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경고

  암울한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 한판의 복수극. <브이 포 벤데타>를 한 줄로 설명하자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가 각본을 담당하고, <매트릭스> 사단의 신인감독 제임스 맥티그가 지휘한 <브이 포 벤데타>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 영화 역시 또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은, 대부분 <매트릭스>를 떠올리며 '워쇼스키 형제'라는 광고문구를 보고 극장을 찾을 것이다. 나 역시 포스터 중간에 걸친 '워쇼스키 형제'라는 문구에 혹 하고 끌렸으니. 처음 듣는 감독의 이름, 또 별로 관심없는 나탈리 포트만과 휴고 위빙. 절대로 '워쇼스키 형제' 없이는 지금의 예매율 2위를 기록할 수는 없다.

  나는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 암울한 미래 사회와 복수극. 내가 관심있어 하는 두 가지 소재가 한 영화에 모두 담겨있으니 더더욱 끌릴 수 밖에. '워쇼스키 형제'는 나로 하여금 이 영화에 대해 처음 관심갖게 만들었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는 나를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이 영화는 매트릭스 사단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워쇼스키가 그러하고, <매트릭스>의 제작진이었던 초짜 감독이 그러하고, 이 영화에서 결코 얼굴 한번 드러내지 않는 휴고 위빙이 또 그러하다. 그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요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니 <매트릭스> 사단의 영화라고 볼 수 밖에.



* 총과 칼의 대결, 일대 다의 대결. 하지만 승자는 브이. '승리의 브이'는 그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총알세례를 받고도 끄덕없던 브이는 모든 총알을 막아내진 못했다. 결국 이 싸움으로 인해 영웅은 잠든다.

  2040년의 통제된 사회. 미국에 의해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의 영국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양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사회. 피부색과 종교와 정치적 성향과 성적 취향 등등의 것은 모두 무시된다. 오직 한 가지만 존재할 뿐. 정부의 지도층과 취향을 같이 하지 않는 이들은 '정신집중 캠프'로 끌려가 자취를 감추고, 이들이 사는 거리과 집안 곳곳에는 감시 카메라와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어 엄격히 통제받고 있다. 사회는 매우 평온하다. 아무도 불평불만이 없고, 전쟁과 시기, 미움, 다툼, 증오, 분노를 찾아 볼 수 없다. 마치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의 사회와 같다. 사람들의 감정까지 통제하진 않지만 모든 사람들은 감시와 통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편으로 조지오웰의 <1984년>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암울한 미래 사회를 그려낸 대부분의 영화들은 모두 조지오웰의 <1984년>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마치 화이트헤드가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모든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린 작품들은 조지오웰의 주석이다.



* 브이의 그날의 연설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나보다. 일년 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혁명은 성공했다. 수많은 브이들은 새 시대를 맞이했다.

  통금시간을 넘긴 어느 밤, 이비는 PD를 만나러 갔다가 거리에서 정부요원에게 붙잡힌다. 그러나 어디선가 나타난 괴력의 사나이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와 함께 대법원의 폭파 장면을 감상(?)한다. 국회 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사형당한 가이 포크스라는 사나이의 얼굴을 한 가면을 쓰고, 검은 모자, 검은 망토, 검은 부추를 신은 이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도대체 누구? 횡설수설 이런저런 문구들을 붙여다가 자신을 소개하는 정신나가 보이는 이 사나이의 이름은 '브이'. 그는 셰익스키퍼의 <맥베스>의 대사를 술술 읊어대고, 이런저런 고전 속의 유명 문구들을 인용하며 세상에 맞서 싸우는 자신을 정당화한다.

  아무도 불평불만이 없는 조용한 사회. 그럼 태평천하가 아니던가? 아니 누가 이런 평온한 우물가에 커다란 돌덩이를 던지려 하는가. 브이는 테러분자인가. 시민들은 아무런 불만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브이의 출현으로 인해 서서히 깨달아간다. 우리는 정부의 통제 아래 자유를 빼앗겼음을. 그리고 1년 뒤를 기약한다. 혁명의 그날을.

  브이는 스스로 정의로운 복수를 감행한다 하지만 정의로운 복수란 것이 가능한 것일까? 영화는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리며 국민들 각자의 가슴속에 자유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한편, 복수의 문제,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거 생체실험의 도구로 쓰였던 브이 자신은 지금 정부 고위 지도자가 되어있는 그들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감행함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자유를 되돌려주기 위한 정의의 복수를 시도한다.

  복수는 가능하다. 복수의 문제, 정의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 함무라비 법전을 인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고 실험을 당한 브이는 그들에게 복수를 행함에 있어 그 수단으로 화학적 독극물을 사용한다. 하지만 고통이 없는 죽음. 주사기를 통해 독극물을 투여하고, 고요히 잠든 그들의 가슴 위에 주황장미를 얹어놓고 떠난다. 좋다. 내가 당한 만큼 돌려주는 개인의 복수는 납득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로운가?

  아무도 불평불만이 없는 사람들, 하지만 브이는 지금의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라고 진단을 내리고, 잘못된 사회를 고치기 위해, 정의로운 복수를 한다고 말한다. 정부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속였고, 통제했으며, 자유를 박탈했다. 그러니 그들에게 복수를 해야한다. 잘못된 사회를 바꿔놔야 한다고 말한다. 오직 브이 혼자만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는 테러분자인가, 정의의 영웅인가. 우리가 보기에도 아무도 불만이 없지만 억압과 통제가 자유를 대신하고 있는 그 사회는 분명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이의 정의로운 복수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보인다. 잘못되었다는 진단엔 동의하겠는데 이에 대고 정의로운 복수를 하겠다고 홀로 나서는 브이의 처방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진 않는다. 무엇이 잘못일까. 그가 행하고자 하는 것은 혁명이다.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일년이 지난 뒤 함께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열자는 것이다. 자유의 세상을 열자는 것이다.

  혁명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혼자 할 수 있다고 해도 혼자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잘못된 사회를 뒤바꾸기 위한 노력은 다수의 국민들이 깨닫고 나서서 행동할 때 비로소 결실을 맺는다. 소수의 사람들의 진단만으로 사회를 뒤바꿀 수는 없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 그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지라도 많은 이들이 사회에 불만이 없다면 그 사회는 별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국가를 이루고 있는 국민들의 몫이다. 북한 사회가 독재체재라고, 아랍계 국가들이 일부다처제를 실시한다고 그들이 그르다고 말 할 수는 없다. 각 사회마다, 국가마다 문화와 정치체제는 다를 수 있다. 그 사회와 국가를 이루고 있는 다수의 국민들이 그 체제에 불만이 없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괜.찮.다. 자유를 박탈당한 영국의 미래사회가 비록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하나 많은 이들이 불만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도 그 자체로 괜.찮.다. 영화는 브이를 정의의 영웅으로 칭송하려는 듯 하다. 브이가 만약 국민들에게 호소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정의를 실행에 옮겼다면 그것은 정의실현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호소했고, 일년 뒤 국민들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과 검은 망토, 검은 모자를 쓰고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혁명은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혁명은 성공했고, 혁명의 방법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로운 복수였는가. '정의로운 복수'라는 말 속엔 이미 복수 그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앞서 개인적인 복수가 옳다할 순 없지만 납득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은, 복수를 하는 브이의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복수가 정의 실현의 한 방법임은 틀림없다.  복수라는 말 ekdikesis는  ek는 영어 from과 dikesis=justice의 합성어이다.  복수는 정의로부터 왔다. 복수 또한 정의실현의 한 방법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방법이 되는 것과 그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이며, 복수를 그 자체로 옳다고 볼 수는 없을 듯 하다. 복수를 하는 방식엔 여러가지가 존재한다. 브이의 '피의 복수'(vendetta)를 옳은 방식의 복수라 볼 순 없지 않을까.

 복수의 문제, 정의의 문제, 과연 정의로운 복수란 가능한가와 같은 문제는 내 머리 속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확실한 결론은 없다. 여전히 내 머리 속은 정리안된 복수와 정의의 문제로 뒤엉켜있고 고민은 계속된다. 브이의 방식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불가피한 방법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현재 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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