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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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다! 타월 위에는 한 점의 핏자국도 남아 있지 않다. 아무리 봐도 순백의 시트 위는 깨끗하다. 머릿속이 온통 까매지고 정신이 아뜩해져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전거를 타지도 않았고, 심한 운동을 한적도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침대 시트를 샅샅이 살피고 타월을 뒤집어보기까지 한다. 그러나 짧고 구불구불한 몇 올의 털만 떨어져있을 뿐, 내 몸에서 흘러나왔어야 할 붉은 꽃잎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시트 위에 천천히 커버를 덮는다.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먹먹하다. "너 되게 뻑뻑하더라"
(낭만적 사랑과 사회 中)-33쪽

주차장까지 걸어 나오는 동안 그는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아주 잠깐 우리의 손끝이 스쳤지만 우리의 눈빛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자동차의 운전석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건 다른 남자애들한테도 흔한 일이었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 괜찮았다. "통금이 열시라면서? 좀 늦었네." 나는 다소곳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줄게 있었는데. 잊어버릴 뻔했네." 그는 뒷좌석에 손을 뻗쳐 쇼핑백을 집었다. 실내등을 켜자 황갈색 쇼핑백에 선명히 아로새겨진 루이뷔통의 로고가 드러났다. 쇼핑백 안에는 백과 똑같은 재질의 종이 상자가 들어있었다. 조심조심 상자 뚜껑을 열어보았다. 반투명하고 매끄러운 습자지로 한 겹 덮인 그것은 모노그램 캔버스 라인의 진짜 루이뷔통 백이었다. 짝퉁이 아닌 진짜 명품을 갖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비싼 거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마. 면세점에서 그냥 하나 사놨던 거야."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였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 中) -3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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