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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책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4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지음, 조원규 옮김 / 들녘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위험한 책.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책 제목이다. 아니 도대체 책이 뭐가 위험하다는거지? 모든 책은 위험하다 아니면 이 책은 위험하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 책의 제목은 전자와 후자 중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자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책에 관한 책이 될 것이요, 후자를 의미한다면 금기가 되었던 책을 뜻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마치 추리 소설 한편을 보는 듯한 줄거리 진행. 예전에 읽었던 <꿈꾸는 책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저자불명의 책의 주인을 찾아 떠나는 여행, 그리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 위험을 무릎쓰고 이 책을 사수할 가치가 있는가. <위험한 책>은 <꿈꾸는 책들의 도시>만큼 흥미진진하고 긴박하진 않지만 책을 좋아라하는 이들의 고충과 위험(?)을 충분히 재밌게 보여준 소설이다.
읽고 난 뒤에 줄거리가 남는 소설이 있고, 읽고 난 뒤에 이미지가 남는 소설이 있다. 이 책은 후자이다. 또한 전에 읽었던 <꿈꾸는 책들의 도시> 또한 그러했다. 남미 특유의 냄새가 난다고 할까. 남미의 소설들 많이 접하지 않아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분명 남미의 냄새는 있다. 줄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고 난 뒤에 줄거리보다는 책의 이미지들이 연상되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다. 유독 남미 소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책의 곳곳에 숨어있는 림들은 줄거리를 이미지화 시키는 하나의 작업이다. 그림이 들어있다고 해서 지금 내 머리 속에 이미지만 뚜렷히 남아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이 그림을 그린 자 또한 원고를 읽고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연상물들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일진대 그것은 정말 탁월했다. 중간중간 들어있는 그림들만으로도 책을 다 읽은 것만 같은 느낌을 지니게 한다.
이 책속엔 책을 좋아하라는 애서가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책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나로서는 자그마한 내 방에 모셔둔 책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는다. 큰 책장 하나 다 채우고, 작은 책장 몇개 채우고, 읽고 바닥에 쌓아둔 책들이 전부. 그중에 내가 다 읽은 책도 있고, 아직 읽지 않고 보기만 하면서 뿌듯해 하는 책들도 있다. 대개 후자의 책들은 철학책.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대학 때 분명 칸트연구 라는 과목을 수강했지만, 내게 남아있는 칸트의 이론은 없다. 중국 무협영화에서 태극권을 익힐 때처럼 무술을 터득하고 난 뒤 까먹는 것이 아니고, 정말 내 머리 속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은 기억은, 그냥 읽었다는 기억뿐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헤겔의 <정신현상학> <법철학>, 그리고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마르크스 서적들. 이런 애들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얼마되지 않는 책이지만 방이 워낙 좁은지라 놔둘 곳이 없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다들 이런 고민을 매일 같이 안고 살 것이다. 버릴 수는 없다. 왜냐면 가까운 돈 탈탈 털어가며 지른(흔히 인터넷 서점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들 사이에서 책을 구입하는 것을 '책을 지른다'라고 말한다) 책들이기 때문에. 결코 버릴 수 없다. 한번 읽고 다시는 안보게 될 책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그렇더라도 버릴 수 없다. 난 책을 좋아하는 것인가, 책을 수집하길 좋아하는 것인가. 이쯤되면 이런 고민이 생길 밖에. 애서가냐 수집가냐?
난 수집가인 동시에 애서가이다. 내가 수집가라는 것은 도서관 책을 거의 빌려보지 않는다는데서 생각해볼 수 있다. 가벼운 소설 한 권을 읽더라도 난 내 책이 아니면 읽기 힘들다. 도서관 대출 기한이 정해져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도서관 책이 더럽기 때문일까, 줄이 쳐져있고, 찢어져서? 아니다. 도서관 책은 읽으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 때문에 난 소설 하나를 읽더라도 사서 본다. 그리고 사서 읽은 책은 반드시 소장한다. 다 읽었다고 아는 이들에게 책을 뿌리거나, 헌책방에 넘기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니 난 수집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난 애서가다. 책을 그 자체로서 좋아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날 좋아하든 아니든 간에, 또 그 사람이 날 알든 모르든 간에 그 사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싱긋. 싱긋. 난 책을 좋아한다. 책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집에 들어와 방문을 열고 책장 가득 채우고 있는 나의 사랑스런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행~복 그 자체. 한때는 책방을 운영하고 싶기도 했다. 장사가 안될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 고될 거라는 걸 알면서. 그래도 책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해봤다.
"애서가로서 우리는 친구들의 서가를 심심풀이로 염탐하곤 한다. 읽고 싶지만 수중에 없는 책을 발견할까 해서, 또는 그저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짐승 뱃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우리의 동료들은 혼자 응접실에 있게 되면 분명 책장 앞에 서성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고 있을 것이다."(P18)
책이 많다는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게 될 때면, 먼저 살펴보는 것은 그 집이 얼마나 넓은가, 어떤 가구들이 있고, 티비는 몇인치인가, 컴퓨터 환경은 어떤가가 아니라, 주인장의 책장이다. 책이 얼마나 많은가, 또 어떻게 꾸며놨는가, 분류방식은 어떠한가, 어떤 주제들을 즐겨 읽는가 등이 나의 관심사이다. 저자는 이를 "책장 앞에서 서성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는다는 표현을 썼다. 정말 그렇다. 음식 앞에 둔 강아지마냥 남의 책장 앞에서 냄새를 맡고 어떤 음식인지 살핀다.
"서가를 만드는 사람은 인생 전체를 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거든요. 결코 아무 계획 없이 모아놓은 책들이 아니란 뜻입니다. "(p30)
지금 나의 책장에 꽂혀있는 저놈들은 나의 인생이다. 나의 관심사의 변천에 따라 책은 하나 둘 꽂히면서 주제를 바꿔가면서 차곡차곡 쌓여 나의 지나온 인생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저놈들은 나의 어린시절부터 함께 해왔던 나의 일기장이다. 책을 볼 줄 몰랐던 그 시절에 골랐던, 지금 보면 저걸 왜 샀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그런 책들도 있다. 책이 좋았으나 뭘 읽어야 할지 몰랐던 시절, 서점가서 아무거나 집어 사들고 걸어오는 길은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나 와서 책을 읽어보면 잘못 샀구나 하는 걸 깨닫는다. 깨달으면 다행이다. 깨닫지 못하고 그냥 내용도 모르고 읽어버릴 때가 있다. 책은 내 인생이다. 서가는 내 인생이다. 그 사람의 서가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한 10년 후쯤 내 서재를 보고 오늘의 날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살며시 입가에 웃음짓고서.
오늘도 난 책을 지른다. 어서 오너라. 주문버튼을 누른지 얼마나 됐다고 또 택배배송현황을 뒤져보고 있다.
** part 2 **
책은 위험하다. 사면 또 사고 싶고, 사놓은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또 사고 싶고, 그러다보니 집에 책은 많은데 '읽은' 책보다 '읽을' 책이 훨씬 많아지고, 아니 이걸 언제 다 읽어, 하고 걱정하면서 눈에 띄는 신간서적이 나오면 또 지른다.
책은 위험하다. 좁은 방을 채우고 또 채우고, 그러다 나의 편안한 잠자리를 해치고, 언제 바닥에서부터 쌓아둔 책들이 철퍽 하고 나를 덮칠지도 모른다. 책장이 쓰러져 내가 사랑했던 책들에 깔려 생을 마감한다면 난 행복할까? 아 아무리 책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렇더라도 책에게 죽음을 당하곤 싶지 않다. 또 책 모서리로 맞으면 얼마나 아픈데. 딱딱한 신간 양장본 책 모서리로 머리 한대 쥐어박히면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픔을 느끼기 전에 이미 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 톡 하고 떨어진다. 엉엉 울어버리기도 전에.
책은 위험하다. 책을 읽느라 지하철을 타고 가다 내릴 역을 지나치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다. 아 여기가 어딘가 일단 내려본다. 처음부터 엉뚱한 방향으로 탔다. 명동에서 삼각지 방향으로 가려는데, 명동에서 동대문까지 올라갔다. 한줄 두줄 읽다 한장 읽고 나면 벌써 몇정거장 지났다. 그런 적이 한 두번이 아니건만 난 매번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책은 위험하다. 책을 읽는 시간 때문에 연애를 못한다. 정말? 엄... 글쎄. 책을 읽고 반드시 글로 흔적을 남기는 나의 편집증적 습관때문에 EX 걸프렌드는 내게 뭐라 한적도 있다. 심각하다고. 음. 그래 심각한거 알아. 그런데 어떡해. 안그럼 불안한걸.
책은 위험하다. 정서불안을 야기한다.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누가 그랬더라. 정말 그렇다. 어릴 땐 몰랐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다.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다. 아무리 바빠도 버스를 타고 있는 짧은 순간에라도 잠깐이라도 책을 읽는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하다. 이건 정말 병이다.
책이 위험한 이유는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니 책을 읽지말자? 그건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래도 책은 읽어야 해. 이유는 없어. 읽어야 할 이유는 없어. 굳이 이야기하자면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결혼을 생각하면, 그 사람이 가진 것 하나 없다고 해도, 앞으로 고생문이 훤히 보인다고 해도, 위험을 무릎쓰고 결혼을 강행하는 것처럼, 책이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난 책을 읽을래. 난 책을 사랑하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