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절판


언어가 존재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언어는 하나의 활동, 혹은 인간들 사이의 의사소통 체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언어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고 전달해 줄 수 있는 사회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인간 사회는 살아갈 수 있는 환경과 생계를 꾸릴 수단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사회가 번성할 수 없는 곳에서는 언어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 언어가 그 사용자를 잃게 되면, 그 언어는 죽어간다.-18쪽

인간의 발명품인 언어는, 하나의 종으로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문화, 기술, 예술, 음악,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가능케 한 것이 언어였다. 모든 인간들이 축적해 놓은 풍요로운 지혜의 원천이 바로 언어이다. 기술은 다른 기술로 대체될 수 있지만, 언어들은 그렇지 않다. 각 언어마다 세계를 보는 자신만의 창이 있다. 모든 언어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언어가 스스로 일구어 낸 모든 문화의 기념비와도 같다. 다양성의 상실을 막기 위해 무언가 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상황에서 다양성의 일부라도 잃게 된다면, 이는 우리 모두에게 손실을 안겨 주는 것이다. 더욱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를 가질 권리, 그 언어를 문화 자원으로 보존하고, 자손들에게 물려줄 권리를 갖고 있다.-34-35쪽

과거에는 이러한 멸종이 대개 인간의 개입과 관계없이 발생했지만 이제는 인간의 개입을 통해, 특히 인간이 환경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유례 없는 규모의 멸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보다 큰 그림에서 볼 때, 언어들의 멸종은 전 세계적인 생태계 붕괴 현상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소위 생물언어적 다양성의 위기가 발생하게 된 이면에는, 인간이 지구 생태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오류가 있는 것이다. -39쪽

언어의 전환은 지구촌 현상을 불러온 훨씬 대규모의 사회적 변화 과정의 징후가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세계 도처의 사람들, 심지어 아마존의 가장 외진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몇몇 세계 언어들이 확산됨에 따라 많은 소규모 언어들이 사멸하고 있다. 오늘날의 지구촌에서는 세계 인구 중 약 90퍼센트가 백 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인간 사회가 이렇게 급진적으로 재편됨에 따라 영어와 몇몇 세계 언어들이 지배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재편이 '적자생존'의 사례를 보여주는 것ㅇ느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결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조건 아래서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이 이루어진 이상적인 시장경제 체제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주장할 것이다. 지배적인 언어의 등장은 사회적 변화가 불균등하게 일어남에 따라, 선진국들과 개발도상국들 간에 현저한 자원의 불균형이 생긴 데서 나온 결과이다. -41쪽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소주 민족들이 이런 식으로 광범위하게 동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대체적으로 무시되고 있는데, 이는 동화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큰 그림을 놓고 보면, 강요된 동화와 자발적인 동화 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진다.-47쪽

언어를 보존하는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지닌 다양한 유산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이기적인 목표라는 점은 인정한다. 사회언어학자인 조슈아 피시먼은 언어 유지를 반대하는 입장 또한 가치 기준에 관한 하나의 의견인 만큼, 언어 유지를 지지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가치 기준에 관한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혹해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언어 유지를 반대하는 이들은 소규모의 문화와 언어들이 단순히 사멸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분명 자신의 언어나 전통 문화가 없더라도 생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분명히 강요에 의한 획일화가 좋다거나, 한 민족이 언어를 상실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50쪽

언어적, 문화적 다양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지구상의 생물다양성을 위협하는 큰 과정의 주요한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언어는 인간이 자연환경과 그 환경에 상호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축적하고, 유지하고, 전승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언어의 위기에 관한 문제는 지구 생태계의 보존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을 지킬 수 있느냐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56쪽

특정 언어들이 확산되어 나가는 반면 다른 언어들이 위축되는 이유는 언어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언어를 확산시키는 것은 사람들이다. 인류 역사의 초기에 이런 확산들은 지역적 생태 환경의 영향으로 유발되었다. 즉 사람들은 자원이 빈약한 터전에서 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이동해 가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원하는 지역을 다른 집단이 이미 점거하고 있는 경우에는 잠재적으로 갈등의 소지가 있었다. 더 나중에 일어난 확산은 에트루리아어를 비롯한 다른 여러 언어들의 사멸을 불러왔다. 로마 제국이 정복하기 이전까지 유럽에는 아마도 현재까지 살아남은 서유럽의 바스크어와 같은 비인도유럽 어족의 언어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새로운 언어가 어떤 지역으로 확산되면, 일부 구조적인 특성들이 다른 특성들을 제치고 퍼져 나가게 된다. 이렇게 언어의 확산은 한 지역의 언어적 다양성을 고갈시키게 된다.-73쪽

일반적으로 외래어가 한 언어의 어휘로 채택되는 정도는 문화적 접촉의 척도가 될 수 있다. 마지막 단계에 이른 죽어가는 언어는 새 언어로부터 많은 단어를 도입했을 수 있다. 일부는 새로운 것들을 가리키면서, 또는 원래의 단어들을 대체하면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악순환을 낳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고 여기는 언어를 말하는 데 반감을 가지기 때문이다.-100쪽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언어가 죽어가고 있는 사회에서는 글을 배우거나 문어체에 어울릴 만한, 보다 형식을 갖춘 표현법을 습득할 기회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충분히 가르치기만 한다면 아이들은 어떤 언어라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처음에는 그 언어의 보다 단순한 측면들을 먼저 익힌 후에 더 복잡한 것으로 옮겨 간다. 구조가 복잡할수록 언어를 배우는 시간은 더 오래 걸린다. 영어를 하는 아이들이라도 학교에 갈 나이가 되기 전에는 세세한 관계절 구문을 완전히 숙지하지는 못한다. 그 한 가지 이유는 관계절들, 특히 "내가 앉은 의자는 빨간 칠을 했다" 같은 유형의 표현들은 구어보다는 문어에서 훨씬 더 자주 쓰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작문을 배우기 전에는 그런 문형을 접하지 않는다. 위기에 처한 언어들의 경우, 아이들의 언어 습득이 바로 이런 종류의 복잡한 문법들을 익히는 나이에 중단되면서 학교에서 다른 언어로 전환하도록 강요받기 쉽다-101-102쪽

한 언어의 어휘는 세상을 이해하고 지역 생태계 내에서 생존하기 위해 한 문화가 이야기하고 분류하는 사물들의 목록이다. 따라서 태평양의 오세아니아 언어들에는 물고기의 경제적, 문화적 중요성이 반영되어 있다. 어떤 개념에 대해 문법적인 차이를 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의 차이, 또는 단수와 복수의 차이), 언어들은 문화적으로 중요한 개념들에 개별적인 이름을 부여한다. 따라서 세계의 많은 언어들은 머릿속의 개념의 범주를 형성하는 구조에 관해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주며, 인간 정신의 무궁한 창의성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109-110쪽

한 언어의 일부분을 다른 어어와 비교해서, 특별한 문법 구조로 인해 어떤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여러 가지 사물이나 상황을 더 쉽고 우아하게 표현할 수 있음으르 보여 주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지만, (피진어를 제외하고) 원시적인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통해 우리 자신의 언어를 바라볼 때,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언어만이 논리적이라고 간주할 만한 필연성이 없단는 것을 알게 된다. 현실을 비추는 창으로서 특별히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언어는 없다.

또한 언어 구조의 문제 때문에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언어도 없다. 모리스 스와데시는 선천적으로 취약하게 타고난 언어, 즉 천성적으로 환경 변화를 이겨 낼 능력이 없는 언어는 없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사용되는 모든 언어들 역시 한때는 기술적으로 더 단순한 사회에서 쓰이던 것들이었다. 아직도 텔레비전을 가릴키는 단어가 없는 언어들이 많다. 하지만 영어에도 텔레비젼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그 단어가 없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든 새로운 사물을 가리키는 단어를 만들어 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112-113쪽

토착 언어와 문화를 원시적이고 후진적이라고 무시하면서 그것을 서구의 언어와 문화로 대치하는 것이 현대화의 진보와 선행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하는 미래를 이상적인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런 견해는 많은 이유에서 잘못된 것이다. (중략) 현대인의 사고방식에서 고쳐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가장 유형이 다른 언어들을 연구하는 데서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 언어들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126-127쪽

언어는 허공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생태학이라는 용어는 몇 가지 의미에서 언어와 연관짓기에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생태학을 뜻하는 영어의 ecology라는 단어의 어원은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os 이다. 언어는 부모가 아이에게 말을 전해 주어 항시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어야 번성할 수 있다. 사회는 살 만한 환경과 지속 가능한 경제 체제가 있어야만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가 생겨나고 사멸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언어 자체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전체적인 삶의 모습을 살펴봐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생태학적 사회관이다. 인간은 지형과 천연 자원에 의해, 자신의 지식과 기회에 의해, 그리고 타인의 행동에 의해서 그 경계가 그어지는 복합적인 장에서 움직이는 행위자들이다. 희귀생물이 생태계에 얽혀 있듯이 언어 역시 사회적, 지리적 기반에 얽혀 있다.-139쪽

우리는 인간의 행위를 단순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고, 사람들이 언제나 자기가 접하는 언어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를 택하게 마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러는 편이 많은 사람들과 정보와 용역을 교류하는 데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소수의 언어를 계속 고수한다면, 그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거나 다른 언어를 습득하는 비용이 어떤 이유에서든 너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가진 그 언어의 문화적 가치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한 오류이다.-150쪽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사회생활에서 성공하려고 하는 노력은 대부분 긴밀하게 얽힌 지역 사회에서 좋은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선물하기나 수다 떨기, 종교적이거나 세속적 모임 등과 같은 인간의 여러 행위들은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행하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종종 이런 활동들을 원시적인 심리 상태에서 기인한 기묘하고 비합리적인 잔재 정도로 치부한다. 예를 들어 발전 이론가들은 원시 부족들이 힘들게 얻은 생산물을 불필요한 큰 잔치에 쏟아 붓는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 같은 활동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는 이유는 우리의 경제적 시각이 비현실적으로 편협하기 때문이다.-150-151쪽

언어를 직접 겨냥한 정책이 아니라, 토착민의 경제적 역할에 대한 정책들이 소수 언어를 사멸시킨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사실은 언어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보다 전반적인 생태적, 경제적 기반의 결과물이라는 우리의 견해가 옳다는 확신을 준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단속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어를 겨냥한 정치적 행위들은 실패로 끝나기가 쉽다. 반면 경제적, 사회적 영역의 주요 물자들은 손에 넣고 통제할 수가 있다. 그런데 언어는 사회적, 경제적 기반 없이 번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언어를 소생시키고자 하는 운동에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157쪽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규모가 큰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실질적인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준다면 사람들 스스로 그것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강제로 사람들을 '현대화'시키려는 시도들은 잘되어도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고, 잘못되면 다른 문제들을 덮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세계 경제에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영어나 다른 세계어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모국어를 잃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쉽사리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만약 그들에게 스스로 개발 조건을 정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흔히 양쪽에 모두 유리한 방안을 찾아낼 것이다. 즉 지역 사회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보다 광역의 경제 및 정치 체제에 적절히 전략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렇게 되면 철저한 다중 언어 사회가 이루어져서 그 사회에서 쓰이는 모든 언어가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받고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248쪽

많은 사람들은 변방 국가들의 언어 보존과 경제 개발의 필요성은 상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둘은 동일한 문제에 대해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의 다양성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상적인 과거에 대한 감상적 찬미가 아니라 지속가능하고, 지역 상황에 적합하게 개발할 수 있는 권리를 되돌려 주려는 노력의 일부이다. 따라서 언어의 사멸은,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관련된 여러 가지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게 해 주는 "유익한" 문제이다.-256쪽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개발에 따른 이런 편향성들 - 도회지 엘리트 위주이며 자원 고갈과 동질화를 지향하는 성향 - 은 가장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위해 작용하는 우호적인 자유 시장 체제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식민 시대와 식민지 이후 시대에 소집단 엘리트들이 자원과 기회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징후로 볼 수 있다. 이런 엘리트들은 정치 제도와 법 제도를 이용해서, 그리고 종종 실력 행사까지 해가며 국가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주변 지역 사람들의 자원을 차지해왔다. 그러나 국가 발전은 시골 사람들의 자원으로 자금을 마련하면서도, 그들을 위해서는 별 혜택을 주지 않는다. 도회지의 엘리트들은 시골의 빈곤을 완화시켜 주기보다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소득을 유용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토지는 장기적으로 다수에게 최선의 소득을 가져다주기보다는, 소수에게 가장 높은 수입을 주는 쪽으로 전용된다. -268쪽

언어적 다양성을 유지한다고 해서 언어의 종류와 문화가 변하지 않고 유지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세계 경제가 제공하는 신나고 유익한 혜택을 누리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영어나 다른 세계어를 습득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인 필요성이 다양성의 유지와 반드시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언어들은 서로 보완적인 기능을 하며 공존해 왔다. 더욱이 이중 또는 다중 언어 상황은 강력한 지역적인 정체성과 아울러 세계적인 의사교류 체제의 이점을 거의 추가 비용없이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의 자생적인 언어 습득 능력은 거의 무한하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언론에서 종종 다중 언어 사용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로 무슨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 계급이 통제하지 못하는 지식이나 조직을 어떤 형태로든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289-290쪽

어떤 언어를 사용하겠다고 선택하는 것은, 정체성에서 나오는 행동 또는 특정의 사회에 소속되려는 행동이다. 어떤 존재로 살고 싶은지 선택하는 것은 인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언어나 이름의 선택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인 자유를 뜻하기도 한다.-290쪽

언어는 복장, 행동 양식, 종교나 직업 등 여러 특성들과 더불어 집단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한 언어를 포기하거나 잃게 되면 다른 언어가 곧 대체하겠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차이가 생긴다. 언어는 궁극적인 상징체계로서 뚜렷한 정체성을 표시하는 데 아주 적합한 도구이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공유하는 의미나 경험을 보존하고 후손에게 전하려는 문화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언어든 큰 부분은 그 문화 특유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어가 사라질 때 자신들의 전통 문화와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린다고 느낀다. 한 아메리카 원주민 대릴 베이브 윌슨은 아주머니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백인들의 말을 알아야 한다. 그러너ㅏ 영원히 살아남으려면 우리말을 알아야만 한다."-321-322쪽

"세계의 문화를 단일하게 통합하는 것만큼 빠른 속도로 인간의 창의성과 풍부한 문화적 다양성을 고갈시키는 것은 없을 것이다. 문화적 획일성은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그것은 전체주의를 가져올 가능성이 더 높다. 일원적인 체제는 특권적 소수 세력의 지배권을 더 강화할 뿐이다. 문화적 다양성은 건강함과 성취를 함께 이룰 수 있는 이 세계의 잠재적인 원천의 하나이다." (론 크로콤)-332쪽

"우리가 본질적으로 언어를 통하지 않고 현실 세계에 적응한다든지, 언어가 단지 의사소통하고 사고하는것과 같은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부수적 수단이라고만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사실상 "현실"세계란, 상당 부분이 집단의 언어 습관 위에 무의식적으로 쌓아 올려지는 것이다. 어떤 두 언어도 동일한 사회적 현실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 만큼 비슷하지 않다. 서로 다른 사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다른 세상들이다. 같은 세상에 이름만 다르게 붙인 것이 아니다." (에드워드 사피어)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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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는 팀장은 분명 따로 있다
김경준 지음 / 원앤원북스 / 2005년 11월
절판


기업에서 민주적 팀은 존재할 수 없다. 단지 합리적 팀만 존재할 수 있다. '합리'란 이치에 맞다는 뜻이다. 이치란 원인과 결과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수렴하는 과정이 살아있다는 의미다.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권한과 책임의 구분이다. -30-31쪽

"상황이 발생했을 때 리더는 최선을 다해 올바른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판단력은 완전하지 않다. 때로는 잘못된 결정도 내린다. 최악의 리더는 막연히 결정을 미루는 사람이다. 잘못된 결정보다 지연된 결정이 더 문제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리더십 교육 中)-44쪽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 없고, 관리할 수 없는 것은 개선할 수 없다."(피터 드러거)-52쪽

일정한 기간 내에 집중적으로 추진해야 할 단순한 목표를 설정해서 조직의 역량을 집중시키고, 다음 단계에서는 목표를 바꾸는 식으로 이끌어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방향이 분명해지고 팀장 자신의 사고도 정리된다. 이것저것 늘어놓으면 심리적 위안은 받을지 몰라도 실질적인 추진력은 가지기 어렵다.

만약 여러가지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면 최소한 우선순위는 분명히 해야 한다. 우선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을 분명히 해야 혼선이 빚어지지 않고 조직의 역량을 집중할 수 있다. -75쪽

돈은 나누면 각자의 몫은 줄어들지만, 지식과 경험은 나눌수록 각자의 몫이 늘어난다. 돈은 나누어도 총액은 그대로지만, 지식과 경험은 나눌수록 총량도 늘어나는 시너지 효과가 있다. 팀장이 돈을 줄 수는 없지만, 경험과 지식의 폭을 넓혀줄 수 있다면 팀원들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돈이 들지도 않는다. 팀장의 리더십과 팀의 분위기만 조성되면 가능하다. 팀장이 팀원들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고 키워나가는 선순환구조만 만들 수 있다면 팀의 실적과 팀원들의 사기는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다. -82쪽

팀장이 노동력을 쥐어짜려 하면 팀원들은 일당받고 주어진 시간만 일하는 노동자가 된다. 그러나 팀장이 자존심을 쥐어짜면 팀원들은 연봉받는 전문가의 집단이 된다. 팀장 자신이 이끌어갈 조직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89쪽

어떤 기업이든 성공만 있을 수는 없다. 기업의 세계란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업에서의 성공, 실패는 도박에서의 성공, 실패와는 다르다. 기업경영에서는 합리적으로 예측하고 최선을 다해도 결과가 나쁠 수 있다. 반면 도박에서는 그때 그때의 운에 맡긴다. 따라서 도박의 실패는 단순한 확률이지만, 기업경영의 실패는 활용 여하에 따라 소중한 자산이 된다. -107쪽

"당신이 가진 힘이란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의 크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의 크기, 그것이 힘이다. 힘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가운데 존재한다."(전직 마피아 중간보스 V) -154쪽

"감정은행계좌란 인간관계에서 구축하는 신뢰의 정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공손하고, 친절하며, 정직하고, 약속을 잘 지킨다면 우리는 감정을 저축하는 셈이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우리에 대해 갖는 신뢰가 높아지기 때문에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그러한 신뢰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하고, 무례하고, 말을 막고, 무시하고, 독단적이라면 감정계좌는 잔고가 바닥나거나 차월된다. 즉 신뢰수준이 매우 낮아진다. (중략)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사람들과 이룩하는 감정계좌는 좀더 규칙적인 예입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매일 하는 상호작용이나 상대방이 우리에 대해 오해하는 데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동인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스티븐 코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中)-216-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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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유럽 출장간다 - 글로벌 마켓을 누비는 해외영업 실전 매뉴얼
성수선 지음 / 부키 / 2008년 2월
품절


별 도움도 안 되는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일요일에 늦잠 한 번 못 자고 비싼 응시료를 내며 매달 시험을 볼 필요가 있었을까? 만점을 받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말이다. 남는 거라곤 달랑 성적표 한 장 아닌가! 그럴 시간이 있으면 소설책을 한 권 읽든지, 좋은 영화를 한 편 보는 게 낫다. 영어를 아무리 잘하면 뭐 하나? 할 말이 없는데! 중요한 건 콘텐츠다. 아무리 표지 디자인이 휘황찬란해도 내용이 없는 책은 팔리지 않듯이,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자신의 일상 밖의 외부 세계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호기심도 없다면 할 말이 뭐가 있겠나? -16-17쪽

"생리적으로 인간은 배설을 못하면 죽게 되고 정신적으로도 그런 현상은 비슷하리라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끊임없이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정리하고, 정화하고, 그래서 삶을 계속하게 된다." (안정효, <글을 써야 하는 이유>)-46쪽

바이어에게 접대성 멘트를 남발하는 것도 역효과를 가져온다. 접대성 멘트를 남발하면 상대는 감동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당신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밥 먹었니?'처럼 쉽게 하는 사람을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나, '네, 고객님,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하는 전화번호 안내원의 인사를 기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과한 표현이라고 불쾌해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진심이 담기지 않은 형식적인 접대성 멘트를 남발하는 것은 협상에 해가 된다.

당신이 달변가가 아니라고 해서 기죽을 필요는 없다. 백 마디 말보다 당신의 확신에 찬 표정이 상대방에게 더 신뢰를 준다. 백 마디 미사여구보다 상대방의 말을 열심히 듣는 당신의 자세가 상대방에게 훨씬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협상은 참석자들이 배우인 연극과도 같다. 상대방의 몸짓, 표정 하나하나에도 의미가 있다. 상대방의 말만 듣지 말고 몸짓, 표정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라. 말에만 의존하지 말고 몸짓, 표정, 태도로 진심을 전하라. -113쪽

고전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당대의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상황, 계급 같은 콘텍스트를 고려하지 않고 현재 시점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면 오독을 할 확률이 높다. 그와 마찬가지로 말하는 사람의 개성이나 문화적 차이,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YES'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착각하기 딱 좋다. 협상 테이블에서의 동상이몽! 상대방이 말하는 'YES'의 의미, 즉 말의 행간을 신중하게 해석하자. 좋을 대로 해석하고 혼자 착각하는건 절대금지! -116쪽

"사람들이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추억을 떠올리거나 주는 사람의 정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값비싼 선물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다. 값나가는 물건은 일시적으로 받는 사람을 흥분시킬지 모르지만, 마치 어린아이가 새 장난감을 금세 잊어버리듯이 쉽게 잊혀진다. 이에 비해 주는 사람의 세심한 배려가 담긴 선물의 경우에는 감상적인 효과가 길게 이어진다. 그 선물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볼 때마다 그것을 준 사람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로버트 그린, <유혹의 기술 다이제스트>)-166쪽

"상대방이 당신을 특별한 존재이고, 피와 살이 있는 존재이며, 3차원적인 개인으로, 즉 감정과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 상대방이 좋아하고 걱정해주고 책임감을 느끼도록 하는 사람으로 인식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적어도 상대방이 무언가를 해 주고 싶은 사람으로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허브 코헨, <협상의 법칙>)-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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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8-03-09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기에 작가는 끊임없이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정리하고, 정화하고, 그래서 삶을 계속하게 된다."

결국 이 책을 읽게 만드는 아프님의 밑줄긋기..^^
 
편집자 분투기
정은숙 지음 / 바다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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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는 책을 만들면서 세상의 일부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물론 오늘날 책의 의미는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 의미가 더 무거워진 부분도 있고, 가벼워진 부분도 있다. 그런데 책의 의미를 일련의 정영ㄴ한 사고체계 그 자체라고 확대해서 보면 인류가 가진 모든 지혜가 다 이 가운데 내포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책을 만든다는 것은 비단 책만이 아니라 세상을 편집하는 작업 한가운데 있다는 의미도 된다." -43쪽

"요즘은 물음을 던지기보다는 대답을 해야 하는 입장에 서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책, 혹은 편집을 잘 모른다는 생각을 반추하곤 한다. 그것은 책의 의미가 어느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이 그러하듯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43쪽

"편집자로 살기가 어려운 것은 책 만들기의 어려움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이런 삶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살기가 어렵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남들은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즐기는 데 비해 편집자는 어느새 저걸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전개하고 있다." -43쪽

관찰자가 되자. 편집자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관찰은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제 3의 시선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 당사자처럼 흥분해서도, 또 국외자처럼 방관해서도 안된다. 편집자에게 가장 타기해야 할 것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다. 관심이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자의식에서 비롯된다. 편집자는 세상을 관찰하면서 그것을 질료로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낸다. 그저 버티거나 견디면서 편집자로 살아서는 안된다. (중략) 관찰을 잘하려면 이해를 해야 한다. 이해를 잘하기 위해서는 역시 앎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출판편집자가 세상 이치를 다 알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책을 낸다고 했을 때 출판편집자의 자양분은 어디에서 올 것인가. 그것은 관찰하는 자아에서 온다. 그것이 발아하여 텍스트도 되고 책도 되고 세상의 일부도 된다. -47-48쪽

출판 불황이 더 심각해져도 책이 죽는 일은 없을테고 독자가 사라질리도 없습니다. 인터넷이 출현하기 전까지 최대, 최강의 정보원이었던 책에서 정보나 지혜를 얻었던 행동을 사람들이 쉽게 버릴 수 없을 테니까요. 단, 현재와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책은 살아남겠지만 어쩌면 출판산업은 수년 안에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제 나름대로 희망적 관측을 해보면 앞으로는 저자-출판사-도매상-독자라는 종래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인터넷을 포함한 '팬클럽'같은 조직을 통해 저자와 독자가 직접 연결되어 그 독자들에 의해 작가가 살아남는 시대로 바뀌게 될 겁니다. 출판의 미래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을까요?
-<심각해지는 출판불황과 '해리포터 현상'>[창] 2003년 3월호. 시노키 히로유키 발언) -57쪽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본다고 하자. 어디부터 먼저 볼 것인가 하는 것에서 이미 관점이 작용한다. 표지를 본다고 답을 냈다면 표지의 무엇을 보는가가 또 문제다. 제목을 보고, 비주얼을 보고, 저자를 보고. 그러나 이런 단순한 관점이 진짜 관점일 리는 없다. 이 책이 지향하는 바가 뭐고 편집은 또 어떻게 앞서의 사실을 구현하고 있으며 내용은 부합하는지, 또 저자가 왜 이런 주장을, 어떤 도구와 과정을 통해 실현하는지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때 관점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왜 같은 물을 먹고도 독도 되고 우유도 되는 것인지, 왜 같은 메시지로 만든 책이 악서도 되고 양서도 되는지 등등의 숱한 물음들에 대해 응답하는 과정이 곧 출판 행위의 A to Z이라 할 수 있다. -59쪽

저자란 무엇인가? 저자는, 또는 작가는 세계를 창조하는 이들이다. 편집자는 작가들에게 현실을 매개로 하여 텍스트라는 정거장을 거쳐 세계를 창조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작가를 앞질러 편집자가 먼저 올 수는 없다. 작가가 현실을 지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일정 역할을 하기 위해서 편집자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편집자는 애초에 독자 편에 서 있도록 프로그래밍된 존재다. 이것은 가치 평가나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즉 우월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문제인데, 편집자는 독자가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작가 자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작가와 편집자는 본원적으로 세계관이 다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단정적이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118쪽

전혀 빈틈없는 사람은 편집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작가의 무의식에 있는 것, 엉켜 있는 것을 언어로 만들어내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의 찢어진 상처를 안고 그것을 도려내듯 쓰도록 해야 합니다. 편집자는 그 정신을 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행위에 열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건 언어가 상대의 가슴에 닿지 않으면 편집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 부담을 계속 주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지만요.-122쪽

저자들은 자신의 원고에만 몰두해 그 사회적 의미를 캐내려 하지만, 편집자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저자의 원고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를 읽어내려고 한다. 저자와 편집자의 사고의 순서가 다른 것이다.-125쪽

책은 책 현상으로 인간에게 다가오고, 인간은 인간됨으로 책과 섞여 지낸다. 책 현상이 인간됨과 상호 소통의 과정에 있고, 또 둘의 존속 패턴이 상보적인 한, 삶의 세계에서 보다 적실한 실체는 책이나 인간이 아니라 책 현상이나 인간됨, 혹은 둘의 어울림을 통한 상호조건화의 관련성일 것이다. 책의 존폐는 근대 문화의 뒷문 밖을 휩쓸려다니는 낙엽 같은 이슈가 아니다. 그것은 미토콘드리아로부터 이데올로기에 이르는 삶의 관게항들을 통해서 부단히 자신의 존재를 투여하고 또 이를 통해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됨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물음과 깊고 넓게 맞물려 있는 것이다. 책은 죽을 것인가. 이 물음에 관한 한 책도 인간도 전적인 책임을 질 수가 없으리라. 책의 의의와 그 존폐를 묻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책과 만나 함께 살아온 인류의 긴 족적을 오랫동안 굽어본 역사가 그 무거운 입을 열 수밖에.-140쪽

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도 입선전, 혹은 리뷰는 출판물의 흥행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금 우리나라 인터넷 서점에서도 독자들이 별점을 매겨 출판물의 성과를 따지고 있다. 성실한 독자 리뷰가 있는가 하면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는 리뷰(가령 아르바이트생을 동원한 자화자찬용 리뷰, 특정작가 특정출판사 안티세력의 의도적 평가절하 리뷰)도 있다. 문제는 많은 독자들이 책을 구입할 때 그 독자서평을 읽어본다는 것이다. 책은 독자에게는 불확실한 상품이다. 수치로 객관적인 평가를 받는 공산품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자동차는 연비, 가속성능 등의 비교가 분명히 제시되지만 책은 읽은 사람의 주관적인 선호도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더구나 책은 구입하기 전에는 다 읽을 수 없다(당연한 이야기다). 이렇게 불확실한 상품으로서의 책을 독자들에게 팔기 위해서는 매체홍보나 서평의 유혹이 필요하다. 독자가 좋아하는 저자의 책, 신뢰받는 출판사의 책인 경우 서평이 크게 개입되지 않지만 주제나 소재에 끌려 책을 구입하려는 독자에게는 다른 사람의 서평이 영향을 미친다. 한 출판사의 충성독자를 늘려가는 일은 그런 점에서 값진 일이다.-242-243쪽

(이어서)

책 표지에 실리는 유명인가 추천글에 대해 '주례사비평'과 더불어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몇 줄의 추천사에 고혹적인 단어들의 나열이 책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그 논의의 진정성은 논외로 하고 홍보 측면에서 이 뒤표지글은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하다.

독자 리뷰의 중요성 특히 전문가의 리뷰는 독자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책의 구성이나 내용의 아주 세밀한 곳까지는 독자들도 미처 눈치채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문성의 장벽도 아주 빠른 속도로 허물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독자들이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릴 만한 장소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현재는 온라인 서점 등에서 독자 서평을 우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주요 출판사의 홈페이지에서도 이런 독자 리뷰가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243쪽

편집자는 저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편집자는 관리자인가? 그렇지도 않다. 편집자는 출판경영자(시장을 인식한다는 점에서)이며, 출판영업자(독자에게 팔아야 한다는 점에서)이고, 또 독자(원고를 평가한다는 점에서)이며, 그 모든 것이다. 편집자의 정체성은 그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내려는 노력 가운데 발생한다. 마치 비온 뒤 잠시 나온 무지개처럼.

편집자는 독특한 잡식성의 동물이다. 뭐든지 취하지만 결국 자신만의 취향에 몰두하니까. 새삼 편집광적인 자질을 가진 사람이 명편집자가 된닫는 식의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지적인 호기심과 창의력, 편집적인 몰입과 추구 등등이 편집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인 것만은 분명하다. -260쪽

책읽기의 방법론도 어떤 강요된 것보다는 스스로 발견하는 가운데 계발되면 그것보다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이 생길리 없으므로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읽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좋다. 배경지식이, 또 앎이 충분하지 않으면 어떠랴. 처음부터 이런 것들이 생길 리가 없지 않겠는가. 누구나 처음이라는 생각으로 비판적 읽기를 시작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학습될 것이다. 또한 비판적 읽기를 하는 과정에라도 저자의 주장에 설복된다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버팅겨 읽으려는 적극적 자세가 아니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학습의 가장 빠른 길 중의 하나는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조그마한 메모 형식으로라도 독후감을 남기는 것은,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는 것과는 천양지차의 격차가 있다. 그래서 이런 독후감을 남기는 사람이 바로 그 책의 임자라고까지 말한다.-265-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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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의 쾌변독설
신해철.지승호 지음 / 부엔리브로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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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기이할 정도로 다뤄지지 않는 것이 '대중의 책임'에 대한 문예요. 대중은 전지전능자 시점에서 좋네 나쁘네를 얘기할 뿐인데요. 자기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고 최후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결과에 대한 책임 의식은 가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나라 음악이 이렇게 된 것에 대중의 책임은 없느냐고 했을 때, 대중들은 면책이거든요. 그러면서 전능자의 시점에 올라서서 야단만 친다구요. 싸가지 없게도.(웃음) 일단 우리나라 대중들이 싸가지가 없어요. 인터넷 보세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뮤지션을 우상으로 떠받들어 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저 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안 해준다는 얘기죠. 자꾸 고개를 숙이라고 하니까. (중략) 지금 10대들까지도 그대로 그 악습을 물려받고 있단 말이죠. 뮤지션 같은 경우 대중의 친구이고, 대중의 입이고, 대중을 대신해서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말하자면 인민의 입이고, 인민의 손과 발인데. 그러니 뮤지션들이 그러한 역할을 해주지 못해요.-28-29쪽

상담에 대해서는 저의 원칙이 몇 가지 있는데요. 제가 상담을 전공으로 공부한 사람은 아니니까, 개인적인 원칙이라면 '그 사람들보다 내가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 것. 눈 높이를 철저히 같은 위치에 맞출 것.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여긴 상담소지 재판소가 아니니까 그들의 잘잘못을 판단하려 들지 말 것'같은 거예요. 어느 것이 옳은 것이다, 그른 것이다는 여기서 할 얘기가 아니라는 거죠. -42쪽

(동반신기를 두고) 문제는, 제가 지극히 싫어하는 것은 가사였단 말이죠. 옛날에 H.O.T. 도 같은 실수를 했다고 보는데요. 남이 써준 사회비판 가사 말이에요. 사회비판 가사란 본인의 생각이 담겨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남이 써준 사회비판 가사를 보면서 눈에 힘을 주고 카메라를 향해서 삿대질을 하면 너무 슬픈 거거든요. H.O.T.가 캔디를 부를 때는 너무 사랑스럽고, 동반신기가 풍선을 부를 때 마이 리틀 프린세스를 부를 때는 "야! 이거 노래 좋다"고 했거든요. 마이 리틀 프린세스 같은 경우는 심지어 인디 전문방송인 우리 방송에서도 나갔거든요. 이거 완성도 높다. 이 정도는 들어줘야 한다구요. 그런데 남이 써준 비판 가사를 그들이 연기에 의해서 눈에 힘을 주고 외칠 때 보는 일각의 사람들은 답답한 거고, 일각의 사람들은 슬픈 거거든요. 저는 오히려 '오! 정반합'같은 가사를 본인들에게 맡겨도 좋지 않은가, 자기들 또래에서 충분히 또래들에게 공감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이 서툰 점이 있다고 한들 거친 점이 있다고 한들 분명히 팬들이 사랑해줄 텐데, 왜 저러한 방법을 쓰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49-50쪽

그러니까 대마초에 대한 논점은 그게 담배보다 몸에 나쁘다고 한들 국가가 그것을 간섭할 권리가 있느냐, 개인이 알아서 해야 될 일이 아니냐는 문제구요. 또 한 가지 간통과 다른 대마초만의 또다른 논점이 있다면 '국가가 소위 자신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보를 조작하거나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해도 되느냐'라는 문제인데요. 군사독재 시절부터 대마초에 대한 정보를 곡해해서 국민들에게 그릇된 정보를 알리고 공포심을 심어주면서 협박을 했거든요.-56쪽

대마초에 관해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설이 있어요. 대마관리법이라는 것 자체도 존재하지 않고, 정부에서 대마에 대해 크게 관심도 갖지 않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이 대마를 흡연하는 사실이 그 아버지에게 알려지면서 그게 문제가 됐다는 이야기죠. 자신의 아들과 어울리던 일군의 뮤지션 집단들이 있었는데요. 자신의 아들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들이 나쁜 물을 들였다는 괘씸죄가 적용되어서 하루 아침에 법이 생기고, 심지어는 소급 적용되어 그 당시 활동하던 모든 뮤지션들이 때려 잡혔습니다. 심지어는 밤무대조차도 올라갈 수 없게 생계를 전부 막아버리는 일이 벌어졌는데요. 음악 전문가들은 70년대에 있었던 대마초 파동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사건을 우리나라 대중음악계가 치명타를 입었던 사건으로 판단하거든요.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나라 대중 음악계가 30년 후퇴했다고 보는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가 뭘 때려잡는지도 모르면서 잡은 거에요. 향후 이 나라의 대중음악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장르가 분화되어 나가면서 파죽지세로 성장하던 음악의 정상적인 발전 단계를 완전히 퇴행시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겠죠. -67-68쪽

그러니까 본인 혹은 당신의 아들딸이 어느 날 정말 황당한 이유, 예를 들면 청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잡혀간다든가 머리카락이 길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두들겨 맞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말 역겹고 꼴 보기 싫지만, 저 놈을 탄압하도록 국가 권력이 날뛰게 내버려뒀다가는 그 칼이 내 목에 들어올 것이므로,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들을 보호해야 되는 거거든요. 내가 소수자에 해당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인식들을 국민들이 가지지 못하니까 그 화살을 계속 쏴대고, 알게 모르게 자기도 그 화살을 맞는 거죠. -73쪽

우리나라 기독교의 세계관 자체가 문제에요. 기독교 내부라는 자기네 메이저 세계 이외의 세계를 전혀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 오만불손한 태도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실수가 나오는 건데요. 이명박 전 시장의 서울시 봉헌 발언은 얼마나 부적절한 발언이며, 주미대사의 참회 금식 기도는 얼마나 부적절합니까?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잖아요. 종교는 자기 자신의 사적인 영역에 담궈놔야 되는데 공직자들이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배경이 궁금합니다. -81쪽

기독교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경계하는 게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믿으면 상관이 없는데 저 사람들이 내 생활 안으로 파고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 생활을 침략하고, 공격해 들어오니까 방어를 해야 되는 거죠. 그건 중학교 2하견 때의 우스운 경험 하나에서 시작하는데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손에 맥콜 음료수를 들고 있었어요. 그게 일화에서 나오는거 아닙니까? 통일교 기업이고, 지나가던 한 여자가, 제가 보기에는 뭔가 광기가 들린 듯한 특유의 번쩍거리는 눈동자로 저를 보는데, 정말 무서웠는데요. 제 손에서 음료수를 빼앗가지고 땅바닥에 패대기를 치면서 이게 어디서 나온 건지 알고 먹느냐는 겁니다. 그게 제 사유재산 아닙니까? 제 사유재산을 약탈당했잖아요.(웃음)-82쪽

말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질문을 많이 받아요. 심지어는 상담소에서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할 수 있어?'라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대화를 테크니컬한 차원으로 낮게 보는 수작이거든요. 대화는 그런 테크니컬한 차원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느다구요. 웅변은 테크니컬한 차원으로 이루어질 수 있죠. 그러나 대화는 테크닉으로 가는 게 아니라고 보거든요. 마음이 따라가지 않으면 대화가 따라가지 않는다고 봐요. 그러니까 대화의 기술 중에서 제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듣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 말을 차근차근 듣고, 말을 끊는 일이 여간해서는 없어야 하고, 참을성 있게 인내하면서 들어야 되고, 그 다음에 그 말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기분 나쁘지 않게 유도하면서 발언을 끌고 가주고 이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저에 대해서 제 말만 실컷하고, 그 다음에 '에브리바디 샷다마우스'하면서 내 말은 전부 맞는 말 너는 전무 틀린 말잉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웃음) 그것은 굳이 신해철을 얕잡아 봐서 기분 나쁜게 아니라 이 사람들이 정작 대화라는 것을 너무 얕잡아 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나빠요. (계속)-85쪽

(이어서) 대화라는 건 그런 차원이 아니거든요. 두 번째 대화의 기술은 마음입니다. 그 다음이란 상대방하고 이야기를 해봐서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느 종류의 용어나 단어들을 피해 간다든가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친구랑 얘기하고 있는데, 유학까지 갔다 온 애라서 영어를 사용하는 애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영어 섞어가면서 얘기해도 되지만, 상대방이 영어 못하는 사람이란 말이죠. 음악계 선밴데. 그 분한테는 영어로 된 단어들은 피해 가야죠. 이건 상대방에 대한 배려잖아요. 기왕이면 상대방이 좋아하는 소재, 상대방이 이미 알고 있는 소재, 내가 말하면 상대방이 맞받아칠 수 있는 소재, 이런 것들 위주로 대화를 해야겠죠.-85-86쪽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포감이 많이 작용하는거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서 검열에 의한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게 바로 그런 건데요. 나에게 직접 피해를 줄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하한 여지만 있으면 겁을 내는 겁니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내가 문신을 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문신을 한 사람들을 내버려두라'고 할 때 입지가 강화되는 겁니다. 그 반면에 제가 대마초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 발언하면 입지가 약해지는 거죠. 그만큼 소수자를 옹호하는데는 당사자가 아니어야 유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사자 아니면 빠지라고 얘기하는데, 소수자들을 옹호하는 데 있어서는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짖어줘야 되거든요.(웃음) 마찬가지로 제가 경상도 출신이기 때문에 전라도를 옹호하기가 쉽습니다. 제가 전라도 출신이면 전라도를 옹호하기가 어려울 거 아니에요.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라도 사람으로 찍혀 있습니다. 인터넷에 보면 '신해철, 이 전라디안 새끼'하면서 제가 전라도 출신인 줄 알더군요. 노무현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저는 심지어 TK잖아요. -92-93쪽

'실제로 섹스를 하지 않았는데, 열나게 러브레터만 교환하고, 매월 보름달 뜰 때 만나서 아름다운 시간을 가진 두 사람은 간통인가, 아닌가? 정신적 간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 뭘 간통이라고 할 건데' 하는 거였습니다. 성기의 삽입? 뭐가 기준이냐는 말이죠.

(중략)

성기를 넣었네, 뺐네 그걸 논하고 있어야 되니까. 국가 공권력이 국민들한테 세금을 받아서 유부남, 유부녀가 성기를 넣었다 뺐나 그런 것을 조사해야 되냐구요. 휴지나 줍고. (웃음) 뭐하는 짓이냐고 그게. -100쪽

김규항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없이 사나운 얼굴로 말한다. '세상이 바뀌려면 사회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없이 온유한 얼굴로 말한다. '세상이 바뀌려면 내가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들은 조용히 말한다. '세상이 바뀌려면 사회구조도 바뀌고 나도 바뀌어야 한다. 둘은 본디 하나다.'"
그런 면에서 신해철은 더욱 현명한 사람이다. 그는 '세상이 바뀌려면 사회구조도 바뀌어야 하고, 나도 바뀌어야 한다. 그러니 같이 바꿔나가자'고 끊임없이 말한다. 한국의 교육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제도와 함께 남들의 인식이 다 바뀌길 바라면서도 정작 자신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승호)-107쪽

내 논법 자체가 나의 이미지를 어떻게 하면 최상으로 올릴까를 목표로 두고 있지 않다. 내 논법은 흰색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주위에 까만색을 칠하면 흰색이 더 부각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적이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있다면 예의상 주먹으로 한 대 쳐야 맞는데, 외투가 너무 두껍다면 망치로 때려버리는거다. 욕먹더라도 망치로 때려야 주먹으로 때리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거고, 그래서 적들에게(?) 많은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108쪽

오히려 저를 당혹시키는 것은 싸움에서 파생되는 문제가 아니라 남들이 그걸 싸움이라고 규정한다는 점입니다. 그게 오히려 당혹스러워요. 제 가사에 대해서 논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사회참여적이며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가사를 쓰는데, 그 이유가 뭐냐?'고 하면 너무너무 당혹스러운 겁니다. 그러니까 제 입장에서는 앨범 한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 타령으로 도배하는 게 비정상적인거고 힘든 것이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거든요. 10대 시절에 이미 간접적인 스승들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음악은 인생 전체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그 한 개인을 포함하고 있는 사회 전체 혹은 세계 전체의 반영이자, 거꾸로 그걸 반사시켜서 세상을 향한 외침이기도 하다'는 기준이 이미 확립됐단 말입니다. 외국에 나가서 외국 청년들이나 뮤지션들하고 얘기를 해보면 제 생각을 스탠다드로 생각하고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당연하지 않냐, 뭘 그렇게 새삼스럽게 얘기하냐'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걸 너무나 궁금해 하는 기자 분들의 질문을 받으면 제가 얼마나 당혹스럽겠어요.-109-110쪽

"신해철은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길 꿈꾸고 서태지는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 세상을 바꾸려 한다. 신해철이 우리가 다 같은 공범이라고 하는 반면 태지는 기성세대만을 탓한다. 이는 신해철이 더 현학적이고 어둡고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데 반하여 서태지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사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는 차이를 나타내주는 것이다."(김용희, <기호는 힘이 세다>) -134쪽

소중하게 여긴다는 태도를 LP시절에는 LP가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바늘을 내려놓는 순간 학습이 되는 것이죠. 뭐, 더 이상 긴 말도 필요 없고, 그런 현장 학습이 없습니다. LP에다가 조심스레 바늘을 내려놓으면서 근육과 신경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콘텐츠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콘텐츠를 깔보는 태도는 마우스를 함부로 클릭함으로 해서 생겨나고, 소비자들이 음악을 우습게 여기는데 좋은 음악이 나올 수가 없죠. (중략) 뮤지션을 깔보고 핍박하고, 콘텐츠를 우습게 알고, 가급적이면 돈을 쓰지 않고, 문화비를 최대한 절감한 상태에서 콘텐츠를 마구 긁어모으며 함부로 평을 찍찍 갈겨대는 태도 이외에 너네들이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이 뭐냐. 저는 없다고 봅니다. 그 슬로건을 초창기에는 굉장히 거창하게 내걸었죠. p2p가 가지고 있는 정신을 과장해서 얘기하고 공유라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의미를 부여했잖아요. 저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 공유를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고.-158-159쪽

그러니까 하이텔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아마추어 문장가들의 전통이 있는데요. 아마추어는 아마추어 안에 머물러 있을 때의 미덕이란게 있잖아요. 아마추어기 때문에 눈여겨볼 만한 점도 있구요. 아마추어들이 프로 평론가가 되고 싶다면 검증 과정을 거쳐야 되지 않습니까? 본인들이 글을 쓸 자격이 있으며, 대중한테 이런저런 얘기를 할 자격이 있느냐를 따져봐야 하는데요. 그걸 뛰어 넘어서 이 사람들이 비평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하니까요. 그때도 제가 글을 쓰면서 막상 글을 쓴 사람한테는 별 말을 안 했잖아요. 오마이뉴스를 공격했죠. '너네가 얘기하는 시민기자 제도의 허라는 것이 여기서 드러나지 않느냐. 모든 시민이 기자라고는 하지만, 모든 시민이 전문가일수는 없지 않느냐' 하는 거죠. 일반 시민들을 촉각으로 이용해 각 사회의 세세한 부분들의 뉴스를 끌어당기겠다는 기본 콘셉트는 좋았는데요. 문화비평이라든가 하는 것은 전문지식이 필요하고, 또 지식하고 소양은 다르잖아요. 지식+소양이 있어야 비평을 하기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소양하고 담을 쌓은 애들을 평론가로 둔갑시켜주는 구실을 하니까요.-217-218쪽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는 것은 기성세대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멘트들, 그중의 하나가 우리는 입을 것 못 입고 먹을 것 못 먹고 너희들을 기르는 데다가 우리 인생을 희생했다고 하잖아요. 자식들이 입지 말라고 얘기한 적 없고 먹지 말라고 얘기한 적 없거든요. 자기가 좋아서 한 거잖아요. 그게 사실이라고 쳐도 그게 사실이라면 자기 좋아서 한 것을 가지고 아래세대들에게 그것을 인정해달라고 외치는 순간 모든 게 끝나는 거구요. 점잖게 앉아 받아먹는 수밖에 없는 건데, 사실은 입을 것 못 입고 먹을 것 안 먹고 자식들한테 투자한 이유가 나중에 덕 보려고 그런 것 아니냐, 자기 인생으로 쇼부가 안 나는 걸 자기 자식들을 마음대로 조정해서 자식들 꿈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투입해서 최대한의 매출을 올리려는 게 아니냐는 거죠. 그 매출이라는 게 우리 사회 특유의 체면상으로 동네방네 자랑할 수 있는 입신양명의 개념이잖아요. 투자해놓고 투자한 만큼 안 빠지면 절규하고, 그런 기성세대의 위선이 삼풍하고 성수대교에서 산산이 무너진거죠. 사실 노래 제목은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였지만, 솔직히 말하면 '니네가 만든 세상을 보라'거든요. -222-223쪽

사실 제가 사회에 대해서 이런저런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해서 저한테 악플다는 새끼들이 웃긴 새끼들인 게 저는 제가 가진 다른 카드를 안 쓰고 있다는 거거든요. 신해철이 가진 다른 카드는 뭐냐, 나 혼자 좋은 세상에서 잘 지내고 싶은 거였다면 이런 멘트 안 하고, 대중들 비위에 맞는 멘트나 찍찍 날리고 평소 소신과는 달리 남이 원하는 대답이나 하고 그러다가 이민 가면 되는 거거든요. 내가 원하는 조건이 되어 있는 나라로. 내숭 떨고 계속 돈 모은 다음에 이민 가면 되는 건데, 남들한테 욕먹어가면서 이건 이런 거고, 저건 저런 거고 이런 얘기 뭐할라고 하겠어요? 다 같이 잘살아보자는 거 아닙니까? 기왕이면 여럿이 잘살아보자는데.-237쪽

미덕이라는 것이 남이 미덕을 갖고 있으면 칭찬을 해주면 되는 거구요. 미덕까지는 안 갖고 있어도 그 사람이 나쁜 사람 아니면 되는 거지, 미덕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손가락질까지 해서야 되겠습니까? 예를 들면 겸손이란 필수 덕목이 아니고 미덕인데, 성공한 누군가가 겸손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면 박수를 쳐주면 되지만, 성공한 그 사람이 겸손하지 앙ㄶ다고 해서 욕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겸손하지 않다는 것과 잘난 척한다는 것은 또 다른 얘기구요. 그러니까 연예인이 대부업 광고를 보고 '내가 공인의 성격을 띠고 있으니까 이런 건 하면 안 되지 않겠나'라고 하는 건 미덕이니까 칭찬할 수는 있어도 그렇지 않다고 해도 비난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242쪽

애기가 태어나고 나서 내가 생각하던 것이 강화가 됐지 생각이 바뀐 면은 많지 않아요. 제가 생각할 때 애기를 기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애기를 위해서 부부 생활을 양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집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우리 부부고 그 사이에서 애가 태어난 거지, 애가 중심이 되고 부부가 부가 되는 이런 일이 절대로 생겨서는 안 되겠다, 아이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출발점은 엄마, 아빠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아이한테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 다음에 애기하고의 문제가 시작되는 거지, 애기한테 열심히 잘하는데 엄마랑 아빠랑 사이가 좆나게 안 좋고, 맨날 '너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산다'고 하면 애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겠어요? 차라리 이혼을 하는게 낫죠. -243쪽

공부는 제가 생각했을 때 아주 특수한 인간들이 하는 거거든요. 이 문구 좋다. 공부는 특별하고 선택받은, 공부에 재능있는 소수의 인간들이 하는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이 하는 공부라는 것은 일상생활을 살아가는데 불편을 안 겪을 정도의 기본적인 지식, 앞으로 살면서 학교를 안 다니더라도 학습할 수 있는 능력과 방법을 배우는 거죠.-244쪽

선정성이 에로티시즘을 얘기하는 거라면 그건 크게 잘못된 얘기가 되겠구요. 마치 집에 고3이 하나 있으면 온 가족이 숨죽여 살고 TV를 치우는 것처럼,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인들이 금욕적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 선정성이 무조건적인 자극과 사람들 눈에 띄려고 페어플레이 원칙을 파기하는 거라고 얘기하는 거라면, 어떻게 보면 맞다고 볼 수 있죠. 페어플레이를 포기한다고 하는 건 방송에서 모럴 헤저드가 일어난다는 말이잖아요. 지금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아무 말이나 막하고, 없는 얘기 지어내고, 그렇게 튀려고 하고, 그러면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도를 지나친 것 같아요. -286쪽

"우리는 황혼이 지는 절벽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자와 같다. 그래서 당장 굴러 떨어질 수 있을 정도로 항상 위험하고 위태위태하고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인생 전체가 파탄 날 위험도 감수해야 되는 놈들이다."(신해철이 후배들에게 자주하는 말)-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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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돌이 2008-03-05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다 밑줄을 그어두시면 책이 안팔리자나요. 버러럭~~~ 신입사원 생활은 재미있으신가요? ^^

마늘빵 2008-03-05 20:16   좋아요 0 | URL
흐흐흐. 밑줄그은 부분에 필받아서 사는 분들도 많으실듯. :) 신입사원 생활은 재밌습니다. 일도 재밌고, 사람들도 좋고, 복지도 괜찮고.

순오기 2008-03-06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다 치느라고 힘드셨겠어요. 가끔 오타도 있어 주시고~^^
'시비돌이'님 책이 나온 거군요. 신해철은 진중권과 같이 100분 토론에도 가끔 나와줘야 하는데...^^

다락방 2008-03-06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1,82 쪽이 제 생각과 같아요. 물론 다른 부분들도 다 맘에 들지만요. 이거 옮기느라 힘드셨겠네요. 살거예요, 산다구욧!!

마늘빵 2008-03-0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 / 치느라 힘들었어요. -_- 오타는... 찾아보면 많겠죠?
다락방님 / 인터뷰집이라 읽는데는 시간이 별로 안 걸리더라고요. 우석훈 인터뷰집도 찜해놨는데 언제 살진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