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을 버리기가 얻기보다 훨씬 힘겨울 때가 많다. 우리는 궁핍과 망각 때문에 책들과 계약을 맺고, 그것들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지난 삶에 대한 증인처럼 우리와 결속되어 있다. 책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 우리는 축적의 환상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책을 읽을 때마다 정신적인 소득을 기입하듯 해와 달과 날을 기록하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첫장에 자기 이름을, 공책에 빌려갈 사람의 이름을 적고 난 연후에야 책을 빌려주곤 한다. 공공 도서관처럼 도장을 찍고 소유자의 카드를 꽂아놓은 책들도 본 적이 있다. 책을 잃어버리는걸 달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라리 반지나 시계, 우산 따위를 잃는 편이, 다시는 읽지 않더라도 낯익은 제목만으로도 우리가 과거에 누렸던 감정을 일깨워주는 책 한권을 잃는 것보다 훨씬 낫다.-17쪽
애서가로서 우리는 친구들의 서가를 심심풀이로 염탐하곤 한다. 읽고 싶지만 수중에 없는 책을 발견할까 해서, 또는 그저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짐승 뱃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우리의 동료들은 혼자 응접실에 있게 되면 분명 책장 앞에 서성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고 있을 것이다. -18쪽
서가를 만드는 사람은 인생 전체를 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거든요. 결코 아무 계획 없이 모아놓은 책들이 아니란 뜻입니다. -38쪽
"당신은 그저 책들이 서가에 모여서 저절로 불어나는 것 같겠지요.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런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사실은 서가의 주인이 특정한 주제를 선택하고 시간이 지나면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게 더 나은 비유일 수도 있겠네요. 말하자면 우리는 흔적이 남는 하나의 여행을 마치는 셈이지요. 물론 말처럼 쉬운 건 아닙니다. 하나의 과정이 들어있어요. 가장 먼저, 가지고 있지 않은 책들의 목록을 작성합니다. 그리고 그 책을 구하게 되면 그 책에서 다음 책에 대한 지시를 얻습니다. 아참, 내가 무척 느리게 읽는 애서가라는 점을 밝혀야겠군요. 나는 인용문의 출처까지 모두 다 꼼꼼하게 읽으면서 모든 상념의 의미를 여러 관점에서 조명해본답니다. 그러니 한 권의 책을 읽을 때는 늘 스무 권의 책들을 주위에 놓아두게 되지요. 때로는 한 챕터를 읽기 위해 그러기도 한답니다. 이렇게 몰두하는 일이 나에겐 상당히 매혹적이지요."-38쪽
책읽기란 완전한 침묵에 잠기는 일이 아니지요. 우리의 목소리가 언제나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기가 악보를 연주하듯이 목소리는 읽는 행들을 연주합니다. 그리고 이런 읽기는 눈으로 읽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확신합니다. 단어와 문장들에서 음과 멜로디를 이끌어내는 거지요. 그래서 낮게 음악을 깔아주면 고막 안 깊은 곳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스피커에서 나온 음악의 조화로운 화성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음악이 몇 데시벨만 더 커져도 목소리를 압도해 텍스트를 침묵하게 만들거나 망가뜨리고 맙니다. 조악한 산문을 읽을 때도 좋은 음악을 곁들이면 느낌이 좀 괜찮아지지요.-60-61쪽
며칠 뒤, 나는 신간에 대해서 무관심해졌다. 또한 할인된 가격에 파는 책들의 그 모든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먼 외국에서 보내온 것까지 포함해 내게 도착한 책들을 거의 읽지도 않은 채 도서관에 기증해버렸다. 나는 내가 어떤 책 한권에라도 흥미를 느낄까봐, 그래서 그걸 집으로 가져가 점점 손쓸 겨를 없이 불어나는 책들의 거대한 식민지에 추가하고, 그 책들이 벽을 따라 쌓이고 복도로 넘쳐날까 봐 지레 겁이 났다. -95-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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