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 김혜니 교수 에센스 세계문학 8
단테 지음, 김혜니 옮김 / 타임기획 / 1999년 10월
평점 :
절판



 

 제목만 말해도 누구나 다 아는 고전 중의 고전. 단테의 <신곡>이다. 단테의 <신곡>은 수많은 번역서들이 나왔지만 내가 읽은 단테의 <신곡>은 김혜니 교수의 에센스 세계문학으로 축약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이런 고전들의 축약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축약본들을 읽는 것은 나의 직업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 그러나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완역본을 읽겠다는 마음은 언제나 가지고 있다.

 두껍고 어려운 고전인 <신곡>의 축약본인지라 이 책은 중고등학생을 독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물론 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포함하여. 친절하게도 축약된 번역 뒤에 '작품 해설과 독서 토론'이라는 부분을 상당 분량 첨가함으로써 이 책을 가지고 어떻게 토론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지도할 것인지에 대한 매뉴얼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는 사실. 이는 <신곡>을 가지고 아이들을 지도해야하는 선생님 입장에서는 지도준비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해준다.

 단테의 본래 이름은 알리기에로 드란테였는데, 드란테라는 세례명이 단테로 변해버려 이렇게 불리고 있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총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에서 단테가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지옥편과 연옥편에서는 단테가 당시에 존경하는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단테의 안내자 역할을 하며, '천국편'에서는 단테가 사랑했던 여인 하지만 연이 이어지지 않았던 여인 '베아트리체'가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본래 <신곡>은 장문의 시이며 결코 소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시가 아닌 소설처럼 읽혀지는 것은 그 시가 장문이라는 점, 그리고 우리나라말로 번역되면서 그 시적인 묘미가 한층 떨어졌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원어로 읽었을 때 어떤 시적인 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글로 번역된 이 책을 읽는 우리는 지루하고 따분할 수 밖에 없다. 내용이 다 한결같이 재미없고 딱딱하다. 그래서 책이 얇음에도 불구하고 참 오랫동안 읽은 것 같다.

 단테의 <신곡>은 본래 'comedy'라는 제목을 갖고 태어났다. 즉 희곡이라는 의미였는데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가 이 앞에 'divine'을 붙이면서 '신곡'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성한 희곡'. 단테의 <신곡>이 희곡인 이유는 지옥과 연옥을 거쳐 결국 천국에 도달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지옥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천국에 이른다.

 단테는 <신곡>을 왜 썼을까? 단테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기도 하고, 베아트리체 때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베아트리체 때문이라는 이유는 순수한 이유라기 보다는 단테가 <신곡>을 쓰게 된 동력이 됐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8살인가에 만난 호기심을 갖게 됐고, 16살인가에 다시 만나 사랑에 빠졌고, 베아트리체는 다른 남자에게 갔고 24살인가에 죽었다. 베아트리체만을 사랑했던 단테는 죽을 때까지도 그녀를 사랑했었나보다.

 단테가 <신곡>에서 말하려는 바는 까발리고 말하면 이런 것 같다. "믿어라 믿을지어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리라. 회개하라."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단테는 이 책의 지옥과 연옥을 통해 사후세계의 무서움을 알려주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믿을 것을 종용하는 것이다. 이는 비기독교신자이고 기독교의 이런 부분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나의 편협된 시각인지도 모르지만. 

 단테는 지옥과 연옥에 별의 별 인간을 다 집어넣는다. 폭식을 한 인간, 자살한 자, 타인을 해한 자, 고리대금업자, 위선자, 이간질 한 자 등등등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단테가 지옥의 제일 위에 올린 사람이 '주께 충성도 반역도 하지 않은 자들'과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었다는 사실. 이 점은 이내 못마땅하면서도 당시 단테가 살던 시대를 생각해보면 그런 분위기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이 딱딱하고 재미없는 책을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나중에 완역된 책을 다시 읽으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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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5-05-3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해문집인가 에서 이번에 새로 나왔다는데 한번 읽고 좋은지 말씀해 주세요. 재미있다 하시면 한번 읽어볼까 합니다.

마늘빵 2005-05-3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지난준가 신문에서 봤어요. 기행문 형식으로 풀어썼다구 ^^; 기회되면 볼까 해요.
 



 

 

 

 

 


 

 

 

 

반드시 꼭 봐야할 영화였다. 그래도 이제야 본 것은 다행이었다.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꼭 봐야할 영화.

 이 영화가 개봉했던 당시 분명히 이 영화를 봐야겠다 하고 마음 속으로 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사정으로- 그것은 아마도 이 영화와 동시에 개봉되었단 다른 로맨스 영화에 눈길이 더 쏠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지금 그 영화가 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 그냥 지나치게 된 영화다.

 '길 영거'라는 우리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무명감독이 만든 영화이지만 주연 '제니퍼 러브 휴잇'이라는 문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시선을  끌만한 영화였다. 제니퍼 러브  휴잇이 출연한 영화들은 대개 성공을 거두었다. <시스터 액트>도 그러했고,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도 그러했고, <하트브레이커스>나 <턱시도>, 그리고 최근에 본 <어바웃 러브>까지 그녀가 출연한 영화의 제목들은 모두 익숙하다. 특히나 나는 그녀가 지금 언급한 영화들에 출연했는지조차 몰랐는데 이는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데 비해 배우들에 무관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각각의 영화들에서 보여준 이미지들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지 얼마 안 된 <어바웃 러브>에서 조차도 그녀가 나왔는지를 나중에 알았으니.

 그녀에 대해 한 마디 더 하자면 79년생으로 나와 동갑내기인 이 여자는 참 일찌감치도 성공의 문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영화계에서도 CF계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으며, 실제로 음반을 낼 만큼 뛰어난 가창력을 소유하고 있기까지 하니 성공할 만도 하다. <이프온리>에서는 마지막에 그녀가 직접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영화를 보면서 설마 실제로 부르는 거겠어? 했는데 진짜였다.

 '사랑'이라는 같은 주제를 놓고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영화들을 접해왔고 앞으로도 이 주제를 가지고 무수히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무리 퍼내어도 바닥이 나지 않는 주제이고 아무리 접해도 언제나 새롭고 참신한 주제가 사랑이다. 나이 어릴 때, 성년이 되어서, 사회에 발을 디디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동안에 같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놓고도 각각의 시기마다 다른 느낌을 품게 된다. 시간의 흐름뿐만이 아니라 만남, 설레임, 익숙함, 갈등, 이별로 이어지는 사랑의 시작과 끝-사랑에 시작과 끝이 있는지는 더 이야기해봐야할 거리이지만- 의 시점에서도 같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놓고도 사랑의 대상이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느낌은 다르다. 
 
 성공한 젊은 비지니스맨 이안과 이안을 따라 미국에서 영국으로 와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졸업을 맞이하는 사만다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하지만 둘 사이엔 뭔가 문제가 있다. 이안은 언제나 사만다보다 일이 먼저이고, 사만다는 이런 점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사만다의 졸업식 연주회 날짜도 까먹고, 사만다를 위해 부모님을 뵈러 미국에 갈 생각도 시간도 없으며, 졸업선물을 해줄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둘의 일상 속에서 이안은 언제나 사만다를 소외되게 만든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라는 류시화 시인의 시집 제목은 이런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해준다. 함께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리워하는 사만다. 

 졸업연주회가 끝나고 밥을 먹고 이안에서 이런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해버린 사만다는 택시를 타고 훌쩍 떠난다. 미국으로 가려는 셈. 하지만 이안은 함께 택시를 타지 않는 것을 선택했고, 그 결과는 사만다의 죽음이다.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이안은 그때서야 자신이 사만다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를 이안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 이런 자고 일어나니 사만다가 내 옆에? 이안을 놀라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사만다가 살아있고 나는 꿈을 꾼 것인가? 그러나 너무 생생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지만 이상하게도 사만다의 죽음 이전의 상황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이안은 사만다의 죽음을 막기 위해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려하지만 아무리 피해도 결국 이전과 같은 일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안은 깨닫게 된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 것은 나에게 사랑을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는. 그리고 운명을 받아들이고 마지막 순간. 사만다와 함께 택시를 타고 교통사고는 난다. 하지만 정면충돌한 것은 이안이고 사만다는 이안의 품에서 살아남았다.

 슬픔은 이안에서 사만다에게로 옮겨갔지만 적어도 이안은 저 세상에서 행복하다. 나중에서야 사만다는 깨닫는다. 이안이 이런 결과가 올 것을 짐작했었다는 사실을. 이안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며 사랑하는 사람을 지켰고 이로써 이안이 사만다를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증명되었다. 물론 이는 이안에게 주어진 기회를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었지만.

 나는 이안와 참 비슷한 놈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사랑은 다른 것과 함께 순위를 매길 수 없는 것이라고 되뇌이곤 하지만 솔직히 다 드러내고 말하자면 나는 나의 자아실현이 첫번째이고, 사랑은 그 다음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만다와 같은 소외감을 느낄 것이며 나 또한 이를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하지 않고 있다. 사만다의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사건이 벌어지지 않아서일까.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사랑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할까. 그건 모르겠다.

 단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순위가 내게 있어 아직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또 내가 그녀에게 미안해한다는 사실. 그것뿐.


 아래는 제니퍼 러브 휴잇이 영화 속에서 졸업연주회 마지막에 직접 부른 노래이다.

  < Love will show you Everything >

Today, today I bet my life
You have no idea
What I feel inside
Don't, be afraid to let it show
For you'll never know
If you let it hide

I love you
You love me
Take this gift and don't ask why
Cause if you will let me
I'll take what scares you
Hold it deep inside
And if you ask me why I'm with you
And why I'll never
Leave
Love will show you everything

One day
When youth is just a memory
I know you'll be standing right next to me

I love you
You love me
Take this gift and don't ask why
Cause if you will let me
I'll take what scares you
Hold it deep inside
And if you ask me why I'm with you
And why I'll never
Leave
My love will show you everything
My love will show you everything
My love will show you everything
My love will show you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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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워지고 여름이 다가오다 보니 이제 서서히 공포영화들이 속속 개봉하고 있다. 올 여름 공포영화물의 시작을 알리는 <그루지>는 사실 새로운 영화는 아니다. 일본의 공포영화 <주온> 1편과 2편의 미국 리메이크작인 <그루지>는 이미 <주온>시리즈를 본 사람에겐 익숙한 장면들이다. 단지 달라진 것은 주연인 일본인이 아닌 미국인이라는 점만 다를 뿐.

 이제 더 이상 미국식 공포물은 우리에게 식상하다. 매번 똑같이 등장하는 잔인하고 엽기적인 살인마들. 미국의 공포영화를 보면서 으례 이런 장면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이런 시점에서 일본의 공포영화가 안겨주는 그 섬뜩함은 참신하다. 미국의 공포영화가 단 하나의 괴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오로지 그에 의한 공포를 조성한다면 일본의 공포영화는 괴물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처해진 상황이 안겨주는 섬뜩함을 공포의 요인으로 삼고 있다.

 이미 일본의 또다른 공포영화 <링>이 미국식으로 리메이크된지 오래고 곧 리메이크작 <링2>가 다시 나온다. 그리고 <그루지>는 단지 일본 공포영화 <주온>을 이름만 바꿔 내놓은 작품이다. '주온'은 본래 '죽음 사람의 저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고, '그루지'는 '원한'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뜻은 그대로 지닌채 단어만 교체한 것이다. 이는 어쩌면 영화 <그루지>가 <주온>의 재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관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상술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나 역시 그 사실을 모르고 봤으니.

 <그루지>가 만들어내는 공포는 <주온>이 만들어내는 공포와 별반 다르지 않으며, 이미 <주온>을 봤지만 내가 <주온>을 봤을 때 느꼈던 그런 섬뜩함은 <그루지>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영화를 두번 보면 처음의 느낌이 반감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루지>를 볼 때는 그렇지는 않았다. 단지 이 영화 주온이랑 비슷하네? 재탕이구나! 라는 생각만 가졌을 뿐. 그런 점에서 <주온>을 재탕한 <그루지>는 나름대로 제대로 리메이크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내가 <주온>을 본지 오래됐고 이를 전부 기억해내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무감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주온>을 이미 본 사람에게 영화표 값을 지불하고 다시 보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주온>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봐도 무방할 듯. 아니 어쩌면 이 영화는 <주온>을 보고 푹 빠져들었던 사람들이 봐야할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줄거리와 공포가 목적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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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5-06-08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온 받는데, 제가 3초 기억력? 뭐 그런 비슷한거라서
그루지에서 '아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봤는데 ..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야 주온을 리메이크한 걸 알았다는 ;
근데 정말정말 무서웠어요! 역시 이런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제맛 ! +_+

마늘빵 2005-06-0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그쵸 주온을 기억못한다면 재밌는 영화죠. 전 봤던 장면이 또 나와서 다음엔 이렇겠구나 하고 예상을 하고 보니깐 조금 진부하더라구요.
 

 

 

 

 

"전 세계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그것! 섹스" 라는 포스터 문구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시선을 집중시켰던 영화 <킨제이 보고서>. 하지만 아무리 포스터 문구로 시선을 끈다해도 영화의 본질을 알아버린 예비관객들은 다른 영화로 눈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보고서'를 다루고 있으며 그 대상이 비록 '섹스'가 됐을지라도 영화 자체가 지루하고 따분할 거라는 인상을 받은 예비관객들은 이 영화로 몰리지 않았다. 상영관을 잡지 못한 것도 영화의 상업적 성공의 패배요인중의 하나이다. 나는 서울극장에서 영화를 봤지만 그곳에서조차도 아주 작은 상영관 하나만을 '킨제이'에게 할애하고 있었다.

영화는 말 그대로 섹스를 다루고 있다. 모든 정신분석을 성적인 것과 관련지어 해석한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세상을 떠나고 나치 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성 연구의 주도권이 독일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때 성 연구에 있어 달라진 점이 있다면 미국에서는 표본조사를 토대로 한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는 특정인의 사례연구를 중심으로 성 연구를 했지만 미국에서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면담을 하거나 설문을 실시하는 등의 표본조사를 통해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한 방식을 도입해 최초로 성과를 거둔 인물이 바로 킨제이 박사이다.

그는 미국 전역에서 1만 8천명을 면접해서 1만 2천건의 자료를 가지고 두 권의 책을 냈는데 하나는 남자의 성행위, 다른 하나는 여자의 성행위에 대한 책이었다.

이 책이 파장을 일으킨 것은 표본조사의 결과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개 정상적인 이성애자 부부 사이에서 정상체위만을 하려니 생각했던 기존의 고정관념이 여지없이 깨져버린 것이다.

동성애를 경험한 남성이 37%나 있었고, 여성의 절반이 혼전성교를 경험했으며, 26%의 유부녀가 간통경험이 있었다. 또한 여성의 오르가슴에 있어서도 남자가 한번 경험하는 동안 여자가 10여차례 경험한 사례도 있었다.

킨제이는 이 책으로 하룻밤만에 일약 스타가 되어있었고 이후 온갖 잡지의 표지모델을 차지했으며,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외면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것이 부끄러워서 혹은 이 보고서로 인해 많은 비정상적인(?) 성행위가 난무할까봐 두려워서 사실을 부정하고 킨제이를 비난하기에 이른 것이다.

킨제이 보고서가 나오기까지 킨제이는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았지만 이후로 록펠러는 지원을 끊었고 결국 자금조달의 어려움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던 킨제이는 2년후 사망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킨제이 보고서>가 정말 사실일까? 믿어도 되는 걸까? 그 시대의 많은 미국인들이 지금의 나와 같은 생각을 품었을 것이고 그래서 킨제이를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믿을만한 것인가? 킨제이 보고서는 유례없는 대규모의 사람들의 면접과 설문을 통해 얻어낸 결과이므로 믿어도 될 듯 싶다. 하지만 킨제이 보고서의 표본연구 대상자가 1만 8천명이라는 점은 여전히 미국 전역의 인구를 대표하기에는 부족한 수치인 듯 하다. 또 면접에 응한 사람들과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만약 면접에 응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점도 하나의 의문거리다. 정상적인(?) 성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아닌 특별한 성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면접에 응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문.

감독이 <킨제이 보고서>를 영화로 만든 이유는 뭐였을까? 오래된 보고서이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보고서이겠지만 일반인들은 아직 이런 보고서를 접해본 사실이 없고 그래서 당시에 충격적이었던 이 보고서의 내용을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감독은 충분히 성과를 달성했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킨제이 보고서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므로.

<킨제이 보고서>는 정말 놀랍다. 하지만 킨제이 보고서가 빠뜨리고 있는 점이 있다면 섹스를 사랑과 분리했다는 점이다. 대개의 섹스는 사랑을 전제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킨제이는 철저하게 섹스를 사랑과 분리했고, 사랑과 연관지어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순전히 섹스만을 가지고 보고서를 작성했을 뿐. 물론 보고서상의 실수는 아니다.

영화 속에서도 킨제이는 자신의 젊은 동료와 동성애를 갖고, 젊은 동료는 또다시 킨제이의 부인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킨제이 또한 이를 허락한다. 이런 엽기적인 일이. 그리고 그 젊은 동료는 또다시 다른 동료의 부인과 관계를 맺고 결국 그 둘은 사랑에 빠져버린다. 이후 결과는 불보듯 뻔한 일. 부인의 남편과 젊은 동료는 서로 치고박고 싸우게 된다. 킨제이가 사랑을 제외하고 섹스를 연구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사랑없는 섹스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또한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린 것이다. 오히려 사랑없이 섹스를 하는 경우보다 사랑해서 섹스를 하는 경우가 더 많을텐데도 말이다. 이건 순전히 나의 생각.

나는 성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고, 성관념이 개방적이 되어버린 이 시대를 살고 있지만 킨제이 보고서의 사회적 파장에 대해서는 당시에 킨제이를 비난했던 사람과 비슷한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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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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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클베리핀. 굳이 미국인이 아니더라도 이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허클베리핀은 '모험'을 상징하는 인물의 일반명사가 되어버렸다.

 <허클베리핀의 모험>은 모험을 상징하는 다른 문학서 <톰 소여의 모험>과 함께 언급되곤 한다. 실제 <허클베리핀의 모험>에는 톰 소여가 중심인물로서 등장하고 <톰 소여의 모험>에도 역시 허클베리핀이 그의 친한 친구로서 등장한다. 두 소설은 어느 하나만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허클베리핀의 모험>은 수많은 번역서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 언급하고 있는 1998년에 민음사에서 나온 이 번역서는 이전의 다른 번역서들과 달리 <허클베리핀의 모험> 완역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 가을 로스엔젤레스의 한 다락방에서 우연히 발견된 마크 트웨인의 친필원고. 이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허클베리핀의 모험> 보다 100페이지 가량이 더 첨가되었으며 질적으로도 더 우수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민음사에서 번역한 이 책은 분량이 매우 두껍다. 해설을 빼고만도 600페이지에 달한다. 그래서 어쩌면 청소년추천도서로 소개되곤 하지만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인해 쉽게 읽히는 내용과 상관없이 청소년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책인지도 모르겠다.

 작가 마크 트웨인은 어릴적부터 인쇄소 견습 식자공, 저널리스트, 수로 안내인, 출판업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미시시피 강 주변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마크 트웨인은 이 소설뿐 아니라 <톰 소여의 모험>과 <미시시피강의 추억>에서도 미시시피강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으며 후에 이 세 소설을 일컬어 미시시피 3부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미시시피강을 배경으로 장난꾸러기 허클베리핀이 주정뱅이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있을 무렵 만난 흑인노예 짐과 함께 겪는 모험담을 담고 있다. 소설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쉴새없이 펼쳐지는 구조로 되어있으며, 각각의 에피소드들에서 그리고 소설 전체에서 작가는 자연과 문명을 대립시키고, 문명을 비판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문명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타락한 모습들을 아버지, 공작, 왕 등의 캐릭터들을 통해 보여주고 헉과 짐, 톰 소여는 이들을 조롱하는 대립되는 인물로 묘사된다. 헉, 짐, 톰이 다른 이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조롱하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작가는 재미를 부각시키려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진중권씨가 어디선가 신랄한 비판보다는 웃음을 자아내는 조롱이 더 효과적인 비판 방법이라고 말했듯 마크 트웨인의 문명을 향한 조롱은 매우 유쾌하다.

 쉽고 재미있는 내용임에도 600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분량은 역시 내게도 부담스러웠고 이 책을 읽는데 이주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것은 시간의 부족과 여유없음, 게으름의 조합으로 인한 결과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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