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상 - Mr. Know 세계문학 15 Mr. Know 세계문학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책 제목만큼은 못들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추리소설이다. 그러나 이토록 무게감 있고 가벼이 보지 못할 추리소설도 따로 없을 것이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 소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고, 이 책을 산 사람이 많아도, 이 책을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는 감독이 영화를 설명하며 그런 말을 했다. 사실 이 소설에 등장하지도 않는 부분(영화에만 있는)에 대해서 움베르트 에코에게 편지를 써서 그 부분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고 말 한 독자(?)도 있었다고 한다. 영화 <장미의 이름>은 봤어도, 소설 <장미의 이름>은 사놓고 보지 않은 것이다. 영화와 소설이 정확히 일치 하지 않으니 원작 소설을 보지 않은 채 영화만을 가지고 <장미의 이름>을 논하는 것은 위험하다.

  세계적인 지성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는 움베르트 에코. 그는 정말 천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다재다능하다. 엄청난 지식을 소화해내고 많은 글을 생산해내는 다작가이지만, 글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글을 쓰는 작가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한 권의 책을 내놓는 부류가 있고, 글쓰기를 글읽기 하듯 다작을 하는 부류가 있다. 아무래도 전자의 글은 좀더 깊이가 묻어나게 마련이고, 후자의 글은 깊이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움베르트 에코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솜씨를 보인다. 유럽의 유명 언론에 칼럼을 쓰는가 하면, <장미의 이름>과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도 하고, 본업인 기호학자로서의 이론가이기도 하며, 동시에 철학과 문학과 역사와 미학의 전문가이며 이 분야에서도 많은 글을 토해내고 있다. 중세철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컴퓨터도 잘 다룬다. 더불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는 물론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까지 능숙하다.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학자다. 그가 쓴 책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번역되어 있다.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논문 작성법 강의> <미의 역사> <소크라테스 스트립쇼를 보다> <포스터 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철학의 위안> 등 일일히 언급하기도 힘들 정도다.

   <장미의 이름>은 그의 여자친구의 권유로 재미삼아 시작해 본 작품이다. 누구는 재미삼아 쓴 작품이 이 정도이니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고. 본래 그는 이 이 작품의 제목을 <장미의 이름>으로 잡지 않았다. <수도원 살인 사건> <아드소의 수기> 와 같은 혹은 그와 비슷한 제목을 붙이려다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장미의 이름>이었다. 제목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것이 주는 어떤 비밀스러움과 중세적인 분위기가 소설을 대표할 수 있다고 믿었던게다. 서양에서 '장미'는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미 전쟁>에서의 장미, <그대는 병든 장미> 에서의 장미,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는 장미이다>에서의 장미, <장미 십자단>에서의 장미 등등. 후에 제목을 붙이고,  베르나르의 '속세의 능멸을 위하여'의 싯구절 '어디에 있느뇨'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에코는 밝힌 바 있다. 아벨라르는 '장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통해, 언어가 ㅔ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존재했지만 사라진 것을 드러내는지 설명했다. 제목을 붙이고 나니 <장미의 이름>에서의 '장미'의 존재는 매우 알쏭달쏭한 하지만 한편으로 깊은 의미를 지닌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에코가 우연히 접하게 된 어떤 중세의 책자가 이 소설의 발단이었다. 그는 실제 기록된 사건을 토대로 하여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여나갔다. 중세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당연히 중세를 배경으로 한 수도원 살인사건의 소설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고, 라틴어 지식 등 그가 가진 다른 재능들도 이곳에 집적되었다. 그 누가 이런 소설을 쓸 수 있겠는가. 에코가 아니면 안된다. 이 소설 속에는 중세 수도원의 분위기와 역사, 그리고 아리스텔레스의 시학에 관한 내용 등 풍부한 지적경험이 녹아있다. 하나의 어려운 고대, 중세의 철학자의 1차 서적을 읽는 듯 어렵기도 하다. 무슨 소설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앞부분의 그 역사와 배경에 대한 길고 긴, 지루하기까지 한 글은 출판사에서 잘라내자는 제의까지 했으나 에코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장면이 없다면 소설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독자는 900쪽에 달하는 두 권 짜리(한글판)의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을 읽어야만 했다. 이 책을 내가 접한 것이 이번이 두번째. 처음 접했을 땐 도통 무슨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용 파악 조차 하기 힘들었다. 중세에 대한 지식도, 고대에 대한 지식도 가진 것이 없는 채로 이 지적고통과 지루함을 안겨주는 소설을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다 읽긴 했다만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는 그런 경험이었다. 지금은 다행히 '완전히' 라고는 못하지만 내용파악과 그 의미를 해독했다고 생각한다. 추리소설을 읽으며 이것을 '즐김'의 대상이 아닌 '해독'과 '이해' 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우습지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윌리엄 수도사. 그는 매우 근대적인 사람이다. 안경과 나침반을 사용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 위에 사건을 조사하며, 이성을 사용한다. 하지만 수도원의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그와 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믿음, 신, 구원 등 철저히 기독교적 교리에 의한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사건을 바라본다. 그 극단에 있는 이가 베네딕트 수도회의 베르나르 귀이다. 화려한 언변과 찍 소리 못할 카리스마로 순식간에 한 수도사와 여인을 악마와 마녀로 둔갑시키는 그에게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 사건을 바라보는 또다른 인물 아드소. 아직 10대인 아드소는 윌리엄 수도사를 따라다니며 세상을 배운다. 이 소설은 이 어린 아드소가 어린 시절 윌리엄 수도사의 곁에서 겪었던 사건을, 윌리엄의 나이가 되어 과거를 회상하며 서술한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다양한 측면에서 이 책을 바라 볼 수 있다. 이성과 신앙, 과학과 종교, 중세 수도원의 역사와 갈등, 마녀재판, 금해야 할 것과 금지된 것들, 책의 가치, 도서관의 역할, 사랑, 지식, 기호와 텍스트, 사물의 본질, 앎과 지식 등등.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사색하려면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매번 반복되는 독서를 해야 할 터이다. 너무나 많은 주제들이 집적되어 일일히 다 살피지 못하는, 수많은 지적체험으로,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뭔가 뿌듯하면서 머리가 가득찬 느낌과 동시에 아무 것도 알게 된 것이 없는 듯 벙찐 모습을 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매력이다. 두 권의 이 책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직도 그 때의 그 느낌이 묵직하게 나를 눌러온다.

 

 ***
 1. 신화학자 이윤기 씨는 이 책을 86년 처음 번역하고, 이후 여러차례 손을 보며 재차 번역을 하며 틀린 부분을 고쳤다. 또 이윤기 씨의 이 수고에는 철학자 강유원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 텍스트를 공부하며 원전번역의 잘못을 지적한 책자를 만들어 출판사 측에 전달해줬고 이윤기 씨는 이를 바탕으로 번역을 시도하였다.

 2. <장미의 이름>을 통해 철학공부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도 재밌는 작업일 듯 하다. 기호와 텍스트의 측면에서 해석학을, 또 소설의 사건의 중심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또 소설의 배경이 된 중세 기독교와 철학을 신학을, 또 이성과 신앙, 과학과 종교의 관점에서 과학철학과 신학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을 듯 하다. 900장 짜리 두 권이라는 책이 주는 무게감은 이 소설 속에 들어있는 갖가지 지식의 양념이 주는 무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터이다. 다른 묵직한 책보다 이 두 권의 책을 바라봤을 때 느껴지는 무게감은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일게다.  

3.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때는 내가 좀더 내 머리 속에 철학지식이 쌓여있기를, 그리고 이를 토대로 많은 철학적 고민들을 했길 기대한다. 미래의 나에게.

 

***
인상적인 몇 구절을 첨부한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 (서문) (상권 p23) 

들판에 가을이 오면 꽃이 시들어 꽃대에서 사라져 버리듯이, 인간 또한 그렇게 사라져 버릴 터인즉, 인간의 외양만큼이나 덧없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 (보에티우스) (상권 p37) 

진정한 앎이란, 알아야 하는 것, 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알 수 있었던 것, 알아서는 안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 윌리엄 수도사) (상권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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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마니아 2006-07-12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호 이윤기 씨가 번역한 거였군

치유 2006-07-13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다시 떨림이 있네요..참 두근 거리며 봤던 몇년전의 기억이예요..특히 장서관 살필때는..저도 다시 한번 읽어 봐야 겠어요..

마늘빵 2006-07-13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촬리 / 응 이윤기 씨 번역. 86년 초판때는 오류가 많았다는데 지금은 다 개선됐다지.
배꽃님 / ^^ 아 정말 어렵게 재밌게 읽은 책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집적되어있었어요. 철학적 주제들, 중세의 숭고하고 비밀스런 분위기, 아리스토텔레스, 책, 도서관 등등. 나중에 다시 보고 싶어요.

체다카 2006-08-25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윤기씨 유명세에 비하면 번역이 영 맘에 들지 않았어요. 이단논쟁 부분이나 주석 그리고 전체적인 번역문체상의 껄끄러움이 많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시간이 나면 꼭 영역판이라도 구해 읽고 싶은 책이랍니다. 구경 잘 하고 갑니다.
 

* 지난 일요일에 공연을 마쳤기에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그가 다시 무대에 오를 날이 언제인지는 나도 알 수 없습니다.


   "내 사랑을 말하기엔 하룻밤은 너무 짧습니다."
   "오! 스무살 난 아내는 어쩌면 그렇게도 애절하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요?" 
  아내를 혼자 버려둔 채 이렇게 당신들 앞에 끌려와야 했던 오늘밤은
  정말이지 내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악몽이 될 것입니다.
  아! 아내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신일의 진술> 

 

  대단한 공연이었다. 연극의 묘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모노드라마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좋았다. 참으로 좋았다. 이런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종로, 대학로 길거리에 지나다니다 보면 공연 포스터 참으로 많이 붙어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좋은 공연인지 아닌지 구별하기란 까막눈인 나는 모른다. 영화를 많이 보면서 영화에 대한 취향과 나름의 안목이 생겼지만, 연극을 본 것은 내 인생 스물 여덟 해에 있어 딱 네 번. 한번은 대학 2학년즈음이었나. 당시 수강했던 한 교과의 교수님께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오너라 했고, 처음 연극을 접했을 때, 더군다나 그것이 <고도를 기다리며>였다는 것이 내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무엇이든 처음이 중요하다. 첫 경험이 어떤가에 따라서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연극의 첫경험은 매우 탁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연극은 영화보다 비싸다는 이유로, 항상 돈에 쪼들려 살던 나는 언제나 영화를 택했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쉽게 선택할 수 있기에는 연극보다는 영화였다. 솔로 시절이 길었던 내가 더군다나 오봇하게 누군가와 함께 연극을 보러가기란 어려웠다. (연극은 연인끼리 봐야한다는 편견을 버려. 그래 맞다. -_- )

  내 생에 경험한 몇 안되는 연극은 모두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강신일의 진술>은 처음 내가 연극을 접했던 <고도를 기다리며>와는 또다른 색다른 감동을 선사해준다. 난 이렇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좋다. 책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어떤 형태로 전해지든 간에 뭔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은 언제나 환영이다. 하지만 생각거리를 던져준다고 하여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불친절하게 툭 던져놓고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고, 어떤 것은 친절하게 메세지를 전달해주려 노력한다. 또 어떤 것은 나름의 줄거리를 가지고 진행하지만, 중간중간 대뇌피질에 찌릿찌릿 전기가 흐르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모두 좋다. <강신일의 진술>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봤기 때문에, 그저 이름과 제목과 포스만 알고 봤기에 더욱 좋았지 싶다. 함께 본 이가 내게 작품에 대한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의도였다.

***

  연극은 매우 철학적이다. 또 매우 흥미롭다. 마치 소설을 한편을 읽은 것처럼. 또 스릴 넘친다. 찌릿한 지적 자극과 함께 짜릿한 섬뜩함을 느끼게도 해준다. 딱 내가 좋아하는 그런 작품이다. 적당히 지적이고, 적당히 흥미롭고, 적당히 짜릿한.

  환상과 실제. 철학에서 매우 흥미롭고 흔한 주제이면서 언제나 많은 생각거리를 선해주는 주제이다. 내가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가, 사물을 인식하는가의 인식론적 문제. 많은 영화와 책에서 써먹히는 주제이면서 다루기 힘든 주제이기도 하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실제세계와 가상세계를 다루었고, 어떤 것이 실재하는 세계인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실재하는 세계와 상관없이, 우리는 어떤 세계를 실재세계라고 믿는다. 그리고 또 무엇을 원하는가, 를 다루었다.

  믿고 싶은 것과 믿어야 하는 것은 다르다. 믿고 싶은 것은 나의 희망이 가미된 환상이며, 믿어야 하는 것은 불행이 그곳에 있더라도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환상은 무엇이고 실제는 무엇인가. <강신일의 진술>에서 주인공이  '환상과 실제'라는 책을 썼다고 했을 때, 이미 난 눈치챘다. 내 마음 속에서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머리 속에서 번개가 쳤다. 사랑하는 여인이 살아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여행을 왔다고 믿고 싶었다, 그녀와 전화통화를 했다고, 처음 그때를 떠올리며 다정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죽었다. 그녀와 함께 여행을 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녀와 전화통화를 하지도 않았다. 다정한 대화는 없었으며,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다. 믿고 싶었다 하지만 믿어야 했다. 인정해야 했다.

  어쩌면 환상 속에 살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더 나은 삶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매트릭스'에서 리얼세계로 나올 필요도 없고, 그것을 탐구한다는 것 자체도 무의미하다. 현실 속의 불행감보다 환상 속의 행복감이 낫다면, 깨지 않는 것도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좋은 방법일 터이다. 이건 아니야 어서 인정해 괴롭겠지만 눈을 떠, 라고 말리고 다그치고 윽박지르며 두들겨봐야 소용없다. 그 사람은 이미 행복한걸. 우리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이 아니던가. 행복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 행복하기 위해 큰 집을 사고, 행복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행복하기 위해 책을 보지 않던가. 단지 모두에게 행복에 대한 관심과 관점이 다를 뿐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누구도 불행해지길 원하지 않는다. 만일 나는 불행해지길 원해 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또한 객관적인 불행의 조건을 통해 주관적인 행복을 획득하려는 것이다.  

  존재하는 실제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은 결국 삶을 살아가는 주체의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환상 속에 살며 현실을 사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객관적인 도덕규칙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행복감과 상관없이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차원에서 어떤 제제를 가해야 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 속에서 보여지는 '그'의 환상에 때로 가슴저리게 아프고, 욱신욱신 쿡쿡 통증이 오며, 공감하고픈 것이 나의 현실이다. 그의 행각(?)과 별도로 내가 그가 되어 그를 느끼고 싶었다. "오늘 밤 아내 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래. 그러고 싶었다. 세상에 없는 아내를 불러내고 싶었다.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가슴 아픈 사랑의 이야기이며, 환상과 실제의 이야기이며, 섬뜩 놀래키는 추리물이기도 한 이 연극을 연출하고 열연한 박광정씨와 강신일씨에게 박수를. 두 분 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다.

***

하나. 5년만에 무대에 다시 올린 이 연극을 종료 하루 앞두고 본 것은 정말 잘 한 일이었다.
하나. <공공의 적>을 통해 강렬하게 다가왔던 그의 힘이 연극에서 또다른 더 큰 빛을 발했다.
하나. 박광정과 강신일을 다시 주목하게 된 작품이었다.
하나. 연극의 원작이 된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하나. 나중에 다시 무대에 올린다면 이 연극을 또 한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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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s678 2006-07-16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일지의 소설 <진술>을 토대로 만든 연극인가 봐요. 5~6년쯤 전에 정신없이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책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는 독특한 구성이랍니다. 연극이 끝났다니 아쉽네요.

마늘빵 2006-07-17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소설을 바탕으로 했어요. 소설도 보고 싶어요.
 
하얀 강 밤배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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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빛 이쁘장한 표지를 달고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하얀 강 밤배>. 1989년에 쓰여졌지만 우리나라 말로 번역이 된 것은 2005년이다. 그러니 매우 오래전에 쓰여진, 하지만 이곳에서는 얼마 나이를 먹지 않은 갓난 아기인 셈이다. 그녀의 많은 소설들 중 이 책은 가장 안팔렸다. <키친> <하드보일드 하드럭> <하치의 마지막 연인> <티티새> <도마뱀> 심지어는 가장 나중에 나온 <불륜과 남미>의 판매량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물론 그녀의 이름을 달고 나온 소설은 다른 책들에 비해 많이 팔리지만.

  외면 받은 작품 치고는 참 느낌이 괜찮았다. 그녀의 모든 소설들은 가볍게 말하자면, 다 거기서 거기인 내용에, 거기서 거기인 감성을 건드리고 있다. 그런데 불구하고 비슷비슷한 환경에 처한 등장인물들에 비슷비슷한 줄거리, 그리고 비슷비슷한 글의 구조와 느낌, 사실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 중 어느 하나만을 집어 골라 봤다면 그만 봐도 좋을 법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손이 가는 것은, 내가 그녀의 소설을 모조리 읽어버릴테다, 라고 말한 것과는 별도로, 그 감성에 취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픈 구석을 바늘로 콕콕 찔러 괜찮다 싶으면 또 두 눈 젖게 만들고, 방 한 구석에 벽 보고 앉아 흑흑 울고 있으면, 아무 말 없이 뒤에서 살며시 안아주며 토닥여주는, 병 주고 약 주는 소설들. 하지만 앓던 병 나 자신 조차 모른 척 하며 살기보다 아파도 한번 더 찔러주고 건드려주며 마음 속 딱딱한 응어리 쪼개어주는 그 아픔이 싫지 않다.   한번 와락 눈물 쏟고 나면 상쾌해진단다. 다 털어놓아보렴. 울어도 괜찮아. 그것이 그녀의 소설에 자꾸만 손이 가는 이유일게다. 그런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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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강 밤배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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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다들 누가 옆에서 그냥 자주기를 바라는 존재인가봐. 여자도 있고, 외국인도 있어. 하기야 나, 그냥 적당히 잠들 때도 있지만. ...... 어쩌면 지친 사람들 옆에서 자면서, 잠든 사람의 숨결에 내 숨결을 맞추면서 그 사람의 마음 속 어둠을 빨아들이는 건지도 모르겠어. 자면 안돼 하고 생각하면서 그만 꾸벅꾸벅 졸다가 무서운 꿈을 꾸곤 하거든. 초현실적인 꿈. 침몰하느 배에 타고 있는 꿈, 모아놓은 동전을 잃어버리는 꿈, 창문으로 어둠이 들어와 숨이 막히는 꿈...... . 숨이 막혀서 놀라 잠이 깨지. 무서워, 그런 때는. 그런데 옆에서 자는 사람을 보면, 아아 지금, 이 사람의 마음의 풍경을 봤구나. 이렇게 외롭고 괴롭고 황량한 풍경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왠지 무서워져."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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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모른다. 그를. 클림트라는 이름과 그의 몇몇 작품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이다. 음악엔 관심 있지만 - 그것도 장르가 한정 되어 있지만 - 그림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았다. 철학을 했어도 해석학, 분석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철학에는 관심을 보였지만 미학을 들을 땐 거의 졸았다. 하긴 다른 수업에서도 졸았긴 마찬가지구나. 보통 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림에 대한 관심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에 생초짜인 내가 미학에 관심을 갖기는 환경상 어려웠다. 이것은 내가 처음 악기를 배우고자 할 때 피아노나 기타를 배우지 않고 드럼을 배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피아노나 기타는 원래 어릴 때부터 해서 좀 치는 녀석들이 많다. 그래서 20살 먹고 남들보다 빠르게 뛰어난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잘 선택하지 않는 악기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드럼이 간택(?) 되었던 것이다. 나의 선택은 적중해서 밴드 결성시 가장 희귀한 파트가 드러머였고, 나는 안되는 실력에도 초반부터 괜찮은 밴드를 잡아 그 생활을 시작했었다.

  영화 <클림트>를 보기 위해 오는 관객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나와 같은 부류. 즉 클림트가 어떤 인물인가를 영화를 통해 알기 위해 오는 사람들, 그리고 또 하나는 평소 클림트와 그의 그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영화가 개봉되자 그것을 확인하고 어떤 식으로 삶을 그려냈는가를 보기 위해 오는 사람들. 그의 작품이 그려진 과정과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 오는 부류도 넓은 범주의 후자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영화는 나와 같은 부류에게도, 후자의 부류에게도 만족감을 주지 못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삶에 촛점을 맞춘 것도 아니고, 그의 작품 활동에 촛점을 맞춘 것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놓여있는 듯한 인상이다. 양자 모두를 잡으려 했던걸까, 아니면 양자 모두 초월하여 스치고 지나가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의 삶에 있어서, 작품에 있어서, 특정한 시기를 잘라내 그 평면을 비춤으로써 클림트란 인물을 관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오히려 그의 삶도, 작품도 한 편의 짧은 영화로 보여주지 못하느니 더 낫겠다는 판단이었을지도.



   그가 미술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성향과 파를 조성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1862년에서 1918년까지를 살아간 그가 죽은지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지금, 클림트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왜 지금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어떤 시도나 그를 기념할 만한 뭔가를 찾지 못하겠다. 난 그저 누군가가 그의 그림이 좋다고 하여 보게 된 것이고,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 뭔가 조각조각 짜맞춘 듯 하면서 그것이 묘한 아름다움을 구성한다는 것 정도 밖에는 알지 못한다. 

  영화를 봄으로써 되려 그림에 대한 나의 무지와 그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차버렸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그림을 접했을 때의 그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듯 했다. 순차적으로 뭔가를 보여주기 보다는 그의 삶의 중간중간을 잘라내어 하얀 도화지 위에 툭툭 던져놓고 멋대로 짜깁기 한 듯한 느낌이다. 영화를 봄으로써 그의 그림을 본 듯한 이 느낌. 그것으로 만족한다.

 * 함께 본 이의 덕분으로 영화 속의 또다른 인물 에곤 쉴레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녀' 가 아니었다면 클림트 말고는 등장인물들을 그저 엑스트라 쯤으로 여기고 봤을 터.



* 이 사람. 에곤 쉴레. 손가락 제스쳐가 참 인상적이었다. 얼핏 본 어느 책에서 그가 클림트를 존경하며 따르고 교류했다는 글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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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6-07-07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은데... 클림트 그림 마음에 드는데... 존 말코비치도 마음에 드는데... 끄응~

마늘빵 2006-07-07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나침반님 클림트 모르고 가면 그냥 막 던져주는 먹이 구경만 하고 그냥 오게 되는거 같아요. 제가 그랬어요. 따옴표까지 신경쓰실건 없는데. ㅎㅎㅎ 나침반님은 너무 눈치가 빠르셔.

프레이야 2006-07-07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림트 읽고 봐야겠어요..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