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 네그리/하트의 <제국>에 대한 맑스주의적 비판

* 한겨레(2007. 3. 29) / 지구가 하나의 제국이라고? 꿈깨!
21C 가장 영향력 큰 저작 중 하나인 네그리·하트의 ‘제국’에 반격
“지구적 자본주의 대항운동 저해하는 장애물일 뿐”
한겨레  고명섭 기자 
 
 

» <제국이라는 유령-네그리와 하트의 제국론 비판>

알렉스 캘리니코스 외 지음.김정한·안중철 옮김. 이매진 펴냄·1만2000원

 
 
“제국이 바로 우리 눈앞에 구체화되고 있다. 과거 수십 년에 걸쳐서 식민지 체제가 무너지고, 그 다음에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대한 소비에트라는 장벽이 최종적으로 황급히 붕괴한 뒤에, 우리는 저항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경제적·문화적 교환들의 전지구화를 목격해 왔다. 전지구적 시장 및 전지구적 생산회로와 더불어 전지구적 질서, 새로운 지배논리와 지배구조, 간단히 말해서 새로운 주권 형태가 등장했다. 제국은 이러한 전지구적 교환들을 효과적으로 규제하는 정치적 주체, 곧 세계를 통치하는 주권 권력이다.”

 

 

 

 

 

이 야심만만한 선언은 <제국>의 첫머리에 나온다. 이탈리아 자율주의 이론가 안토니오 네그리와 그의 지적 동업자 마이클 하트가 함께 써 2000년에 출간한 <제국>은 20세기에 출간된 좌파 이론서 가운데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저작이자 가장 많은 논란과 반감을 불러일으킨 저작이다. 세계 좌익 운동은 <제국>을 환호하는 쪽과 <제국>에 반대하는 쪽으로 갈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제국이라는 유령>은 영국의 트로츠키주의 이론가 알렉스 캘리니코스를 비롯해 반대 쪽에 선 사람들이 쓴 글 모음이다. <제국>이 출간된 뒤, 이 논쟁적인 저작을 비판적으로 논평하는 서평들 가운데 밀도가 높은 것을 추려 모았다.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제국’은 과거 제국주의 시기의 제국과 전혀 성격이 다르다.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은 국민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전지구적 차원에서 형성된 자본주의적 지배·착취 체제다. 지구가 곧 하나의 제국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묘사하는 제국이 국민국가의 확장과 팽창의 방식이었던 과거의 제국주의와 다르다는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은 오히려 옛날의 로마 제국을 닮았다. 자기 완결적 보편 구조였던 로마 제국처럼 제국은 지구 전체를 그물로 엮어 스스로 작동한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도의 끝없는 확산과 저항으로 주저앉았듯이, 이 새로운 지구 제국은 인터넷 중심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다중의 저항을 통해 극복될 것이라고 이들은 예견한다.

» 영국의 트로츠키주의 이론가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 아무런 전략적 지침도 제시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제국이라는 유령>의 필자들은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 지적으로는 우아하고 현란하지만, 진단과 전망의 내용으로 보면 거의 공상에 가까운 책이라고 냉정하게 평가한다.

“세계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풍요로운 중심부와 종속적 주변부 사이의 거대한 물질적 격차가 사라지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조반니 아리기)

“<제국>의 지구화 패러다임은 자본주의적 사회질서의 재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영토적으로 조직된 국가권력의 구실을 설명할 수 없다.”(엘린 우드)

“<제국>은 진지한 정치 현실주의가 아니라, 저항의 욕망에 위안을 전해주는 (…) 신화다.”(티모시 브레넌)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아무런 전략적 지침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야말로 <제국>의 약점이라고 지적한다. 전략과 관련해 네그리와 하트는 유용한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캘리니코스는 공박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피억압자·피착취자를 익명의 무정형한 대중과 동일시하고, ‘도망·탈출·유목생활’을 민주주의적 힘이라고 선언하면서 이주민과 난민을 찬양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구절을 비틀어 “하나의 유령이 세상에 출몰하는데, 그것은 이주라는 유령이다”라고 선언한다. 이 유령들, 곧 끝없이 이주하고 출몰하는 다중이 제국에 대항해 새로운 공간을 구성할 것이라고 네그리와 하트는 말하지만, 캘리니코스는 이 선언의 내용야말로 실체 없는 것, 곧 유령이라고 본다. 제국은 유령일 뿐이다.

캘리니코스는 네그리가 여전히 자율주의의 핵심 이론가이며, 지난 40년 동안 혁명적 지신인으로 살아온 점을 존경할 수도 있고 또 그런 점에서 그와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냉정한 평가를 거두지 않는다. 네그리의 사상은 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성공적인 운동이 발전하는 데는 장애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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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우리 시대의 명저 <13>: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

* 한국일보(2007. 3. 28) / 민중이여, 정치사회 참여를" 90년대 뜨거운 논쟁 불러


[우리 시대의 명저 50] <13>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
소련 붕괴로 마르크시즘이 힘 잃던 시절
단박에‘진보 뉴웨이브’의 대부로 부상
‘대의 민주주의 통한 변혁’ 가능성 내세워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 질적 후퇴” 진보논쟁 단초


최장집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을 비롯한 90년대 중반까지의 저작에 대해 “권위주의 정치 질서를 강하게 비판하다 보니 대안의 문제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룬 감이 있다”고 자평했다. 왕태석기자 kingwang@hk.co.kr

1987년 6월 항쟁과 12월 대선, 89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90년 독일 통일, 91년 소련 붕괴, 급작스러운 90년 3당 합당에 이은 92년 대선…. 한국 민주주의는 그 지난한 탄생만큼 성장통도 심하게 앓았다.

진보 진영, 특히 마르크시즘을 추종했던 지식인들의 명운은 마치 롤러코스터라도 탄 듯했다. 6월 항쟁을 통해 국민적 가치인 양 대중 속을 파고 들던 이들의 변혁 이론은 불과 2, 3년 후 70년에 걸친 현실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기 무섭게 존재 의미를 잃어갔다.

마르크시즘과 함께 지리멸렬하던 진보 이론의 구원자로 나선 것은 소위 ‘모래시계 세대’ 지식인들이었다. 80년대 초 대학을 졸업한 이 젊은 연구자들은 네오마르크시즘을 비롯한 비판이론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였고, 사회운동 참여와 기획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시카고대학에서 노동정치 논문으로 학위를 받고 귀국한 40대 늦깎이 박사 최장집은 해박한 지식과 열정적 학문 활동으로 단박에 ‘진보 뉴웨이브’의 대부로 부상했다.

박사 논문 출간을 빼면 첫 단독 저작인 <한국 현대정치의 구조와 변화>(1989)에서 최장집은 네오마르크시스트인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 진보 정치학자 필립 슈미터의 ‘코포라티즘’ 이론을 국내에 소개하며 진보적 소장 연구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더불어 특유의 정치한 문장에 담아낸 한국 현대 정치사 분석은 “탁월한 문제 의식을 갖춘, 브루스 커밍스와 쌍벽을 이룰 만한 연구”라는 평가를 끌어냈다.

이 책은 권력층이 6·29 선언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대신 중산층을 개혁적 민중과 분리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지적한다. 또 87년 대선에 정치적으로 동원된 지역 감정은 민주화 세력의 분열을 일으킨 것은 물론, 실질적 민주주의 발전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이라 예견한다.

최장집을 논할 때 흔히 거론되는 사상가는 그람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이 번번히 실패로 귀결되는 원인 규명에 천착한 그는 국가의 폭력적 권위와 더불어 시민사회의 주류 언술로 유포되는 헤게모니에 주목한다. 권력층은 헤게모니를 조작, 유포, 공고화 함으로써 대중의 자발적 복종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비판이론 성격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시즘의 이분법적 토대-상부 구조를 벗어나 시민사회를 언급한 까닭에 그람시 이론은 80년대 후반 시민운동의 발흥을 든든하게 지원했다. 하지만 최장집은 “나는 늘 네오마르크시즘과 자유주의적 비판이론 간 균형을 중시했다”며 자신을 ‘그람시안’으로 규정하는 논의를 경계한다.

93년에 내놓은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은 외형적 자유화가 아닌 실질적 민주화를 중시하는 최장집의 문제 의식이 더욱 날카롭게 벼려진 기념비적 저작이다.

89년부터 92년 대선 직후까지의 논문을 모은 이 책에 대해 그는 “민주주의가 아직 틀을 잡지 않은 이행기적 상황에서 학자이자 운동가로서의 관심사와 희망을 투영했던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에서 87년 항쟁 이후의 한국 정치체제를 ‘제한적 민주주의’로 명명한 저자는 권위주의 체제 아래 정치ㆍ사회ㆍ경제적으로 소외된 민중이 민주화의 실질 주체가 돼야 한다는 ‘민중민주주의’ 입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그 실천에선 변화가 감지된다. “기존 헤게모니 구조에서 민중 운동은 곧바로 정당 조직으로 발전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던 전작과 달리 “민주주의는 민중들로 하여금 제한적이나마 정치권력을 행사할 여지를 제공한다”며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한 변혁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최장집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마르크시즘, 그람시, 토크빌 등의 사회구조 이론을 창조적으로 융합하면서 국가-시민사회의 중간 층위에 ‘정치사회’를 위치시킨다.

노동 계급을 비롯한 시민사회 속 민중은 정치사회에 참여해 자신의 이익과 요구를 정당을 통해 조직함으로써 국가를 민주화시키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정치사회 및 정당의 역할을 중시하는 그의 지론이 이 책에서 원형을 갖춘 셈이다. 아울러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합리적 사회 건설을 위한 사상체계로서 시대적 역할을 다했다”고 진단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은 출간과 함께 학계에 뜨거운 논쟁 거리를 제공했다. 정통 마르크시즘 입장에 선 김세균은 최장집의 이론이 사실상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긍정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한상진은 중산층의 개혁 성향을 긍정하는 ‘중민(中民)론’을 내세우고 하버마스를 국내에 소개하는 등 온건 시민사회론으로 최장집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런 외부적 논쟁이 아니더라도 신간을 내는 최장집의 속은 편치 않았다. 92년 대선에서 다시금 수평적 정권교체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한국의 시민사회가 건강한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긴커녕 지역주의 이데올로기에 힘없이 휘둘리는 걸 보며 실망을 많이 했다”고 그는 토로한다.

대선 결과를 보고 쓴 책의 마지막 장과 결문에서도 민주화운동세력이 주도하는 시민사회의 역량에 대한 짙은 회의감이 묻어난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견결한 진보학자에게 한국의 민주주의 이행 과정은 이후로도 기대를 실망으로 환치시키는 쓰린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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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우리 시대의 명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 한국일보(2007. 3. 23)  / [우리 시대의 명저 50] <12>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구어체로 자유롭게… ‘아름다움의 세계 탐험’ 대중화
‘인터넷 문장’에 익숙한 젊은 독자들 휘어잡아
50만부 판매 돌파… 문학 서적으로는 기록
“미학은 사회의 생산력·미래의 경제학” 믿음 전파


진중권씨는 “세상을 남과 다르게 보고, 다르게 행동해야 상상력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도개교> 파라네스

<집합적 발명> 마그리트

<그리는 손>에서

1970~80년대 우리 사회를 지배한 것은 생산 제일주의와 민주화 투쟁이었다. 한쪽에서는 어떻게 하면 생산력을 높일 것인가를 고민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한 고난의 투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먹고 사는 문제가 많이 해결되고 민주화 역시 이전 보다 훨씬 진전됐다.

문화 욕구의 증대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단순화하면, 이제 좀 먹고 살만해 졌으니까 즐길 것을 찾고 오락거리에 눈을 돌린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미학은 또 어떤 학문일까.

그 같은 궁금증에 대한 대답이 바로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다. 출판 당시(1994년)만 해도 일반인에게 미학은 어렵고 개념 잡기 곤란한 그런 학문이었는데 이 책이 그런 답답함을 꽤 해소한 것이다.

<미학 오디세이>에는 미학, 미술, 철학의 역사가 섞여 있다. 가상과 현실속에 원시 시대부터 최근 탈근대적 시선에 이르기까지의 그림, 건축, 조각 등을 중심으로 인류 역사의 모든 시기에 이룬 예술과 아름다움의 본질을 향해 다가간다.

때로는 한 작품을 파고 들고, 때로는 작품의 분석법을 제시하며, 또 때로는 그 작품을 통해 그 시대 사람의 생각과 삶을 읽는다. 대상이 서양으로 국한된 점이 아쉽지만, 이렇듯 대중을 상대로 미학을 소개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인문서로는 당시만 해도 드물게 구어체 문장을 사용했는데, 독자들은 처음에 그 문장을 불편해 하다가 나중에는 도리어 거기에 매료됐다. 그의 글 쓰기는 특히 인터넷 문장에 익숙한 젊은 독자를 휘어잡았다. 입에 붙는 구어체 문장이기 때문에 죽죽 읽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얕은 책이 아니다.

눈으로만 보고 입으로만 읽는다면 어려울 것 없지만, 틈틈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머리로 정리할 내용이 많다. 책의 정체는 한 가닥으로만 뭉뚱그려지지 않는, 특이한 내용과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진중권은 이에 대해 ‘이중 코드’를 적용했다고 표현한다.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전문가와, 그렇지 못한 일반인을 동시에 겨냥해 책을 썼다는 것이다.

그는 “인류 역사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이고, 미학의 영역과 방법론 역시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에서 자칫 혼동이 생길 수 있다”며 “이 책을 통해 미학의 기초 지식을 소개하고 예술을 어떻게 해석, 비평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틀을 제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책을 쓴 현실적 동기는 아주 단순하다.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누나(작곡가 진은숙)가 있는 독일 유학 비용을 마련하기위해서 였다. 범상한 이유지만, 과정은 수월하지 않았다. 시중에 변변한 미학사 책 하나 없었고, 몇 안 되는 개설서는 관점이 낡지 않으면 수준이 떨어지거나, 시야가 좁았다.

자료 부족이 무엇보다 큰 문제였다. 그는 번역된 것을 모조리 찾아서 읽고 빠진 부분은 원전을 구해 보충했으며 필요하면 지방 대학의 석사 논문까지 찾아 읽어갔다. 독일의 누나에게 부탁해 자료를 구했으며 대형 서점의 외국 서적 코너를 훑었다.

노고가 헛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자들은 좋은 반응을 보였다. ‘미학에 대해 알게 됐다’, ‘미학을 알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평가가 쌓여갔다. 인문서 치고는 너무 가볍다며 탐탁치 않게 여긴 학계 인사도 있었지만, 반대로 철학자 박이문 교수처럼 “좋은 책 썼다”며 격려하는 선배도 적지 않았다.

출판사를 옮겨가며 책을 냈기 때문에 지금까지 얼마나 판매됐는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지만, 50만부는 훨씬 넘었다는 게 출판계의 정설이다. 미학이라는 낯선 분야의 책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 과정을 진씨는 “책의 탄생은 조용하여 언론의 주목도, 광고의 지원도 받지 못했지만 책을 먼저 읽은 이들이 주위에 소개를 하고, 입소문을 통해 꽤 많은 이들이 책을 사거나 빌려서 읽었다”고 요약한다. 출판사의 관계자도 “처음에는 그리 각광을 받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독자들의 입 소문을 타고 알려졌다”며 독자에게 고마워했다.

책을 낼 당시 대학원을 졸업한 서른 한 살의 청년 진중권은 이 책을 시작으로 폭 넓은 문필, 저술 활동에 나서 지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논객이 됐다.

진중권은 미학을 단순히 과거의 아름다움을 분석하는 수단으로만 보지 않는다. 현재 혹은 미래의 현상을 해석하거나 예측하고, 개별 현상에서 보편적 의미를 읽어내는데 정말로 필요한 학문이 미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가령 거리의 간판만 보아도 지금 우리 사회를 해석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간판은 글자가 많고 또 매우 크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옆에 혹은 위에, 아래에 붙어있는 간판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눈에 잘 띌까 간판끼리 치열하게 경쟁한다. “사회적인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경쟁 만능주의를 읽을 수 있지요.”

그가 볼 때 미학은 또 우리 사회의 생산력이다. 과거에는 굴삭기, 기계, 파이프라인, 크레인 등이 생산을 상징했다. 지금은 IT, 나노, 디자인, 브랜드 등이 생산력이다. 육체 노동이 정신 노동으로 대체되고, 눈에 보이는 묵직한 것에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으로 생산의 주체가 바뀌었다. 노동의 양태가 변한 지금, 가장 중요한 생산력이 무엇일까. 진중권은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상상력과는 거리가 멀다. 상상력을 북돋아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그것을 억누른다. 진중권은 “미래를 내다 보지 못하고 과거로만 눈을 돌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보화 사회가 됐는데도 왜 옛날처럼 경제 성장을 하지 못하느냐고 야단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같은 상상력의 부재는 남과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지 못하게 하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타인의 시선이 두렵다. 사회적으로도 남과 다른 것을 이해하거나 참아주지 못한다. 현실이 이런데도 사회 지도층은 상상력이 떨어진 우리 사회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고치려고도 않는다.

하지만 사정이 그럴수록 미학에 대한 진중권의 믿음은 확고해진다. 미와 예술 그리고 감각의 학문인 미학이 결국에는 사회적 상상력을 돋우고 미래의 생산 동력, 미래의 경제학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 특이하고 실험적인 형식도 눈길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은 대부분 ‘모노포니’(monophony)다. 이런 형식의 음악에서는 멜로디가 중심이 되며 반주는 독립성을 잃은 채 멜로디의 진행을 도울 뿐이다. 하지만 반주가 독립성을 갖고 스스로 또 다른 멜로디 행세를 할 때, 여러 개의 멜로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화음을 만드는 새로운 음악이 된다. 바로 ‘폴리포니’(polyhphony)다.

형식으로 볼 때 <미학오디세이>는 책의 폴리포니다. 미학사(본문), 철학사(대화), 예술가 모노그래피(에셔, 마그리트, 피라네시)로 내용을 나눠 독립적으로 전개한 뒤 결국에는 서로 만나 화성을 이루게 한 것이다.

책에서 미학사 부분을 다룬 것은 본문이다. 그러나 미학이 기본적으로 철학의 한 부분이고, 사유의 틀과 개념을 철학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그 같은 철학적 배경을 보여주기 위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등장시켰다. 둘의 대화는 그 형식이 좀 가볍고 장난스러울 때가 있지만 내용은 철학과 예술의 핵심을 짚기 때문에 결코 가볍지 않다.

진중권이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쓴 제 3권(2003년 발행)에는 디오게네스도 합류한다. 탈근대의 관점으로 볼 때, 철학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적 주류와 디오게네스에서 니체로 이어지는 비합리주의적 비주류가 대립하는데 진중권이 이를 잘 활용한 것이다.

책에는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1898~1972), 벨기에의 화가 마그리트(1898~1967), 이탈리아의 건축가 겸 판화가 피라네시(1720~1778)의 작품이 등장한다. 책에서 이들은 단순한 미술가가 아니라 당대의 문화 현상을 해석하고 창조한 철학자와 같은 인물이다. 이들의 작품은 텍스트의 서술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미학 오디세이>는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같은 특이하고 실험적인 형식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진중권

-1963년 서울 출생
-서울대 미학과 졸업, 미학과 석사
-독일 베를린자유대 수학
-중앙대 겸임 교수, KAIST 초빙 교수
-저서 <춤추는 죽음> <천천히 그림 읽기> <앙겔루스 노부스> <현대 미학 강의> <레퀴엠> <성의 미학> <놀이, 예술 그리고 상상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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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옥시덴탈리즘: 반(反)서양주의의 뿌리를 해부한다.

* 한국일보(2007. 3.23) / 옥시덴탈리즘 '反서양주의의 뿌리 해부'


이언 바루마 등 지음ㆍ송충기 옮김 / 민음사 발행ㆍ188쪽ㆍ1만2,000원

팔레스타인 출신의 문명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서구의 시선이 편견으로 가득한 허상이라고 주장했다.

뉴욕 바드대학 교수 이언 바루마와, 예루살렘 헤브루대학 교수 아비샤이 마갤릿은 공저 <옥시덴탈리즘>에서 그 반대 즉 서양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을 지적하고 그 원천을 규명한다.

동양인은 비합리적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서양인에 비해 열등하다는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을 식민지화하면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관념이다.

옥시덴탈리즘은 반대로 서양을 비인간적인 사악한 세력으로 본다. 천박하고 근본이 없으며 자본주의적 기계 문명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따르면 바로 그 옥시덴탈리즘의 원천은 서양이다. 산업화와 도시를 증오한 윌리엄 블레이크와 엘리어트, 사회주의를 주창한 프루동과 엥겔스, 개인의 소외를 경고한 마르크스 등 19세기 인물들에게서 그 뿌리가 발견된다. 옥시덴탈리즘이 급속히 성장한 곳은, 서양을 모델로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 러시아, 독일 등이다. 일본 지식인은 일본 문화는 정신적이고 깊이가 있는 반면 서양 문명은 천박하고 창조성을 파괴한다고 비판했다.

독일은, 유럽 국가이면서도 자국의 정신문화에는 기개가 넘치는 반면, 영국과 프랑스의 문화는 용렬한 상업 문화라고 깎아 내렸다.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러시아의 슬로브 주의자들은, 서양 정신이 공허하고 냉정하다며 비판했다. 그 같은 비판이 지금은 중동의 이슬람문화권에서 특히 강렬하게 나타난다.

책은 정치적ㆍ문화적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물질주의적인 서양 정신을 반대하는 옥시덴탈리스트의 비판에 경청할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자유주의 시장에 대한 맹신과, 오늘날 서양을 대표하는 미국의 정책 등에 분명히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독일, 일본 등 옥시덴탈리즘을 주창한 나라가 나치즘, 파시즘에 빠진 역사를 상기하며 옥시덴탈리즘이 정치권력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오리엔탈리즘과 정반대에 있으면서도 상대와 자기를 구별하고 그 상대를 증오한다는 점에서 둘은 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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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한국 근현대소설과 가족로망스

강의준비를 하는 틈에 잠시 짬을 내어 들어가본 담론비평 사이트에서 리뷰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문학평론가이자 계간 황해문화 주간이기도 한 김명인의 한국근현대 문학사에 대한 '시론적 소묘'를 요약정리하고 있는 리뷰이다. '가족로망스'라는 구도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닌데, 국문학계에서는 아직 이러한 시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완결된 '문학사'가 기대된다.

담비(07. 03. 29) 평론가 김명인의 야심찬 '문학사 기획'

시인 김수영을 통해서 근대를 향한 성찰적 개인의 위대한 모험을, 평론가 조연현을 통해서 근대에 투항하는 복잡한 현대인의 내면을 짚어보았던 문학평론가 김명인의 문학사 쓰기가 새로운 국면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것은 한국 근대문학 1백년을 '가족'이라는 주제로 꿰뚫는 자못 거시적인 작업이어서 주목을 끈다.

김명인은 '민족문학사연구' 최근호(32호)에 발표한 '한국 근현대소설과 가족로망스'에서 자신의 이러한 과업의 "시론적 소묘"를 펼쳐보였다. 그 아이디어의 시발은 바로 프로이트다. 프로이트가 1908년에 쓴 '신경증환자의 가족 로망스'는 어린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한 모방과 동일시가 충족되지 않을때 상상의 아버지를 갈망하게 되는 신경증을 분석했다. 로버트 단턴은 이 가족로망스 이론을 프랑스혁명에 적용했다.

이런 견해를 근대소설에 적용하면 근대소설의 문제적 개인들은 신이 사라진 시대(=아버지가 부정된 시대)에 새로운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자발적 고아들이다. 특히 성장소설이 그렇다. 내발적 경로를 통해 주체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를 이룬 서구사회의 경우, 봉건체제의 부정과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이 자기사회 내의 논리에 따라 계기적으로 일어남으로 해서 비교적 낡은 아버지 부정과 새 아버지 긍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지만 식민지라는 경로를 통해 외재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의 길로 들어선 비서구 지역에서는 이것이 자연스러울 리가 없다.

낡은 아버지는 부정되어야 할 존재이면서 동시에 지켜야할 존재이며, 새로운 아버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동시에 부정해야 마땅할 존재이다. 가족로망스는 시작부터 길을 잃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버려진 존재인 식민지 고아들은 낡은 아버지를 부정할 겨를도 없이 그를 부양해야 하며, 새로운 아버지를 찾을 겨를도 없이 가짜 새 아버지와 대결해야 한다. 그들은 문제적 개인이지만, 행로가 단순하지 않고, 가족로망스는 늘 지연되고 그 자리엔 다른 악몽이 시도 때도 없이 개입해 들어온다. '피식민주체의 서사시'가 시작된 것이다. 김명인은 이런 문제의식 아래 한국 근현대소설을 개관한다.

제1기(19세기말~1920년대 초반)는 봉건체제의 붕괴와 식민체제의 형성이 동시적으로 진행된 시기이자, 넓은 의미의 '계몽주의 시대'와 엇비슷이 일치하는 시기로서 가족로망스에서 이른바 '고아의식'과 '업둥이의식'이 발생하는 시기이다.

제2기(1920년대 중반~1945년)는 '식민지 근대'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는 시기로서 부정된 아버지에 대한 복합심리와 새로운 가족에 대한 동경, 대안으로서의 형제애 등이 복잡하게 착종하는 시기이다.

제3기(해방기~1950년대)는 분단체제 형성기다. 새로운 아버지에 대한 동경이 다시 한번 좌절하고 1기의 고아 혹은 업둥이들은 아버지로서 다시 부정되거나 실종되고 2기의 소년들은 재차 더 극심한 시련 속으로 내던져진다.

제4기(1960년대~1980년대)는 한국 자본주의의 본격적 발전기이자 권위주의적 군부독재기로서 가짜 아버지에 의한 전체주의적 가족국가와 진짜 아버지의 복원열망이 충동하는 시기이다.

제5기(1990년대~현재)는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시기로서 제4기의 새로운 세대가 다시 아버지가 되고 가족로망스 자체가 붕괴되어가는 시기이다.

김명인은 이런 시기구분 하에 이광수, 염상섭, 이상, 김남천, 채만식, 최인훈, 김원일, 조세희, 방현석, 신경숙, 배수아 등의 작품이 이런 특징들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지 간단간단히 짚어나간다. 이광수의 '무정'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만든 무정한 세계에 대한 한탄과,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가짜 선구자의 곤혹스러움이 서로 용해되지 못한채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양립해있는 형국을 보여준다.(제1기)

제2기에는 카프 계열 작가들이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평등한 가족체계를 꿈꾸며 '고향', '황혼' 등의 작업을 보여주는가 하면, 그 반대편의 국민문학파가 그에 반발하며 옛날 아버지를 불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다소 단순한 반응이었고 보다 복잡한 심리는 이상과 김남천, 채만식에게서 나타난다는 게 김명인의 판단이다. 이상은 첨단의 모더니티를 향해 냅다 달렸지만, 그에게 더 절실했던 것은 어떠한 봉건적 관계의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로우면서도 그의 애정결핍을 충족시켜 줄 사적인 가족 형태였으며, 그것은 곧 성적, 정서적 동반자로서의 여성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김명인은 남매애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상의 여성집착은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차라리 손위 누이를 감싸 안는 김남천이나, 손아래 누이를 지키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소년 주체가 제시되는 채만식을 주목한다.

하지만 제3기에서 김남천과 채만식이 남겨놓은 씩씩한 소년들은 타락하지 않은 시원의 아버지를 만났는가. 아니면 스스로 좋은 아버지가 됐는가. 최인훈의 '광장'에서 이명준이라는 청년은 남북 양쪽의 아버지들이 가짜라는 눈치를 챘지만, 새로운 아버지에 대한 열망보다는 가짜 아버지들에 대한 절망이 더 커서 전도된 남매애로서의 여성에 대한 성적 집착의 길을 걷다가 결국 이 땅에서 탈주했다.

제4기에 들어서면 가짜 아버지에 대한 부정과 그가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가족국가에 대한 거부가 두 방향으로 본격화된다. 하나는 '분단소설'들로서 가족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지워진 아버지를 되살리려는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소설에서 보여지는 형제애에 기초한 가족의 형성욕망이다. 김원일이 '노을', '어둠의 혼'에서 분단동이들은 자기 손으로 아버지를 부정하기도 전에, 더 큰 외부의 힘이 아버지를 부정해버린 제1기의 고아들과 비슷한 형국인데, 이들에게 미래의 가족로망스는 곧 과거의 아버지를 되살려내는 것이라는 역설적 상황이 주어진다. 발전의 서사와 대비하여 '복원의 서사'라 부를 만한 이런 경향은 비극적 식민지를 겪은 제3세계 문학의 공통된 경향이라고 김명인은 말한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자본주의체제의 형성과정에서 눌려서 난장이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위한 복수의 서사다. 이 작품은 80년대의 급진화하는 가족로망스를 예비하는 성격을 가지면서도, 봉건시대로 거슬로 올라가는 노예적 가족사의 사슬을 끊고자 하는 비원도 담고 있다. 방현석의 '내일을 여는 집'은 노동계급운동의 미증유의 활성화라는 분위기와 맞물려 본격적인 사회주의적 형제애에 기초한 가족로망스를 구가하였으나, 희망태에 불과했고, 지금 돌아보면 어딘가 허망하고 고립된, 1980년대적으로 특수화된 것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정리한다.

90년대에 들어오면 가족로망스는 현격히 쇠퇴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집단무의식의 문제로는 포착하기가 힘들게 되어 버렸다. 부-모-자녀로 이루어지던 최소단위도 유지하기가 힘들게 돼 구성원들은 단자로 내몰렸다. 불륜소설이 붐을 이뤘고, 신경숙, 조경란, 공선옥 등이 예외적으로 가족이라는 굴레로부터의 이탈과 가족을 추수려 세우려는 노력을 보여 예외적 현상으로 남았다.

김명인은 이상의 가족로망스에서 그 주체가 '아버지-아들'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식민지의 이 기구한 가족로망스 속에서조차 여전히 타자이자 또다른 식민지였던 여성의 역사를 겹쳐놓는다. 나혜석, 강경애, 박완서, 신경숙, 배수아의 소설로 계보를 이어가는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여성의 삶'은 때론 비극적이고 적나라하고 지그재그적 행보를 보여준다. 배수아의 소설집 '바람인형'에 오면 여성으로서 성장한다는 것은 곧 그 여성-인간을 살해하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명제를 입증하는데 바쳐진다.

김명인은 이러한 여성 주체의 근대적, 혹은 탈근대적 해방이라는 주제야말로 주목할한만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자체가 세계사적 보편성과 당대적 폭발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근대/식민지 근대가 낳은 사회체제, 문화, 이데올로기 전반의 문제들을 가로지르고 재구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근본적(radical) 거대주제라는 점에서 가족로망스의 악순환과 근대적 삶에 편만한 식민성을 동시에 넘어설 수 있는 잠재력을 내장하고 있다고 말한다.(리뷰팀)

07. 03. 29.

P.S. 가장 최근에 낸 김명인의 평론집은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6)이다. 책에 관해서는 프레시안의 관련기사가 유익하다(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6092917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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