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쯤하면 편집자가 하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돌멩이를 주고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오라고 하는데 그게 되니?" 본래 다이아몬드를 주고, 그걸 가지고 아름다운 보석을 만들라고 해야 맞다. 그러나 대리석쯤 주고 다이아몬드를 만들으라면 이것도 불가능하겠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애써보긴 하겠다.

 

  그는 매번(?) 내 인내심의 한계치를 측정한다. 어제 이른 저녁 뜨거워진 머리와 가슴이 자고 일어난 지금도 식지 않는다. 과열 상태다. 문제의 원인이 저자들에게 있음이 분명한데, 이들은 그 해결책을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써먹지도 못할 원고를 줘놓고 그쯤하면 편집자가 해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눈을 뜨고 확인해 본다. 그는 가면을 쓰지도 않았고, 고개를 숙이고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정면을 주시하며 말한다. "그쯤하면 편집자가 하는 거예요." 아, 혹시 피부가 남들보다 좀 더 두꺼운 걸까. 이건 혹시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교과서 편집자다. 지금은 교과서 작업이 한참 진행 중이다. 저자는 십여 명이지만 그 중 나오는 사람들은 절반 수준이다. 절반 정도는 그래도 성실한 축이고, 그 중 실력 있는 분은 몇 안 된다. 문제의 발언을 한 사람은, 계약서에 도장 찍고 계약금을 받은 후 수개월 나오라 나오라 메일 보내고 문자하고 전화해도 나오지 않던 사람이다. 나온지 얼마 안 됐다. 지금은 시기상 아주 급한 시점이다. 그는 자신이 빛을 발하는 시점을 안다. 사실 빛이 나지는 않는다. 다만, 시급한 시점에 자신이 맡은 원고를 어설프게나마 써서 가지고 나오면 편집자로서는 초큼 기쁘기는 하다.

 

  그는 이제 초고를 썼다. 엉망이다. 써먹지도 못한다. 그는 능력은 초큼 있어 보여서 의견을 주고 어떻게 어떻게 수정하라고 하면 알아서 수정은 할 것 같다. 문제는 다른 분이다. 검토를 한답시고 하루 종일 앉아서 의견을 내놓고 있는데, 내 정신은 허공에 가 닿아 있다. 이 의견이 쓸모가 있을까. 시간은 없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 붙들고 앉아 되지도 않는 저자에게 원고를 고쳐 오라고 의견을 주는 것이 의미 있을까. 부정적이다. 문제의 저자도 알고, 문제의 발언을 한 이도 안다. 문제의 발언자는 그래서 그렇게 말을 내뱉은 것이다. 문제의 저자가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집필진이 이렇게 구성될 때부터 나는 예고했다. 경고했다. 조언했다. 집필진 일부 교체하고, 보강하라고. 아무도 듣지 않았고,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내가 그렸던 시나리오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의 끝은, 부정적이다. 수차례 경고하고, 간곡히 청했지만 안 먹혔다. 능력은 조금 부족해도 성실하신 분들께는 그저 고마울 뿐이다. 능력이 부족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분들은 좀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리고 집필자가 부족한 만큼 편집자가 더 고생을 해야 하지만, 그 분들께 불만은 없다.

 

  교과서 편집자는 영화 감독이다. 영화 감독의 역할은 배우들이 제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고, 그들이 잘못하면 잘 되도록 지적하고, 주어진 스케쥴에 맞추어 작품을 찍어 내는 것이다. 감독은 영화를 찍는 배우뿐만 아니라 카메라, 조명, 소품, 장소, 의상 담당 등 촬영 스텝들을 모두 챙겨야 한다. 그들의 능력과 성격을 파악하고, 좋은 영화를 찍기 위해 그들이 조화를 이루고, 능력이 발휘되도록 전체를 총괄하는 이가 감독이다. 그런데 배우가 정해진 촬영 날짜에 나타나지 않는 날이 십여 번이고, 뒤늦게 나타나 촬영분을 찍는데 연기가 안 돼 지적을 하니, 감독에게 "내가 이쯤하면 됐지. 당신이 찍어."라고 말한다면, ...

 

   감독은 감독의 일을 해야 하고, 배우는 배우의 일을 해야 하고, 카메라 감독은 카메라 감독의 일을 해야 하고, 소품 담당은 소품 담당의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영화가 작품이 되는 건 둘째치고, 완성은 될 수 있다. 그 작품이 100만 관객이 들지, 1000만 관객이 들지는 그 다음의 문제다. 영화는 일단 완성되어 나와야 상영관에 걸리고, 관객은 수많은 영화 중 해당 작품을 선택한다.

 

  이미 처음부터 감독은 배우가 찍어야 할 촬영 분의 일부를 찍고 있었다. 감독이 연기에 재능이 있어 그마나 찍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제작사와 계약한 배우가 남은 자신의 촬영분까지 엔지만 내다가 감독에게 찍으라고 한다. 거기에 배우가 배우의 일을 안하겠다면서, 배우라는 직함은 가지겠고, 영화 포스터에서 자신의 이름은 빼지 않을 것이며, 영화 흥행 정도에 따라 수익금도 모두 가져가겠다고 한다면, 이 배우를 어찌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그 배우는 제작사에서 정해준 이라 감독이 자를 수 없는 형편이다.

 

  불성실, 무책임, 뻔뻔함, 몰염치, 무능력. 다섯 가지 잣대로 그들을 바라본다. 다섯 가지 모두 갖춘 사람도 있고, 다섯 가지 모두 해당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대개 불성실한 사람은 무책임하고, 염치가 없기도 하다. 다만 어쩌다 그 중 능력을 초큼 갖춘 경우도 있는데, 이 사람과 함께 하기보다는 능력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과 함께 할 만하다. 불성실하고 무책임하며 몰염치하고 무능력하고 뻔뻔함까지 갖춘 사람은 그 중 최악인데, 그 뻔뻔함은 감당하기 어렵다. 경험해본 바 몰염치와 뻔뻔함을 갖춘 이는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이보다 더 상태가 심각하다. 그와는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나 피할 수 없는 경우 그 괴로움의 강도는 극에 달한다.

 

  매번 편집자가 하라는 대로 하는 성실한 몇몇 분들 모시고 여기까지 왔다. 그들과는 능력 여부를 떠나 끝까지 함께 할 만하다. 이 성실한 분들 또한 위의 불성실, 무책임, 뻔뻔함, 몰염치를 갖춘, 나아가 무능력까지 갖춘 이들에게 불만이 많다. 소수는 분노가 극에 달했고 소수는 마음은 뜨겁지만 말은 못한다. 감독은 불성실하고 무책임하고 뻔뻔하고 몰염치한 배우에게 화가 나 능력 있고 성실한 배우를 다독여가며 촬영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가 다른 배우의 촬영분까지 찍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찍는다고 한다면 영화는 이미 제 시나리오를 잃고, 완성하는 것만이 목표가 될 뿐이다. 감독은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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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동 작업의 인세 배분
    from 자유, 그리고 자유 2012-01-08 14:26 
         공동 저작물의 인세에 대해서는 어떻게 배분해야 할까? 이 일을 하면서 부당하고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오늘은 인세 문제를 얘기하겠다. 지난 번에 이어 앞으로 계속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말을 꺼내려 한다. 드러나지 않은 일들은 수면 위로 끄집어 내어 공개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토론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합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
 
 
마립간 2012-01-03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께는 격려를 보내드리고 저 스스로는 반성을 합니다. 저는 감독도 되어 봤고, 성실한 배우와 (강제로 끌려 배역을 맡은 고로) 불성실한 배우도 맡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입장이던지, 의견이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절벽같다는 느낌을 받을때가 많습니다.

마늘빵 2012-01-03 14:18   좋아요 0 | URL
이런 글을 쓰면 제 스스로 괜찮은 편집자인지 되물어보곤 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제 역할 이상을 넘어서서 집필까지 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괜찮은 편집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능력 여부를 떠나 책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편집자에 대한 신뢰와 자기 역할에 대한 충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결여된 이들에게는 '저자'라는 직함을 떼어야 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않네요.

비로그인 2012-01-0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위에 떡하니 보이는, (하필이면) 인문학의 미래.
그와 함께 나타나는 `이쯤하면'으로 시작하여 `괴롭다'로 끝날 수 밖에 없는 페이퍼가 나오는 상황.

마늘빵 2012-01-03 14:19   좋아요 0 | URL
인문학의 미래도, 교육의 미래도, 출판의 미래도 암울합니다. 새해 첫 페이퍼가 이러네요. 쩝. 제게 새해는 이 작업을 마무리하는 시점이에요. ^^

비로그인 2012-01-03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저 5관왕에 빛나는 선수들의 경우, 무슨 재주를 타고났는지, 여기저기 다른 출판사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며 편집자들을 괴롭힌다는 거죠. "다른 데선 이 정도면 편집자들이 알아서 다 하던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말이죠.
새해 벽두부터 골치 아픈 선수들 때문에 맘고생하시는군요. 그래도 올해 꼭 멋진 시나리오로 개념 있는 제작자와 뛰어난 배우들 그리고 헌신적인 스태프와 함께 빛나는 작품 만드시길 빌어드리겠습니다^^

마늘빵 2012-01-03 14:21   좋아요 0 | URL
첫 문장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두고 "정치를 잘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윗분들과는 전화도 하고, 인사도 하고, 친하게 지내죠. 그런데 실무쪽에서 바라보는 그 분들과 윗분들이 바라보는 그분들의 모습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니 문제입니다. 위에서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텐데, 실상은 바닥을 치니 말여요. 응원 감사합니다. 열악한 현실은 바꾸라고 있는 거지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기필코 바꾸어놓겠습니다.

북극곰 2012-01-03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회사에도 교과서 개발팀이 있어서 간접으로 겪긴 하는데, 그 고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듯 해요. 교과서는 특히나 일정 등등등등의 문제로 너무 힘들게 작업하는 것 같아요. 기필코 바꾸어 놓으시겠다는 아프님, 화이팅이에요. (안녕하세요, 인사는 첨이죠? 수 년간 즐찾이었는데. ^^)

마늘빵 2012-01-03 20:00   좋아요 0 | URL
아, 교과서 팀이 있다니 그 분들 지금 서서히 발동걸릴 시점인데 앞으로 몇 달 고생하시겠네요. 교과서가 힘들죠. 얽혀 있는 인간관계도 많고, 그 중 한쪽이라도 부실하면 그대로 꼬꾸라지는 작업이라서. 그래도 전 이 일이 좋습니다. 내 능력의 한계치를 시험해볼 수도 있고, 제가 팀을 만들어서 꾸려나가는 재미도 있고요. 반갑습니다. ^^

하늘바람 2012-01-03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한창 바쁘시겠어요
날마다 야근 아니세요?
님 몸 살피시며 하셔요

마늘빵 2012-01-03 18:31   좋아요 0 | URL
날마다는 아니지만 앞으로 그리 될 거 같아요. 지금 문제가 해결된다는 전제 하에. 감사합니다.

감은빛 2012-01-03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편집자는 아니지만, 아프님의 입장을 충분히 공감하고 또 이해합니다.
자신이 제대로 연기하지 않고도, 수익을 받으려 하고 또 이름을 버젓이 올리는 배우들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자기가 어떤 배우인지는 잘 알겠지요.

한창 바쁜 시기시네요. 부디 몸 챙겨가면서 일 하시길 바랍니다.

마늘빵 2012-01-03 18:32   좋아요 0 | URL
저는 단행본 편집자이신 줄 알았어요. 어디서 그런 분위기를 감지했는데.

그들 스스로 자신이 어떤 배우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화가 나기도 하고, 안쓰럽습니다. 감사합니다.

BRINY 2012-01-04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나 있습니다. '정치만 잘하는 사람'. '정치를 잘 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나이들어가면서 통감하고 있습니다만, '정치만 잘하는 사람'이 마치 능력인인양 대우받는 세상은 역시나 부조리합니다. 무척 스트레스 받으시겠어요. 풀면서 사세요.

마늘빵 2012-01-04 17:35   좋아요 0 | URL
정치 잘하는 건 뭐라 안 하겠는데, 정치만 잘하니 참 문제입니다. 그것만 잘 해도 아무것도 없어도 여기저기 건수를 잘 만들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