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투표를 부탁하다...
밤의 기적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게 주어진 첫 투표권을 거부했다.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이 대선에 나왔던 때였다. 그해 김대중 후보는 대통령이 되었다.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정치판을 잘 몰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통적 우파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부터 퇴직할 때까지 오직 경찰에만 몸 담았던 분으로 완전한 보수였고, 어머니도 보수였다. 두 분이 함께 살면서 보수가 되었는지, 아니면 원래 어머니는 아니었는데 아버지를 따라 그렇게 표를 던지셨는지는 잘 모른다.
김대중 후보가 대선에 나왔을 때, 어머니는 내게 투표를 하라고 하셨다. 생애 첫 투표를 하라고. 다소 강압적인 어조로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기억상으로 그때 나는 "그럼 뽑을 정당이 없잖아. 사회당 뽑아?!" 홧김에 이렇게 말 한 것 같고, 사회당이 무슨 정책을 들고 나왔는지 몰랐지만 그래도 나와 생각이 가장 비슷한 쪽이 사회당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딱히 정치성이란 건 없는, 하지만 당시 국가와 사회에 대해 반감은 가지고 있던 아해였다. 기득권층에 표를 주지는 않았을 거란 이야기. 어쨌든 그때 나는 명확하게 표를 줄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고, 그냥 기권했다.
이후 살면서 오랫동안 보던 조선일보를 다른 신문으로 바꾸며, 또 경향신문으로 바꾸며, 가볍게 다투었고, 선거 때마다 내 의견을 피력했다. 어머니는 매번 어떤 선택을 했는지 잘 모른다. 어머니에게 누구를 찍었느냐 묻지 않았고, 어머니도 따로 누구를 찍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대충 짐작한다. 어머니는 몇년전부터 내게 이번 선거에서 누구를 뽑을 거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누굴 뽑겠다고 대답했다. 추측컨대, 어머니는 내가 표를 던진 그 사람에게 마찬가지로 표를 던지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할 때였다. 어머니는 투표를 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고, 나는 98년 대선 때를 떠올리며, 어머니가 내게 했던대로 그대로 말했다. 그때 그러지 않았냐고, 왜 투표 안 하냐고 나한테 뭐라고 하지 않았냐고. 이번에는 왜 투표를 하지 않는 거냐고. 어머니가 투표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또 묻지 않았고, 어머니도 따로 말씀하시지 않았으니까.
이번, 선거. 어머니는 투표를 안 하실 것이다. 주소지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으로 되어 있는데 - 바꾼다고 말씀하시고서는 아직 안 바꾸신 거 같다 - 남들 쉬는 날도 일 나가시는 어머니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와서 투표를 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전의 어머니라면 무조건 보수에 표를 던졌으니 내 입장에선 투표를 안 하는 게 차라리 나은데, 지금의 어머니라면 내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표를 줄 가능성이 높으니 그 한 표가 아쉬운 상황이다. 얼마 전 집에 갔을 때 어머니는 내게 누구를 지지하냐고 물었던 거 같다. 나는 누구를 지지한다고 말했던 거 같고, 이번에도 어머니는 별다른 말씀을 안 하셨다.
어머니는 아마도 투표를 못 하실 것 같지만, 나는 그동안 장성한 자식의 정치성에 따라 지지 후보가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멀리 떨어진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고, 함께 사는 부모님과 집에서 선거에 대해 대화를 나누자. 흥분하여 다투기보다는 차분히 말씀을 드리자. 마음에 와닿도록. 왜 우리가 한나라당에 표를 던지면 안 되는지. 경험상 아버지는 잘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의 정치성에 기꺼이 맞춰주실 수 있다. 선거 하루 전이다. 아직 투표는 시작되지 않았다. 전화 한 통화, 건네는 말 한마디가 결과를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