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그다지 화목한 가정이 아니다. 활화산이었던 적은 아주 가끔 한 두번이었지만, 언제나 휴화산이었다. 지금도 우리 가족은 휴화산이다. 아버지는 현재 우리집에 거주하고 계시지 않다. 일종의 별거인데, 합의된 별거도 아니고, 이혼은 더더욱 아니고, 두분이 크게 다투거나 한 것도 아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좋아하지 않으신다. 싫어하신다. 내가 볼 때 두분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너무나 다르다 두분은.

  이분법적이긴 하지만, 아버지를 이상주의자로 볼 수 있다면, 어머니는 현실주의자다. 아버지는 현실적인 것들에 별로 관심이 없으시다. 그리고 세상이 변해가는 과정을 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분이다. 한 예로 오랫만에 어제 만나 함께 버스를 타고 동생 학교에 가는데, 내릴 때 버스단말기에 카드를 찍었더니,

"그거 찍어야되니?"
"어 그럼! 찍어야지. 안찍으면 나중에 돈 더 나와."

아 이런. 버스카드 바뀐지가 언젠데 카드만 들고 다니시면서 탈 때만 찍고 내릴 때 안찍으신단 말이냐. 이제부터는 찍고 다니시겠지. 그렇담 환승하는 법에 대해서도 모르고 계신거 아닌가? 흠. 하나의 작은 예를 들었지만 아버지는 이렇다. 이러한 세상의 작은 변화들에 무관심하고, 그냥 나중에 알게 되면 알게 되는거고 아니면 말고. 좋게 말하면 세속의 이치를 떠나있다고 볼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무감각하신거다.

반면 어머니는 세상의 작은 변화들을 모두 체험하시고 때로는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나도 현실에 좀 무감각한 편이다. 안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유전인가? 그래서 어머니를 통해 몰랐던 것에 대해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동생은 어머니를 닮았다. 얘는 별거 다 안다. 영화 싸게 보는 법 등 돈과 관련해서 싸게 뭔가를 할 수 있는, 아니면 같은 값에 혜택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그런 정보들에 민감하다. 얼마전 내가 우리은행에 가서 신용카드를 만든 것도, 얘기 거기서 체크카드를 만들어 CGV 영화관 1500원 할인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수십년을 사셨다. 초창기 신혼 때 몇년을 제외하고는 계속 이런 상태로 사셨다. 두분 다 많이 늙으셨고 타협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봐도 타협 불가능이다. 그러니 서로를 인정하고 그냥 싫은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아버지는 월세비와 전화세만을 매달 갖다주러 한달에 한번 오시고, 어머니는 가정경제를 이끌어가셔야한다. 그런데 어머니도 늙으셨는지라 이제 어디 불러주는데도 없다. 얼마전까지는 슈퍼마켓 매장에서 카운터를 보셨지만 그곳 사정도 안좋아 그만두신지 꽤 됐다. 얼마 받지도 못하면서 고생만 하시는데 지금 우리집은 이제 먹고 살 돈이 없다. 동생은 아직 직장을 잡지 못했고, 나도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지라, 생활비를 댄다는 것은 힘들다. 무슨 밑천이 있어서 조그만 포장마차라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면 그거라도 할텐데 그런 정도의 여력도 없다. 하긴 어머니도 넉넉치 않은 우리집이지만 밖에 나갔을 때 우리가 못사는 집인 티를 내지 않으려고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했던 터라 그런 일을 하기는 쉽지 않으실 것이다. 밖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보이고 싶어하셨으니까.

가끔 특별한 일이 있어  가족이 다 모이는 자리가 있으면, 난 부담스럽다. 불편하다. 나랑 어머니랑 동생 혹은 나랑 아버지 이렇게 있는 게 더 편하다. 아버지-어머니-나-동생 혹은 아버지-어머니-나, 아버지-나-동생 이런 자리는 매우 불편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집안경제에 신경을 안쓴다고 싫어하고, 물론 이전에 성격때문에 싫어하시긴 했지만, 동생도 아버지의 그런 점 때문에 싫어하고, 나는 중간이다. 동생 졸업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가 나보고 아버지한테 전화하라 했다. 아니 내가 왜. 난 이런 거 싫다. 우리 가족은 나를 통해서 대화가 된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동생이 아버지에게 직접 전화거는 상황이란 쉽지 않다. 난 거절했다. 그럼 동생 졸업식이니까 걔보고 전화하라고. 자꾸 날 통해서 대화를 하려고 하면 관계회복은 힘들다. 그래서 거절했다. 그랬더니 결국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동생 졸업식있다고 전화했다.

또, 우리 가족이 함께 어딜 걸어가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모양새인데, 네명이 함께 걸어가면, '함께'는 없다. 따로 또 같이 걸어간다. 상황 1. 아버지 혼자 저 멀찌감치 걸어가신다. 그리고 내가 걸어가고, 뒤에 어머니와 동생이 뒤따라 온다. 상황 2. 어머니와 동생이 먼저 걷는다. 내가 걷는다. 그리고 아버지가 따라온다. 항상 이렇다. 그것은 우리 가족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과도 같다. 나는 항상 중간이다. 아니면 외롭게 있을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 옆에 따라 간다.

졸업식이라고 불러놓고는 왜 따로따로 걷냐고 어머니한테 뭐라 했다. 화가 나서 그런건 아니고, 그러지 말라고. 불렀으면 같이 다녀야지 왜 다 따로따로 다니냐고. 어제 세븐스프링스에서도 그랬다. 접시를 들고 음식을 먹으러 가는데 어머니와 동생이 먼저 가고, 나도 따라가고, 아버지는 기다렸다 우리가 자리에 온 뒤에 일어나셨다.

난 우리 가족이 함께 모이는 자리가 불편하다. 이런 모습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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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8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6-02-18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 감사함니다.

2006-02-19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6-02-19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 네. 댓글 감사합니다.

2006-02-19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9시경에 신촌에 갈 일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신촌 현대 백화점 앞에서 내려 골목길을 들어서는데 아 머냐. 시끌벅적 시끌벅적 노래를 부른다. 단체로 수십명. 근 100명은 되어보였다. 그 많은 어린넘들이 모여가지고 하는 짓이라고는, 단체로 둥글게 둥글게 원을 만들고 손짓 발짓으로 뭔 춤을 추며 알아 들을 수 없는 이상한 노래들을 불러댄다. 그리고는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아 정말이지 이런 짓은 제발! 니들 집에 가서 해라. 아 왜 시끄럽게 길거리에서 그러고 있는거야.

  못마땅한 눈으로 힐끔 쳐다보며 지나갔지만 - 개들은 노래하느라 날 당연히 보지 못하지만 - 또 다른 골목에 커다란 깃발 두개를 들고 또 한 무리가 노래를 한다. 아 정말 짜증.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들을 또 불러제끼며 아주 신이 났다. 처음 100명의 무리는 어디애들인지 모르겠고, 나중 무리는 연대애들이었다. 깃발에 연세대라고 써있었으니깐. 제발이지 이런 짓 좀 하지마라.

  나 대학 때도 신입생이 되어 들어갔더니 술자리에서 이런 짓들을 하는거다. 자주통일 어쩌고 하면서 깃발을 높이들고 뭐라뭐라 소리친다. 뭐하는거니. 난 도대체가 이런 일련의 행위들 영 못마땅하다. 이건 내가 군대를 혐오하는 수준에 맞먹는 '못마땅함'이다.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구호들, 그리고 그 구호들에 굳이 의미를 갖다붙인다고 해도 그들이 길거리에서 시끌벅적 떠들며 고성방가 하는 짓과 아무리 생각해도 상관관계를 맺을 수 없고 - 나 내가 돌인가 연관관계를 찾지 못하는게 - 자기들끼리의 그 작태, 이게 다 나중에 파벌을 조성하는 거다. 내가 너무 많이 치고 올라갔나? 의도확대의 오류를 범했나. 그렇지 않다고 본다.

  난 대학 신입생 때도 이 따위의 행동들에 동참하지 않았고, 철학과로 전과를 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왕따 일 수 밖에 없는건 학생회를 주축으로 한 일련의 이 따위의 행동들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 따위의 행동이 내겐 너무나 혐오스러운걸 어쩌랴. 특히나 이게 더 심한 학교들이 있다. 연세대와 고려대(약칭으로 연대, 고대 라는 단어를 쓰지만 이것도 웃기는 거다. 그럼 연 이나 고 자로 시작하는 다른 대학들은 뭐가 되냐. 존재감이 없는거 아니냐. 그래서 나도 습관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대학명칭은 있는 그대로 사용하려고 의식하는 중이다)가 가장 심하다. 내가 본 바로는. 서울지역대학 같은 학번 모임에 나갔을 때도 그들은 얼굴도 모르는 넘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는 또 한바탕 노래를 하며 춤춘다. 제발 그러지 좀 마라 라고 가서 뜯어 말릴 순 없다. 싫으면 내가 그 모임 안나가면 되니깐.

  이런 행위들은 모두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과 선배들이 모여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 라는 일종의 단결심을 위한 것이겠고, 또 그것이 전혀 이해가 안되는 바는 아니지만, 왜 단합을 위해 그 따위의 행동을 해야하느냔 말이다. 다른 걸 하면 안되나. 아니 또 좋아 해라. 그럼 니들 학교가서 보이지 않는데서 해라. 왜 길바닥에서 길막고서 깃발 흔들며 꿱꿱 노래부르고 춤추며 동네방네 다 여기 좀 쳐다보소 해야하느냔 말이다. 우리 연세대 생은 이렇게 단결심이 좋아요, 우리 고려대 생은 이렇게 단결심이 좋아요, 우리 기계공학과는 이렇게 단결심이 좋아요, 자랑하는거야 뭐야.

  내가 이 글에서 연세대와 고려대를 주로 언급했지만 - 어제 봤던 그 광경은 일부 연세대 학생들이었고 - 모든 대학생들이 다 마찬가지다. 연세대와 고려대에 대한 특별한 증오심이나 미움따위는 없다. 다만 그들이 더 심한건 사실이라는 것 뿐. 그리고 나 또한 그 대학 중 한 곳에 현재 적을 두고 있으니, 너 우리가 부러워서 그러지 따위의 시시껄렁한 딴지는 통하지 않는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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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2-16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도 철학과셨군요. 어쩐지 페이퍼가 심도있어서

마늘빵 2006-02-16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네 경제학 쪽에서 철학으로 옮겼습니다.

가넷 2006-02-16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것도 하나요?=_=;;;

비로그인 2006-02-1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히 찔리는군요. 술 마시고 춤 춘 적은 없지만;; 도로 점거(?)는 여러번 해봤었는지라... 학생회 하면서 신입생들 환영회 한다고 기 들고 학교서부터 신촌 독수리빌딩 쪽으로 이동했던 것도 일종의 도로 점거... 맞죠? (학교 앞엔 사회대 10개의 과가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장소를 제공하는 곳이 없는지라..) 아닌가... 으흠.. 아, 아주 얌전히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

생각해보니, 전 학생회였기 때문에 과에서 왕따였던 거 같군요. 사회복지학과는 성향상 기독교적 색채가 짙고, 심지어 구조조정으로 과가 폐쇄되어도 재학생은 물론이거니와 졸업생 하나 나서서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 정도로 학교에 대해 철저히 복종(?)하지요. 전 1학년 때부터 총학생회에 있었고, 게다가 복수전공도 사회학이었는지라, 제가 하는 이야기들을 과 동기들은 거의 과격함(!)으로 받아들였고, 과 전체적으로는 똘똘 잘 뭉쳤지만 단대 전체 행사가 있거나 그러면 얼떨결에 제가 과 대표가 되어버리는 묘한 현상을 자주 겪었지요. FM? 암튼 남녀공학의 대학들에서 자기 소개할 때 앞에 길게 구호 붙이고 학번에 자기 이름 목소리 터져라 외치는 거.. 확실히 여대다보니 할 일은 없었지만, 사회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색다르게(?) 한 번 해보자며 후배들은 안 시키고 재학생들 몇몇이 한 번 해봤었지요. 다들, 목만 아프다는 결론을 얻었던;;;;

아.. 쓰다보니 님의 글과 상관없는 내용까지 어마어마하게 길어졌군요. 놀고 즐기는 거야 물론 좋지만, 그게 남에게 피해가 되면 안 되는데.. 특히 두 학교간의 대회(1년에 한 번 하는 거 있죠. 연고전인지 고연전인지..)시엔 정말 심각해지죠. 본인이 졸업한 학교의 학생들도 종종 기차놀이하러 참여하곤 하다 못해 우리 학교에도 그런 게 있어야 발전한다는 묘한 목소리를 내는 이도 있고, 심지어 올해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했던 모 선본은 서강대와 함께 연고전 혹은 고연전에 버금가는 축제를 만들겠다며 학벌주의를 조장하려다가 당선에 실패하고 말았던-_-;;

마늘빵 2006-02-1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로님 / 네. 3월 되면 더 심해질거에요.
여대생님 / 아 제가 뭐라하는건 뭐 얌전하게 조용히 행렬지어 지나가는걸 뭐라는게 아니고, 꽥꽥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노래하고 춤추고 하며 주변을 어지럽히고 소란피우는 행위를 말하는거에요. 님한텐 해당사항 없어요. ^^ 그냥 학교가서 운동장에서 하든 잔디밭에서 하든 할 것이 말이에요. 꼭 밖에 나와서 그래요.
행복나침반님 / 그쵸. 3월 되면 더 심해질거 같아요. 그쪽에 또 나름 자부심있는 대학들이 좀 많아요? 저도 차라리 학교 강당에서 오티하며 바위처럼 노래부르고 거기서 술먹고 끝내는걸 권장해요. 아 저도 해병대 아찌들 더 싫어요. 항상 어느 집단이든 전부가 그런건 아니지만 유독 눈에 띄게 행동하는 이들이 있죠. 신촌에서 논 그들도 그렇고, 나 해병대 나왔어! 군인이야! 그래서 뭐 어쩌라는건지 아주 대놓고 과시(?)하는 이들이 있어요. 저도 해병대 벩이에요.

비로그인 2006-02-21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끄럽게해서 다른이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는지 반성중입니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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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접한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이다. 일본 소설에 입문 한 뒤로 한 명 한 명 작가를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가네시로 가즈키, 무라카미 하루끼, 오쿠다 히데오, 야마다 에이미, 츠지 히토나리를 거쳐서 이번엔 요시모토 바나나다. 가장 최근작 <불륜과 남미>를 읽은 이후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감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이전작들이 너무나도 호평을 받고 있어서 그 한권만으로 그녀를 판단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 끝에 이번에 몇 권을 더 구입했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그녀의 많은 작품들 중에 언제쯤 내놓은 것인지 모른다. 기왕이면 집필 시기를 알 수 있어서 그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혹은 역순으로 읽어나가는 재미를 누리고 싶었지만 불친절하게도(?) 그녀의 책 어디에도 그 순차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읽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그녀가 거쳐왔던 세월의 흔적들, 생각의 흔적들을 느끼고 싶었다.

  그녀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이 책을 접했을 때 무슨 과학책인줄 알았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의학관련, 과학관련 대중서인줄 알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작가의 이름만 기재되어있지 않다면, 이 책을 소설책으로 분류할 사람은 없을 듯 하다. 일전에 어떤 책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학교 도서관에서 철학책을 찾는데 철학분야에 끼워져있지 않고 다른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경우가 있었다. 도서관 사서들이 제목만 보고서 다른 곳으로 분류해놓은 것이다. 그럴 때면 아 뭐 실수할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런데 사서들은 이 많은 책들을 어떻게 제자리에 분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가졌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짧은 여러개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초록반지, 보트, 지는 해, 검정 호랑나비, 조그만 물고기, 적당함 등등의 여러 단편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지만,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담고 있다. 그 주제를 풀어놓은 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 다른 여자와 또 만나 데이트를 하며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때 그 장소로 나의 발길이 향할 때, 나보다 내 몸이 먼저 자연스럽게 행동하는구나, 하는 걸 느낀다. 바로 어제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즐거웠던 시간들이 오늘, 그리고 내일, 혹은 한달 뒤 까맣게 잊혀지고 말지 모른다. 기억에서 자연스럽게 지워지고 흔적조차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또 알게 되기도 한다. 역자 김난주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런 말을 한다.

  "그런 때, 시간은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렇게 한순간에 지금이 먼 옛날이 되고 또 먼 과거의 시간이 오늘에 되살아날 수도 있는 것을, 하고 말이죠."

  함께 했던 그 행복했던 시간은 기억을 통해 영원히 '행복'으로 남을 것만 같지만, 언젠가는 기억 저장고에서 날아가버린다. 하지만 그때 내가 했던 말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는 비록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내 몸에 습관으로 배어있다. 단지 그걸 인지하지 못할 뿐.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돌아왔을 때 나는 안다. 익숙한 나의 몸짓에, 한 마디 말에,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인거 같은데, 언젠가 내가 했던 행동인 거 같은데... 나는 잊었지만 내 몸은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요시모토 바나나는 이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옛 이야기를 내 몸은 기억하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좋은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억지로 얘기하기를 그만두면, 몸이 오랜 세월에 길든 서로의 리듬을 마음대로 새겨준다. 그러면 대화는 느긋하고 매끄럽다." (p51, 검정호랑나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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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2-16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몸은 알고 있다~ 저도 읽어 보고 싶네요. 요시모토 바나나 참 미칠듯 질투나는작가같아요

마늘빵 2006-02-16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글을 잘 쓰더군요. 전 세계적으로 읽히는 이유도 그가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공감과 동의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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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좋은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억지로 얘기하기를 그만두면, 몸이 오랜 세월에 길든 서로의 리듬을 마음대로 새겨준다. 그러면 대화는 느긋하고 매끄럽다. - <검정호랑나비> 中 -51쪽

지금은 초췌하게 눈 밑에 기미까지 끼어 있지만, 언젠가는 새로운 사랑을 하고 다이어트다 뭐다 시끄러워 지리라. 내가 전에 여기 왔었다는 것을 잊게 한 똑같은 힘이 그녀를 또 웃게 한다.
멈추지 않는 시간은 아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순간을 하염없이 품기 위해 흘러간다. - <검정호랑나비> 中 -52쪽

나는 그의 몸매도, 할 때의 표정도, 비디오를 보며 연구한 듯 집요한 섹스 스타일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욕망은 삽입도 아니고 다른 무엇도 아니고 오로지 보는 것이 전부였고, 나를 즐겁게 해주려는 생각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너무 집요해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지만, 그것은 그냥 보통 섹스에서의 평범한 기분 좋음이 아니라 어딘가 뒤틀린 환희였다. 그러나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그 유난히 가는 팔도, 울룩불룩 튀어나온 등뼈도, 부숭부숭한 털도, 안경을 벗으니까 유난히 긴 속눈썹도, 햇볕에 까맣게 탄 피부도 싫다고 외면할수록 좋았다. 아무말이 없는 것도 나를 매혹시켰다.
그것은 어린 시절 바다에 놀러 가서, 파도치는 해변에서 뒹굴 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물을 머금은 부드러운 모래가 몸 아래서 흔들리는 느낌, 그 감촉이 황홀하도록 기분 좋아서, 수영복 속으로 모래가 찔끔찔끔 들어와 나중에 성가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이 뭐, 하고 물가에 누워 있었던 때의 그 기분. 몸을 담글 때까지는 혐오스럽지만, 한번 그 부드러운 모래의 힘에 사로잡히면 거기에 있고 싶어진다.
- <미라> 中-81-82쪽

아마도 전쟁이란 것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그리고 또 무엇을 '미워하자'고 정하고는,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증오란 증오를 전부 끌어내 거기에 쏟아 붓고 탓하는, 그런 중독 비슷한 이상한 상태에서 일어나는지도 모르겠다......
- <밝은 저녁> 中 -94쪽

그 냉정함을 듬직하다 여겼었다. 하지만 사실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무관심하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과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이어지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 <아빠의 맛> 中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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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02-16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과학서적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마늘빵 2006-02-16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그렇죠? ^^ 저도 첨에 제목만 보고 그런줄 알았어요.
 
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읽기 위한 메모 몇 가지

사상의 자유라는 것이 과거 서양사회에서 종교의 자유와 일치한다고 봐도 좋을 만큼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는 사상의 자유를 논함에 있어 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책을 읽는 와중에 비기독교 신자인 나로선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으므로 꽤나 낯설었다. 기독교와 관련해서 또 철학과 관련해서 몇 가지 단어들의 의미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어렴풋이는 알고 있지만 도대체가 그 차이점이 정확히 뭔지,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몇몇 단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이 책을 읽는데 있어 많음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 변신론(辯神論)

영어로는 Theodicy  독일어로는 Theodizee

어원 :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 Theos 와 정의를 뜻하는 그리스어 Dike

의미 : 악이라는 현상에 관련해 신을 변호하려는 입장

변신론은 세계 속에 창궐하는 악에 대한 책임을 신에게 전가할 수 없음을 보여 주려고 한다. 이 말은 <신의 선함, 인간의 자유, 세계의 기원에 관한 변신론>(1710)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책 제목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둘. 무신론(無神論)

영어로는 Atheisme 독일어로는 Atheismus

어원 :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 Theos 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어 a가 붙음

의미 : 신의 존재나 신이 세계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입장
           신에 대한 거부로부터 세계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것

  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무신론은 우주와 인간의 시원, 진화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의 결과로서 등장한다. 무신론은 불가지론과 구분된다. 불가지론은 신의 존재에 대한 언급을 거부하는 입장이다.

  실천적 유물론은 일종의 윤리학이며, 도덕적, 정치적 참여에 연관된다. 니체의 주장처럼 "신은 죽었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치를 거부함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무신론은 마르크스에서처럼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사르트르에서처럼 인간의 절대적 사유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상은 <철학사전>, 엘리자베스 클레망 외, 이정우 역, 동녘  참조)

 

셋. 이신론(理神論)

  이상주의적 입장에ㅓ 종교를 생각하거나 자연종교의 입장에서 역사적 종교를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을 말한다. 신이 세계의 창조자라고 인정하긴 하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인격적 존재라고는 보지 않는다. 또 일단 창조된 세계는 신의 지배를 떠나 정해진 자기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면서, 기적이나 예언과 같은 불가사의한 요소는 배척한다.

(본 책 P 91 역주 참조)

 

넷. 설계논증

  설계논증이란, 세계는 목적에 적합하게끔 수단이 끝없이 조절된다는 명백한 설계의 흔적을 나타내 보이는데, 이는 강력한 지성의 의식적인 계획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밖에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흄은 단순한 지성적 존재는 그러한 결과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원인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추론을 논박한다. 왜냐하면 설계논증에 따를 경우 물질세계의 체계는 그 원인으로서 그에 대응하는 관념들의 체계를 필요로 하는데, 그러나 그러한 정신적인 체계 역시 물질세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우리는 결국 원인의 무한소급에 빠져들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본 책 P184 본문 참조)

 

다섯. 불가지론(不可知論)

  불가지론이라는 말은 특히 종교에 관한 태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이 말이 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급진적 회의주의와 동의어이다. (<철학사전> 참조)

  불가지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신학은 그 한계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과학이 취급하는 세계는 그 한계 안에 있다. 과학은 전적으로 현상만을 다룰 뿐, 현상의 배후에 놓여 있을지도 모를 궁극적인 실재의 본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할 것이 없다. 이 궁극적인 실재에 대해서는 네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첫째. 궁극적인 실재가 존재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알 수 있다고 확신하는 형이상학자와 신학자의 태도.

  둘째. 궁극적인 실재의 존재를 부정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부정이 오로지 형이상학적 논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형이상학자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태도.

  셋째, 궁극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해 뭔가 알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사람들.

  넷째. 궁극적인 실재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이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불가지론자.

  * 셋째도 넓은 의미에서 불가지론자로 분류된다.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의 차이는, 무신론자가 인격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반면 불가지론자는 그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 책 P2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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