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의 서평을 써주세요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 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대필 작가의 독백
배홍진 지음 / 멘토프레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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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을 위안부 할머니들. 그들은 모두 꾸미지 않아도 이쁜 소녀에서 주름을 감출 수 없는 할머니가 되었고, 일부는 세상을 떴다. 이 책의 주인공인 강덕경 할머니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이다. 그러나, 그녀의 육신은 떠났을지 모르지만 그녀의 마음은 아직도 수요일이면 일본 대사관 앞을 지키고 있다. 마음 편히 가셨으면 좋으련만 일본의 제대로된 사과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한스럽고, 외로운 세월을 보내다 가셨다. 일본 정부뿐 아니라 한국 정부도, 그리고 그 분들의 아픔에 공감해주지는 않고 외면하는 사람들도 많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몰랐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와 그 분들의 이야기는 뉴스나 기사를 통해서 들어왔지만, 내가 아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신문이나 티비 뉴스 등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단편적인 사실, 딱 그만큼만 알고 있었다. 그 분들 개개인이 수십년 걸어온 삶길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었다. 어쩌면 티비 다큐멘터리나 인생극장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공개됐을지도 모르겠다. 연이 없었던지, 아니,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게 솔직할게다, 그 분들의 삶을 들여다 볼 기회는 없었다.

  몇 해 전 일본계 미국인(?) 하원 의원의 노력으로 위안부 사건이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미국의 행정부가 압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보도는 일본에게 상당한 부담감을 주었을 것이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운용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곳에 갇힌 여자들은 한국과 동남아 등의 여러 국가에서 강제로 차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후에도 일본은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故 강덕경 할머니. 할머니가 아닌 소녀다. 이제 막 세상을 배울 나이에, 일본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만 믿고 배를 탔고, 그곳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탈출을 시도, 알 수 없는 산길에서 한 일본 헌병대 군인에게 잡혀가 강간을 당했다. 그리고 우리가 '위안소'라고 부르는 그곳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매일밤 문앞에 길게 줄을 선 일본군인들을 제 몸으로 열 명 이상씩 받아내야 했다. 수치심이나 모멸감 등의 감정은 당장 중요하지 않았다. 몸이 너무 아팠다고 한다. 몸이 느끼는 고통은 마음이 느끼는 고통에 앞섰다. 당장 한 명이라도 덜 왔으면 하고 바랐다.  

  이 책은 강덕경 할머니 개인의 삶을 들여다본다.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떻게 위안부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을 드러내야 했는지, 그리고 왜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정확히는 강덕경 할머니를 포함한 위안부 할머니들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랐는지, 글을 읽을 줄 모르고, 글을 쓸 줄 모르는, 안다해도 더 이상 말할 수도, 쓸 수도 없는 할머니를 대신해, 한 대필 작가의 손을 빌려, 말한다. 대필 작가의 손으로 쓰여진 이 글을 통해 할머니의 삶은 당신의 바람대로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얼마 전,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 논란 때 뉴라이트 진영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향해 자발적 매춘을 한 창녀라는 망언을 한 적이 있다. 어디 이런 발언이 한두번 있었던 것도 아니라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소위 이름있는 학자라는 사람들이 이따위 막말이나 하고 다니니 할머니들 마음이 어땠을까. 국회의원들과 학자, 정부가 힘을 합쳐 일본에게 사죄를 요청해도 일본이 들어줄까 말까한 마당에 내부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일본이 어찌 한국 정부를, 위안부 할머니들을 우습게 보지 않을 수 있으랴. 소녀에서 할머니가 된 분들이 점점 나이를 먹고 늙어,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있는 시점에서, 이 분들의 작은 목소리는 너무나 외롭다. 현 정부에서는 더더욱.  

  에세이도 소설도 아닌 이 책의 형식은 처음엔 불편했다. 강덕경 할머니가 된 1인칭 시점에서 글을 써내려가다가도 어느 순간 작가 자신으로 돌아와 할머니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 작가의 말을 늘어놓는다. 각각의 꼭지들이 각각의 다른 서술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읽어야 그 불편함으로부터 조금 벗어날 수 있을 듯 하다. 또, 할머니가 경험한 상황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오히려 작가의 감정과 마음이 반영된 어떤 수식어들로 인해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할머니가 경험한 것들을 작가의 시각에서 한번 걸러내 전달해주는 듯 했달까.

  작가 배홍진의 첫 책이다. 이 책의 맨 뒤에는 무경계 문화 펄프 연구소 '츄리닝바람'의 또다른 구성원인 김경주 시인의 글이 실려있다. 배홍진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글이다. 주인공은 강덕경 할머니이지만, '유령 대필 작가'가 아닌 '실명 대필 작가'로 '배홍진'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첫 책이라는 점에서, 배홍진 또한 이 책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금껏 누군가를 대신해 글을 써왔고, 다른 대필 작가들처럼 제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 대필 작가가 끊임없이 일거리를 받아내기 위해선 '대필'했다는 사실을 드러내선 안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 사람의 인생을 '대필'했다. 그러나 이전과 차이점은 자신을 드러내고 공개적으로 대필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는 때로 유령 작가로 제 이름을 숨긴채 누군가를 대신해 글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으로 그는 작가로서 세상에 신고를 마친 셈이며, 앞으로 나올 그의 온전한 작품 <내 슬픈 상대성 이론 저편의 방콕>을 통해 '실명 대필 작가' 딱지 또한 뗄 것이다. 10년간 글을 써왔다고 한다. 글만을 위해서 삶을 살아온 사람 같다. 글이 안써지면 훌쩍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그의 예정작을 읽겠다고 약속할 순 없지만, 작가로서의 첫 작품 괜찮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 숙제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한 위안부 할머니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메세지를 전달한 점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
<봉선화가 필 무렵>(윤정모) - 위안부 할머니들의 그림과 함께 쓴 역사 동화
<위안부 리포트1>(정경아) - 위안부 할머니들의 체험을 비롯 피해 사실을 종합적으로 전달한다.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이명박 이하 행정부, 한나라당 모두, 뉴라이트, 경찰, 검찰, 조중동 기자들+조갑제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연민이란 타인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에 대한 우리들의 상상력이다. 동정이 계급적 의식을 전제한, 타인의 불행에 대한 제도적이고 고양된 슬픔의 베풂이라면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란 사실에 대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동정엔 실천이 따르지만 연민엔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연민은 사람을 주저앉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까닭에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는 비극적 이야기에 끊임없이 경도되고 싶어하는 자아의 상상력이다. 나는 지금 강덕경 할머니를 연민하고 있다."(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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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포 벤데타 - (정식 한국어판) 시공그래픽노블
앨런 무어 지음, 정지욱 옮김 / 시공사(만화) / 2008년 12월
구판절판


당신의 괴롭힘, 당신의 절망, 당신의 두려움, 그리고 당신의 애정을 담아 가꿔 온 편협한 사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횡령자, 사기꾼, 거짓말쟁이들이 끊임없이 등장하여 재앙과 같은 판단을 내리는 상황이 이어져 왔죠. 이것은 단순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누가 그들을 선택했습니까? 바로 당신들이었습니다! 당신이 이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당신을 대신해 판단할 권한을 준 것입니다. 물론 누구든지 한번쯤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치명적인 실수들을 수백 년 동안 되풀이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의도적인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 사악한 무능력자들을 장려했으며, 이들은 당신의 일과 인생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계속)-116-117쪽

(이어서) 당신은 그들의 지각없는 주문들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그들이 당신의 일터에 위험하고 증명되지 않은 기계들로 가득 채우는 걸 허락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저 "안 돼"라는 말만 하면 됐습니다. 당신에게 기개란 없습니다. 당신은 자존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관용을 베풀 것입니다. 난 앞으로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발전한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당신에게 2년이란 시간을 줄 것입니다. 만약 2년 후, 당신이 여전히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해고될 것입니다. -117-118쪽

침묵하는 대다수에 의존하는 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이비. 고요함은 부서지기 쉬운 법이니까... 한번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그 고요함은 사라지지. 하지만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고 지리멸렬해. 이 기회를 틈타 몇몇은 항의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저 누군가가 황야에서 소리를 지르는 꼴과 같은 거야. 소음은 그 앞에 오는 고요함과 연관돼 있어. 그 고요함이 절대적일수록 뇌성은 더욱 충격적으로 들리지. 우리의 주인은 민중의 소리를 몇 세대 동안이나 듣지 못했어, 이비...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기억하고 시은 것보다 훨씬 더 큰 소리지. -193-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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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 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대필 작가의 독백
배홍진 지음 / 멘토프레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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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이란 타인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에 대한 우리들의 상상력이다. 동정이 계급적 의식을 전제한, 타인의 불행에 대한 제도적이고 고양된 슬픔의 베풂이라면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란 사실에 대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동정엔 실천이 따르지만 연민엔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연민은 사람을 주저앉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까닭에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는 비극적 이야기에 끊임없이 경도되고 싶어하는 자아의 상상력이다. -218쪽

타인을 연민하는 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 연민은 가장 서글픈 상상력이다. 내가 아닌 것들을 이해하는 동안 나는 따뜻해져 간다. 그리고 나는 이 따뜻함을, 내가 이해한 모든 것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내가 이해한 타인의 슬픔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그건 자기 연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연민하고, 타인의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을 연민하며, 나와 연민과 타인에 대한 나의 연민 사이에 있는 어떤 벽을 슬퍼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같은 슬픔으로 괴로워하지만, 우리가 서로 똑같은 어떤 슬픔을 가지고 있다 해도 서로에게 보여줄 순 없다. 우린 우리의 슬픔으로 타인의 슬픔을 상상한다. 같은 것이지만, 우린 같다고 상상해야 타인의 슬픔을 겨우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슬픔은 모두 다르다. 난 이렇게 슬픈데, 넌 왜 저렇게 슬픈가? 내 안에 너의 존재에 대한 슬픔이 있어도 넌 왜 모르고 어깨를 스쳐가는가? 내가 상상한 슬픔이 너의 슬픔도, 나의 슬픔도 아니라면 그건 어디에서 온 슬픔인가? 나는 지금 너를 연민하고 있다. -218-219쪽

70년을 살아온 사람이 하나의 행동을 이해받기 위해 70년의 삶을 단 1초 단위의 세밀함까지 모두 설명할 수 있다면 그는 절대 오해받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이해란 결코 단순히 성격에 대한 인정이거나 직관, 분석에 의지하는 판단, 같은 슬픔을 통해 유추된 슬픔에 대한 연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해, 그 사람이 왜 그 행동을 했고 고통을 받았는가에 대한 정확한 사실적 앎(상상적 사실이 아니라)으로부터 생기는 슬픔에 대한 공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살아온 70년의 삶을 모두 설명하는 동안 또다시 70년이 흐른다. 그는 무엇을 이해받았는가? -219쪽

시간이란 누명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몸을 빌리고 나와 우리가 인식의 탈을 쓰고 견뎌야 하는 누명 같은 것이다. 그 시간으로부터 자신의 생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 인간은 순간의 밀도를 가지고 발버둥을 치면서 자신의 검진록을 만들고 살아간다. 시간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 어쩌면 오해는 조금 더 우리 곁에 살아야 할지 모른다.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물음, 왜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왜 우리는 헤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아련한 질문, 너는 왜 아직도 거기서 가혹한 생태계고 나는 왜 여기서 아직도 참혹한 자연인가에 대한 술회, 너의 눈 속에 담긴 연서들, 너의 종에 살림을 차렸던 수많은 풍경들, 가혹한 삶이여, 너에게 시간이란 누명에 다름 아니다. (김경주 시인 발문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中)-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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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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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약간 들어있습니다.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책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여기 밑줄긋기를 읽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책을 읽을 계획이 없다면, 그러나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읽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0쪽

그들의 삶이란 항상 똑같아요, 왜죠, 생각해 보세요, 그들의 삶이란 항상 똑같아요, 다른 게 없죠, 나타났다가, 얘기하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사진사들에게 미소를 짓고, 항상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죠, 우리 모두가 다 그렇죠,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이나 저나, 모든 사람들은, 이곳 저곳에 나타나, 얘기를 하기도 하고, 집을 나섰다간 그곳으로 돌아가죠, 가끔씩 웃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이죠, 우리 모두가 유명인이 될 수는 없죠, 다행한 일이네요, 선생님의 수집이 등기소만한 크기가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더 클 수도 있죠, 등기소는 단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고,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까요, 우리가 결혼을 하든, 이혼을 하든, 홀몸이 되든, 등기소에선 그런 것엔 관심도 없어요, 그런 일들 가운데서 우리가 행복하든 그렇지 않든, 행복과 불행은 마치 유명인들과 같은 거예요, 인기가 왔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보다 더 끔찍한 사실은, 등기소에선 우리가 누군지조차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들에게 우리는 몇 개의 글자로 된 이름과 날짜 외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206-207쪽

완전한 죽음은 망각의 마지막 열매이고, 삶이란 기억 속에서 영원할 것입니다. -221쪽

공동묘지란 아무 작은 공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도시가 형성되면서 그 주위의 자그마한 공간을 차지하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행히도 그 공간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엄청난 면적을 차지하게 되었다. 예전엔 그 주위를 빙 돌아가며 담을 쌓았지만,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담 안쪽의 한정된 공간 속에 죽은 자들의 치열한 자리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마치 등기소의 경우처럼, 어쩔 수 없이 담을 허물고 조금 더 넓게 새로운 담을 쌓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사백 년 전, 묘지를 담당했던 한 관리인의 머릿속에, 거리로 향하는 담을 제외하고 다른 방향의 담들은 모두 제거해버리자는 생각이 떠올랐었다, 그것이 담 안쪽과 바깥쪽의 감성적 관계를 새롭게 환기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는 변론했던 것이었다. 담이 가지는 의미가, 비록 위생적인 면이나 장식적인 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저 빨리,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잊혀지게 하는 효과 외엔 그다지 쓸모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225쪽

생사에 관해 신고를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 애절한 망각으로 인해 제때에 사실을 알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동묘지는 등기소보다 더 빨리 죽은 자들의 이름을 알고 있게 되었으므로, 이 중앙 공동묘지의 또 다른 명칭은 모든 이름들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렇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지만, 등기소에서 그 두 단어란 마치 보자기 같은 것으로, 그 속에서 모든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산 자든 죽은 자든, 공동묘지의 경우엔, 종착지라는 그 본질적 의미로 언제나 사망자의 이름이 적혀 있어야만 했다.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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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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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약간 들어있습니다.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책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여기 밑줄긋기를 읽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책을 읽을 계획이 없다면, 그러나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읽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0쪽

인간이 가끔 두려움 때문에 또 가끔 자신의 이익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 가끔씩은 거짓말이 진실을 방어할 유일한 수단임을 적시에 깨닫는 바람에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61쪽

테러 사흘 뒤인 이른 아침,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굳은 얼굴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백기를 들었다. 모두 왼팔에 하얀 완장을 둘렀다. 장례 예절에 밝은 사람들이 흰색은 애도의 상징이 될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 -175쪽

열한 시가 되자 광장은 이미 가득 찼다. 그러나 군중의 커다란 숨소리, 공기가 허파를 들락거리며 내는 둔한 속삭임만 들릴 뿐이었다. 공기는 들락거리며 이 살아 있는 존재들의 피에 산소를 먹이고 있었다.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그러다 마침내 갑자기, 이 말은 끝을 맺지 않겠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생존자들에게 그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175쪽

시위대는 대통령궁으로 간다던데요. 조직한 사람들한테 물어보시오. 그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누굽니까. 모두이기도 하고 아무도 아니기도 하고 그런 것 같소. 틀림없이 지도자가 있겠지요. 이런 운동은 저절로 조직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발적인 세대는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이런 규모의 대중 행동인 경우에는, 지금까지는 그랬지, 맞소, 그러니까 백지투표 운동이 자발적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그런 추론을 하다니 언어도단이로군. 이 일과 관련하여 지금 말씀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아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때가 늘 오기 마련이지, (중략) 놀라운 건 아무런 외침도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세 소리 하나, 타도하라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군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구호 하나 없습니다, 그냥 등뼈까지 떨리게 만드는 이 위협적인 전율뿐입니다. -183-184쪽

이자들은 시위도 제대로 할 줄 모르네, 그들은 말했다, 돌이라도 몇 개 던져야 하는 거 아냐, 대통령 인형이라도 태우고, 창문 좀 몇 개 깨고, 낡은 혁명가도 부르고, 자신들이 방금 묻어버린 사람들처럼 죽은 몸이 아니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거 아냐, 시위는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람들이 도착해서 광장을 메웠다. 그들은 말없이 삼십 분 동안 눈앞의 대통령궁을 바라보며 서 있더니, 이윽고 해산했다. 어떤 사람들은 걸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갔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씨 좋아 보잉는 낯선 사람에게서 차를 얻어타기도 했다. 그렇게 다들 집에 갔다. -184-185쪽

인간 본성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여서 이들 사이에서도 이기적인 환상, 거짓된 방심, 헤픈 감상을 향한 변덕스러운 호소, 기만적으로 유혹적인 조작 등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지만, 감탄할 만한 이타심의 사례도 있었다. 우리가 언제나 이런 식으로 훌륭한 포기를 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우리도 창조라는 불멸의 기획에서 우리의 작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유지하게 해주는 그런 사례들 말이다. -186-187쪽

진실을 말하면 안 된다는 것뿐 아니라, 필요하면 진실이 하나하나 거짓과 일치하게 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사물의 틀린 면과 옳은 면이 늘 아주 자연스럽게 함께 발견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258쪽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배운 바로는 정부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말도 안 된다고 판단한 것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외려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이용해서 양심을 무디게 하고 이성을 파괴하오.
-377쪽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377쪽

검은 색과 빨간색으로 된 표제만 보더라도 각각의 신문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우리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조국의 적들의 또 한 번의 전복 행위, 누가 복사기를 돌렸는가, 허위 정보의 위험, 누가 그 복사 값을 냈는가.-419쪽

<옮긴이의 말>에서 옮긴이가 인용한 주제 사라마구의 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맹목적으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 시대에,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 꿈꾸던 것과는 달리 돈도 많이 벌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를 만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그들도 열여덟 살 때는 단지 유행의 빛나는 횃불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모가 지탱하는 체제를 타도하고 그것을 끝내 우애에 기초한 낙원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한 대담한 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온건한 보수주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로 몸을 덥히고 근육을 풀었다. 따라서 그들이 과거 혁명에 애착을 갖던 것처럼 지금 애착을 갖고 있는 그 신념과 관행들은 시간이 흐르면 가장 외설적이고 반동적인 종류의 순수한 자기중심주의로 변해갈 것이다. 예의를 약간 걷어내고 말을 하자면, 이런 남자와 이런 여자들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매일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라는 가래로 과거의 자기 모습이라는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 -4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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