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 : 불멸의 사운드트랙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164
박신영 지음 / 살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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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언더 스코어링'은 고전 영화음악에서 흔히 사용되던 기법으로 '미키 마우징'이라 불리기도 한다.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음악이 그 장면을 추적하는 스코어링 방법이다. 발레와 서커스에서 이미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졌으며 영상과 일치하는 매력으로 등장인물의 감정을 보다 증폭시키는 효과를 이끌어낸다.

'언더 스코어링'과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다른 뜻을 갖고 있는 '오버 스코어링'은 스코어가 영화 속의 다른 음향에 비해 좀더 과장된 소리로 들리게 하는 방법이다. 영화 속의 효과음은 거의 제거된 채 처음부터 끝까지 스코어만 들리는 기법으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데에 있어 탁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자칫하면 영화의 흐름을 깨는 역효과도 일으킬 수 있어 작업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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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살림지식총서 222
이진홍 지음 / 살림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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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번, 죽음도 한번, 태어남도 한번, 소멸도 한번뿐이다." (쉴러)-8쪽

어떤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고찰한다는 것은 이성의 질서에 따라서 고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부분적으로는 오히려 열정과 병리학의 질서를 따른다. 이것이 자살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자살에 대한 이성적인 논증들을 알고는 있지만 그 논증들이 자살자의 고통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 자살자의 고통을 전해주는 말은 이성적인 논증에 이르지 못한다. 인간이 인간을 진실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정이입이 필요하고, 나의 과학적 논증이 적어도 과학이라고 자처하려면 현상에 의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자살에 관한 논증들은 이 둘 사이를 영원한 평생선처럼 오락가락하는 것이다.-9쪽

인간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자신을 가장 잘 제어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경우가 아니라면 그는, 말하자면 끊임없는 장광설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가 될 뿐으로서 오히려 자기가 아닌 타인으로서 자신을 유포하는 셈이다.(디누아르, <침묵의 미덕>)-13쪽

인생이란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오래 끌어가지 않으면 안 되늰 것과 같은 그런 애착이 가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대의 본질이 원래 어떻게 만들어져 있든 간에 남과 마찬가지로 그대 역시 죽지 않을 수 없으며, 품행이 나쁘고 신을 모독하는 일을 해온 사람도 마찬가지로 죽어간다. 그러므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온갖 선물 중에서 적절한 시기에 죽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을, 각자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영혼의 약으로서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더구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선물은 자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리니우스, <박물지> 제28권 제 1장)

신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만능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은 설사 스스로 자살하기를 바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이 가능하다.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자 최상의 선물이다.(플리니우스, <박물지> 제2권 제7장)-18-19쪽

"자살은 설사 그 사람 자신에 있어서는 부정한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국가에 대해서는 하나의 부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 15장)-25쪽

자살이란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빚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자 그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에, 그리고 만일 이것이 의도적이고 자유롭게 영속적으로 행해진다면 오직 신에게만 속하는 권한을 사취하는 신에 대한 범죄이므로 자살은 치명적인 죄악으로 간주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33쪽

소크라테스는 자살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도덕적으로 나쁜 것임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것이 철학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철학자에게 죽음은 평정을 가지고 맞이해야 할 단순한 불행이 아닌, 자기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일반인에 대해서는 원하는 때에 죽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철학자에게는 인정하고 있다. -62쪽

극기주의는 그것이 자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과 그 영역의 경계 밖에 잇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이고 자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확고하게 붙잡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자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다시말한다면 자살 행위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합리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기만 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 자유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65쪽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방법이 죽음 말고는 다른 것이 없을 때 이 세계를 떠날 시간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오직 철학자에게만 속하는 지고의 존엄이다. (세네카)-66쪽

그런데 모두가 자살을 개인적 의지의 승리로 간주하고는 있지만, 그 의지도 그 승리가 쟁취되는 순간에는 그 지지의 근거를 잃고 만다. 만일 시체가 다시 되살아난다면 그 승리가 결정적인 것만큼이나 순간적이라는 것을 알 것이지만 이제 그 승리를 연장시키고 그 기억을 보존하고 그 결과를 전개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남아 있는 전 인류의 몫이 된단 말인가? 자살을 어떠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하는 의지의 부정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그 반대로 생에 대한 보다 밀도 깊은 긍정의 징표로 간주한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한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죽음의 의지가 존중되어야 한다면 이것 또한 이기적인 쾌락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살고자 하는 욕망과 이 의지의 실현 사이의 장애가 너무 크기 때문에, 삶에서 의지를 실현시킬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그 의지라는 현상 자체를 소멸시켜 버리는 자살 이라는 형태로서 그것을 확인한다는 것은 의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고통을 거부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68-69쪽

만일 자살이 허용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만일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자살 또한 허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이것이 바로 윤리의 본질에 관한 문제다. 자살은 말하자면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살을 알아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수증기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수은 증기를 만져보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그런데 자살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비트겐슈타인)-71-72쪽

"각자가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결정하는 곳에서 (타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그를 위해 걱정해 주는 것뿐이다."(키에르케고어)-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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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06-06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던가요?

마늘빵 2006-06-0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요? 네! 요 책 읽고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보면 딱 좋지 않을까 싶어요.
나아가 4만원에 육박하는 <죽음 앞의 인간>도 볼 수 있다면 더 좋을듯. 자살에 대해 짧은 시간 안에 축약적으로 볼 수 있는 책입니다.

가넷 2006-06-06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것 말고도 살림지식총서중 몇권 골라잡아서 지를까 생각중인데.. . 질러야 할까봐요. 정말 저렴한 가격에 질은 어떨지 궁금했었는데... 그리 나쁜 평들은 없는것 같으니까...음.;

마늘빵 2006-06-06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살림지식총서 괜찮은 거 많아요. 예전에 봤던 <르몽드>도 좋았고. 이번에 새로 산 <영화음악>도 아직 안봤는데 괜찮을거 같아요. 싸고 좋아요. 책 중에 제일 싸지 않을까 생각.

비로그인 2006-06-07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의 밑줄긋기 74쪽 때문에, 키에르케고르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이지요.

마늘빵 2006-06-07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 ^^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구판절판


그건 그렇다치고. 어쨌든 내가 여자를 찾는 목적은 육체적 행위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섹스 따윈 하지 않아도 좋다.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해도 상관없다. 함께 식사하는게 즐겁고,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어도 질리지 않고, 하루만 만나지 못해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평온해지는 그런 여자. 이를테면 평생의 반려자로 삼을 수 있을 만한 그런 여자와의 만남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비웃어도 좋다. 내가 원하는 건 바로 그런 플라토닉한 연애다. 나는 육체를 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와는 상관없는 관계도 동경한다. 너무 자기중심적인 모순된 얘기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내 안에는 두 개의 인격이 공존하고 있다. -17쪽

"그런거야, 꽃이 떨어진 벚나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건, 기껏해야 나뭇잎이 파란 5월까지야. 하지만 그 뒤에도 벚나무는 살아있어. 지금도 짙은 녹색의 나뭇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 그리고 이제 얼마 후엔 단풍이 들지." -506쪽

꽃을 보고 싶은 녀석은 꽃을 보며 신나게 떠들면 된다. 인생에는 그런 계절도 있다.
꽃을 보고 싶지 않다면 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지금도 벚나무는 살아 있다는걸 나는 알고 있다.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물든 벚나무 이파리는 찬바람이 불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인생의 황금시대에는 흘러가버린 무지한 젊은 시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늙어가는 미래에 있다. - 린위탕 -5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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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6-06-05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 책은 안 읽으신 분이 없으삼;
전 무서울 것 같아서 못 읽지만요 ㅠ_ㅠ

마늘빵 2006-06-06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전혀 안무서운데요. ^^ 재밌어요.
 
이지누의 집 이야기
이지누 지음, 류충렬 그림 / 삼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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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따뜻하고 넉넉한 글이었다. 비록 내 나이 얼마 먹지 않아 이 책에 등장하는 그런 가옥들에 산 경험은 없다만 어릴 적 내가 살던 그 막다른 골목의 셋방집. 방 두칸에 부엌도 없고, 화장실은 밖에 마당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는 곳을 다녀야만 했던 그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지금도 우리집은 극빈층이기는 하다만 그래도 화장실은 집안에 있지 않은가.

 어떤 분은 책 제목에 저자의 이름이 들어간 책은 오로지 책 하나만으로 자신이 없기 때문에 저자의 유명세를 빌려 팔아보려는 속셈이라고 하나, 또 나 역시 이에 일부 공감하나, 이 책에 저자의 이름이 들어간 것을 두고 이에 적용시키기는 어렵다. 저자는 이름 내세운다고 아무나 다 아는 그런 유명인물도 아니니 말이다. 이지누. 그는 사진 작가이자 기록문학가이다. 길 위에서 직접 사진을 찍고 돌아다니며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하여 글로 써낸다.  <이지누의 집 이야기>는 이런 그의 오랜 노력과 작업의 성과이다. 

  그는 집을 해부하고 곳곳에 대해 경험하고 보고 느낀 바를 서술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집의 개념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집이란 건물 그 자체만이 아닌 건물이 속해 있는 마을 입구부터 시작된다. 맨처음으로 골목이 나오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집이 위치해있는, 우리가 어릴적 노닐었던 그 골목도 우리의 집이다. 그는 골목이야기, 대문이야기, 울타리이야기, 변소이야기, 마당이야기, 지붕이야기, 우물이야기, 부엌이야기, 마루이야기,  창문이야기, 구들이야기, 방이야기 순으로 집에 대해 말한다. 목차에서 볼 수 있듯 우리가 집을 떠올리고 해부할 때의 그런 개념이 아니다. 마당, 울타리, 대문, 지붕, 우물 등 집이라고 했을 때 쉽게 떠오르지 않는, 우리의 상상 속에서 소외된 부분들에 대해 다룬다. 집은 우리가 먹고 자는 그 공간만을 가르키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고, 자신이 본 것을 떠올리고, 좋은 옛 글귀들과 함께 어우러지며 머리 속에서 집을 찾아간다. 그 따뜻하고 푸근했던 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는 비록 허름하고 불편했지만 정겨웠던 우리의 옛 집과 오늘날의 콘크리트 건물 아파트 빌라를 비교하며 이야기하기도 한다. 집은 단순히 사는 곳이 아니다. 집에는 철학이 담겨 있다.

"그러고 보니 집이란 목수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 탓인지 집은 주인의 생각을 빼다 박은 닮은 꼴일 수 밖에 없다. 그래야만 서로 서걱대지 않고 물 흐르듯이 집과 사람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P7)

 "요즈음에는 공동주택 중에서도 원룸이라는 주거형태가 인기를 얻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그곳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많이 탄다고 한다. 이는 공간을 지배하지 못하고 공간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네 살림살이에서 주어지지 않던 혼자만의 공간을 다스릴 힘이 없으니 상대적으로 외로워지는 것이다.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꿋꿋하게 견디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과거에 자신이 지니고 있던 사고방식과 조금씩 달라졌음을 고백하곤 한다. 사는 공간이 달라진다는 것은 사고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P49)

  사람이 공간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살아야 하는데, 오늘날엔 집의 구조에 의해, 집의 공간에 의해 사람이 다스림을 받는다는 그의 말은 매우 가깝게 다가왔다. 사람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생각이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태어나 자라는 그 환경에 의해 지배를 받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요즈음의 집들은 독립된 공간으로 이루어져있고, 사람들과의 왕래가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칸칸 구획이 나누어져있지 않고 부엌과 거실, 마루가 함께, 때로는 방도 함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는 독립되어있지만, 안에서는 뭉뚱그려져있는 것이다. 이는 타인에 대한 내 마음을 닫아버리는 결과와 함께 내 안의 편리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상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내가 사는 집은 나를 지배한다.

  <이지누의 집 이야기>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옛 집의 구조에 대한 자세한 설명부터, 자신의 경험, 그리고 오늘날의 집과 옛 집의 비교, 또 집에 들어있는 철학에 이르기까지. 집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많은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해준다. 이 글을 읽고 난 뒤에는 내가 사는 집이 그저 먹고 자는 공간으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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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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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도 읽어도 실망시키지 않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은 모든 작품이 다 비슷비슷한 감성을 전달해주고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아직 읽지 않은 새로운 작품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펼쳐져있을까 궁금하게 만든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에는 중독성이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어거지'와 '인내'가 필요했지만,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은 자연스럽게 한권을 읽고 나면 다른 한권에 또 손이 간다. 아주 자연스럽게도. 그것이 요시모토 바나나를 지금의 위치에 있게 하지 않았나 싶다.

  이번엔 <티티새>다. 소설 속에서 '티티새'는 '츠구미'를 의미한다. 개똥지빠귀라고 하며 또 백개의 혀를 가지고 수다를 떤다하여 백설조(百舌鳥)라고도 한다. 개똥지빠귀는 참새목 딱새과의 한 종류로서 시베리아 북부지역의 평지나 산지 숲에서 서식하는 새이다. 한국에서는 10월에 찾아와 겨울을 난다. 먹이로서는 식물의 열매를 따다먹으며 벌레도 먹는다. 티티새의 특징으로 봤을 때 사람에 비유하자면 수다스러운 사람을 말할 듯 한데, 소설 속의 츠구미와 어떻게 연관시켜할지는 잘 모르겠다. 츠구미는 말이 많은 아이도 아니도 단지 좀 삐딱하고 엉뚱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아이였으니까.



  <티티새>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초기작이다. 89년도 작품으로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그녀의 책을접할 때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목록을 보며 각각 다른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어진 한편의 이야기지만 제목을 나눠놓을 것일까 하는 부분이다. 이번에도 다른 이야기이겠지 하고 읽어나갔지만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는 같은 선에 연결되어 있었다. 줄거리가 하나인 것과 별도로 하나건 두개건 상관없이 그녀의 소설은 책으로 엮여진 작품 하나에서 하나의 주제를 뽑아낼 수 있다. 대개는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보듬음을 담고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츠구미라는 조금은 유별나고 자기밖에 모르는 또 때로는 엉뚱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의 삶에 관한. 또 사랑에 관한. 그녀는 자기 밖에 모르는 병든 아이다.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며, 관심도 없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의 그런 까칠한 행동들은 타인을 사랑하기 위한 자기 자신만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억울한 것에 분노하고 처절하게(?) 복수하는 그녀를 통해 섬뜩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나 여기있어. 나 아직 죽지 않았다고. 그녀는 확실하게 주변인들에게 자신을 인지시킨다. 나의 존재를. 그런 츠구미가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들, 그리고 그녀가 남긴 편지들. 그녀는 분명 그들을 사랑했다.

  '도깨비 우편함'에서부터 '츠구미에게서 온 편지'에 이르기까지 소설은 매우 잘 짜여져있다. 각각의 장들이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또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연결되는 잘 쓰여진 작품이다. 읽는 내내 요시모토 바나나의 치유를 받으며, 감성을 울리고, 푸근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소설은 늘 편안하다. 부담없고 담담하다. 특별히 무엇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냥 책을 집어들고 읽고 덮는다. 다시 또 그녀의 책을 들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처음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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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6-05-31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속의 새가 티티새?
친절하셔라~ ㅊㅊ!

마늘빵 2006-05-31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네. 쟤가 티티새래요. 표지에 드러난 얼굴이랑 똑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