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7
존 그레이 지음, 손철성 옮김 / 이후 / 2007년 1월
절판


나는 자유주의적 실천의 토대를 탐구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정권은 바람직한 보편적 통치 형태와는 거리가 멀고, 단지 근대 후기 또는 탈근대의 초기에나 정당화될 수 있는 제도들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감사의 글 中) -11쪽

어떤 정권이 정당한지의 여부는 그 정권이 자국 국민들의 문화적 전통과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 긜고 자국 국민들의 욕구를 얼마나 충족시켜 주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감사의 글 中)-12쪽

1장 근대 이전 : 자유주의의 예비적 모습

근대인에게 자유는 법의 지배에 의해 보호되는 간섭받지 않는 독립된 영역을 의미하지만, 고대인에게 자유는 집단적인 의사 결정에서 발언권을 갖는 것을 의미했다.-21쪽

그리스인들에게 그리고 아마 로마인들에게도 자유 관념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자연스럽게 적용됐는데, 이런 공동체 차원에서 자유는 외부 통제가 없는 상태, 즉 자치를 의미했다. 심지어 자유 관념이 개인들에게 적용될 때에도 공동체의 통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공동체의 협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닫는 의미로만 사용됐다. 이처럼 고대와 근대의 자유관은 상당히 심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21-22쪽

"정의란 잘못을 범하지 않거나 잘못을 당하지 않기 위한 계약이다"(글라우콘) 아리스토텔레스가 들려준 바에 따르면, 소피스트인 뤼코프론은 법의 유일한 목적은 개인의 안전 보장이며 국가는 정의롭지 못한 일의 방지 같은 소극적 기능을 담당하기에 법과 국가는 일종의 계약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자연과 관습을 구분한 소피스트들의 주장은 자연적 노예 상태라는 관념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힘을 발휘했다. 수사학자인 알키다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신은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자연은 아무도 노예로 만들지 않았다."-22쪽

"모든 시민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 그래서 개인들이 지위와는 상관없이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법은 허용하지만, 특정한 개인에게는 이익이 되고 타인에게는 피해를 주는 특권이나 법률은 제정되어서는 안된다." (로마 12표법 공법 제 1항) -27쪽

2장 근대 초기의 자유주의

"자연법이 자기 보존의 욕구에서 도출되어야 한다면, 다시 말해서 자기 보존의 욕구가 모든 정의와 도덕성의 근원이라면, 근본적인 도덕적 사실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이다. 즉 모든 의무는 자기 보존이라는 근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서 도출된다. 그래서 절대적이거나 무조건적인 의무는 없으며, 의무는 그것의 수행이 우리의 자기 보존을 위협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구속력이 있다.오직 자기 보존의 권리만이 무조건적이거나 절대적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의 자연적 의무를 정식화 해주는 자연법은 아닌 것이다. ... 중략 ... 즉 의무와 구별되는 인간의 권리를 기본적인 정치적 사실로 간주하고 국가의 기능을 그런 권리의 보호나 보존으로 간주하는 정치적 교설로 생각해도 좋다면, 우리는 자유주의의 창시자가 홉스였다고 말해야 한다." (슈트라우스) -31-32쪽

[스피노자는] 모든 인간 존재는 (자연의 다른 모든 사물들처럼) 우선 자기 보존의 성향을 가진다고 봤으며, 그런 필연적인 자기 충족 행위들의 상호 작용이라는 관점에서 인간 사회를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는 밑줄그은이가 첨가한 것-33쪽

[홉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는 법의 침묵과 같은 것으로서, 개인이 현재의 욕구를 추구하려고 행동할 때 방해받지 않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33쪽

홉스와는 다르게 스피노자에게 개인의 자유란 욕구 충족을 막는 장애물이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 가치가 아니라 모든 개인의 최고 목적이다. -33쪽

스피노자는 개인의 자유를 본질적 가치롤 간주한다는 점에서, 즉 가장 훌륭한 삶을 위한 필수 요소이자 선한 삶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홉스보다는 자유주의에 더 가까이 있다.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스피노자와 홉스는 자유주의의 사회개량주의적 관점, 즉 인간사는 열려진 미래를 향해서 무한정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들의 성찰이 제대로 적용된다면 인간의 운명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그들이 생각했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인간의 영원한 무능력 탓에 사회 개량의 전망은 어둡다고 봤다. -35쪽

로크는 영구적으로 자유로운 사회를 설립하는 데 어떤 선천적인 장애물도 없다고 본 점에서 자유주의자에 속한다. 로크는 자기 자신의 사회에서 일어난 절대군주제에 대한 반대 투쟁이 자연법이 요구하는 자의적 지배를 반대하는 운동의 모범적 사례이며 시민 사회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40쪽

3장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권리로서 오직 법에만 종속될 수 있으며, 한 개인이나 많은 개인들에 의해서 체포되거나 고통 받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권리이다. 자유는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거나 자신의 소질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다른 사람들과 왕래하고 연합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이다. 끝으로 자유는 행정부 공직자들 전원이나 일부를 선출하거나, 권력자가 많든 적든 고려해야만 하는 충고, 요구, 청원을 통해서 국가 행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이다." (콩스탕) -51쪽

영국의 자유주의는 고대의 권리들과 역사적으로 선행했던 것들에서 자유권의 근거를 찾았던 반면에 프랑스의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자연권이라는 추상적 원리에 호소했다.-53쪽

5장 고전적 자유주의의 부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와 바로 그 뒤를 이은 시기에도, 현대 자유주의나 수정자유주의보다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더 충실한 사상가들이 지적 영역에 훨씬 중요한 기여를 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1944)이다. 하이에크의 주장은 대담하고 과감했으며, 모든 진보적 견해와는 반대로 나치즘의 뿌리는 사회주의 사상과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더욱이 하이에크는 서구 국가가 사회주의 정책을 선택한다면 결국에는 전체주의라는 인과응보식의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서구 문명에 용인될 수 있는 미래는 사회주의 이념을 맹세코 부인해야하며, 그동안 포기됐던 고전적 자유주의의 길(법의 지배를 받은 제한적 정부)을 다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77-78쪽

특히 노직의 작업은 자유주의 전통을 위해 유토피아적 전망을 복원, 활용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사실 (하이에크를 제외한) 모든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이념이 요구하는 다원주의에는 적합하지 않다며 이런 유토피아적 전망을 거부해왔다. 그러나 노직은 유토피아를 거부하지 않은 채 최소 국가의 제도들이 자유주의적 메타 유토피아의 구조틀, 즉 각자의 다양한 유토피아적 전망들을 실제로 실현하고자 개인들이 서로 협력하려 하는 정치 질서를 구성해 준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노직의 작업은 경제적 자유를 옹호하는 것과 비경제적 개인적 자유(언론이나 생활 방식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서로 관련되어있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했다. 이런 점에서, 고전적 자유주의를 재론한 노직의 주장은 오랫동안 미국 우파의 전통이 되어 왔던 자유 시장에 대한 보수주의적 옹호와는 뚜렷하게 대조된다.-84쪽

6장 토대에 대한 탐구

자연법이란 독립적으로 독자성을 지니는 인간의 선에서 직접 도출되는 옳은 행위의 원리나 도덕적 필연성이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90쪽

개인의 자유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제한되지 않아야 한다는 자유의 원칙은, 밀이 원하는 자유주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피해라는 개념 자체는 매우 어려운 논쟁을 야기하는 특성을 갖고 있으며, 비록 피해라는 개념을 적절히 규정한다고 할지라도 자유의 원칙은 행동을 이끌기에는 여전히 불충분한 안내자이기 때문이다.-101쪽

밀의 원칙은 자신의 행위가 타인의 이해관계에 피해를 주지 않는 개인적 영역에서만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호해줄 수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그럴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늘 정당화되며, 또한 효용성을 계산해 본 결과 그런 제한이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으로 입증된다면 자유의 제한은 늘 정당화될 것이다. 더 본질적으로, 밀의 원칙은 결국 자유와 부자유가 형평성 있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개, 피해를 막고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킨다며 자유를 제한하는 정책은 특정 사회집단들에게 훨씬 불평등하거나 불공정한 부담을 지울 수 밖에 없다. 이런 결과를 막으려면 밀의 원칙은 공정성이나 형평성의 원칙(즉 전체의 복지에 대한 공리주의적 관심과 경쟁관계에 있는 원칙)을 더 많이 보완할 필요가 있다. 밀이 효용성의 원칙에서 자유의 원칙을 도출하는 데 성공할지라도, 자유의 분배를 규제하는 공정성의 원칙은 분명히 전체 복지의 증진과 갈등을 빚을 것이다. 자유의 분배에서 공정성을 보증해주는 그런 원칙은, 진정으로 자유주의적인 정의론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래서 공리주의 관점에서는 옹호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밀의 기획이 전체 복지에 대한 공리주의적 관심과 자유의 우선성과 자유의 평등한 분배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심을 화해시키련느 기획이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을 지닌 기획이었다. 왜냐하면 피해 방지라는 공리주의적 정책이, 결과적인 부자유의 분배에 공정성이 제한을 가하는 일을 항상 존중해 주리라고는 결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102-103쪽

계약론적 방법이 산출한 자유의 원칙은 애매하고 위험하기 그지 없는 밀의 피해 원칙보다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말하는 최대의 평등한 자유 원칙(정의라는 개념을 통해 일체의 복지주의 정책을 제한하는 원칙)과 비슷하다. 롤즈의 이론이 밀의 자유주의보다 고전적 자유주의에 더 가까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록 롤즈의 최소극대화 원칙이 사회에서 가장 처지가 나쁜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불평등은 부당한 것이라고 비난하며 그들에게 우선권을 주지만, 롤즈는 제 1원칙인 최대의 평등한 자유 원칙은 밀의 원칙이 허용하는 부자유의 부당한 분배를 금지한다. 게다가 롤즈는 차등의 원칙에 따른 [부, 소득, 기회 등의] 재분배만을 정부의 기능으로 부과하는데, 이것은 자유의 보호와도 상관없고, 예술이나 과학의 장려를 위한 완전주의적, 공리주의적 정책들과도 상관없으며, 정의의 요구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서 배제되었던 전체 복지와도 상관없다. 롤즈의 계약주의적 방법은 윤리학적 개인주의를 토대로 갖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공리주의 이론들보다도 자유주의적 자유를 옹호하는 데 고유한 장점을 갖고 있다. -103-104쪽

7장 자유 개념

사실 고전적 자유주의와 대립하는 현대 자유주의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준들 중의 하나는 (현대 자유주의자들이나 수정자유주의자들이 했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자율성으로서의 자유는 경제적 자원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비나 시장의 작동 과정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정을 전제로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현대 자유주의자들에 반대해, 그리고 경제 조직의 작동과 관련해 중립성을 유지하려고 기본적 자유가 계약의 자유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적 소유권에 대한 법률적 보호를 전제로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옳았다고 주장할 것이다.-112쪽

7장 자유 개념

사실 고전적 자유주의와 대립하는 현대 자유주의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준들 중의 하나는 (현대 자유주의자들이나 수정자유주의자들이 했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자율성으로서의 자유는 경제적 자원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비나 시장의 작동 과정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정을 전제로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현대 자유주의자들에 반대해, 그리고 경제 조직의 작동과 관련해 중립성을 유지하려고 기본적 자유가 계약의 자유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적 소유권에 대한 법률적 보호를 전제로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옳았다고 주장할 것이다.-113쪽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재산을 소유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최소한 그가 자신의 재능, 능력, 노동에 대한 처분권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만약 이런 자기 소유권에 대한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인간 존재는 (노예 제도에서처럼) 타인의 소유물이나 (사회주의 국가에서처럼) 공동체의 자원 같은 한낱 물건으로 전락한다. 내게 내 자신의 신체와 노동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면 나는 내 목표를 성취하거나 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을 할 수 없으며, 내 자신의 목표를 다른 사람의 목표나 집단적 의사 결정 과정의 요구에 종속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소유권을 갖는다는 것은 그에 수반해 계약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결사와 운동의 자유 같은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자유를 갖는다는 말일 수 있으며, 이런 소유권은 그런 자유들이 축소될 때마다 손상된다. 이럴 경우 소유권과 기본적 자유들 사이의 연관성은 본질적인 것이지 단지 수단적인 것은 아니다.-114쪽

완전한 자유주의적 소유권 체계에서는 개인이 불가피하게 자신의 재능이나 자원에 의해서 제한되더라도, 자신의 이웃들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나 의견에 의해서는 제한되지 않는다는 통찰이 그것이다. 오직 대지의 법에만 종속되는 개인은 자신의 소유물을 자신이 선택한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도 사용할 수 있으며, 그 누구의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그 누구에게서 허가를 받을 필요로 없다. 즉 지나치게 위험하다거나 관습적인 도덕적 견해를 벗어났다며 이웃들이 비판할 수도 있는 모험을 감행하기 위해서 개인은 자신의 자원을 사용할 수 있다. -117쪽

"이전의 노력들이 이미 공동의 견해를 산출한 경우, 무엇이 바람직한지 의견이 모아진 경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반적으로 인정된 가능성들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문제일 경우에만 집단적 동의에 의한 행동은 이뤄진다." (하이에크)

... 중략 ... 왜냐하면 사적 소유 제도와는 달리, 공동체적 소유 제도에서는 개인의 계획이 실제적으로 실현될 수 있으려면 그 계획이 자신이 속한 사회나 자신이 속한 협동체의 다른 성원들에게 지배적 견해로 수용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적 소유권의 옹호는 단지 사적 소유권을 소극적 자유와 연결시키기보다는 개인의 자율성, 즉 자신의 인생 계획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연결시킨다. 자유주의 질서의 입헌적 구조는 기본적 자유를 형식적이거나 소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인데 비해, 사적 소유권은 기본적 자유를 실질적이거나 적극적으로 구체화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117-118쪽

비록 자유로운 사회에서 자신의 소유물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소유물을 가진 사람보다 덜 자율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자신이 생산한 물건을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사회에서 사는 것보다는 그래도 더 자율적이다. -118쪽

"국가가 유일한 고용주인 나라에서는 저항이 굶주림에 의해 천천히 진행되는 죽음을 뜻한다. '복종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새로운 원칙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낡은 원칙을 대체했다." (트로츠키) -120-121쪽

9장 자유주의 국가

특히 자신의 권리를 침해한 자를 처벌할 수 있는 로크적 자연 상태의 권리를 상실한 개인은 국가가 제공한 권리 보호 기능에 따라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노직의 제안을 봐도, 그가 설명한 최소 국가주의는 명백히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권리 양도는 동의를 받지 못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노직의 이론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권리들이 축소되는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에 이 제안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133쪽

결론 : 탈자유주의

"자유주의 사회란, 강제력보다는 설득에 의해서, 혁명보다는 개선에 의해서, 현재의 언어적 실천이나 다른 형태의 실천들과 새로운 실천들을 위한 제안들 사이의 자유롭고 열린 만남에 의해서 그 이념이 실행에 옮겨질 수 있는 사회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하려고 하는 바는, 이상적인 자유주의 사회가 자유 이외에는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런 만남이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보면서 그 결과를 준수하려는 자발성 이외에는 다른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사회라는 점이다." (리처드 로티)-167-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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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
로저 트리그 / 자작나무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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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우리란 누구인가라는 물음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나란 누구인가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이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다. (들어가는 말 中)-11쪽

<홉스>

홉스는 결정론자였고, 인간과 동물을 엄격히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의지하거나 의지하지 않음에 있어서 다른 생물체에 비해 더 자유로운 것이 아님을 단호히 주장한다. 홉스는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현대 철학자들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거나, 우리가 의지한대로 행위하는 능력으로 자유를 정의했다. 그러나 어떤 결단이나 선택을 행위로 옮기는 자유를 일차적인 선택의 자유로 간주할 수는 없다. 묶이지 않은 개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홉스에게 인간의 자유는 단순히 강제의 부재에 불과하다. 언덕 아래로 구르는 돌이 자유롭듯이, 우리가 그렇게 자유롭다고 그는 생각한다.-25-26쪽

홉스는 사람들이 응분의 처벌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그 자체로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잠재적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했다.-26쪽

홉스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자연스런 애정'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했으며, 우리가 우리와 가까운 타인에 대해 애저을 품을 수 있음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낯설은 사람을 돕는 행위에 대해서는 좀더 회의적이었으며, 그러한 행위란 '우정을 구매하려는 행위'이거나, 아니면 공포감에서 유발된 '평화를 구매하려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은 우리에게 있어 자기 집착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과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도 배려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33쪽

"강제력이 없다면 계약은 한낱 말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을 안심시킬 수 있는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사람들은 합의에 이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근본적 경향이 변한다거나 변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성은 계약의 준수가 그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국가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 지상명령이 되며, 따라서 우리는 저마다 자발적으로 우리의 힘을 어떤 집단이나 한 사람에게 양도하게 된다. 홉스는 군주제를 선호했지만, 그러한 선호를 철저하게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양도한 힘을 갖고서 주권자는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이라는 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며, 우리에게 의무가 강제되는 절차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모든 개인이 주권자가 하는 모든 행위의 원천이다." -36쪽

<흄>

오로지 욕구와 감정만이 우리의 행위를 이끌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어떤 욕구도 없는 단순한 지적 이해만으로 우리의 행위를 유발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원할 때 생기는 동기가 원인이 되어야만, 인간의 행위는 설명될 수 있다. 동기 없는 인간 행위가 가능할지라도, 그것이 합리적일 수는 없다. 자유의지가 신성한 것으로 정의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이성적 행위를 모델로 삼아서 행위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흄은 그러한 일체의 시도를 배격한다.-49-50쪽

"인간이란 서로 다른 지각들의 다발이거나 집합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은 생각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서로를 결합시키며, 상호운동을 하는 항구적인 유동상태에 있다." -53쪽

"나의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더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 -56쪽

이제 도덕은 인간에게 내려지는 명령이나 요구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특성의 결과일 뿐이다. 흄에 있어서 도덕은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도덕은 인간 본성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58-59쪽

정의란 '인위적' 덕이며, 따라서 사회는 정의를 강화시키는 메커니즘을 마련해야 한다. 인간 본성의 허약함과 고약함에 관해 흄은 "인간은 그들이 치유할 수 없는 특성을 완화하는데 전력해야 한다"고 말한다.-59쪽

"인간의 선의나 자연의 재화를 충분히 증대시키면, 당신에게 정의란 무용해진다" 사회의 관습이 생기는 까닭은 정의와 재산 때문이다. 사회의 보존이 우리의 공동 이익이긴 해도, 멀리 있는 것보다는 가까운 것을 더 선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위임을 흄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60쪽

"인간은 그들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을 변화시켜서, 정의를 따르는 사람은 곧바로 직접적 이익을 얻게 하고, 정의를 어기는 사람은 이익을 얻기 어렵게 만드는 일 뿐이다"-60쪽

<다윈>

도덕은 공감처럼 우리 본성의 일부인 욕구와 도덕적 감정에서 발생한다. 다윈은 우리의 '사회적 본능'이 '저급한' 충동과 충돌하는 수도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말한다. "미래 세대를 바라보면, 사회적 본능이 점점 약화될 것이라는 공포감은 생기지 않ㅎ는다. 우리는 덕있는 습관이 점점 더 강해져서 유전적으로 고정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래에 우리의 고급한 충동과 저급한 충동간의 갈등은 덜 격렬해질 것이며, 마침내 덕이 승리할 것이다." -79쪽

다윈은 도덕이 개인에게 이득이 될 수 없을지라도, 부족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믿고 싶어했다. 그는 말한다. "애국심, 성실, 복종, 용기, 공감을 상당한 수준까지 소유함으로써 언제나 타인을 도와주려 하고, 일반적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많이 포함하는 부족은 다른 부족을 지배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자연도태가 될 것이다." -82쪽

<니체>

"엄밀히 말해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95쪽

우리가 이 '세계 내에서'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부여한 범주일 뿐이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결부되어 있으며, 결저되어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말한다. "진리는 일조의 오류로서, 그것 없이는 어떤 종족의 삶은 영위될 수 없다" 그는 사상가에 대해서도 말한다. "'정신'이나 이성, 사유나 의식, 정신, 의지,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쓸데없는 허구이다. '주체와 객체'의 문제도 없다." -98쪽

'이 세계'와 '이 세계에 관한 주장과 믿음'의 이원론은 결코 극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다면 무엇인가를 주장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떤 주장이나 믿음도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니힐리즘의 결론이다. 이제 일관된 니힐리스트는 오직 침묵할 뿐이다. 무엇인가를 주장하려면 사실과 사실 아닌 것 사이의 구별을 전제해야 한다. 무엇인가를 주장한다는 것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진리에 대한 주장을 포함하고 있는 데 반해, 니힐리즘은 그 어떤 것에의 집착도 허용하지 않는다.-99-100쪽

"나는 현재의 태양, 현재의 대지, 현재의 독수리, 현재의 뱀과 함께 돌아가련다. 새로운 삶이라든가, 더 유복한 생활이라든가, 그와 유사한 삶은 필요없다. 나는 만물의 영원회귀를 다시 한번 가르치기 위해서, 가장 큰 일이든 가장 작은 일이든 지금과 똑같은 동일한 자아를 유지하는 삶으로 영원히 돌아가련다." -103쪽

삶이 현재와 같은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삶을 가치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느낌 때문에 기독교와 같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정치적 차원에서든, 구원의 문제가 등장한다. 분명히 부활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는 우리가 현재 신이 의도한 대로 살고 있지 못함을 암시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부정하기보다는 긍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삶이 어떤 방향을 갖는다는 확신은 현재의 삶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주장만큼이나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원회귀에 관한 니체의 사상은 결과적으로 이 두 가지 견해를 모두 거부한다. 우리는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는 끝없이 반복되는 지루함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이 처한 곤경에 대한 암울한 묘사로서 어떠한 처방도 될 수 없다. 오히려 니체는 힘에의 의지에 의한 지배욕구를 옹호함으로써,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하나 더 추가하였다. -115쪽

<마르크스>

"(미래 공산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사냥꾼이나 어부, 양치기, 학자가 되지 않고서도 마음먹은 대로 오늘 이 일을 하고 내일 저 일을 하면서,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소먹이는 일을, 저녁 식사 후에는 토론을 할 수 있다." -117쪽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일이다." -117쪽

"인간은 사회적 동물일 뿐만 아니라 사회를 벗어나서는 개인이 되지 못하는 문자 그대로 정치적 동물이다." -119쪽

우리는 우리가 처한 경제적 상황에 의해 영향받지 않고 그것을 사실 그대로 인식할 때에만 비로소 그것을 변혁시키기를 바랄 수 있다. 혁명을 일으키는 주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들이 처한 여건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중요한 절차가 된다. 경제적 여건은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지만, 그것의 불가피성은 무엇이 그들에게 진정한 환경인가에 대한 깨달음의 결과이기도 하다. 분명히 환경이 인간을 만들지만. 마르크스는 '인간이 환경을 만든다'는 것도 믿었다. -121-122쪽

흄이 자원의 결핍과 선의의 결여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마르크스는 완전한 사회에서는 풍요와 이타성이 생길 거라고 믿었다.-128쪽

마르크스는 사회적 전통이나 개인적 습관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흄처럼 관습을 강조하지도 않으며,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습관적 행동에 의한 덕 있는 성품의 계발도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에 놓인 우리의 기본 시념과 성향이 특정한 경제체제의 작용에서 유래하낟고 믿기 때문에, 대규모의 혁명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변화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133쪽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는 온갖 고통을 감수하면서 소수의 프롤레타리아가 잘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선견지명을 갖춘 혁명주의자는 지독한 이타주의자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의 역할을 마르크스는 강조함으로써, 자기 충족적이며 타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의 관점에서만 결단하는 원자론적 개인사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개인들이 어느 정도까지 필요한 희생을 기꺼이 감수할 것인가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 모델을 악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전면적 혁명의 과정이 불가피하다는 입자이었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압박과 억압의 기제를 수립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로 하여금 혁명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드는 내적 모순을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운명은 내적 모순을 예정하고 있다.-136쪽

<프로이트>

"에고와 이드의 관계에서 에고는 말을 탄 사람과 같다. 그는 말의 넘치는 힘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141쪽

<플라톤>

"철학자들이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자가 되어야 국가는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
-165쪽

동일성의 절대적 기준은 우리의 감각을 초월하는 세계 속에 존재해야 하며, 그러한 기준에 호소할 때에만 우리는 약간의 차이가 나는 두 개의 잣대라도 똑같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도덕 기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의 모양이나 소리를 초월한 다른 세계로부터 나온다. 선이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형상'의 이름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이 공통으로 갖는 그 무엇으로, 사물들은 모두 그 공통 성질을 나누어 갖고(분유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선 그 자체'란 우리의 일상 세계의 특징과는 구별되며, 분명한 것은 그것의 타당성이 인간 판단에 좌우되지 않는닫는 것이다. 다른 형상들처럼 그것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며, 그에 대한 인간의 믿음에 영향받지 않는다.-170-171쪽

<아리스토텔레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원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야 하고, 우리 안의 최선의 것들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191쪽

"국가가 더 이상 국가가 아니면서 어느 정도의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하는데, 그 지점에서 국가는 여전히 존재하면서도 합창이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이 작은 공동체가 된다." -194쪽

"우리가 말하는 것이 인간이든 가정이든 가족이든, 그것이 완전히 계발되었을 때의 그 무엇을 우리는 그것의 본성이라고 부른다. 목적인과 목적은 최선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목적과 최선의 상태는 자기 충족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또 인간이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196쪽

개인은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연은 노동의 분화, 따라서 계급의 분화가 존재하는 정치 체제를 산출했다. 사회 없이도 살 수 있는 존재는 신과 짐승 뿐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려는 본능이 우리에겐 주입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언제나 함께 연합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197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아무 것도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반복한다. 인간과 인간이 사는 공동체는 적절한 목적을 갖지만, 우리의 이성을 통해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그들의 적절한 목적을 실현하는 경우에는 최상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이것이 사실임을 자주 입증하고 있다.-198쪽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면, 우리는 인간 본연의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식물과 동물에는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식물도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활동을 한다. 동물도 사물을 감각하고 그에 따라 활동한다. 그러나 이성을 소유하는 존재는 오로지 인간뿐이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인간의 기능은 이성을 따르거나 이성을 함축하는 영혼의 활동에 있다"라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선은 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이성과 도덕적 선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202-203쪽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결정해 주는 것은 욕구가 아니라 이성이다. 우리가 무엇을 욕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목적론적 접근 방식은 우리가 서로 다른 근본적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중요한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인간 본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 본성에 거역해서 행위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본성을 파괴할 수는 없다. 그가 믿는 바에 따를면, 우리의 참된 본성에 따라 행위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국가의 기능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가의 목적은 도덕적이어야 한다.-211쪽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와 관습을 강조함으로써, 자유분방한 개인주의의 범람을 피하려 했다. 법과 도덕에 대한 그의 강조는 그가 여전히 개인의 자유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국가론의 근거는 각 개인의 도덕적 책임에 있으며, 집단의 강제력에 있지 않다. 모든 사람을 결집시키는 바탕은 가족간의 자연스런 애정이며 국민들 간의 친애이다. 남은 대안이 전체주의적 통치, 아니면 타인을 희생시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 간의 갈등상태뿐인 것처럼 보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매력적인 중도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의 견해를 수천 명의 시민들로 구성된 그리스 도시국가의 맥락으로부터 수백만 명으로 구성된 근대국가로 옮겨 놓을 때 분명히 많은 문제점이 생긴다. -214쪽

<토마스 아퀴나스>

자유와 합리성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자유롭지 않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대해 책임이 없기 때문에 비난받을 수 없다. 이러한 유형의 문제에 대해, 특히 의지의 박약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아퀴나스가 제시하는 한 가지 답변은 습관, 성향, 정념은 이성에 의해 간접적으로 통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229쪽

도덕과 법이 아퀴나스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는 까닭은, 도덕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법은 도덕 기능의 하나이다. 법은 자연법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으면 부당해질 수 있으며, 그것의 목적은 반드시 공동선이어야 한다. 아퀴나스는 법이 상이한 도덕적 관점들 사이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점을 부정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른다. 그 역시 현대 자유주의의 여러 양상들을 거부했다. 실제로 그는 법이란 사람들의 도덕적 충동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고 부도덕한 충동을 억누를 수 있도록 하는 규범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법적 제재의 위협이 필요한 젊은이들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길들여지면서, 그들은 과거에 두려움 때문에 하게 되었던 행위를 스스로 알아서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덕있는 사람이 된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사람들을 강제하는 이러한 종류의 제재가 바로 법적 제재이다." –-234쪽

<비트겐슈타인>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하여야 한다." -243쪽

"신비로운 것은 사물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245쪽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실재와 관련시켜 그것을 기술하는 도구로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미 존재하는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언어와는 독립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언어에 우선성이 부여될 때, 개인의 사적 믿음과 객관적 세계는 서로 대비될 수 없게 된다. 모든 사람이 준수해야 하는 규칙을 갖는 공적 언어는 규범을 형성한다. 이 세계는 언어의 가능성에 의해 제한되며,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서의 우리의 개념은 언어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우리의 사유방식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혹은 일정하게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250-251쪽

"의도는 상황 속에, 인간의 관습 속에 그리고 인간의 제도 속에 새겨져 있다." -251쪽

고통을 기술하는 것이 의학적으로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고통은 가려움, 전기충격, 구역질, 여타의 불쾌한 감각과 구별되는 종류의 감각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한 개인에게만 인지되고, 그 개인의 사적 감각과 결부되는 사적 언어란 있을 수 없다고 논증한다. 중요한 사항은 그가 언어와 관련하여서만 일정한 개인적 경험을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질 수 없는 언어란 있을 수가 없음을 입증하려고 하였다.-253쪽

기억을 통해서 언제나 우리의 판단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의 고통이 지난 주에 겪은 고통과 똑같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기억을 통해서 그때의 고통을 기술하기 위해 어떤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도 알고 있따. 그렇지만 여전히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는 개잉ㄴ의 내면 경험에 의존하는 정당화가 된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다른 믿음에 호소하여 내 마음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과정이, 기사의 내용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려고 조간신문을 여러개 사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충고한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사적 대상에 대한 관념을 항상 제거하라. 즉 사적대상의 관념은 항상 변하지만, 당신의 기억이 항상 당신을 기만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없다고 전제하라."

우리는 우리의 사적 경험이 마치 공적 세계의 대상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듯이, 어떠한 기술이 정확하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오류가 원칙적으로 확인될 수 없다면, 정확성과 오류도 구별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254-255쪽

그에게 세계란 언어로 표현되는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파악되지 않고 그와 별개로 인식되는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사적 경험을 언어사용과 분리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사적 경험이 일차적으로 언어를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경험은 말해짐으로써 공적 세계 속에 자리 잡을 수 있으며, 개념적으로 나의 행태와 연관되게 된다. 사적 경험이 언어의 근거가 되기보다는, 언어의 규제를 받으면서 경험이 형성되는 것이다.-257-258쪽

비트겐슈타인은 사람들이 동일한 개념을 공유한다면 그들의 판단은 일반적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때의 일치는 의견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의 일치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심각한 불일치가 삶의 형식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따라서 개념을 사용할 때 차이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259쪽

"본능이 우선하며, 이성적 추론은 그 다음이다. 언어게임이 생길 때까지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263쪽

"나의 정체성이 어떤 형이상학적 사실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개입된 사회적 언어적 활동 때문이라면, 나는 나의 정체성을 언어로부터 추상할 수 없으며 언어적 범주의 도움 없이는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언어가 자아를 형성하며 실재를 결정한다. 우리는 더 이상 이성을 초월하는 문제로 번민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으므로 언어의 활동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264-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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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9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8-09 23:17   좋아요 0 | URL
솔직히 이 책 저도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신경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_- 알아먹기 힘든 문장이 많아서요. 첫째 질문은 그렇게 해석하는게 더 맞는거 같고요 - 번역상의 문제라고 해야하나 - 두번째 질문은 솔직히 저도 문장과 맥락이 완전히 머리에 들어온건 아닙니다. 훑어보는 책으로 보고 넘겼어요. 원서는 -_- 휴. 영어가 안되는지라 읽으려면 매우 오래걸리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읽더라도 매우 중요한 일차서적에 한해서만 봐야겠죠. 이런 책은 그 정도의 정력을 투자하기에는...

아마도 홉스에게 있어 일차적인 자유란, '강제성의 부재' 상태가 일차적이라고 보고, 그런 점에서 '어떤 결단이나 선택을 행위로 옮기는 자유'를 일차적이지 않다고 본거 같습니다. '언덕 아래로 구르는 돌이 자유롭'다는 말은, 그런 구르는 돌에겐 강제가 부과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유한 듯 합니다. :)

비로그인 2007-08-09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이 많았는데, 날아가버리기도 했고..힘이 빠져서..

그러나 다음의 글은 마음에 드는군요.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일이다." – 117쪽


"인간은 사회적 동물일 뿐만 아니라 사회를 벗어나서는 개인이 되지 못하는 문자 그대로 정치적 동물이다."


마늘빵 2007-08-09 23:36   좋아요 0 | URL
유명한 말이죠. :) 둘 다 마르크스의 말인데, 뒤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먼저 한 말입니다. 그걸 일부러 인용을 하고 있는데, 결국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회를 떠난 생산은 생각할 수 없고, 사회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라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비로그인 2007-08-09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하간 핵심정리 요약 리뷰 써주세요. 정말 인간본성에 대한 해석들이 궁금하단 말이예요.

마늘빵 2007-08-10 00:00   좋아요 0 | URL
헙. 리뷰는 좀 미뤄두고 있는데욤. 쓸지 안쓸지도 모르겠어요. 요새 계속 관련 책 '읽기만'하는 중이에요. 리뷰 못쓴지 넘 오래됐다. -_-

비로그인 2007-08-10 13:00   좋아요 0 | URL
저도 리뷰 잘안쓰는데..안쓰면 잊어버리더라구요. 요즘 안그래도 진짜 이카테고리처럼 형광펜을 들고 긋고있어요

비로그인 2007-08-1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홉스: 그러나 그는 낯설은 사람을 돕는 행위에 대해서는 좀더 회의적이었으며, 그러한 행위란 '우정을 구매하려는 행위'이거나, 아니면 공포감에서 유발된 '평화를 구매하려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 참 마음에 안드는 아저씨네. ^^;;; [리바이던]의 저자군요. 아부지 서재에 꽂혀있는데, 읽을 가능성이 이제 더 낮아졌어요 ㅡ.,ㅡ

마늘빵 2007-08-10 13:07   좋아요 0 | URL
크크크. 홉스 재밌어요. 알고보면. 나름 일관된 논지를 펼치고. 요새 논술이다뭐다해서 쉽게 다시 쓴 <리바이어던> 같은 책들이 나와있더라고요.

비로그인 2007-08-10 13:36   좋아요 0 | URL
한사람의 이론이나 생각이 일관적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어찌하면 정말, 그 뭐라고 그러죠? 하나에만 목을 맨 똘아이 (^^;;;)를 뭐라고 표현하드라?가 되겠지만, 여하간 서로가 모순되지 않는다는 건 대단한거죠

마늘빵 2007-08-10 18:43   좋아요 0 | URL
삶에 있어서 자기모순을 점차 제거해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저보고 자기모순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자학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부분 저도 공감합니다. 하물며 사회, 정치, 국가를 논했던 홉스같은 철학자야말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론을 설득시키려면 자기모순부터 제거해야했겠죠.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주장에서 자기모순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비로그인 2007-08-10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흄: "인간은 그들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을 변화시켜서, 정의를 따르는 사람은 곧바로 직접적 이익을 얻게 하고, 정의를 어기는 사람은 이익을 얻기 어렵게 만드는 일 뿐이다" ==> 가장 냉철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네요. 하지만,
"나의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더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수긍하기가 어렵네요

마늘빵 2007-08-10 13:09   좋아요 0 | URL
흄에게 있어서 기본은 "오로지 욕구와 감정만이 우리의 행위를 이끌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어떤 욕구도 없는 단순한 지적 이해만으로 우리의 행위를 유발시킬 수는 없다."이기 때문에, 내 손가락의 상처가 당장 아프니까,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장 아픈 내 손가락을 돌보는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죠. 하핫. 흄도 나름 재밌습니다.

비로그인 2007-08-10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윈 : "미래 세대를 바라보면, 사회적 본능이 점점 약화될 것이라는 공포감은 생기지 않ㅎ는다. 우리는 덕있는 습관이 점점 더 강해져서 유전적으로 고정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래에 우리의 고급한 충동과 저급한 충동간의 갈등은 덜 격렬해질 것이며, 마침내 덕이 승리할 것이다."

==>과연 유전자가 이를 기억할지는 의문이 되는데요. 여하간, 무척이나 긍정적인 분이셨군요. 전 사회적 본능, 타인배려에 대한 것이 점점 희미해져간다고 생각하는데요.

언제나 타인을 도와주려 하고, 일반적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많이 포함하는 부족은 다른 부족을 지배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자연도태가 될 것이다

==> 이건 당최 이해가 안가는 걸요? 도와주고 희생하는 쪽이 지배를 하니까, 누가 자연도태가 된다는 건가요? ^^;;

마늘빵 2007-08-10 18:40   좋아요 0 | URL
너무 낙관적인 견해죠? -_- 다윈이 죽은지 오래인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결국 덕있는 습관을 유전적으로 고정시킨 부족이 그렇지 않은 부족을 '자연에서' 지배하고 압도한다는 말인데, 그다지...

비로그인 2007-08-10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 부분은 어려워요. 결국 이거 번역 너무 엉망인거 같아요. 뭐 전공자들은 뭔얘기인지 알고 넘어가겠지만 말이죠.

"나는 현재의 태양, 현재의 대지, 현재의 독수리, 현재의 뱀과 함께 돌아가련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시 니체는 힘 (power)를 좋아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인용한 것들이 강한 것들이니까요.

마늘빵 2007-08-10 19:49   좋아요 0 | URL
크크. 이게 일부분을 툭 잘라서 밑줄긋기를 해놔서 그럴거에요. 전후 문맥을 보면 쉬울텐데. 그렇다고 제가 다 쳐서 올릴 수도 없고. :) 크크크.

이건 고대 페르시아의 창시자 짜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의 말을 인용한건데요, 이 책엔 니힐리즘에 대한 니체의 답변을 나타낸 대목이라고 써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삶의 가치를 부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긍정하는 존재임을 보여주게 된다고" 생각했으며 "삶이라고는 하지만 어떤 의미나 목적도 없으며, 더욱이 종착점도 없이 불가피하게 반복되는, 지극히 가공스러운 상태, 즉 '영원회귀'라는 것을 생각해보자."면서, 결국 해방이니 구원도 없고, 진보도 죄의식도 후회도 없고, 에라 "지금과 똑같은 동일한 자아를 유지하는 삶으로 영원히 돌아가련다"고 말합니다. :)

뱀이나, 독수리, 대지, 태양 등을 끄집어 낸건 글쎄요, 저도 함부로 말하기 조심스럽습니다. 니체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는데. 대자연의 만물을 지칭하는 명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비로그인 2007-08-10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 : "미래 공산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사냥꾼이나 어부, 양치기, 학자가 되지 않고서도 마음먹은 대로 오늘 이 일을 하고 내일 저 일을 하면서,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소먹이는 일을, 저녁 식사 후에는 토론을 할 수 있다."

이상적으로 제시한 공산주의는 환타스틱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한 더 깊숙한 인식이 없고서는 어떤 이즘이 성공적으로 실현된다는 건 어렵다고 생각하는데요. 과연 인간의 소유욕이나 집착 등 그런 부정적인 것들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실현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는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에 놓인 우리의 기본 시념과 성향이 특정한 경제체제의 작용에서 유래하낟고 믿기 때문에, 대규모의 혁명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변화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 이것도 이상적인 생각인거 같네요.

"흄이 자원의 결핍과 선의의 결여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마르크스는 완전한 사회에서는 풍요와 이타성이 생길 거라고 믿었다"

==> 완전한 사회란 어떤건지, 공산주의 모델이 성공한 사회란 거 같은데.. 전체가 풍요롭지 않고 전체가 모두 가난하다면, 전체의 파이를 만들어내는데 있어 인간본성을 잘못 전제하고 있다면 후자가 될터인데...


마늘빵 2007-08-10 19:53   좋아요 0 | URL
요 대목들만으로 보면, 마르크스의 이상향은 대략 짐작이 되는데, 실현 방법이 안나와있죠. 이상적인 세계를 상정해놓고 여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건 여기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인간본성에 촛점을 맞추고 있고, 어떤 관점들을 가지고 접근했느냐를 보기 때문에. 결국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게, 그는 '자아실현'인데, '자유'와 '노동'을 '개인의 자아실현'에 일치시키려고 했습니다. 노동을 하면서 스스로가 자유롭다 느끼고, 그것이 자아실현으로 이어지는.

비로그인 2007-08-10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 : 에고(ego)는 'me'라고도 얘기할 수 있는 건가요? 말을 제어하기는 커녕, 사람들은 다 미미미미거리는데..

마늘빵 2007-08-10 19:54   좋아요 0 | URL
아 이런건 제가 함부로 말씀드리기가... -_-a

비로그인 2007-08-10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이 무지 많아서 조금 귀찮으시죠? ^^;;; 근데 너무나도 흥미로운 얘기인데다 모르는게 많아서...

마늘빵 2007-08-10 19:54   좋아요 0 | URL
크크크. 밑줄그어진것만 보면 앞뒤 맥락이 빠져서 이해하기 힘들텐데, 책을 보심이 어떨까요.

비로그인 2007-08-10 20:52   좋아요 0 | URL
네.

마늘빵 2007-08-10 20:59   좋아요 0 | URL
하하핫. 귀찮아서 그런게 아니구요. 물어보시면 저도 한번 더 확인해서 도움은 되는데, 제가 잘 몰라서. -_-a

비로그인 2007-08-13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참 마음에 드네요 ^^

=>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면, 우리는 인간 본연의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식물과 동물에는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식물도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활동을 한다. 동물도 사물을 감각하고 그에 따라 활동한다. 그러나 이성을 소유하는 존재는 오로지 인간뿐이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인간의 기능은 이성을 따르거나 이성을 함축하는 영혼의 활동에 있다"라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선은 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이성과 도덕적 선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원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야 하고, 우리 안의 최선의 것들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마늘빵 2007-08-13 22:41   좋아요 0 | URL
^^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이 마음에 드는건, 우리의 상식과 부합하는 내용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비로그인 2007-08-13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결정해 주는 것은 욕구가 아니라 이성이다. 우리가 무엇을 욕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목적론적 접근 방식은 우리가 서로 다른 근본적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중요한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인간 본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 본성에 거역해서 행위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본성을 파괴할 수는 없다. 그가 믿는 바에 따를면, 우리의 참된 본성에 따라 행위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국가의 기능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가의 목적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 여기서 국가라는 데에 좀 꺄우뚱하지만 말이죠

마늘빵 2007-08-13 22:43   좋아요 0 | URL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교되곤 하는데, 둘 다 어떤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한 국가의 모습은 무엇인가, 에 초점이 맞추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고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억울하게 죽어버린 이후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이 체제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또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서 배우면서도 플라톤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더랬죠. 인간의 본성은 결국 국가의 기능이나 역할로까지 확대되며 논의됩니다.

비로그인 2007-08-13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비트겐슈타인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사실 예전에 칸트돠 비트겐슈타인을 들춰본 적은 있는데 그때도 그랬는데. 아, 이 참을 수 없는 알고픔 때문에 그래24의 철학강의 신청할 거예요.

마늘빵 2007-08-13 23:08   좋아요 0 | URL
비트겐슈타인은 저도 간접적으로라도 접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떤 책 읽다가 중간중간 나오면 그때나 조금 읽어보고 그랬어요. <서양철학사> 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은 다루지 않아요. 아무래도 근래의 철학자이고 하다보니. 이 사람 맛보기로 조금 접해본 바로는 매우 끌립니다. :)

사실상 자신으로서 철학을 끝내려고 했는데, 그게 안되죠. 철학이란건 언제나 기존의 것에 대한 반박과 또 반박 또 반박이 계속 이루어지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에. 위에 나온 부분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간단히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어떤 한 개인의 경험이란 것은 몸으로 직접 부딪힘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바를 '언어'를 통해서 재생시킬 때 비로소 경험이 된다는 것이죠.

비로그인 2007-08-13 22:51   좋아요 0 | URL
"철학이란건 언제나 기존의 것에 대한 반박과 또 반박 또 반박이 계속 이루어지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에"이란 말 참으로 마음에 드네요.

비로그인 2007-08-13 22:52   좋아요 0 | URL
"어떤 한 개인의 경험이란 것은 몸으로 직접 부딪힘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바를 '언어'를 통해서 재생시킬 때 비로소 경험이 된다는 것이죠."==> 이건 좀 생각해볼래요.

마늘빵 2007-08-13 23:07   좋아요 0 | URL
:)
 
프레임 전쟁 - 보수에 맞서는 진보의 성공전략
조지 레이코프.로크리지연구소 지음, 나익주 옮김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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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레이건에 대해 어떤 모습을 떠올리든지, 이것은 지난 사반세기 동안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승리의 공식이 되었다. 진보주의자들은 이 공식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정치는 가치의 문제이고, 의사소통의 문제이며, 후보자가 옳은 일을 수행할 것으로 믿는 유권자들의 문제인 동시에 후보자의 세계관에 대한 믿음의 문제이며, 그 세계관과의 동화의 문제이다. 또한 정치는 상징성의 문제이다. -18-19쪽

일반적으로 잘못된 이념 때문에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오른쪽으로 이동해야'한다고 믿었다. 사실 이것은 역효과를 낸다. 오른쪽으로 이동함으로써 진보주의자들은 실제로 우파의 가치를 활성화하고 자신들 고유의 가치를 포기하고 만다. 또한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들을 소외시킨다.-24쪽

너무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보수적으로 투표하는 사람들, 특히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반대로 투표하는 사람들을 정망 멍청하다고 생각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우리가 그러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경제적 진실을 말해야만 하고, 그러면 그들이 투표하는 방식을 바꿀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보수적으로 투표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으며,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보수적 포퓰리즘은 본성상 경제적익이 아니라 문화적이다. 보수적 포퓰리스트들은 자신들이 단지 평범하고 도덕적이며 올바른 신념을 지닌 사람들인데, 자신들을 무시하는 진보주의자들이 부도덕한 '정치적 올바름'을 자신들에게 강요하려 한다고 보며, 그 점에 대해 분노한다.

* '정치적 올바름' : 여성이나 유색인종,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을 유발할 수 있는 언어 표현을 바로잡으려는 일종의 문화 정치적 운동을 가리키는 용어-24쪽

이중개념주의는 두뇌의 시각과 신경 기제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진보주의 세계관과 보수주의 세계관은 상호 배타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에는 두 세계관이 나란히 존재하며, 각각 상대편을 신경적으로 억압하고 경험의 여러 다른 영역을 구조화한다. 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진보적인 것이나, 진보적인 국내 정책과 보수적인 외교 정책을 동시에 지지하는 것, 시장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면서도 시민적 자유에 대해서는 진보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별로 특이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30쪽

정치적인 이중개념주의자들은 평범하다. 그들 가운데에는 단일 이념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을 분류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중개념주의자를 '중도주의자'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중도주의 세계관이란 결코 없으며, 진정한 중도파는 정말로 거의 없다. 참된 중도파는 선형 척도를 찾으며, 그러한 척도에서 중간 입장을 취한다. 학교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지출을 해야 하는가? 많은 지출? 적은 지출? '적당한' 양이 바로 참된 '중도파'가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중도는 정치적 이념이 아니다. 서로 다른 전장에서 현저하게 대립하는 두 이념을 사용하는 것도 '중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중개념주의이다.-31쪽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진정성을 잃는 것을 의미하며, 유권자들은 진정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것은 당신의 정치 기반을 허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보수주의 이슈와 가치에 의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수주의자들의 성공이 '왼쪽에서 이동한' 결과가 아니었다는 점을 명심하라. 그들은 보수주의 세계관을 활성화함으로써, 즉 자신들의 정치 기반의 언어로 말하고 자유주의자들을 냉소적으로 공격하여 자유주의 세계관을 억제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38-39쪽

비록 두 종류의 실용주의자가 동일한 방식으로 투표할 수 있지만, 정치 지도자로서의 그들의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진정성이 있는 실용주의자는 일관성 있는 도덕적 비전을 유지하지만, 진정성이 없는 실용주의자는 자신의 도덕적 비전을 포기한다.-44쪽

합리주의에는 마음에 대한 몇 가지 잘못된 이론 또한 따른다.

* 인지과학의 탐구 덕분에 우리는 사고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합리주의는 모든 사고가 의식적이라고 주장한다.

* 우리는 프레임과 은유를 사용하여 사고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합리주의는 모든 사고가 축자적이며, 세계와 전적으로 합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프레임 구성과 은유, 세계관의 모든 효과를 배제한다.

* 우리는 다른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한다는 것, 동일한 사실들이 주어져도 완전히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합리주의는 우리 모두가 동일한 보편적 이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성의 어떤 국면들은 보편적이지만, 다른 많은 국면은 그렇지 않다. 즉 그러한 국면은 자신의 세계관과 심층 프레임에 근거하여 사람마다 다르다.

* 우리는 사람들이 고전적인 논리의 범위를 벗어나 프레임과 은유의 논리를 사용하여 추론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합리주의는 사고가 논리적이며 고전적인 논리와 합치한다고 가정한다. -67쪽

합리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의 물질적 이기심에 근거하여 투표하고, 자신이 왜 그렇게 투표했는지를 알고 있으며,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여론 조사원에게 말할 수 있고, 그러한 관심사를 가장 잘 역설하는 후보자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말한다.

... 중략 ...

만일 합리주의를 신봉한다면, 당신은 진실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고, 사람들에게 어떤 프레임 구성과도 무관한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기만 하면 되며, 사람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추론하여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안다. 즉, 사실이 사람들의 프레임과 합치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쨌든 자신의 뇌 속에 있는) 프레임을 보존하고, 사실을 무시하거나 망각하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간주할 것임을 안다. 사실을 더 심오한 사유의 바탕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이해가 되는 방식으로 그 사실을 프레임에 넣어야 한다.-68쪽

보수주의자들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인과관계에 근거하여 주장을 펼치는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전체적이고 복합적인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주장을 펼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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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주체성의 이념 - 철학의 혁신을 위한 서론 인문정신의 탐구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7년 2월
품절


철학은 자유인을 위한 학문이다. 이런 사정은 개인이든 민족이든 마찬가지여서,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기를 일으켜 세우려는 겨레만이 철학을 필요로 한다. 자유란 소박하게 말하자면 남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요,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만, 이것은 고립된 자기관계 속에서 가능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세계 속에서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사회와 세계의 부분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모든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을 수 없으니 만약 전체 사회와 세계가 나로부터 소외된 타자적 힘과 권력으로서 나에게 대립한다면, 나는 결국 그 전체에 의해 규정되는 노예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내가 사회와 세계에 의해 규정되고 지배받는 백성이 아니라 그것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입법자가 되고 주권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부분으로서의 우리 모두는 오직 전체의 주인이 되는 한에서만 자기의 주인이 될 수도 있으니, 어떤 경우에도 자유가 단순한 분릴와 독립만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오직 자기의 세계를 스스로 형성해가는 활동 속에서만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다.-11-12쪽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단순히 압제에 저항하는 용기 뿐만 아니라, 자기의 세계를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이 요구된다.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칸트가 깨우쳐주었듯이 세계는 눈에 보이는 사물적 대상이 아니라 오직 생각 속에서만 열리고 생성되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모든 있는 것들의 총체이다. 만약 있는 것들이 오직 물리적 사물들이라면 세계는 그런 사물들의 총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물들의 시간적 공간적 전체를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사물들의 절대적 전체는 사물이 아니라 이념이다. 그런데 있는 것은 고정된 사물로서 주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모든 있는 것은 될 수 있는 것이니, 있음은 언제나 될 수 있음이다. 그런즉 세계는 단지 일방적으로 고정되어 주어져 있는 것들의 총체가 아니라, 동시에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것들의 총체이다.-12-13쪽

자유인으로서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사물의 주어져 있음을 넘어서 모든 될 수 있음과 역사에 이르기까지 있음의 모든 차원들을 자기 속에 포괄하는 참된 총체성으로서의 세계를 파악하고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13쪽

이른바 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은 신념을 가지고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밀어붙이고, 민청학련 사형수 출신의 철도공사 사장은 고속철도 여승무원 문제에서 보듯 그들이 비판했던 자본가들과 한치의 다름도 없이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다.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단지 그들 개인의 문제로 돌려 변절이라 비판하겠지만, 사실은 이 모든 위기적 징후가 우리 모두의 정신의 빈곤에서 비롯된 일이다. 우리는 압제에 저항해서 싸우는 일에는 영웅적인 용기를 보여준 겨레이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일에는 너무도 게을렀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억압의 사실을 끊어내고 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을 때,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할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다만 싸우고 또 싸워왔다. 하지만 막상 우리에게 권력이 주어졌을 때, 우리의 머리 속에는 참으로 새로운 우리들 자신의 세계상이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지도도 설계도도 없이 자기의 세계를 형성하고 자기의 집을 지어야 했으니, 남이 만들어놓은 세계상에 의존하는 것 말고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즉 지금 우리가 눈앞에 보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사유의 빈곤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16쪽

"자아는 근원적으로 정신적 삶의 초기 단계부터 욕동에 사로잡혀 있으며, 또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그 욕동을 만족시킬 능력도 지니고 있다. 이런 상태를 우리는 나르시시즘이라 부르며, 또 그렇게 스스로 만족을 얻는 방식을 자기성애라 일컫는다." (프로이트)-46쪽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이론 자체를 서양적 나르시시즘의 현대적표현이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나르시시즘의 개념을 프로이트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사용한다. 프로이트에게서 나르시시즘이란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자기애와 같은 말로 쓰인다. 그러나 자기애는 한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와 반성적인 관계를 맺으며 더 나아가 다른 무엇보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모든 사람이 에고이스트인 것과 마찬가지로 동시에 나르시스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자기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 방식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자기애라도 자기가 어떠하냐에 따라 그것은 긍지로 나타날 수도 있고 연민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혐오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려는 서양 정신의 나르시시즘이란 자기에 대한 긍지가 하나의 지속적 성격으로 굳어진 특수한 심리 상태를 의미한다.-49쪽

본래적 나르시시즘이 내용은 다른 무엇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느끼는 자기에 대한 "확고한 긍지"로 나타난다. 긍지란 '위에-있음'의 의식이다. 아름다운에서 내가 남보다 위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긍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르시시즘은 단순한 대자적 반성이 아니라 대타적 반성의 결과이다. 자기의 아름다움을 의식하되 그것을 남과의 관계, 또는 객관적 비교 가운데서 우월한 것으로 의식하는 것, 이것이 나르시시즘인 것이다. 그 우월성의 의식이 긍지인데, 이 긍지는 결코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는 자기의식이 아니라, 오직 아름다운 사람에게만 가능한 의식이다. 이에 반해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 자기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자기혐오나 자기연민일 수는 있으나 결코 긍지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본래적 의미의 나르시시즘은 아무에게도 허락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보편적 감정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객관적으로 우월하고 탁월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한 자기감정인 것이다-54쪽

그렇게 내가 남보다 위에 있음을 자각하는 나르시스는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뭇 타인들을 멸시한다. 그리고 이 멸시가 타인에 대한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랑은 매혹되고 사로잡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자기가 멸시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그는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뭇사람에게 사랑받았으나, 자기 자신은 누구에게도 매혹되지 못하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렇게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르시스적 정신은 언제나 자기 속에 머물러 자기와 관계한다. 그것은 타자와의 만남을 거부하는 정신이다. 물론 모든 주체에게는 타자가 있고 이런 사정은 나르시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에게 타인은 진정한 타자적 주체로서 대접받지 못한다. 오비디우스는 나르시스를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그 이름이 에코, 곧 메아리이다. 자기의 말을 빼앗기고 나르시스의 말을 단지 어눌하게 반복할 수 있을 뿐인 에코는 서양 정신 앞에서 자기의 언어와 주체성을 상실한 모든 타자적 정신의 은유이다.-54-55쪽

그렇게 치명적인 사랑으로부터 떠나지도 못하고 사랑을 이루지도 못하는 나르시스에게 남은 운명은 죽음 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 속에 머물러 자기의 존재를 완성하려는 모든 홀로주체성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리하여 주체의 죽음은 우리 시대의 철학적 관용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주체의 죽음은 주체가 자기 집착의 허망함을 깨우쳐 스스로 자신의 주체성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주체의 자기집착의 필연적 결과로서 일어난 일이다. 나르시스적 주체는 결코 스스로 자기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오비디우스의 신화가 말해주듯이 하데스로 내려간 나르시스는 지금도 스틱스 강에 하염없이 자기의 얼굴을 비춰 보고 있는 것이다.-56-57쪽

"자아의 본질은 자유이다. 즉 자아는 오로지 절대적인 자기권력으로부터 자기를 어떤 사물이 아니라 순수한 자아로서 정립하는 것을 통해서만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쉘링)-64쪽

"나는 나 자신과 나의 표상들의 대상이다. 나 밖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나 자신의 산물이다. 나는 나 자신을 만든다. ......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든다." (셸링)

여기서 보듯이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드는 것은 다른 행위가 아니다. 내가 세계로부터 고립된 존재자가 아닌 까닭에 우리는 오직 세계를 형성하는 한에서 나를 스스로 형성하는 것이며 세계의 주인이 되는 한에서 나의 주인이 된다. 주체의 자유는 그렇게 자기와 세계를 무제약적으로 형성하는 근원적 행위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66쪽

생각하면 서양 정신이 보여주는 타자에 대한 공포는 바로 이 수동성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나와 동등한 타자가 나 밖에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그에 의해 언제라도 예속되고 수동적으로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의한다. 그리하여 수동성을 회피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타자적 관계를 지양하는 것은 자유를 구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데, 근대 철학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과제를 수행하였다.-67쪽

여기서 우리는 서양 정신이 배제하는 것이 타자적 주체이지 타자 일반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떠한 타자도 없는 정신은 공허한 정신이다. 그것은 아무런 대상도 없는 생각은 현실적 생각으로 발생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정신은 오직 타자를 대상이나 객체로 삼는 한에서 자기의 존재를 실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타자를 정신 밖에 자립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나의 타자를 정신 밖에 자립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나의 자유가 침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스적 정신은 이런 상황에서 타자를 자기화하고 내면화한다. 즉 그것은 자기 속에서 타자를 정립하는 대신, 또는 비슷한 말이지만 모든 타자를 자기의 내재적 계기로 만드는 정신이다.-69-70쪽

서양적 자유의 이념 속에 내재된 배리와 역설은 자기의 자유를 위해 타자적 주체를 부정해야 한다는 데 있거니와 이것은 현실 역사 속에서는 북미 대륙에서처럼 원주민의 집단 학살과 같은 타자의 절멸로 나타나는가 하면, 이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타자를 자기에게 동화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동화가 자기와 타자의 절대적 동일성으로 발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양 정신은 타자를 자기화하는 만큼 자기 속에서 다시 타자를 정립하는 정신이다. 즉 그것은 자기가 주인이 된 세계 속에서 다시 타자적 관계를 산출하는 정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 정신의 나르시시즘은 자기 속에서 타자를 일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필연적으로 (반)정립하게 되는데, 이때 자기 속에서 반정립되는 타자는 정신의 타자일뿐 타자적 주체일 수는 없다. 그것은 관념 속에서는 대상화되고 객체화되는 타자이며, 현실 속에서는 도구화되고 노예화되는 타자이다. 그렇게 타자를 자기 속에서 노예화하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이다. 제국주의란 주체가 자기 자신을 보편자로 실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기 밖에 타자를 남겨두지 않을 경우에 그 타자의 주체성, 곧 타자적 자유 부정하고 타자를 노예화하는 전략이다. 그러니까 그리스에서 미국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어온 제국주의의 역사는 그리스에서 태동한 서양적 자유의 이념의 현실태인 것이다-70-71쪽

서양 철학의 나르시시즘은 존재의 근저에 놓인 이 근원적인 권력을 자기화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권력에 참여하고 그것을 전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기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나와 이질적인 것이라면 나는 결코 그것에 참여할 수도 없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도 없다. 오직 존재론적 권력이 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일 때에만 나는 그것을 나 속에서 따라체험하고 반복할 수 있으며, 또한 그때에만 나는 그 권력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 정신이 만물을 지배하는 존재론적인 권력을 바로 자기 자신의 형상 속에서 찾은 까닭이다. 그리고 이처럼 존재의 본질적 진리를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표상하는 것이 나르시시즘의 탄생기의 특징이다.-77쪽

신이 정신적인 존재라는 것은 그것이 인간적인 존재라는 말과 같다. 정신은 인간의 본질규정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이 정신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은 신과 인간의 본질적 동일성이 확보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요, 이는 인간이 신적인 존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신과 인간의 무차별한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호메로스에게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본질적 동일성의 지평 속에 내재적 차이가 정립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신적인 정신은 인간의 정신처럼 자기 밖의 대상을 생각하는 정신이 아니다. 만약 그런 정신이었다면, 그것은 타자에 의한 수동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정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정신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정신으로서, 오로지 자기하고만 관계하는 정신 곧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정신이다. 프로이트에 빗대어 말하자면 그것은 절대적 나르시시즘의 현실태인 것이다.-89-90쪽

중세철학의 역사는 그 신에서 시작된다. 신에게 몰입하는 정신이 중세의 정신이다. 그것은 사냥에 지쳐 연못가에 와서 물 위에 엎드린 나르시스와도 같다. 그는 수면에서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타인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에 매혹된다. 그 얼굴은 사실은 남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의 얼굴이었으나, 나르시스는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와 사랑에 빠져든다. 바로 이 단계가 중세이다. 그것은 신이 자기 자신의 영상인 줄 모르고 신에게 몰입하는 정신인 것이다. 그러나 중세철학이 찾았던 신은 고대 그리스 정신이 발견한, 아니 투사한 신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그리고 이 차이가 나르시시즘의 탄생기와 성장기를 나눈다. -91쪽

그러니까 인격적인 신에 대해 열광하는 까닭은 신이 본질적으로 나와 같은 인격적 존재이므로 내가 신과 같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과 같아짐이야말로 신에 대한 기독교적 열광의 지향점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적 겸허나 자기비하의 감저이 신 앞에서의 자기부정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의 확장과 신격화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만약 서양 정신이 마주한 그 타자가 자기와 동등한 상대적 타자였더라면, 자기를 타자와 일치시키려는 열망이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을 것이요, 자기가 타자 앞에서 수동성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정신이 마주한 타자적 정신은 절대적 정신이요, 절대적 주체인 신이었다. 신 앞에서 내가 나를 부정하는 것은 나를 신에게 일치시키기 위함이다. 그렇게 내가 신과 하나 된다는 것은 내가 그의 나라와 권력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의 절대화이다. 기독교적 열광은 이처럼 내가 신을 통해 절대적 권력의 주체가 된다는 데 대한 열광이다. 결과적으로 신에 대한 열광은 자기에 대한 열광이다. 신에 대한 사랑은 그 본바탕에서 보자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인 까닭에 그리도 열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106쪽

자아의 자유는 자기를 그렇게 주체로서 스스로 정립하는 것에 존립한다. 인간은 주체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자유가 있다. 근대 철학은 바로 이런 자유를 보편화하였다. 왜냐하면 근대 철학이 말한 자아의 주체성은 다른 어떤 경험적 조건도 배제한 순수한 사유의 주체성을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사람들 사이의 어떤 차별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기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본질적으로 주체이다. 자유와 주체성의 보편화, 이것이 바로 근대 철학의 영속적인 공적이다-117쪽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자기정립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자기를 정립하는 것만큼 세계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데 존립하는 것이며, 사유의 주체성 또한 단순히 추상적 자아의 정립이 아니라 현실의 능동적 형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즉 자아는 자기정립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 현실의 법칙의 입법자일 때 비로소 온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 중략 ... 자아가 타율적 법칙의 지배 아래 있는 한 그는 타율적 강제 아래 있는 것이요, 노예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도덕법칙이나 인륜적 법칙뿐만 아니라 자연 법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아는 오직 자기가 모든 객관적 법칙들의 입법자가 될 때 비로소 온전히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117쪽

근대에 이르면 자아는 절대적 권력을 직접 자기 속에서 반복하고 따라체험함으로써 자기가 그 권력의 주체가 되려 한다. 중세 철학이 신과의 합일 속에서 진리와 자유에 참여하려 했을 때, 진리와 자유의 최종적 실행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다. 인간은 다만 신과 하나됨으로써, 절대적 권력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원리는 나 속에서 직접 실현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 그 자체로서 존립한다는 어떤 객관적 진리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객관적 진리는 소외된 진리일 뿐이다. 진리는 나 속에서 반복되고 따라체험되는 한에서만 진리이다. 절대자는 더 이상 피안의 환상이 아니라 자아 속에 현전하는 현실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기도와 은총을 통한 간접적인 만남이 아니라 자아 자신의 직접적인 활동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유는 이제 신의 절대적 권력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과 행위 속에서 실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118쪽

현대적 정신은 욕망과 억압 사이에서 갈등한다. 자아는 초자아와 같아지기를 욕망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도리어 그것에 의해 억압받고 상처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상황을 종식시키지 못한다. 만약 그가 자기를 욕망하기를 멈추고, 어두운 수면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 있다면, 그는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 자기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아는 계속해서 초자아에 예속되고 억압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욕망에 휘둘리고 초자아에 억압받는 자아가 바로 우리 시대, 정신의 자화상이다. 그것은 근대적 정신이 생각했던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다. 이것이 이른바 주체의 죽음이다. -129쪽

"의지는 다른 것, 외적인 것, 자기와 별개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다만 자기 자신을 바꿔 말하면 의지를 의지하는 한에서만 자유이다. 앞의 경우에 의지는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자유란 이것, 곧 자유롭고 의지하는 것이다." (헤겔, <역사철학강의>)-130쪽

내가 인식한다는 것, 그러니까 인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내가 잠재적으로 사물의 생성과 존재의 주체가 된다는 것과 같다. 반면에 한 사물이 인식의 객체가 된다는 것은 형성의 객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가 인식 가운데서 사물의 생성을 반복할 때, 인식되는 그 사물은 생성의 근거와 원인들에 의해 형성되는 객체가 된다. 물론 인식은 사물을 형성하되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생각 속에서 형성한다. 하지만 이것이 본질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현실공간 속이든 사유공간 속이든 중요한 것은 사물이 자기의 형성의 원리를 타자적 아르케에게 양도하고 객체의 자리에 놓인다는 것이다. 현실공간에서 사물은 아르케로부터 형성된다. 그리고 이 형성에 대응하여 사유공간 속에서 사물은 개념적으로 구성된다. 그렇게 형성되고 구성되는 한에서 사물은 수동성 속에 있다. 그리고 인식의 사물의 형성 원리를 모방하고 반복할 때, 그것은 사물을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주체의 자리에 서게 된다. 이처럼 사물을 형성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야말로 인식을 통해 자아가 얻는 권력인 것이다. -143쪽

서구적 인식에서 인식과 기술은 공속한다. 기술과 인식이 공속하는 한에서 인식의 대상은 동시에 기술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기술적 재생산과 조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뜻하는 것인데, 이는 인식의 대상이 기술적 사유 앞에서 객체화되고 사물화 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말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했듯이 "기술은 기술이 적용되는 대상을 지배하고 다스리기 때문이다." 그런 한에서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지배하는 주체이다. 기술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인식하는 것은 정신이다. 그러나 기술 자체는 주관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기술이 객관적 정신의 체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49쪽

법이 나의 동의 없이 나에게 명령할 때, 그것은 타율적 강제의 체계이다. 그러나 내가 법에 동의할 때, 법은 나의 주관적 의지의 보편화이다. 그리하여 내가 동의하는 법에 복종할 때, 그것은 내가 타율적 강제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이른바 자율성의 의미이다.
-151쪽

자유는 처음엔은 개인의 의지의 자율성으로 발생하지만 개인적 자유는 언제나 사회적 지평에서 완성된다. 개인적 자유를 사회적 지평에서 완성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인간은 법의 주체가 됨으로써 보편적 권력의 주체가 된다. 자유와 권력을 향한 욕구에 한계가 없듯이 법의 적용 범위에도 한계는 없다.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자아는 무제약적인 보편적 법의 주체가 되려 하고, 이에 따라 법의 외연은 시민법에서 국제법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계시민법의 이념을 향해 끝없이 확장된다.-152쪽

"네가 외적으로 행위할 때, 너의 자의의 자유로운 사용이 모든 사람의 자유와 보편적인 법칙에 의해 더불어 공존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칸트)

법은 자유의 현실태이다. 그러나 내가 자유로운 만큼 타인의 자유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 법은 나의 자유의 현실태인 만큼 타인의 자유의 현실태이기도 하다. 법의 입장에서 보자면 각 사람의 행위의 합법성은 각자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한에서만 확보된다. 칸트의 저 말은 이런 법정신의 표현인 것이다. 법은 모든 주체들을 동일화한 뒤에, 그 주체들 사이에 현실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권리의 불균형을 시정하고, 이를 통해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154-155쪽

우리는 오직 우리가 모든 것을 소유할 때 온전히 자족할 수 있으며 자유로울 수 있다. ... 중략 ... 이제는 자유를 향한 욕망이 사물에 대한 욕망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욕망이 무제한적인 만큼 소유에 대한 욕망도 무제한적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근대 사회에서 자유의 원리가 보편화된 만큼 소유의 권리도 보편화된다. 나의 소유와 타인의 소유는 공존할 수 있어야 하며, 나의 소유가 타인의 소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공존과 균형의 원칙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 중략 ... 그러나 소유가 강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교환에 의해 주고 받는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소유 가능성은 교환 가능성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무제약적인 소유 가능성은 무제약적인 교환 가능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모든 것을 교환 가능하게 만드는 보편적 교환의 지평을 산출하게 된다.-158쪽

그렇다면 나르시스적 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르시스적 주체성이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홀로주체성이라면, 나르시스적 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한 첫 걸음은 주체성을 타자와의 만남, 특히 인격적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사유하는 일이다. 나의 주체성이 너와의 만남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와의 만남 속에서만 온전히 생성되고 정립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나르시스적 홀로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이 수행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철학이 지금까지 참된 주체성이 무엇인지를 물어왔던 것처럼 참된 만남이 무엇인지를 같이 물어야만 한다. -167쪽

선험론적 철학은 나의 존재든 세계의 존재든 그 어떤 존재도 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믿음을 거부한다. 모든 존재 주체의 활동을 통해 개방된다는 것이야말로 선험론적 철학의 근본 통찰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칸트에 의해 기초가 놓인 선험론적 철학의 길을 따른다.-168쪽

우리의 과제는 헤겔이 멈춘 바로 그 지점에서 생각을 시작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만남 속에서만 생성되고 정립되는 주체성을 참된 의미에서 개념적으로 해명하는 일이다. 주체는 사물이 아니라 활동이다. 인간은 자동적으로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체로 정립하는 활동을 통해 주체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 객체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성이란 우리가 실현해야 할 과제이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기성품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주체성이 본질은 오로지 활동에 있다.-172쪽

서양 정신이 타자적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지 않은 채, 타자 없는 자기 관계 속에서 자유와 주체성을 추구해왔기 때문에 도리어 주체의 죽음에 이르게 되고 이런 위험이 수동성과 능동성의 공속을 생각하게 만드는 배경이라면, 한국인들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자기를 자유로운 주체로서 정립하지 못한 역사를 살아오면서 지속적인 예속과 수동성에 사로잡혀 있었고 정신적으로 타자적 주체 속에서 자기를 상실해왔던 까닭에 자기를 온전히 주체로서 정립하지 못한 것이 수동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배경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서양 정신은 타자적 정신에 의해 침해되지 않는 자기가 먼저 있었으니, 그 자기의 아성을 타자적 주체를 향해 해체하고 개방하는 것이 과제이다. 이에 반해 한국인은 처음부터 온전한 의미에서 자기를 주체로서 정립하지 못한 민족이요, 그 결과 타자적 주체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민족이었다. 그리하여 이 겨레는 통일된 나라를 형성한 이래 한 번도 타자에 의해 강제되는 수동성의 굴레를 벗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수동성에 빠져 있었던 겨레에서도 주체성이라는 것이 가능한가?-176쪽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정신의 자기상실이다. 생각하면 자기의 철학이 없는 민족이 바로 한민족이다. 철학은 자기인식이다. 그것은 현실의 자기반성이다. 그러나 한민족은 자기의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자기의 언어로 반성하는 일에 너무도 게을렀다. 기존의 세계관이 현실 적합성을 잃어버렸을 때 이 나라의 주류 철학자들은 스스로 새로운 철학을 정립하기보다는 대개 남의 철학을 수입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가 수입된 이래 이 나라의 철학은 언제나 수입된 철학이었다. 불교가 쇠하면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성리학이 쓸모없어지면 서양의 철학을 받아들인 것이 이 나라 철학사의 지배적 경향이었으니, 그렇게 수입한 남의 철학에 주석을 다는 것이 이 나라 대다수 철학자들이 한 일이었다.-179쪽

그렇게 하나로 이어진 생각의 총체성의 객관적 현실태를 가리켜 우리는 세계관이라 부르는데, 이런 세계관을 기투하고 형성하는 정신의 노동이 바로 철학이다. 철학은 사유의 총체성 속에서 경험을 통일하고, 이를 통해 온전한 의미에서 세계를 통일된 경험의 지평으로 개방한다. 칸트가 말했듯이 세계는 경험적으로 주어진 사물적 대상이 아니라 생각의 활동을 통해서 정립되는 이념이다. 철학은 비어 있는 총체성의 이념인 세계를 구체적 규정 속에서 형성하는 정신의 노동이다. 주체는 그런 철학을 통해 비로소 자기의 세계를 가지게 되는데, 그 세계가 자기의 세계인 한에서 주체는 그 세계의 주인이다. 그런즉 자기를 주체로서 세우려는 자는 개인이든 민족이든 먼저 자기의 철학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181쪽

타자적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민족이 주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앞서 말했듯이 주체성이란 단순한 논리적 자기동일성의 의식이 아니라 총체적 인식체계로서 세계관을 스스로 정립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한국인들은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든 그들도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 구성된 연속적인 세계관이 아니다. 개항 이후 서양의 온갖 철학과 세계관이 밀려 들어온 뒤에 한국 땅에는 너무도 많은 세계관들이 중첩되어 있는 까닭에 단절 없는 잘 구성된 하나의 세계관의 지평이 없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인들에게는 잘 구성된 연속적인 자기 또한 없다. 한국인에겐 자기가 그 자체로서 타자성의 총체이다. 이 타자성 속에서 한국인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통스럽게 단절과 불화를 자기 속에서 경험해야만 하며, 결과적으로 온전한 주체로서 행위할 수도 없게 된다. -188쪽

홀로주체성은 나르시스적 주체성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관계와 자기 동일성을 통해 정립되는 주체성이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홀로주체성은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가 여기서 새로이 추구하려는 서로 주체성은 오로지 타자적 주체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생성되는 주체성이다. 나는 오직 너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됨으로써만 참된 의미에서 내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나와 네가 우리가 된다는 것은 나와 네가 우리 속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전적으로 양도하고 객체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나와 네가 만나 우리가 된다는 것은 이제 우리만이 주체이고 나와 너는 그 우리라는 공동주체의 속성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주체성은 한편에서는 나와 네가 서로 만나 보다 확장된 주체인 우리가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인 동시에 나와 네가 서로서로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네가 우리에 대해 동등한 주체라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234쪽

주체성이란 단순히 논리적 자기의식이나 이론적 자기의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듯이, 주체는 고정되어 존재하는 사물적 실체가 아니라 자아의 존재 방식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고 객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앞의 경우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자기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활동의 주체란 말이요, 뒤의 경우는 내가 남의 작용에 의해 이리저리 규정되는 객체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만남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내가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만 참된 의미에서 나의 주인으로서도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35쪽

서양적 인식이론에서 앎은 본질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앎의 대상은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습이다. 그러나 앎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정신화하고 이를 통해 그것을 보편화한다. 그렇게 정신화 작용을 거쳐 보편화될 수 있는 객관적 모습이 형상이다. 그렇게 정신화된 형상이 바로 개념이다. 그리고 개념이 인식의 주관적 내용인 것이다.-255쪽

말을 하고 듣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주체적이다. 말하는 자가 말하는 한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것처럼 말하면서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라면, 듣는 자 역시 들리는 말을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지만 동시에 그 말의 뜻을 알아듣는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듣는 일에 관해서는 어느 한쪽을 가리켜 주체라 하고 다른 한쪽을 객체라고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하고 듣는 사람이 모두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이기 때문이다.-262쪽

반성이 자기를 보는 것이냐 아니면 듣는 것이냐 하는 우리의 물음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립 불가능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반성은 신체적 감각의 일이 아니라 순수한 생각의 일이기 때문이다. 반성이란 보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나는 내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마찬가지로 내가 내면의 소리를 밖의 소리를 듣듯이 귀로 듣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체적 감각이 문제라면 내적인 자기반성은 듣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이 보는 것이냐 듣는 것이냐 하는 물음은 무의미한 물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내적 반성이 신체적 감각 그 자체로서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체적 감각과 유비적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지각하는 대상이 모두 같은 종류인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할 것도 있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도 있다. ... 중략 ... 이처럼 우리는 신체의 귀와 눈을 통한 감각은 아니지만 마음의 일에도 보는 것과 듣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 과연 마음으로 자기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듣는 것인가 하는 물음도 의미 없는 물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반성 속에서 우리 앞에 마주 선 타자로서의 내가 과연 어떤 의미의 타자인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것은 한갓 형상인가, 아니면 말이요 뜻인가? 반성 속에서 내가 되돌아가는 나 자신이 한갓 형상이라면 반성은 마음의 눈으로 나를 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반성 속에서 내가 마주 서는 나 자신이 말과 뜻이라면 나는 오직 마음의 귀를 기울여서만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264-265쪽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만남이 있다. 하지만 모든 만남이 서로 주체성을 실현하는 것은 안다. 도리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으려 할 뿐이다. 그때 만남의 대상은 동등한 서로주체가 아니라 한갓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는 사람은 만남 속에서 결코 자기의 동일성이나 정체성을 지양하지 않으려 한다. 그 결과 만남의 상대방에게 자기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강요하게 된다. 이를테면 사사로운 관계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자기의 취향과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나, 국제관계에서 미국이 이른바 법률과 제도에서 미국적 기준을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것은 모두 만남을 서로주체성의 실현이 아니라 자기의 홀로주체성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삼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이런 만남은 참된 만남이 아니다. -291쪽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주체성이다. 그런즉 민족이 문제라면 민족이 순수하게 그 동일성을 유지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얼마나 주체적이냐 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이다. 순수한 동일성이 문제라면 사물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니 순수하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것은 사물적 동일성이 아니라 자유이며, 활동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한 개인이 주체적이 되는 것이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서로주체성을 이룰 때 가능한 일이듯이 한 공동체가 주체적이 되는 것도 언제나 다른 공동체와 서로주체성 속에 있을 때이다. 이를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를 순수하게 보존하고 고수하려는 집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열린 개방성이며, 타자와의 만남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버릴 수 있는 용기이다. 우리는 주체성이 실체가 아니라 오직 활동에 존립한다고 반복해서 말해왔다. 그런즉 만약 민족이 하나의 주체라면, 그것 역시 어떤 사물적 동일성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 속에서 타자를 위해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고 비울 수 있는, 자발적인 자기부정의 활동성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292쪽

참된 서로주체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자기 부정의 의미에 대한 오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한 가지는 말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타인을 위해 나를 부정한다는 것이 자기의 모든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너도 만남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근본에서부터 포기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에도 획일성이 서로주체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획일성은 동일성에의 집착이니 그것이야말로 홀로주체성의 징후인 것이다.-293-294쪽

서로주체성을 위한 동일성은 획일적 같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교환을 의미한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주체성 속에서 나와 네가 같닫는 것은 나와 네가 자기의 색깔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나처럼 그리고 나도 너처럼 같은 주체이듯이 너도 나에게 주체일 수 있을 때,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에게 같은 주체일 때 그것이 서로주체성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너를 주체로 승인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내가 너의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의 인식적 주체성의 교환은 사실은 서로주체성의 형성을 위해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 너를 주체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만해가 '복종'이라는 시에서 표현하려 했듯이 내가 낮은 자리에서 너를 모시고 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를 마음으로 섬기는 한에서만 참된 서로주체성은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나와 네가 서로를 모시고 섬기면서도 서로가 주체성을 잃지 않아야 하며 노예적 예속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295쪽

사랑에서 환대까지 그 모두 자기를 내려놓고 겸손히 타인에게 배움을 청하는 것에 비하면 결코 비움도 모심도 탁월한 방식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배움은 가장 탁월한 의미의 비움이요 모심이다. 그리고 참된 모심은 또한 배움이다. 아무도 자기를 비우지 않고 남에게 배울 수 없으며, 남에게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서 자기를 비우고 남을 모신다는 것도 빈말이다. 타인에게 자기를 낮추고 배우지 않고 다만 타인을 사랑하고 책임지겠다는 것은 타인을 지배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타인에게 배우려는 사람은 이미 타인을 모시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이다. 인식은 대상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것이지만 배움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대나 책임은 강자의 자리에서 타자를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모심은 타인을 낮은 자리에서 받드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낮은 자리에서 타인에게 배우고 모시는 법을 배울 때에만 비로소 나는 온전히 나를 비울 줄 알게 되며, 나와 네가 그렇게 서로를 비우는 법을 배울 때 나와 너 사이의 참된 만남이 가능할 것이다.-296-297쪽

타자와 내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타자의 고통을 없애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물이 아닌 사람이라도 우리는 동물 학대에 반대해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은 자기와 타자 사이에 선행적인 동일성을 조건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나눔을 통해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주체성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서로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공유하고 나누어야 할 동일성은 오직 같은 주체성과 같은 수동성이지 존재의 사실적 내용의 동일성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 이외의 다른 동일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강요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결국 타자에 대한 폭력적 침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와 타자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타자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다면 그때 차이는 도리어 풍요한 다양성인바, 서로주체성은 그 차이와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개방성에 존립하는 것이다.-298쪽

홀로주체성은 나르시스적 주체성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관계와 자기 동일성을 통해 정립되는 주체성이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홀로주체성은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가 여기서 새로이 추구하려는 서로 주체성은 오로지 타자적 주체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생성되는 주체성이다. 나는 오직 너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됨으로써만 참된 의미에서 내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나와 네가 우리가 된다는 것은 나와 네가 우리 속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전적으로 양도하고 객체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나와 네가 만나 우리가 된다는 것은 이제 우리만이 주체이고 나와 너는 그 우리라는 공동주체의 속성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주체성은 한편에서는 나와 네가 서로 만나 보다 확장된 주체인 우리가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인 동시에 나와 네가 서로서로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네가 우리에 대해 동등한 주체라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234쪽

주체성이란 단순히 논리적 자기의식이나 이론적 자기의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듯이, 주체는 고정되어 존재하는 사물적 실체가 아니라 자아의 존재 방식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고 객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앞의 경우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자기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활동의 주체란 말이요, 뒤의 경우는 내가 남의 작용에 의해 이리저리 규정되는 객체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만남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내가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만 참된 의미에서 나의 주인으로서도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35쪽

서양적 인식이론에서 앎은 본질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앎의 대상은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습이다. 그러나 앎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정신화하고 이를 통해 그것을 보편화한다. 그렇게 정신화 작용을 거쳐 보편화될 수 있는 객관적 모습이 형상이다. 그렇게 정신화된 형상이 바로 개념이다. 그리고 개념이 인식의 주관적 내용인 것이다.-255쪽

말을 하고 듣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주체적이다. 말하는 자가 말하는 한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것처럼 말하면서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라면, 듣는 자 역시 들리는 말을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지만 동시에 그 말의 뜻을 알아듣는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듣는 일에 관해서는 어느 한쪽을 가리켜 주체라 하고 다른 한쪽을 객체라고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하고 듣는 사람이 모두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이기 때문이다.-262쪽

반성이 자기를 보는 것이냐 아니면 듣는 것이냐 하는 우리의 물음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립 불가능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반성은 신체적 감각의 일이 아니라 순수한 생각의 일이기 때문이다. 반성이란 보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나는 내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마찬가지로 내가 내면의 소리를 밖의 소리를 듣듯이 귀로 듣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체적 감각이 문제라면 내적인 자기반성은 듣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이 보는 것이냐 듣는 것이냐 하는 물음은 무의미한 물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내적 반성이 신체적 감각 그 자체로서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체적 감각과 유비적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지각하는 대상이 모두 같은 종류인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할 것도 있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도 있다. ... 중략 ... 이처럼 우리는 신체의 귀와 눈을 통한 감각은 아니지만 마음의 일에도 보는 것과 듣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 과연 마음으로 자기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듣는 것인가 하는 물음도 의미 없는 물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반성 속에서 우리 앞에 마주 선 타자로서의 내가 과연 어떤 의미의 타자인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것은 한갓 형상인가, 아니면 말이요 뜻인가? 반성 속에서 내가 되돌아가는 나 자신이 한갓 형상이라면 반성은 마음의 눈으로 나를 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반성 속에서 내가 마주 서는 나 자신이 말과 뜻이라면 나는 오직 마음의 귀를 기울여서만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264-265쪽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만남이 있다. 하지만 모든 만남이 서로 주체성을 실현하는 것은 안다. 도리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으려 할 뿐이다. 그때 만남의 대상은 동등한 서로주체가 아니라 한갓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는 사람은 만남 속에서 결코 자기의 동일성이나 정체성을 지양하지 않으려 한다. 그 결과 만남의 상대방에게 자기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강요하게 된다. 이를테면 사사로운 관계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자기의 취향과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나, 국제관계에서 미국이 이른바 법률과 제도에서 미국적 기준을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것은 모두 만남을 서로주체성의 실현이 아니라 자기의 홀로주체성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삼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이런 만남은 참된 만남이 아니다. -291쪽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주체성이다. 그런즉 민족이 문제라면 민족이 순수하게 그 동일성을 유지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얼마나 주체적이냐 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이다. 순수한 동일성이 문제라면 사물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니 순수하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것은 사물적 동일성이 아니라 자유이며, 활동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한 개인이 주체적이 되는 것이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서로주체성을 이룰 때 가능한 일이듯이 한 공동체가 주체적이 되는 것도 언제나 다른 공동체와 서로주체성 속에 있을 때이다. 이를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를 순수하게 보존하고 고수하려는 집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열린 개방성이며, 타자와의 만남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버릴 수 있는 용기이다. 우리는 주체성이 실체가 아니라 오직 활동에 존립한다고 반복해서 말해왔다. 그런즉 만약 민족이 하나의 주체라면, 그것 역시 어떤 사물적 동일성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 속에서 타자를 위해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고 비울 수 있는, 자발적인 자기부정의 활동성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292쪽

참된 서로주체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자기 부정의 의미에 대한 오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한 가지는 말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타인을 위해 나를 부정한다는 것이 자기의 모든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너도 만남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근본에서부터 포기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에도 획일성이 서로주체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획일성은 동일성에의 집착이니 그것이야말로 홀로주체성의 징후인 것이다.-293-294쪽

서로주체성을 위한 동일성은 획일적 같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교환을 의미한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주체성 속에서 나와 네가 같닫는 것은 나와 네가 자기의 색깔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나처럼 그리고 나도 너처럼 같은 주체이듯이 너도 나에게 주체일 수 있을 때,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에게 같은 주체일 때 그것이 서로주체성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너를 주체로 승인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내가 너의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의 인식적 주체성의 교환은 사실은 서로주체성의 형성을 위해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 너를 주체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만해가 '복종'이라는 시에서 표현하려 했듯이 내가 낮은 자리에서 너를 모시고 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를 마음으로 섬기는 한에서만 참된 서로주체성은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나와 네가 서로를 모시고 섬기면서도 서로가 주체성을 잃지 않아야 하며 노예적 예속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295쪽

사랑에서 환대까지 그 모두 자기를 내려놓고 겸손히 타인에게 배움을 청하는 것에 비하면 결코 비움도 모심도 탁월한 방식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배움은 가장 탁월한 의미의 비움이요 모심이다. 그리고 참된 모심은 또한 배움이다. 아무도 자기를 비우지 않고 남에게 배울 수 없으며, 남에게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서 자기를 비우고 남을 모신다는 것도 빈말이다. 타인에게 자기를 낮추고 배우지 않고 다만 타인을 사랑하고 책임지겠다는 것은 타인을 지배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타인에게 배우려는 사람은 이미 타인을 모시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이다. 인식은 대상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것이지만 배움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대나 책임은 강자의 자리에서 타자를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모심은 타인을 낮은 자리에서 받드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낮은 자리에서 타인에게 배우고 모시는 법을 배울 때에만 비로소 나는 온전히 나를 비울 줄 알게 되며, 나와 네가 그렇게 서로를 비우는 법을 배울 때 나와 너 사이의 참된 만남이 가능할 것이다.-296-297쪽

타자와 내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타자의 고통을 없애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물이 아닌 사람이라도 우리는 동물 학대에 반대해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은 자기와 타자 사이에 선행적인 동일성을 조건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나눔을 통해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주체성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서로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공유하고 나누어야 할 동일성은 오직 같은 주체성과 같은 수동성이지 존재의 사실적 내용의 동일성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 이외의 다른 동일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강요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결국 타자에 대한 폭력적 침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와 타자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타자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다면 그때 차이는 도리어 풍요한 다양성인바, 서로주체성은 그 차이와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개방성에 존립하는 것이다.-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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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7-2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추천받아서 읽고 있는데, 제가 아는게 없어서 쉽게 읽히지 않아 반쯤 읽고 덮어두고 있었는데.. 님 밑줄보고 다시 봐야겠단 용기가 생겼어요 ^^; 물론 여전히 제겐 쉽지 않겠지만..^^

마늘빵 2007-07-23 00:41   좋아요 0 | URL
아 제이드님 저도 이거 힘들게 읽었습니다. 근데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텍스트에 밑줄을 치고픈 욕망이 가득해집니다. 이 책 한권이 정말 많은걸 깨닫게 해줬습니다. 전 종교는 없지만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으며 느낄 때의 그런 '마음이 밝아짐'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 책 완전 옆구리에 끼고 살아야겠습니다. 이거 밑줄긋기 옮겨 치느라 죽는줄 알았습니다. 휴.

2007-07-23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7-23 07:27   좋아요 0 | URL
속닥님 네 한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가넷 2007-07-23 0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거 지난번에 밑줄긋기로 올리지 않으셨어요?

마늘빵 2007-07-23 07:27   좋아요 0 | URL
엇, 아닐텐데요. -_- 제가 비공개로 계속 꾸준히 치면서 축적해온건데, 언제 한번 중간에 살짝 공개된 적이 있었나봐요. 그때 보셨나보다. :) 이게 완성본이에요. 다 읽었어요.

비로그인 2007-07-23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거 찬찬히 읽어두어야 할텐데 서재에선 이런글 같은데에 책갈피 꽂아두는 것같은걸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ㅜ..ㅠ

마늘빵 2007-07-23 20:18   좋아요 0 | URL
어 있잖아요. 찜기능. 저는 좀 오래 씹으며 읽어야 할 페이퍼나 리뷰들은 찜해놓고는 제 서재에서 열어보곤 합니다. :) 곱씹어 읽고 읽다 멈춰 사색할 문장이 많아요. 최근 이슈들과도 연관해서.
 
비평 15 - 2007. 여름
비평이론학회 엮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5월
품절


어느 쪽이 낫다 못하다를 떠나서, 만약 우리가 고교생들에게 미국 방식의 에세이를 쓰게 한다면 어찌될까? 어림도 없는 얘기다. 학생들이 소질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금의 교육 현실에서는 우선 학생들의 소질을 북돋아 줄 방법이 없고, 이미 사회에 만연한 상호불신과 반교육적 '에토스'가 그런 자발성의 교육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대학으로서 당장 그 제출된 에세이가 학생이 제 손으로 쓴 것인지 누가 대신 써준 것인지 판별할 길이 없다. 미국 방식의 자유논술 같은 것은 "학생 에세이는 절대로 타인이 써주지 않는다"는 규칙과 명령의 교육적 준엄성이 사회적으로 존중되고 학교, 사교육장, 학부모, 학생이 모두 그 규칙을 준수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잘 쓴'혹은 '잘 썼다'는 에세이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시장이 즐비하고 대신 써줄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데가 대한민국이고 우리의 교육 현실이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규칙을 제 혼자 지키려는 자는 바보가 된다. 학생들은 바보이고 싶지 않다. 부모들도 바보이고자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대학에 붙고 보자"는 명령이 다른 모든 명령들을 압도하는 상황에서는 수단방법을 가리고 규칙을 따질 겨를이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어야 하기 때문에 그 '무슨 수'들이 아무리 부당하고 불법적이고 비교육적인 것이라 해도 일단 대학에 붙기만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속임수를 포함해서 '무슨수' 이건 쓸 줄 아는 것이 오히려 '경쟁력'이다. 고교생 독서이력철 같은 제도가 시행되어도 대학으로선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난감한 문제에 봉착한다.

(경쟁력, 수월성, 창의성의 비극 - 도정일)-27-28쪽

대학입시 경쟁에서 91점을 받은 학생은 입학하고 90점을 받은 학생이 탈락하는 것은 개인의 실력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학과정원 수에 의해, 30명 정원일 경우 30등을 한 91점 학생은 입학이 가능하고 31등을 한 91점 학생은 탈락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기에 91점과 90점 간의 차이 1점은 결코 인간의 능력이 실력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1점으로 겨우 붙은 학생은 실력 있는 학생처럼 사회적으로 대우 받는 반면 90점으로 탈락한 학생은 열등생으로 낙인 받게 된다. 이것이 입시 위주 한국 교육의 병폐인 동시에 한국 교육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다.

(교육 붕괴와 교육의 민주화 - 한준상)-32쪽

이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 어른들에게뿐만 아니라 곁 사람에게, 세상에,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게 버르장머리가 없다. 사람대접은 보고 배운 적도, 따로 익힌 적도 없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가끔 도저히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불러 야단치면 "왜요?"하고 눈부터 치켜뜨고 대든다. 사회의 소수자나 약자는 고사하고 도대체 남을 배려하는 일엔 손방이다. 하기는 이들이 누구에게 뭘 보고 배워 그걸 알겠는가? 무엇보다도 사이버 공간에서 익명성에 기대 함부로 악담으로 대거리로 마녀사냥을 일삼는 이들의 버르장머리 없음과 배려 없음은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다. 또 디지털 세대로서 어른들보다 월등한 핵심역량으로 어른세대의 위선과 모순에 앙갚음하는 서슬 또한 무섭기 짝이 없다. 아이들을 이렇게 죽음과 죽임의 나락으로 내몬 어르신들은 과연 어떠신가?

그토록 교육이라면 맹신하다 못해 광신하는 세상에서 정작 교육을 맡은 교사들부터 헌신짝 취급이다. 그림자도 밟지 않도록 모시고 기리던 스승의 자취는 어느 새 간 데 없고, 스승의 날이면 교문 닫아걸고 손사래 치며 대접은커녕 손가락질이나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처지다. 그깟 세상이야 뭐라던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아이들 잘 가르치면 되지 않느냐는 말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일 뿐이다. 내가 아는 어느 초등교사가 울먹이며 한탄하듯이 아이들은 숫자나 글자는 죄 배워갖고 오면서, 정작 싸가지는 하나도 배워먹지 못하고 학교에 들어온다. 공부는 학원에서 하고, 학교에서는 퍼져 자기나 하다가 행여 이름이라도 부르면 눈을 부릎뜬다. 나무라거나 꾸지람 할라지면 핸드폰으로 호시탐탐 동영상 찍어 신고할 건수나 노린다. 부모들은 이제 교사 알기를 우습게 알고 아무 때나 달려들고, 걸핏하면 팔 걷어붙이고 나선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두렵다고, 부모들이 무섭다고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른다.

(교육, 마지막 식민지 - 정유성)-106-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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