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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덕과 악덕에 관한 철학사전
A. C. 그레일링 지음, 남경태 옮김 / 에코의서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한번에 봐도 제목에서 확 끌리는 제목을 달고 있는 <미덕과 악덕에 관한 철학 사전>은 도대체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어떤 글을 담아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어려운 강단 철학이 아닌 아마도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하지만 그 단어가 내뱉는 무게감은 상당한 그런 주제를 가지고 가볍게 또 진지하게 쓰고 있을 것만 같은 이 책 매우 끌린다.
제 1부 성찰해야 할 것들, 제 2부 버려야 할 것들, 제 3부 아껴야 할 것들로 크게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일단 목차부터 재밌다. 저 큼지막한 제목들 아래로는 작은 여러가지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성찰해야 할 것' 에는, 도덕주의, 관용, 자비, 예의, 타협, 두려움, 용기, 패배, 슬픔, 죽음, 희망, 인내, 신중함, 솔직함, 거짓말, 위증, 배반, 충성, 비난, 처벌, 망상, 사랑, 행복이 위치해있고, '버려야 할 것들'에는 민족주의, 인종차별, 동물차별, 증오, 보복, 무절제, 우울, 그리스도교, 죄, 회개, 신앙, 기적, 예언, 순결, 이교, 신성모독, 외설, 빈곤, 자본주의가, 마지막으로 '아껴야 할 것들'에는 이성, 교육, 소질, 야망, 연기, 예술, 건강, 여가, 평화, 독서, 기억, 역사, 리더쉽, 여행, 사생활, 가족, 나이, 선물, 사소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세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는 작은 항목들을 보고 있노라면 재밌는 점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버려야 할 것들에 신앙과 신성모독, 그리스도교와 이교가 함께 있는 것이 재밌다. 신앙을 버리라하면서 신성모독을 버리라한다. 겉으로 보기에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것들이 함께 존재한다. 허나 엄밀하게 신앙과 신성모독은 대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으로 살폈을 때 얼핏 대립되어 보이는 이것들이 함께 있다는 것은 재밌다. 그리스도교와 이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교는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시각이 강하고, 이교는 그리스도교와 맞은편에 위치해 있는 녀석이다. 둘이 함께 버려야 할 것들 안에 있다는 점은 재밌다.
때로 어떤 이들은 아껴야 할 것들에 있는 요소들을 버려야 할 것들로, 버려야 할 것들에 있는 요소들을 아껴야 할 것들로 옮기고픈 욕망을 느낄 수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개인의 주관적인 관점을 떠나 세 카테고리에 담겨있는 녀석들은 대개 우리가 수용할 만한 고개를 끄덕일 만한 기준으로 나뉘어져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의 머릿말에는 이 책의 서문을 대신하여 줄리어스 헤어의 수필집 <진리를 향한 추측>의 서문의 일부를 발췌했다.
"이 책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몇 가지 생각을 제시할 것이다. ...... 생각이라기보다는 거의 꿈이라고 할 만큼 어렴풋하고 희미한 내용이지만...... 만약 여러분이 이미 다른 책을 읽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 책을 읽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 모든 설비를 갖춘 완성된 집을 사고 싶은 사람이 굳이 재료를 구하러 채석장까지 찾아올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구성하고 싶다면, 그래서 거기에 필요한 재료를 찾고 있다면 이 책에서 여러분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본래 런던대 철학교수이자 옥스퍼드 객원교수인 A.C.그레일링이 <가디언>지에 <유념해야 할 한 마디>라는 제목으로 매주 기고하던 것을 모아 다듬고 재배열하여 묶어낸 것이다. 각각의 글은 매우 독립적이며 또한 매우 짧다. 그래서 쉽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짧은 글이지만 많은 사색을 할 수 있다. 저자 그레일링은 강단철학보다 일상생활의 철학을 하는 자로 철학의 대중화라고까지 하면 뭔가 거창하지만 일상에서 쉽게 우리가 접하는 철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는 가디언지 말고도 타임즈, 파이넌셜 타임스, 옵저버, 이코노미스트, 인디펜던트언 선데이,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먼트, 뉴 스테이츠먼 등의 신문과 잡지에, 또 BBC 방송의 여러 프로그램에 활발하게 참여하며 자신만의 철학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은 그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일들에 대한, 주제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며 주의주장을 담아내기보다는 편안하게 사색하고자 우리를 이끈다. 사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일상의 소재에서 찾아낸 사색은 좀더 무겁고 심층적인 것으로 옮겨간다. 그것이 바로 철학이다. 그런 차원에서 <미덕과 악덕에 관한 철학 사전>은 일종의 입문서이다.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사색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하는 철학 입문서이다.
분류체계나 주제는 맘에 들었지만 내용이 아무래도 매주 신문에 기고한 글을 재구성한 것이다보니 좀더 깊이있는 사색을 기대했던 나에겐 약간의 실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지나친 기대 때문이지 이 책이 결코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책은 충실하게 독자를 안내해줬으며 독자를 남겨놓은 채 빠져나왔다. 비슷한 책을 원한다면 우리네 철학자인 김용석 씨의 <두 글자의 철학>을 권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책보다는 <두 글자의 철학>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둘 모두 일상의 철학을 담은 철학책이긴 하지만 <두 글자의 철학>이 좀더 사색의 깊이가 담겨있다고나 할까. 또한 아무래도 번역서가 주는 텁텁함보다 본래 한글로 쓰여진 자연스러움이 더 편안함을 안겨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