(맹자, 고자편) -80쪽

흥미로운 것은 맹자가 예를 사단이라는 형식을 통해 본성의 영역 안에 포함시킨 것과는 달리, 순자는 그것을 인위의 영역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순자는 성악설을 통해 예를 외재성이라는 본래 자리로 되돌려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과거의 성인들은 주체적인 의지와 노력, 즉 인위에 의해 예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외부에 만들어져 있는 객관적 규범으로서의 예를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학습해야만 했다. 결국 순자가 본성의 영역과 인위의 영역을 구분했던 이유 역시 예의 외재성을 회복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00쪽

분명 맹자가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라고 했을 때의 '선'은 윤리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그러나 순자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고 했을 때의 '악'은 전혀 윤리적인 의미를 띠고 있지 않다. 맹자에 의하면 존경하는 어른을 만났을 때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사양지심'은 선한 감정이다. 당연히 이 감정의 밑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본성도 선한 것이다. 그러나 순자는 사양지심과 같은 마음을 기본적으로 인위를 통해 내면화된 감정이라고 보며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을 윤리적인 선악의 의미가 전혀 없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이해할 뿐이다.
순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본성을 눈이 볼 수 이쓴 것과 귀가 들을 수 있는 상황을 통해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본성이란 선악과는 관계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눈과 귀의 역량과 유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순자의 본성은 분명히 윤리적인 선악의 문제를 벗어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인성론을 비도덕적인 주장쯤으로 쉽게 깎아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100-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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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21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자는 모호한 '天命'대신 눈앞의 현실인 '효와 제'를 유가 윤리의 근간으로
내세웠지요.
맹자가 유가 윤리의 바탕으로서 인간의 본성을 사단으로 좀더 심화, 체계화했지만
공자와 맹자 두 분 공히 본성 본능등 자연적 질서를 범주가 다른 인간 윤리의 근거
로 삼았다는 점에서 유가의 윤리체계에 근원적으로 문제가 많은 셈이지요.
하지만 2500년전의 공자의 고심, 고뇌를 단순한 논리로 쉽게 볼 수는 없겠지요..

현대 동물학자들은 집단생활을 하는 고등동물의 '이타적 behavior'의 근원으로 그 동물에 내재된 본능을 지적하곤 합니다.
맹자의 성선설의 의미를 새겨볼만한 논리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