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분투기
정은숙 지음 / 바다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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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는 책을 만들면서 세상의 일부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물론 오늘날 책의 의미는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 의미가 더 무거워진 부분도 있고, 가벼워진 부분도 있다. 그런데 책의 의미를 일련의 정영ㄴ한 사고체계 그 자체라고 확대해서 보면 인류가 가진 모든 지혜가 다 이 가운데 내포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책을 만든다는 것은 비단 책만이 아니라 세상을 편집하는 작업 한가운데 있다는 의미도 된다." -43쪽

"요즘은 물음을 던지기보다는 대답을 해야 하는 입장에 서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책, 혹은 편집을 잘 모른다는 생각을 반추하곤 한다. 그것은 책의 의미가 어느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이 그러하듯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43쪽

"편집자로 살기가 어려운 것은 책 만들기의 어려움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이런 삶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살기가 어렵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남들은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즐기는 데 비해 편집자는 어느새 저걸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전개하고 있다." -43쪽

관찰자가 되자. 편집자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관찰은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제 3의 시선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 당사자처럼 흥분해서도, 또 국외자처럼 방관해서도 안된다. 편집자에게 가장 타기해야 할 것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다. 관심이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자의식에서 비롯된다. 편집자는 세상을 관찰하면서 그것을 질료로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낸다. 그저 버티거나 견디면서 편집자로 살아서는 안된다. (중략) 관찰을 잘하려면 이해를 해야 한다. 이해를 잘하기 위해서는 역시 앎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출판편집자가 세상 이치를 다 알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책을 낸다고 했을 때 출판편집자의 자양분은 어디에서 올 것인가. 그것은 관찰하는 자아에서 온다. 그것이 발아하여 텍스트도 되고 책도 되고 세상의 일부도 된다. -47-48쪽

출판 불황이 더 심각해져도 책이 죽는 일은 없을테고 독자가 사라질리도 없습니다. 인터넷이 출현하기 전까지 최대, 최강의 정보원이었던 책에서 정보나 지혜를 얻었던 행동을 사람들이 쉽게 버릴 수 없을 테니까요. 단, 현재와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책은 살아남겠지만 어쩌면 출판산업은 수년 안에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제 나름대로 희망적 관측을 해보면 앞으로는 저자-출판사-도매상-독자라는 종래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인터넷을 포함한 '팬클럽'같은 조직을 통해 저자와 독자가 직접 연결되어 그 독자들에 의해 작가가 살아남는 시대로 바뀌게 될 겁니다. 출판의 미래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을까요?
-<심각해지는 출판불황과 '해리포터 현상'>[창] 2003년 3월호. 시노키 히로유키 발언) -57쪽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본다고 하자. 어디부터 먼저 볼 것인가 하는 것에서 이미 관점이 작용한다. 표지를 본다고 답을 냈다면 표지의 무엇을 보는가가 또 문제다. 제목을 보고, 비주얼을 보고, 저자를 보고. 그러나 이런 단순한 관점이 진짜 관점일 리는 없다. 이 책이 지향하는 바가 뭐고 편집은 또 어떻게 앞서의 사실을 구현하고 있으며 내용은 부합하는지, 또 저자가 왜 이런 주장을, 어떤 도구와 과정을 통해 실현하는지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때 관점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왜 같은 물을 먹고도 독도 되고 우유도 되는 것인지, 왜 같은 메시지로 만든 책이 악서도 되고 양서도 되는지 등등의 숱한 물음들에 대해 응답하는 과정이 곧 출판 행위의 A to Z이라 할 수 있다. -59쪽

저자란 무엇인가? 저자는, 또는 작가는 세계를 창조하는 이들이다. 편집자는 작가들에게 현실을 매개로 하여 텍스트라는 정거장을 거쳐 세계를 창조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작가를 앞질러 편집자가 먼저 올 수는 없다. 작가가 현실을 지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일정 역할을 하기 위해서 편집자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편집자는 애초에 독자 편에 서 있도록 프로그래밍된 존재다. 이것은 가치 평가나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즉 우월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문제인데, 편집자는 독자가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작가 자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작가와 편집자는 본원적으로 세계관이 다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단정적이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118쪽

전혀 빈틈없는 사람은 편집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작가의 무의식에 있는 것, 엉켜 있는 것을 언어로 만들어내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의 찢어진 상처를 안고 그것을 도려내듯 쓰도록 해야 합니다. 편집자는 그 정신을 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행위에 열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건 언어가 상대의 가슴에 닿지 않으면 편집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 부담을 계속 주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지만요.-122쪽

저자들은 자신의 원고에만 몰두해 그 사회적 의미를 캐내려 하지만, 편집자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저자의 원고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를 읽어내려고 한다. 저자와 편집자의 사고의 순서가 다른 것이다.-125쪽

책은 책 현상으로 인간에게 다가오고, 인간은 인간됨으로 책과 섞여 지낸다. 책 현상이 인간됨과 상호 소통의 과정에 있고, 또 둘의 존속 패턴이 상보적인 한, 삶의 세계에서 보다 적실한 실체는 책이나 인간이 아니라 책 현상이나 인간됨, 혹은 둘의 어울림을 통한 상호조건화의 관련성일 것이다. 책의 존폐는 근대 문화의 뒷문 밖을 휩쓸려다니는 낙엽 같은 이슈가 아니다. 그것은 미토콘드리아로부터 이데올로기에 이르는 삶의 관게항들을 통해서 부단히 자신의 존재를 투여하고 또 이를 통해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됨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물음과 깊고 넓게 맞물려 있는 것이다. 책은 죽을 것인가. 이 물음에 관한 한 책도 인간도 전적인 책임을 질 수가 없으리라. 책의 의의와 그 존폐를 묻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책과 만나 함께 살아온 인류의 긴 족적을 오랫동안 굽어본 역사가 그 무거운 입을 열 수밖에.-140쪽

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도 입선전, 혹은 리뷰는 출판물의 흥행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금 우리나라 인터넷 서점에서도 독자들이 별점을 매겨 출판물의 성과를 따지고 있다. 성실한 독자 리뷰가 있는가 하면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는 리뷰(가령 아르바이트생을 동원한 자화자찬용 리뷰, 특정작가 특정출판사 안티세력의 의도적 평가절하 리뷰)도 있다. 문제는 많은 독자들이 책을 구입할 때 그 독자서평을 읽어본다는 것이다. 책은 독자에게는 불확실한 상품이다. 수치로 객관적인 평가를 받는 공산품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자동차는 연비, 가속성능 등의 비교가 분명히 제시되지만 책은 읽은 사람의 주관적인 선호도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더구나 책은 구입하기 전에는 다 읽을 수 없다(당연한 이야기다). 이렇게 불확실한 상품으로서의 책을 독자들에게 팔기 위해서는 매체홍보나 서평의 유혹이 필요하다. 독자가 좋아하는 저자의 책, 신뢰받는 출판사의 책인 경우 서평이 크게 개입되지 않지만 주제나 소재에 끌려 책을 구입하려는 독자에게는 다른 사람의 서평이 영향을 미친다. 한 출판사의 충성독자를 늘려가는 일은 그런 점에서 값진 일이다.-242-243쪽

(이어서)

책 표지에 실리는 유명인가 추천글에 대해 '주례사비평'과 더불어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몇 줄의 추천사에 고혹적인 단어들의 나열이 책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그 논의의 진정성은 논외로 하고 홍보 측면에서 이 뒤표지글은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하다.

독자 리뷰의 중요성 특히 전문가의 리뷰는 독자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책의 구성이나 내용의 아주 세밀한 곳까지는 독자들도 미처 눈치채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문성의 장벽도 아주 빠른 속도로 허물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독자들이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릴 만한 장소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현재는 온라인 서점 등에서 독자 서평을 우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주요 출판사의 홈페이지에서도 이런 독자 리뷰가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243쪽

편집자는 저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편집자는 관리자인가? 그렇지도 않다. 편집자는 출판경영자(시장을 인식한다는 점에서)이며, 출판영업자(독자에게 팔아야 한다는 점에서)이고, 또 독자(원고를 평가한다는 점에서)이며, 그 모든 것이다. 편집자의 정체성은 그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내려는 노력 가운데 발생한다. 마치 비온 뒤 잠시 나온 무지개처럼.

편집자는 독특한 잡식성의 동물이다. 뭐든지 취하지만 결국 자신만의 취향에 몰두하니까. 새삼 편집광적인 자질을 가진 사람이 명편집자가 된닫는 식의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지적인 호기심과 창의력, 편집적인 몰입과 추구 등등이 편집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인 것만은 분명하다. -260쪽

책읽기의 방법론도 어떤 강요된 것보다는 스스로 발견하는 가운데 계발되면 그것보다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이 생길리 없으므로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읽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좋다. 배경지식이, 또 앎이 충분하지 않으면 어떠랴. 처음부터 이런 것들이 생길 리가 없지 않겠는가. 누구나 처음이라는 생각으로 비판적 읽기를 시작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학습될 것이다. 또한 비판적 읽기를 하는 과정에라도 저자의 주장에 설복된다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버팅겨 읽으려는 적극적 자세가 아니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학습의 가장 빠른 길 중의 하나는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조그마한 메모 형식으로라도 독후감을 남기는 것은,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는 것과는 천양지차의 격차가 있다. 그래서 이런 독후감을 남기는 사람이 바로 그 책의 임자라고까지 말한다.-265-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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