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읽기 - 텍스트 해석의 한계를 에코에게 묻다
강유원 지음 / 미토 / 2004년 12월
절판


기호의 생산이나 해석은 기호 그 자체만 가지고서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여러 가지 사회적 학습의 성과들이 은연중에 결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기호를 제대로 만들어내고 해석하는 일은 정확한 기의를 확실한 기표에 담는 일 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당사자들의 학습 배경과 수준에 달린 일이기도 한 것이다. -20쪽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기본 요소인 기호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에 이어 텍스트의 정의에 포함된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어던 코드들에 입각해서 통일성을 이룬 기호학적 체계'라는 규정을 한마디로 다시 쓰면 '기호들의 통일적 질서'이다. 여기서 '질서'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기호들이 여기저기에 아무런 배치나 의도 없이, 말 그대로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으면 그것은 단순한 기호 덩어리일 뿐 텍스트는 아니다. 텍스트는 기호들이 일정한 질서에 따라 배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 그 질어의 원리를 만들고, 누가 그것에 따라 배치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기호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 움직여 어떤 배치를 이루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기호에 질서를 부여하고 배치하는 이는 인간, 즉 저자, 기호를 이용하여 텍스트를 생산하는 자이다.-22쪽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물건을 소유했던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할 수도사들은 재물을 소유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황은 재물을 소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황제를 임명하는 권한까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교황 요한 22세가 이를 못 마땅해 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중략...
이미 요한 22세에 의해 파문을 당하고 그에 대응하여 교황을 배교자로 비방했던 신성로마 제국 황제 루드비히와 이단으로 몰리고 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손을잡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말이었고, 이들은 교황파에 대립하는 황제파를 형성하게 된다. -31-32쪽

"철학은 이 웅장한 책, 즉 우주에 쓰여진다. 이 책은 우리 시야 앞에 항상 펼쳐진 채 서 있지만, 그 언어를 이해하고 그 언어를 쓴 문자를 해석하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져있으며, 그 문자는 삼각형, 원 및 그 밖의 기하학적 도형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인간의 힘만으로는 단 한 단어도 이해할 수 없으며, 이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캄캄한 미로 속에서 방황할 것이다."
(갈릴레이)

"이 세상 만물은 그림과 책처럼 우리에게 거울로 나타난다."
(알라누스데 인술리스-프랑스 신학자이자 시인)-47쪽

수도사만이 서책을 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쓴 맛이 온 몸에 배어들어오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이들도 서책을 손에 잡고 서책에서 얻는 한 모금의 위안에 안도하곤 한다. 서책이 위안을 준다 해도 이들이 서책에 중독되는 일이란 없다. 그들의 한 발이 서책 밖의 세계를 딛고 있는 한, 그들은 세상에서 서책보다 즐거운 것이 발견되면, 바로 그 순간 서책을 팽개친다. 그 즐거움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면 그들은 평생 다시는 서책을 잡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서책이 삶의 거짓 모방이라는 것을 몸으로써 안다. 서책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중독되고 그렇게 버려지는 것이다. -112-113쪽

"인간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들 가운데 가장 놀랄 만한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책이다. 다른 것들은 신체의 확장이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시각을 확장한 것이며, 전화는 목소뢰의 확장이고, 칼과 쟁기는 팔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다른 것이다. 즉, 책은 기억의 확장이며 상상력의 확장"이다. (보르헤스) -151쪽

담론은 순수한 학적 언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언설이 은닉하고 있는,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권력관계까지도 담고 있다. 이 권력관계에는 발언자의 사회적 위치와 배경, 발언 시점, 발언이 전달되는 매체 등도 중요한 요소로서 포함된다. 이러한 맥락이 고려될 때 담론분석은 권력분석이 되는 것이다. -168쪽

중세의 공부는 독해에서 시작한다. 이는 주어진 텍스트를 읽는 것인데, 다시 또 3단계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가 텍스트에 대한 문법적 분석이다. 읽는 이는 이 분석을 통해서 문자의 뜻을 알아낸다. 그 다음에는 논리적 설명을 시도하여 의미를 찾아낸다. 마지막으로 학문과 사고의 내용을 드러내는 주석을 통해 텍스트 주해가 완성된다. 어떤 텍스트가 주어지면 이처럼 형식과 내용에 대한 철저한 검토를 거친 후에 그러한 독해 결과를 놓고 토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토론의 첫번째 절차는 질의이다. 학생은 이제 텍스트를 질문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에 답을 하는 교사는 자기 나름의 해답을 찾아내어 결론이라는 사색의 작품을 창조한다. ...중략...

중세 스콜라의 학문 방법은 낡은 것으로 간주되어 근대의 학자들에게 배척당했다. 근대의 학자들은 텍스트의 권위에 기대어 끊임없이 전거만을 찾는 것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는 방법이라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같은 이는 자신의 학문의 출발점으로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론적 회의주의를 세우기도 하였고, 베이컨은 '새로운 기관'을 정립하기도 하였다. 근대의 학문 방법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해서 중세의 독해, 쟁의, 쿠오들리베타가 가진 깊은 사색의 힘까지 배척되어서는 안된다. 중세의 교사들은 그러한 사색과 쟁론을 통해서 진정한 독토로 doctor - 이는 본래 '교사'라는 뜻을 가졌다 - 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168-170쪽

윌리엄은 '이름은 사물의 궁극'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름은 사물의 본질과 무관하게 아담이 임의로 붙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장미'라고 불리는 사물도 그것이 무어라 불리든 그 본질은 '장미'라는 이름과는 무관하다. 그 사물의 이름이 무엇이건 그것은 그것 자체인 것이다. 아담이 사물에 임의로 이름을 붙였듯이 모든 이름은 사람이 약정을 통해 붙이는 것이다. -172쪽

권능이란 권위와 물리적인 힘이 합쳐진 단어이다. 즉 형식과 내용의 권위를 갖춘 상황에서 힘까지 가진 상태가 권능이다. 베르나르 기가 로마 교회의 권능을 믿느냐고 레미지오에게 묻는 것은 레미지오가 로마 교회가 지닌 헤게모니, 즉 동의된 권력을 인정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178쪽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성자 중에서 이단자가 나오고 선견자들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르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도사)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진리가 아니겠느냐?"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도사)
-192-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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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방 - 우리 시대 대표 작가 6인의 책과 서재 이야기
박래부 지음, 안희원 그림, 박신우 사진 / 서해문집 / 2006년 6월
품절


"플래티넘 고객이래요. 뭐가 궁금하면 우선 책을 사요. 애가 말을 안듣는다 하면 교육에 관한 책을 사요. 요리를 해야겠다면 책부터 사서, 하고 싶은 거는 하고 요리 안할 것은 그냥 넘어가고. 어떤 사람은 수영을 책으로 배워 접영까지 했다는데 그 정도는 아니에요. 책을 버릴 때는 재활용품 수거함에 넣는데,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조심해서 넣죠. 요즘은 교도소에도 갖다 주지요." (공지영의 방 中)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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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 Mr. Know 세계문학 15 Mr. Know 세계문학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절판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 (서문)-23쪽

들판에 가을이 오면 꽃이 시들어 꽃대에서 사라져 버리듯이, 인간 또한 그렇게 사라져 버릴 터인즉, 인간의 외양만큼이나 덧없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 (보에티우스)-37쪽

진정한 앎이란, 알아야 하는 것, 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알 수 있었던 것, 알아서는 안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 윌리엄 수도사)-190쪽

"수도원이 '세상의 거울'이라면 해답은 자명해졌을테지."
"사실이 그렇습니까?"
"세상에 거울이 있으려면 먼저 세상이 모습을 얻어야 할 것이다."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의 대화)
-227쪽

"말은 인간이 지닌 이성의 표징일 수 있으나, 인간은 말로써 하느님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 온당한 것이라는 법도 없지요. 웃는 자는, 자기가 웃는 대상을 믿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악한 것을 보고 웃는닫는 것은, 악한 것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요, 선한 것을 보고 웃는다는 것은, 선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드러내는 선의 권능을 부인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회칙에, <어리석은 자는 웃음 속에서 제 목청을 높인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닌 열 번째 미덕은, 웃음이 해프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르헤 수도사)

"퀸틸리아누스는, 웃음이란 위엄을 차리고 칭찬해야 할 자리에서는 삼가되, 그 밖의 경우에는 장려해서 마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 플리니우스는, <인간이기에 ㄴ는 때로 웃고 익살을 부리고 논다>고 썼습니다." (윌리엄 수도사)-249쪽

"사랑이 무엇이냐? 이 세상 만물 중에, 사랑만큼 영혼을 흔드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에게도 그러하고, 악마에게도 그러하니 만상에 두루 그러할 것이다. 사랑처럼 가슴을 뜨거운 것으로 가득 차게 하고, 사랑만큼 가슴과 가슴을 하나로 열게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사랑을 이길 무기가 없는 자는, 영혼의 사랑을 통하여 바닥 없는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윌리엄 수도사)-432쪽

여자는 내게로 다가서면서 그때까지 가슴에 안고 있던 까만 보퉁이를 구석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서 내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조금 전에 하던 말을 되풀이했다. 도망쳐야 할지, 가까이 다가서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 내 귀에 예리고 성벽을 허물어뜨리는 여호수아의 나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여자는, 마음은 원이로되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하는 나에게 미소를 뿌리고는, 암염소 같이 주름잡힌 소리를 내면서 가슴 위에 둘러져 있던 치마끈을 풀었다. 치마가 휘장처럼 걷히면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 앞에 선 하와 같은 모습으로 여자가 내 앞에 우뚝 섰다.
<아름다워라 젖가슴이여. 부풀어올랐으되 지나치지 아니하고, 자제하였으되 위축되지 않았도다>
나는 우베르티노에게서 들었던 말을 라틴 어 원문으로 읊었다. 여자의 가슴이 흡사 백합 꽃밭에서 뛰는 두 마리 새끼 사슴 같았기 때문이었다. 배꼽은 영원히 비지 않을 술잔, 배는 백합꽃밭에 놓인 밀가루 자루 같았다. -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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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7-03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여러군데 연필 밑줄이 그어진 책이에요. 다시 보고 싶네요..

마늘빵 2006-07-03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문구 하나하나 새겨가며 읽고 싶지만 그렇게 읽으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이렇게 인상적인 부분을 발췌해 놓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겠어요.
 

 

 

 

 

  영화로 본 <오만과 편견>에 이어, 소설로 본 <오만과 편견>, 그리고 마지막으로 BBC 드라마 <오만과 편견>이다. 그야말로 <오만과 편견>의 완결편. 소설을 먼저 보고, 영화를 보고, 그리고 BBC 드라마를 봤으면 했지만 영화를 먼저 본 걸 어쩌랴. 어찌되었든 마지막에 BBC 드라마 <오만과 편견>을 본 것은 잘한 짓이다. 왜냐면 제일 좋았으니깐.

  BBC <오만과 편견>은 영국 BBC 방송국에서 제작한 것을 두 개의 디비디에 담아낸 것이다. 기존에 6부작으로 나눠 방송하던 것을 두 편에 담았지만, 각각의 드라마 한편 한편 끊어지는 부분이 그대로 느껴진다. 드라마 시리즈 6편을 연달아 본 것이나 마찬가지. 덕분에 엄청 긴 러닝타임을 견디느라 녹초가 되었지만 - 한번에 보는 바람에 - 그래도 한 편 보고 멈출 수가 없는지라 내리 다 봐버렸다.

  BBC 드라마를 본 많은 사람들이 영화보다 드라마가 훨씬 낫다고들 이야기한다. 영어가 들리는 사람들은 영화에서의 발음보다 드라마에서의 발음이 좀더 정확한 영국식 발음이라 그렇다고들 하지만 나야 뭐 그냥 영어도 안들리니깐 그런건 알 바 없고, 영화보다 드라마 속의 인물들과 배경이 더 소설에 충실하고 그 시대에 충실하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좀더 촌티나는 다섯 자매들과 좀더 거만하고 딱딱한 다아시, 그리고 콜린스 씨. 아 정말 대박 콜린스. 영화와 드라마는 소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조금씩 느낌이 달랐다. 영화가 관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좀더 세련되고 대중적인 모습을 그리려 했다면, 드라마는 원작에 충실하려 노력한 듯 했다. 영화보다 긴 러닝타임을 자랑하며 소설의 느낌을 세밀하게 잡아내려 한 흔적도 무시할 수 없다. 소설을 보며 속으로 큭큭대던 그 장면들이 그대로 눈앞에 벌어지는 꼴이란. 다시 본다 해도 혼자 좋다고 재밌다고 큭큭 대며 볼 수 있는 드라마다. 사길 잘했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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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 2006-07-01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재밌죠? ebs에서 해줄때 이거 보려고 시간 맞춰서 집에 들어왔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stella.K 2006-07-0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언제 했었나요? 오늘 방송한다고 하던데...BBC 버전인가?
 

  족히 금방 떠오르는 대형 사건들만 나열해도 우리나라의 성수대교 붕괴 사건,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 청소년 수련회 화재 사건, 대구 지하철 폭발 사건, 미국의 9.11 테러 사건, 인도네시아 쓰나미 사태, 유럽 어느 나라에선가 열차 탈선 사고 등이 떠오른다. 이런 대형 사건들은 꾸준히 일어났었고, 그것이 자연의 힘에 의해서 일어났건, 사람의 실수로 인해 일어났건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살아난 사람들은 있었으며, 그들은 때로는 운으로, 때로는 운+본인의 끈질긴 생명에 대한 의지로 위기를 모면했다.



* 영화 속의 열차 탈선 사고. 한 명 빼고 다 죽었다.

  <언브레이커블>은 그런 영화다. 영화 속에서 열차 탈선 사고, 비행기 폭파 사고 등등의 대형사고들이 일어났고 거의 대부분이 다 죽었지만, 단 한명만이 생존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는 털 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끔 신문에서 보면 아파트 13층에서 떨어졌는데 멀쩡했더라 하는 기사들을 볼 수 있다. 행운인지 운명인지 모르지만 어찌되었건 데이비드 던, 그는 살아남았다. 한때 잘 나가는 풋볼 선수였으나 자동차 사고 이후 이를 그만두고 같이 사고를 당했던 여자와 결혼을 해서 경기장 경비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신체장애의 어떤 흑인이 내게 메모를 남기고, 그의 말도 안되는 가설을 들으며 황당해하지만 이내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제 영웅이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난 범죄를 미리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두 아이를 살리고 살인범을 잡았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남았으니.

  마치 이 영화의 설정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황당무계한 영화들 - 가령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등등 - 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단지 예를 든 영화들을 보며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언브레이커블>에서는 그것이 현실임을 이야기한다. 나같이 맨날 넘어지고 깨지고 부러지는 녀석이 있다면 그 대칭점에는 넘어져도 맞아도 사고나도 다치지 않는 누군가가 존재할 것이다라는 가설. 듣고보니 고개를 끄덕일 만도 하다. 엘리야는 가상의 그를 찾기로 하고 결국 그는 나타났다. 그는 배트맨도 슈퍼맨도 <매트릭스>의 네오도, 세일러문도 아니지만 정말 무적인 것만 같았다. 아니야 나는 어릴적 수영장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다고. 그래? 그건 영웅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단점일 뿐이야. 그래. 끄덕끄덕.

  영화는 반전을 통해 가상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음을 알려주지만, 참으로 재미있는 설정이 아닐 수 없었다. 선이 있다면 악이 있고, 찬 것이 있으면 더운 것이 있고, 하얀 것이 있으면 검은 것이 있다. 맨날 아픈 놈이 있으면 결코 아프지 않을 놈이 있다. 여기엔 반대개념과 모순개념이 범벅되어있지만 영화가 설정하고자 하는 가설은 대립개념이니 굳이 반대와 모순을 구분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 가상에서 현실로 돌아왔지만 아직 영화를 보고 있는 나는 가상세계에 머물며 생각을 확장하고 있다.



* 서로 마주 보고 앉은 데이비드 던과 엘리야. 강자와 약자? 영웅과 악당? 완벽한 자와 결점투성이인 자?

  통계학에는 정규분포곡선이라는 것이 있고, 이는 평균치에 가까울수록 빈도가 높고 양극단으로 갈수록 빈도가 낮아지는 모양의 곡선을 의미한다. 우생학이라고 하여 정규분포곡선의 아랫부분을 인위적으로 잘라내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실패했다. 아래쪽 곡선을 아무리 잘라내도 나머지 곡선에서 다시금 꼬리가 다시 형성되기 때문이었다. 생물학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아래 곡선에 위치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돌연변이 혹은 변종으로 간주되지만 이들이 없이는 이상적인 사회가 될 수 없다.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잘 사는 사회라는데 이견이 없을테지만 그때의 행복이라는 것은 사회적, 생물학적으로 온전한 중간층 이상의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규분포곡선의 아랫쪽에 위치하는 이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단점을 극복하고 행복할 수 있으며 때로는 중간곡선, 상위곡선에 있는 이들보다 더 행복한 경우들도 많다. 우리는 이들을 잘못된 개체로 취급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어쩌면 인간종의 진화에 있어, 생존에 있어 기여할 수도 있다.

  과거 공룡이 어떤 이유로 멸종되고 말았지만 조그만 벌레녀석들은 살아남았다. 그 녀석들은 인간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인간 역시 신체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이후의 인간 존재에 있어 발전과 생존에 기여할 수도 있다. 어느 학자에 의하면 역사를 돌아봤을 때 지나친 엘리트주의를 앞세우며 인위적인 도태를 시도하였던 집단은, 다양성을 인정했던 집단에 비해 융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나친 엘리트주의와 무결점주의는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더 낮은 단계의 사회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완벽, 이상 사회라는 것은 모든 것이 정말 완벽하고 결점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다양성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회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고 섭리이다. 영화 속에서 엘리야는 자신이 지닌 신체적 단점을 비극이라 느끼며 살아왔지만 결국 그러한 생각은 비뚤어진 결과를 낳고 말았다. 지금의 내 처지가 남들보다 못하다고 해서 비관할 필요 없다.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은 자연의 섭리에 따른 것이며, 왜 하필 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우연이라고 말 할 수 밖에 없겠지만, 비극을 극복한 뒤에 올 행복은 저 위에 있는 이들보다 더 갚지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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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7-01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고딩 때 영화감상반에서 본 것 중 하나네요. 상당히(실은 대단히) 지루했었죠.

마늘빵 2006-07-02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조금 지루한 면도 있는데 생각해 볼 여지는 많은 영화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