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milla Elliott, Rethinking the NOVEL/FILM DEBAT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 31~56

2. Prose Pictures (산문 그림)
오늘날까지 산문과 삽화에 대해 범주적 구분은 이어져오지만, 이 장은 이러한 논의(담론)가 무시하고 있는, 산문을 그림으로 삽화를 논평으로 말하는 유비적인 interart 수사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2.1 Prose Painting/Illustration Commentary (산문 그림/삽화 논평)
19세기 영국문학에서 소설을 그림에 대해 유비하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이 시기 평론은 그림에 대한 개념으로 산문에 대해 논했다. 소설을 캔버스로, 산문 스타일을 그림 기법으로, 작가를 화가로. 작가들의 실재적이고 시각적이고 경험적인 재현의 방식에 대한 열망이 이러한 유비에 기반이 된다고 비평가들은 생각했다. 이러한 interart 수사와 이론은 당대 지배적인 과학 이론들을 종종 따른다. 19세기 초 interart 유비는 당대 과학 이론인 유기적인 힘의 개념에서 비롯한 상상력의 공유라는 낭만적 이론에 기반한 것이다. 19세기 후반에는 다윈이즘에 영향을 받아서 예술이 같은 영역을 놓고 경쟁하는 긴밀히 연결된 종들이라고 인식되었다. 19세기 작가들과 비평가들은 산문과 그림을 유비로 부착시킴으로써, 소설에서 삽화를 제거하는 것을 정당화시켰다. 산문을 보다 높고 고급한 회화 예술과 연결시킴으로서, 비평가들은 더 낮은 형태의 예술인 삽화의 위로 산문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이러한 비평가들은 삽화를 “논평”으로 만드는 (counter)유비를 야기했다. 이러한 유비와 대항유비는 삽화가 그림적, 서술적 여분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출판에서 삽화를 제거하는데 일조했다.

   작가-삽화가 관계에 대한 19세기 두 극단의 예를 살펴보자. 하나는 1827년에 출판된 것으로(35p 그림 4) 작가와 삽화가는 책의 첫머리에 한 책상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면서 공동작업을 하고 있다. (물론 작가의 위상이 좀 더 높음을 책 표지에 작가의 이름이 더 크게 쓰여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반면에 1890년에 출판된 그림(36p 그림 5)에서 작가와 삽화가는 동등하게 서로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으로(다윈이즘) 그려져있다. 이러한 작가-삽화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위해서 William Makepeace Thackeray의 “Vanity Fair”을 대상으로 연구하기로 한다. 이는 작가와 삽화가가 동일인이고, 상대적으로 일찍 출판되었으며, 대중성과, 1847년부터 1899년까지의 다양한 판본이 있으며, 수십년에 걸친 다기한 독자의 코멘트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산문과 삽화에 대한 태도의 변화, 삽화의 패션, 이론, 기술의 변화를, 산문이 그대로인 것을 통해(산문은 그대로이고 삽화만 시간에 따라 변화했음) 더 명확히 살펴볼 수 있다. 덧붙여서, 이러한 연구를 통해 문자와 그림 기호 사이의 범주적 구분과 유비에 대해서 시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2.1.1 Penning the Pencil: Prose Criticism of Illustrations (‘그림’에 대해 쓰기: 삽화에 대한 산문 비평)
“Vanity Fair”에 대한 19세기 초 비평들을 보면, 소설과 그림에 대한 유비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단 “Vanity Fair”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빅토리안 소설들 일반에 적용될 수 있다. 이러한 유비는 소설 삽화를 논의하는 언어에 영향을 주고, 제한을 가한다. 즉 소설 서사를 논할 때는 미술(fine arts)의 개념을 쓰고, 소설의 삽화를 논의할 때는 기술적이고 일반적인 용어들을 사용한다. 삽화에 대한 평은 그림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 기술적인 재생산(얼마나 서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즉 삽화가 진정 ‘미술’임에도 불구하고 이는 평자의 눈에는 서사에 부수적인 것으로 억압된다. 반면에 서사는 그것이 ‘미술’이 아님에도, ‘미술’과의 긴밀한 유비 속에서 논해진다. 결국 이 책은 산문-미술 논쟁에 대해 비판적 접근을 하면서, 소설-영화 관계의 기원을 파고들면서, 그 관계를 논쟁사를 통해서 재정립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삽화에 대한 생각에는 당대 삽화가 그림(painting 채색)될만한 가치가 있는 구성이라고 당대인들이 생각한 데에서, 삽화와 그림 사이에는 위계적인 질서가 있다는 관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세기 중반의 “Vanity Fair”에 대한 평론은, 그의 삽화를 산문보다 더 높게 가치평가하거나, 대부분은 동등하게 협력하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변화된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평론가들은 산문과 삽화의 대립을 부각시킨다. 산문과 삽화의 대립을 통해 산문을 높이고, 삽화를 낮춘다. 삽화가는 고용된 ‘기능공’이 되고 작가는 ‘사상의 기원’으로 자리매김된다. 이는 19세기 말에 산문과 삽화의 관계에서 산문의 위치를 보여준다. (*소설에서의 산문과 삽화의 관계는 결국 유비적으로 영화에서 화면과 서사의 관계로 대치되고, 결국에는 영화와 소설 사이에서 소설의 우위성으로 연결되는 것? 그러나 영화에서 화면과 서사는 분리되기 쉽지 않다. 화면의 구성이 바로 서사 아닌가? 미장센) 이러한 변화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1850년대 후반과 1860년대에 영국 삽화의 황금기가 되어 삽화의 성격이 변했다. 이러한 새로운 스타일이 평론적 뒷받침을 갖게 된 것은 시간이 쫌 더 지나서였기 때문에, 1860년대 초는 아직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대의 평론들은 “Vanity Fair”의 삽화들을 비난했다. 이에 따라 후대에 편집된 “Vanity Fair”은 황금기 스타일의 삽화나 19세기 말의 모방적이고, 실재적이고, 사진과 같은 스타일의 삽화들로 원본 삽화를 대체했다.

   반면에 “Vanity Fair”의 원본 삽화와 그 삽화가 따르는 Hogarthian 학파에 대한 옹호가 그들의 회화적 가치를 비난했던 평론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옹호는 산문-그림 유비에 대한 대항 유비를 지니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원본 삽화들은 그 그림적 속성이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문학적 개념을 통해 살아나고, 이들을 ‘구절’로 만들게 된다. 물론 이러한 대항유비는 산문과 삽화를 동등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삽화에 해당되는 유일한 가치는 문학과 언어에 대한 유비를 통해서만이다. 그들의 미술적 가치는 무시된다. 20세기 평론가들도 이러한 생각을 따른다. 그들에게 원본 삽화는 텍스트의 ‘의미’에 핵심적인 것이다. 이는 그들의 의미론을 중요시 한 것이지, 그들의 미술적 효과를 중시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독해는 삽화를 유사-문자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산문을 미술에 유비하는 것과, 삽화를 문자적 서사에 유비하는 것이 협동하여 삽화적 패션과 기술을 바꾸었고, 어른을 위해 쓰인 소설에서 사실상 삽화를 추방시켰다. “Vanity Fair”를 살펴보면 어떠한 삽화는 산문과 모순되기도 한다. 이는 미술-문자 서사에 부조화를 가져온다. (삽화 7 - 산문에서는 조가 어떻게 죽는지 말하지 않고 베키가 논의 중에 집 밖에 있는데, 그림에서는 베키가 논의 중에 칼을 들고 커튼 뒤에 음흉하게 서 있다) 이러한 부조화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이 해석들은 모두 원본 삽화가 그의 산문을 단지 장식하고 보충하고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고 갈등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황금기 삽화는, 후대의 사진적인 실재 삽화와 마찬가지로 수사적 기능보다 미술적 기능에 집중한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이러한 삽화들을 서사적으로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따라서 20세기에 “소설”은 순수하게 산문으로 재정의된다. 마치 소설 안에는 삽화가 없었고, 삽화가 소설의 구성요소가 아니었다는 듯이. 따라서 어떠한 소설의 이론도 삽화에 신경쓰지 않는다. 아동 문학이나, 논픽션 책들, 백과사전, 포스터, 광고, 잡지 등등에는 모두 그림이 살아있는데 왜 소설에는 그렇지 않을까?

   interart 유비와 adaptation에 대해 반대한 평론들은, 문자와 시각적 예술을 갈라놓으려는 노력에서 가장 큰 성과를 얻었다. (* 소설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배격하고, 그 기원을 추적하다보면 <소설>이 보인다. 이는 산문과 삽화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각각의 ‘구역’나눔의 과정에서 산문>삽화로 규정되었고, 이것이 나아가 <산문>이 순수이고 <삽화>가 비순수로 규정된다. 데리다 컴백.)

이러한 산문 유비에도 불구하고, 산문은 삽화와의 미술 싸움에서 지고 있다. 1890년대 인쇄 기술의 발전은 사실적인 삽화들로 가득 찬 인쇄된 책들로 넘쳐났다. 한 때 산문 ‘미술’에 비해 삽화가 ‘스케치’로 나타났다면, 이제 산문 ‘미술’은 삽화의 사진적 스타일에 비해서 ‘스케치’로 드러났다. 또한 많은 유명한 미술가들이 책 삽화에 뛰어들면서, 책 삽화를 고급 예술화하게 했고, 심지어 산문을 저급 예술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산문이 완전하고 독립적이게 재현한다는 주장에 대해, Blackburn은 삽화는 단어들이 표현하기 실패하는 지점에서 또는 단어들이 정확한 의미를 소통하기 실패하는 지점에서 비롯한다고 주장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문자에 대한 도움으로서 미술적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이론에서 삽화의 등장은, 산문의 재현적 힘과 자족성이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 말에, 종종 산문은 삽화에게 밀린다. 특히 대중적인 선물 도서 등에서. 여기서는 제본과 삽화가 중요하다. 이러한 책들은 문자적 서사가 아니라 시각적인 가공품으로서 수집된다. 그림은 ‘illustrate'하지 않고 오히려 단어들을 가린다. 이러한 문맥에서 헨리 제임스 같은 저자-평론가가 소설은 오직 산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설=미술‘이라는 유비가 완전하다고 하였다. 이는 일방향적인 것으로서, 삽화가 산문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산문은 미술의 모든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더 나아가 제임스는 산문 미술 유비의 승리를 주장하며, 산문은 삽화가 전혀 없이도 충분히 ’미술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산문-미술 유비를 소설에서의 삽화의 제거를 위해 논의한 것은, 순수한 산문의 미학으로 나아가게 했다. 1930년이 되자 어른 소설에는 거의 삽화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소설 삽화가 줄어들면서, 산문-미술 유비도 줄어들게 되었다.


   우리는 20세기에 재출간되는 19세기 소설은 문자적 “illustration"이 시각적 삽화를 대신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898년 “Vanity Fair”의 자전적 판은 저자에 의한 삽화와 저자의 초상이 들어있다면, 1943년과 그 이후판은 주석과 서문 비평들이 들어있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5장에서 삽화와 평론이 문학에 영화 적용에 대한 연속성을 이론과 실재에서 더 탐구한다.) 삽화를 소설에서 내쫓은 수사가 소설과 영화의 관계를 논의할 때 다시 나타난다, 특히 문학적 영화 수용에 관한 담론에서.

2.2 Prose at the Pictures (그림에 대한 산문)
삽화에 대해 반대했던 헨리 제임스는 사진이 소설을 묘사하는 것은 허용한다. 그는 사진은 산문과 가능한 한 다른 미디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사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하면서 사진이 엄밀하게 소설이나 이야기와 경쟁하지 않아야한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항상 단지 시각적인 상징이나 반향이어야 하고, 텍스트에서 특정한 것을 표현하면 안 된다. 이렇게 삽화를 ‘시각적 상징’이라 이름붙이는 것은 그 미술적 성질을 그 상징적 기능에 부수적이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반향’이라는 것은 음성적인 산문의 사후에 파생되는 청각적 여파로 만드는 것이며, 텍스트 안에서 특정한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반향은 점차 사라진다. 이러한 삽화보다 사진에 대한 선호는 제임슨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였다. 사진은 자연과 이의 재현에 한 발 더 다가간 것이었다. 사진에 비하면 모방적이고 세부적인 묘사도 스케치로 나타날 뿐이었다. 그러나 제임슨이 사진이 산문 소설이 시각 예술보다 미술적 우월성을 유지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단시안적이었다. 산문이 책 삽화와의 대결에서 이겼을지 몰라도, 사진과 긴밀한 관계에 있고 후예인 영화는 산문의 미술적 주장에 대해 심지어 더 만만찮은 라이벌이 될 것이었다. 움직이는 사진과 편집의 통사론은 영화에게 산문과 라이벌인 서사적 능력을 더해주었다. 영화 초창기의 평론들은 문학과 영화 사이의 서사적 라이벌 관계를 확인시켜준다. 20세기 초에 문학을 영화한 것들이 삽화가 든 책들을 대체하였다. 심지어 필립 제임스는 단지 문학을 영화한 것뿐만 아니라 일반 영화가 삽화가 든 문학을 대체한다고 주장한다. 초창기 영화 평론가들은 삽화가 든 소설과 연극을 능가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평론들은 문학을 단어로 영화를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세 개의 혼합된 서사적 예술 형식으로 보았다. 삽화가 든 소설, 공연되는 연극, 자막 달린 영화.

   1920~30년대 산문 작가들은 1900~10년대 작가들이 삽화가 산문을 위협한다고 느꼈던 것처럼 영화가 소설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30년대에 피터제랄드는 이러한 위협을 인식하면서, 영화는 이미지에 단어들이 복속되는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단어를 이미지에 복속시키고, 소설은 이미지를 단어에 복속시킨다. 이러한 영화를 모더니스트 산문 작가들은 자신들의 글쓰기에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들은 자신의 미술적 영감을 버리는 것으로 영화의 우월한 미술적 능력을 받아들였다. 소설은 외부적 행동에서 내부적 생각으로, 플롯에서 캐릭터로, 사회적 실재에서 심리적 실재로 나아갔다. Esrock은 문학이 이제는 심지어 심리적 이미지마저도 벗어나서 산문의 추상적인 재현적 본질을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비평적 경향은 고급 근대 소설은 영화화될 수 없다는 널리 퍼진 주장과 함께 간다. 이는 소설과 영화의 독립적인 영역을 만든다. 소설은 미술적이고 연극적인 영감에서 물러나서, 영화가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 (* 박형서의 소설로? 혹은 돈없고 빽없는 옛날 이창동으로?)

이에 버지니아 울프는 “미술”에서 기존 산문 미술 전통에 반대하고 서사적 미술 전통에 대해서도 비난한다. 그는 문자와 미술적 측면의 분리를 요구한다. 그녀는 또 다른 글인 “영화”에서 영화를 시각적 예술 전통에 위치시키고, 산문 소설과 대비하고 대조한다. 그녀는 시각적 예술을 본질적으로 뇌와 떨어진 눈 기능과 동일시한다. 영화 관객들은 20세기의 야만인으로서 눈으로 스크린을 핥으며 뇌는 잠자고 있다. 미술적 효과를 바라는 작가는 다리가 없는 사람이고, 서사적 효과를 열망하는 미술은 우스꽝스러운 공연하는 개라면, 울프에게 영화는 불구인 사람과 훈련된 동물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녀는 문학을 영화하는 것에도 반대한다. 문학은 뇌에 해당하지만 영화는 눈에 해당하여, 관객은 문학을 영화한 것을 볼 때는 이 둘 다를 쓰려고 하다가 찢어지고 만다.


   후대의 논의들도 옛날의 문자/시각 라이벌을 영화에 대응시키려고 하며, 예술간 adaptation을 비난함으로서 interart 유비를 제거하려고 한다. 문학을 영화화하는 것에 대한 공격은 소설 삽화에 대한 공격에 쓰였던 수사에서 비롯한다. Orr은 문학을 영화화 한 것을 ‘사진-책’이라고 하며 이러한 ‘사진-책’은 그 자신이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힘을 도상적으로 보여줄 뿐이라고 한다. 이는 텍스트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힘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삽화가 든 책에 대한 역사가들은 산문을 파는데 삽화가 힘이 있음을 증명했다. 영화 원본 책의 판매도 유사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영화나 삽화가 소설과 경쟁해서 문학을 없애버릴 것이라는 작가의 우려와는 달리, 소비자들은 두 가지 형태를 모두 소비하고 싶어한다. 소비자들은 하나의 분리된 면에만 갇혀있지 않다, 오직 아카데미와 예술가들만 그러하다. 영화가 문학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림-책’이 아니라, 소설과 소설을 받아들이는 영화가 함께 ‘그림-책’을 구성하고, 소비자들은 예전에 삽화가 든 책들을 구입했듯이, 이를 구입한다. 영화를 소설화 하는 것에도 마찬가지 원칙이 통용된다.

   연극에서 수용된 것들도 흥미로운 intertext를 형성한다. 19세기에는 소설을 연극화 한 연극의 사진이 소설 삽화를 종종 대체한다. 20세기와 21세기에는 영화와 티비 스틸이 소설 삽화를 대체하는 것처럼. 이러한 대체는 위와 같은 수용이 삽화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만, 산문의 자리는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한다. 또한 스틸은 연기와 움직이는 이미지를 고정시킨다. 이 스틸은 움직이는 배우들을 고정시키고, 그들의 대화를 침묵시켜서, 아이들로 하여금 산문에 고정시킨다. 역설적이게 이러한 출판 작업은 새로운 혼합을 만들면서도, 소설과 영화를 각각 단어와 이미지로 양분한다. 이들은 영화를 순수한 이미지로 제시하고, 소설에서 삽화를 제외하여 순수한 단어들로 만든다. 그들은 결코 영화의 단어들이나 소설의 삽화를 재현하지 않는다. 이렇게 소설이 단어로 축소되고 영화가 정적인 이미지로 변화되면, 예술 내적인 단어와 이미지 교환이 가려진다. 이러한 내부 예술의 동학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내부 예술의 단어 이미지 역학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얻기 힘들다.

* 이러한 Kamilla Elliott의 분석은 흥미롭다. 우리가 지금 <소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실상은 삽화와 산문의 분리에서 비롯한 것이고, 이의 배경이 되는 논쟁들을 재구성함으로서, 논쟁의 배경까지 추적하는 것.
기원 -> (논쟁) -> 현재 라고 할 때, 그 논쟁의 배경을 추적하는 작업. 이에는 분명 “작가”의 탄생과 문자가 그림보다 우월하게 인식되어진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존재한다. 근대국가형성과 문학이 긴밀히 연결되는 과정에서, 문자>그림이 조선의 경우 성립되었던 것일까? (황호덕 선생님의 책에 대한 리뷰랑 목차만 봤는데, 화폐-문학이 근대네이션 성립에 기능하였다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신소설 연재 당시부터 시작해서 20~30년대 문예지에 실렸을 때, 단행본에 실렸을 때에 대한 비교 작업이 요청된다.(이영아 선생님, 천정환 선생님이 잘 아실 부분^^) 우리는 또 문인화의 전통이 있었기에, 이것이 어떻게/왜 굴절되고 단절되고 변종되었는지 흥미로워 진다.


천정환 선생님 연구에서 얼핏 기억나는 것은, 근대의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가 ‘생식기 도해’같은 거였다는 점.(책장에서 찾기 귀찮아서 기억에 의존함 -_-;) 분명 ‘그림책/빨간책’이 많이 팔렸다. 대중이 ‘삽화’를 소비하는 방식과, 교육에 의해 억압되는 과정.(분명 현대 분과과정에서도 연구하기 쫌 난감한 부분이 있다. 박태원 단행본 소설 삽화의 서사적 기능 연구? 이 또한 Elliott에 따르면 삽화를 ‘서사’로 축소-변질 시키는 것. 전체 ‘텍스트’(Elliott은 이것이 둘을 같은 것으로 환원해서 싫어한다고 하지만)연구라는 것.) 이것의 이데올로기적 의미 등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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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시

'작가와문학사이' 이번주는 손택수 시인이다.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과 <목련전차>(창비, 2006),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이자 기대주이다(연배 자체가 젊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작년에 시집 <목련전차>가 나왔을 때 호의적인 평문을 여럿 보았음에도 시집을 구입해놓지 않았었는데, 올봄 목련이 다 지기 전에 다 읽어봐야겠다. 젊은 평론가 신형철의 리뷰(그는 "손택수는 문태준과 더불어 1970년대산 서정시의 젊은 령"이라고 평한다)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3. 31) [작가와 문학사이](12)손택수-사연을 품어 마음을 열다

손택수(孫宅洙)라는 이름 안에는 풍경이 있다. 강 흐르는 곳에 집 한 채. 택수야아, 하고 누가 부르는 소리 같은 것도 얼핏 들리는 이름이다. 1970년 전남 담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고 거기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98년에 시인이 되었고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송곳니로 삶을 꽉 물고 놓지 않는, (…) 생동하는 민중서사적 시인”(이시영)이라는 평이 있었다. 저 유년의 기억이 이 시인의 8할을 만들었던가 싶다. 동세대 시인들과 그의 차이가 그 어름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시란 무엇이고 시인이란 무엇인가. 예컨대 이런 식의 대답이 그의 것이다.

눈 내리면 호랑이 발자국 모양의 장갑을 끼고 산간지대를 어슬렁거리며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물정 모르는 이들은 멸종한 호랑이의 출현에 들뜰 것이다. 이것은 썩 유쾌한 파문이 아닌가(‘호랑이 발자국’). 반대 방향으로 박혀 있는 비늘을 역린(逆鱗)이라 한다. 이것은 “제 몸을 거스르는 몸”이자 “은빛 급브레이크” 같은 것일 텐데,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낙향하는 친구로 말하자면 이 역린의 희생자쯤 되지 않겠는가(‘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 그렇다면 시인이란 멸종한 호랑이 흉내를 내고 다니는 자일 것이고 시란 저 혼자 세태의 반대방향으로 뻗어 있는 역린 같은 것이겠다. 은빛 급브레이크 한 편 읽는다.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스윽, 제비 한 마리가,/집을 관통했다//그 하얀 아랫배,/내 낯바닥에/닿을 듯 말 듯,/한 순간에,/스쳐지나가 버렸다//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그야말로 무방비로/앞뒤로 뻥/뚫려버린 순간,//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방심(放心)’ 전문)

앞뒤 문을 다 열어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마음을 놓아버리고 드러누워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집도 사람도 모두 방심한 터라 제비가 묘기 한 번 부려보고 싶었겠다. 그 찰나의 체험에서 눈 밝고 몸 예민한 시인들은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도 보고 몸의 숨구멍들이 죄다 열리는 듯한 경이도 느낀다. 이런 시들이 있어서 메트로폴리스의 숨구멍도 가끔씩은 탁탁 열린다. ‘결심’이 아니라 ‘방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편히 내려놓아야 그 틈으로 시도 찾아들어오곤 하는 것이다.

그 방심은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여는 일이기도 하다. 열린 마음속으로 타인들의 곡절이 흘러들어온다. 그의 시들은 사연을 품고 있을 때 특히 아름다워진다. 추석날 고향에도 못 가고 화장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로 흐느껴 우는 안마사 김양 누나의 사연이 있고(‘추석달’), 목련 전차를 타고 간 동래온천에서 신혼 첫날밤을 보낸 어머니 아버지의 사연이 있고(‘목련전차’), 보험서류를 들고 찾아온 여자 후배의 입에서 문득 튀어나온 ‘자기’라는 말이 둘 다를 무안하게 한 사연도 있다(‘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작업을 걸면서’ 쓰는 시들이 아니라 ‘작업을 당하면서’ 쓰는 시들이어서 이리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좀 들어야 한다. 네 말이 내 모서리를 갉아먹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너의 사연을 먼저 수락하지 않고서는 내가 네게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서정시가 세상과 연애하는 방식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너의 사연을 받아 안지 않으면 내 말이 둥글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 손택수는 문태준과 더불어 70년대산 서정시의 젊은 본령이다. 방심한 자가 뜨는 사랑의 눈 덕분에 얻은 성취라고 믿는다. 그는 작업 당하는 데 선수다.(신형철|문학평론가)

두 번째 시집 『목련전차』(창비, 2006) 펴낸 손택수 시인

컬처뉴스(06. 06. 23) "시는 일상에 탁 끼어드는 생명의 박동"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 스윽, 제비 한마리가, / 집을 관통했다 / (…) /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 그야말로 무방비로 / 앞뒤로 뻥 / 뚫려버린 순간,” - 「放心」(『목련전차』, 창비, 2006) 중에서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에서 가족의 서사를 중심으로 깊은 서정을 뿜어냈던 손택수(36)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목련전차』(창비)를 펴냈다. 이번 두 번째 시집에서는 시인의 가족에서 시작됐던 서정의 시선이 도시문명의 속도에 뒤쳐지는 혹은 그것을 거부하는 남루한 삶들에 대한 연민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19일(월) 홍대 인근 카페에서 고봉준 문학평론가와 함께 만난 시인은 “그것은 자신을 향한 연민이기도 하다”고 털어놓는다. 2년 전 결혼과 함께 30년이란 세월을 함께 했던 ‘부산’을 등지고 일산으로 이사 온 그는 “부산이 내게 줬던 이미지가 근대라는, 도저히 내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도시공간이었는데, 일산이라는 공간은 더 그렇죠”라고 말한다.

‘부산’이 나에게 준 두 가지

흙냄새 풀풀 나는 전남 담양 ‘봉산’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항구도시 ‘부산’에 살다가 수도권 신도시 ‘일산’으로 주거지를 옮겨온 시인. ‘농경문화적 상상력’이 서정의 근간에 깔려 있는 시인에게 이 같은 공간들이 주는 의미가 적지 않아 보인다.

“공간이란 것은 제가 구체적 실존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예요. 때문에 흙을 만져보고 흙을 먹어봤던 저로서는 대지라는 공간이 최초로 세계와 밀착감을 느낀 곳이라 할 수 있는데요. 그곳을 벗어나 부산이라는 공간에 왔을 때 순환적인 시간 속에 있다가 탁하고 끊어져버린 듯한 공포감이 들었어요.”

부산역에 다다랐을 때 산꼭대기에 다닥다닥 모여 있는 집들을 보면서 ‘뭐 이따위 도시가 다 있나’라고 생각했다는 시인은 “근대적 시간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시인은 ‘촌놈근성’이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시인에게 ‘공간’이라는 것은 시인이 화두로 삼고 있는 근대라는 ‘시간’과 맞물려 있다. 때문에 근대적 공간으로서의 ‘부산’은 시인에게 근대라는 시간을 함께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시인에게 ‘부산’이 부정적인 공간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부산을 통해 “근대 도시공간이 놓쳐버린 신화체험과 오래된 미래, 가치적 미래를 향한 역방향으로의 진화와 더불어 시원을 향해 끝없이 퇴보하고 싶은 적극적인 퇴행의 욕망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흙에만 있었다면 미처 지나치고 말았을지도 모를 시원에 대한 지향점을 ‘부산’이 발견하게 해준 것이다. 시인이 이번 시집의 끝 시로 「미조항」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다. 부산은 시인에게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준 공간이기 때문이다.

“철길이 바다로 들어간다 // 19번 국도의 출발점, 표지판 속의 0km / 0을 갓 낳은 물새알처럼 품고 있는 어항 // 나는 길을 통해 늘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길은 나를 통해 매번 바다에 이르고자 했다 / (…)” - 「미조항」(『목련전차』, 창비, 2006) 중에서

달빛이 화장지를 들고 제비에게 쉬러오다

90년대 이후 전통적인 서정의 문법이 변하기 시작했다. 신서정 또는 서정의 진화라는 이름 하에 탄생한 이른바 미래파 시인들의 낯선 화법과 종잡을 수 없는 파격이 그것인데. 이러한 동시대 문학의 변화 속에서 재래적인 시 문법을 고집하며 일각의 흐름을 거스르는 지점에 손 시인이 있다.

“제 시의 근간을 ‘농경문화적 상상력’이라고 흔히 말하는데요. 그것이 정말 퇴행적이고 복고적인 것이 될 수 있지만 그런 형식을 통해서나마 지금의 질서, 지금의 속도에 대한 반성의 기제가 됐으면 하는 소박한 믿음이 저 나름대로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시집은 이러한 시인의 소박한 마음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소박하지만은 않다. 시인은 삶의 근간인 ‘집’과 ‘땅’을 통해 사람과 우주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는 단칸집이다 / 시름시름 기울어가던 처마 끝이다 // 진흙둥지 되바르며 보수공사에 여념이 없는 제비 한쌍 / 신접살림을 차렸다 (…) 이 허름한 적산가옥에 세를 들러 온 두 내외 / 덕분에 가난한 나도 / 이제는 어엿한 집주인이 된 셈인가 / (…) / 달빛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와서 하룻밤 묶었다 간 뒤다” - 「제비에게 세를 주다」(『목련전차』, 창비, 2006) 중에서
 
제비가 세를 든 ‘집’은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제비 덕에 집주인이 된 ‘화자’와 광활한 우주의 한 지점에 있는 ‘달빛’을 연결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열림은 모든 세계를 향해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 / 환하게 뚫려”(「화엄일박」)있는 ‘구멍’과도 연결된다.

오늘이 그날 같고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생명감을 잃고 살기 쉬운데, 그 일상의 흐름의 중간에 탁 끼어들어서 순간적으로 생명의 박동음에 가 닿게 하는 시적 순간이 있잖아요. 아마도 저에게는 신화적 관심이 바로 그것의 기제가 되는 것 같은데, 그것을 집과 몸과 우주와 연결시켜 얘기한 것 같아요.”

 

 

 

 

 

 

 

 

 

 

잘 쓴 시가 아닌 나의 시 쓰고 싶어

시인에게 향후 계획을 물었더니 굉장한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저도 몰라요”라는 말이 되돌아온다. “시 한편을 쓸 때도 이 시가 어떻게 끝맺음을 할지 모르거든요. 그러니 제 시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더더욱 모를 일이죠”라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답변이 내심 미안했는지 “다만 모험을 향해, 황무지를 향해 유배를 내리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하얀 종이 앞에 서면 늘 막막하거든요. 그 막막함이 나를 깨어있게 하고 살아있게 하는 것 같아요”라고 덧붙인다. 

시인에게 문학은 “스스로를 버티게 하는 힘”이라고 했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의 방편으로서의 힘이 아니라 그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근거로서의 힘이다. 때문에 시인은 “시를 잘 쓰고자 하는 욕망은 버리고 나의 시를 쓰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마음을 다잡는다.(위지혜 기자)

07. 0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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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문화연구에 있어 문화유물론의 의미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 현대문화론선 19
앤드류 밀너 지음, 박거용 옮김 / 현대미학사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1.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의 지식사회는 '현장'과 '현장성'을 잃었다. 서구에서 이식된 이론의 탈피를 주장하고, 실제로도 그에 부응하는 일정한 움직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같은 주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론 중 하나가 역시 서구는 아니더라도 다분히 서구적인 '탈식민이론'이라는 것이 아이러니이긴 하다. 어쨌든 탈식민의 가장 구체적인 실천방법은 액면 그대로의 '민중 속으로(v narod)'일 테지만 구체적인 현장 없는 '민중 속으로'란 말만큼 추상적인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1980년대 민중운동의 퇴조 이후 문화 혹은 문화운동은 실천적인 담론으로 수렴되기 보다는 민중운동, 변혁운동의 현장을 상실한 운동가들의 새로운 발판이 되었다. 좋게 말해서 발판이지 나쁘게 말하면 퇴기들의 집합소가 된 셈이다.

어쨌거나 당대를 이끌었던 '과학적 유물론'의 퇴조 혹은 한계상황의 수렴을 이룬 여러 분야의 운동 가운데 하나가 문화운동, 문화연구였던 것이다. 영국에서 출발한 문화연구가 언제나 현장성을 강조해온 것 역시 이것이 하나의 학문적 체제 안에 포용되기 보단 그것을 포월하고자 했던 것이 당대 문화연구자들의 이상이었을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체제의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피할 수 없는 딜레마에 대해 고민했다. 이 딜레마는 뤼시엥 골드만이 루카치의 개념을 적용하여 소설을 "문제적 인물이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서사"라고 정의 내리는 것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승리를 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사적 전진은 특수한 성질을 갖는 과정인바, 그 특수성은 역사상 최초로 인민대중 자신이 모든 지배계급에 맞서서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 의지는 현존하는 사회를 넘어서, 그 외부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반면, 기존 질서와의 일상적인 투쟁 속에서만, 즉 기존 질서의 틀 내에서만 발전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로자의 말은 체제개혁이든 혹은 체제변혁운동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근본적 딜레마, '부르주아 사회에서 부르주아와 투쟁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부르주아적인 형식에 기댈 수밖에 없다'에 대해 말한다. 1980년대 변혁운동의 근본적인 쇠퇴에 대한 외부적 요인은 세계체제의 변화 등 다양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으나 이후 운동의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사실 위에서 인용한 로자의 말에서 찾아야 한다.

2.
불행히도 아직까지 한국에서의 문화연구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만큼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뜻이고, 그 개념이 일반인에게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문화유물론"이란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서도 이와 같은 절차들이 요구된다. 문화유물론을 거칠게 정의하자면 문화연구의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이미 수차례 전술한 적이 있는 것처럼 문화연구란 영국의 좌파 문학비평가였던 레이몬드 윌리엄스(R. Williams)가 소련에서 스탈린주의와 동구침공 등의 역사적 상황과 1960~70년대 영국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인간의 자기실현 가능성(해방)을 제약하는 강력한 힘(권력), 통제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출발한 것이다.

그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이같은 억압적 구조를 완벽하게 재생산하며 진화해나가는 삶의 총체적 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를 고민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문학이론에 있어 초기 이론적 자양분 역할을 했던 마르크시즘을 통해 자신의 시대 상황을 분석하고, 대안을 도출할 수 있는 문화이론으로서 제기한 것이 문화유물론(Cultural Materialism)이다. 문화유물론은 마르크스의 '생산' 개념을 문화에 부여한다. 문화는 문화적 의미 생산의 공간이며, 억압적 구조가 재생산되는 의미 생산의 원천이고, 다시 이를 거부하고 새로운 대안적 삶의 양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다. 마르크스의 주장 가운데 가장 의미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많은 논란의 요소는 이른바 '경제결정론'이다. 누구나 들어보았음직한 이야기들, '인간의 의식, 관념, 세계관은 물질적 토대에 의해 결정된다'사실 이 명제는 오늘날 마르크스주의를 비난하는데 있어 가장 유용한 부분이지만, 동시에 마르크스가 인문학 영역에 는 물질적 토대에 의해 상부구조가 결정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이기도 하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를 가장 중요한 이론가로 자리매김하는 원천이다.(나 같은 사람은 지금까지도 '이 말이 근본적으로 뭐가 틀렸는데?' 라고 생각한다. 흐흐) 여기에 나의 생각(어쩌면 이건 나의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을 조금 곁들이면 마르크스의 주장,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말 자체가 틀렸다기 보다는 이것을 지나치게 굳은 개념으로 받아들인 이들, 혹은 상호적인 것이 아니라 고정된 것으로 오해하도록 만든 마르크스의 오류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잘 아다시피 마크르스가 말한 상부구조는 철학, 사상, 문화, 예술, 종교, 법, 제도 등 인간이 사유하는 방식, 문화행위 전반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와 같은 인간의 의식은 그 시대 생산양식을 반영한 것이란 말이다.

문화유물론이란 이때의 '반영'이란 개념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이를 해체하여 재구성한 이론이라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상부구조가 수동적이고, 정태적인 굳은 것이 아니라 생산양식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이와같은 영향의 주고 받음을 통해 인간의 의식이 결정된다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R. 윌리엄스는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명제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로 전환시켰다. 그는 우리의 의식이 사회적 과정(실체적인 영역)을 통해 결정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삶을 만들어가고, 역사를 변화시켜가는 근본적인 추동력으로서 물적 토대를 인정했다.(말하면 말할수록 꼬인다는 생각도 있지만, 다시 말해 문화유물론에선 문화 - 언어, 사상, 예술, 체제, 경제, 이데올로기 등등 -를 이해할 때 물질적 실체를 가진 것으로 정의하고,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과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3.
문화연구는 스스로를 정의하는데 매우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 이유는 문화유물론이란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평소 우리가 매우 이질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문화와 유물론을 결합시키는 것처럼 영국의 문화비평 전통과 마르크스주의라는 매우 다른 두 가지 전통이 문화연구라는 한 지붕 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문 아닌 학문이 매력적인 까닭은 이것이 그간 학문적이든, 혹은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다른 어떤 영역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불편한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요새 유행하는 말을 빌어 '통섭'이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부분을 개별적으로 이해하고, 연구하고 있는데, 근본적인 부분에서 접근하자면 우리는 인간이 의미 생산을 통해 자기 실현을 해나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노동, 여성, 소수자, 생태 등 많은 영역의 운동들이 개별화되고, 파편화되어 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많지만 미립자처럼 분절되어 있는 이들 사이를 유기적으로 연결해낼 만한 영역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문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연구는 스스로를 학문이 아닌 실천담론으로 규정하는 희한한 이론체계인데, 그 까닭은 문화연구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비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실천행위로서의 문화(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 같은)에 양 다리를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앞의 이야기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딜레마는 오늘날 문화연구 영역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1990년대 초중반 우리 사회의 지식담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은 요즘에도 가끔씩 TV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이른바 '문화평론가'라는 존재들이다. 1980년대 지나치게 정치적이어서 도리어 비정치적이었던 운동들이 퇴조하면서 '문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던, 그들은 서태지와 오렌지족으로 상징되는 '신세대담론', '소비담론'의 주역들이었다. 크게 보았을 때 현재도 이 같은 흐름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1997년 IMF위기 이후 한 마리 제비가 되어 봄을 알렸던 철(?) 없는 문화평론가들은 그 겨울에 다 얼어죽어야 했지만, 상당수는 살아남아 아카데미의 품 안에 깃들었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문화연구에서 문화유물론을 빼면, 문화연구가 이데올로기적인 불온함을 상실하는 순간, 이에 대한 고민이 없는 문화연구는 다만 문화산업, 문화정책, 문화콘텐츠(그렇다고 이 영역들이 반드시 그렇다는 뜻은 아니지만)를 위한 도구, 무뇌아적 학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문화가 곧 정치다." 그것이 문화유물론의 기본 정신이기 때문이다.(다행히도 지난 겨울의 위기 이후 일부는 정신을 차렸고, 일부는 여전히 정신이 없다. 그러나 원래 학문의 세상이란 것도 바깥 세상과 그리 다를 바 없다.) 앤드류 밀너의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는 이론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읽어내기 쉽지는 않겠지만 문화연구에 대한 관심이 있는 이라면 한 번쯤, 아니 두 번쯤 충분히 숙독해둘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는 문제는 어떻게 잃어버린 현장성을 되찾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과거의 운동이 '민중 속으로'였다면 오늘의 운동은 역으로 민중이 나에게 오도록 만들거나 아니면 내가 곧 민중인 상황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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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가끔 되새기게 되는 말 - 알튀세르

나는 지성의 회의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가 인용한 소렐의 말에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나는 역사에서 의지주의를 믿지 않는다.
그 대신 나는 지성의 명철함을 믿으며,
또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들의 우위를 믿는다.
이러한 우위 덕분에 지성은 대중운동들과 함께하며,
나아가 무엇보다도 대중운동들이 지나간 과오들을
다시 범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대중운동들이
역사의 진행방향을 바꾸는 것을 지성이 돕는다는
약간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점에서 그렇고 또 이 점에서 그럴 뿐이다.
- 루이 알튀세르(1985)

가끔 홀로 되새기곤 하는 말이다.
미친 놈의 말을 미친 놈이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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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잘코군 > 서울대가 하버드가 못되는 이유(이광일)

2007. 3. 30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03/h2007033018031124380.htm


[메아리] 서울대가 하버드가 못되는 이유


가끔 어디 어디 선정 세계 대학 순위라는 게 언론에 보도된다. 예를 들어 요전에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발표한 '세계 100대 글로벌 대학'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영국의 더 타임스도 하고, 시사주간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도 한다.

그 때마다 베이징대도 순위에 들었는데 한국 대학은 하나도 못 들었네, 200위권 밖으로 밀렸네 하는 개탄이 나온다. 유달리 등수에 집착하는 한국인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대학 순위를 새삼 거론하는 이유는 최근 서울대를 시작으로 각계에서 "정부의 3불(不) 정책이 대학 경쟁력 확보에 암초다"라는 주장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을 뽑을 때 본고사도 보이지 못하고, 지망생의 출신 고교를 등급화해서 차별대우하지도 하지 못하고, 기여입학제도 못하는 바람에 대학의 경쟁력이 가차없이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대학 자율을 저해하는 규제 조치이니 누가 봐도 바람직할 것은 아니다.

● 경쟁력 약한 게 삼불 탓?

그런데, 대학의 경쟁력이란 게 무엇일까? 그게 뭐길래 3불 정책이 그토록 방해가 될까? 대학의 순위를 매기는 기관들의 기준을 보는 것이 좋겠다. 요약하면 해당 학교 교수나 연구원의 논문이 권위 있는 전문지에 인용된 횟수, 외국인 교수ㆍ학생의 비율, 교수 1인당 논문인용지수, 교수 1인당 학생 비율, 도서관 장서 규모 같은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어디에도 신입생의 우수성이라는 항목은 없다.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정도의 우수성은 기본이므로 특별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낫다는 서울대조차 이런 순위에 별로 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3불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심하게 말해서 신입생이 우수하지 않아서이다.

그리고 국가가 3불이라는 이름으로 우수한 신입생을 뽑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하버드대 총장이나 옥스퍼드대 총장에게 해 주면 뭐라고 할까? 아마 What are you talking about?(무슨 소리요?)이라고 할 것이다.

연구비를 키우고, 우수 교수를 어떻게든 영입하고, 무능 교수와 불량 학생은 쫓아내고, 특화할 분야에 집중하고, 석ㆍ박사 과정 학생의 연구를 독려하고, 기업과의 연계를 극대화하고, 특허를 많이 내고 하는 노력에 전력투구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이제 갓 들어와서 4년 동안 키워야 겨우 써먹을까 말까 한 애기들한테 대학의 경쟁력 책임을 몽땅 갖다 씌우는 것이다.

비유가 약간 부적절하지만 솜씨 없는 목수가 연장 탓하는 격이다. 도편수나 소목장쯤 되면 연장을 스스로 만들어 쓰는 법이다. 하버드대생을 만드는 것은 하버드대인데 우리는 서울대생이 서울대를 만든다.

하기야 미국의 경쟁력 높은 대학들도 우수학생을 뽑는 일을 중시해서 많은 인력과 노력을 투입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 우리와 다르다. 미국 대학에서 입학 전형 일을 했던 재미동포 안젤라 엄씨의 분석에 따르면 대개 하버드대에 응시한 고교 수석 졸업생의 80%가 낙방한다.

우리나라의 수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SAT 만점자가 아이비 리그 대학 입시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숱하다. 본고사 같은 것은 아예 없다. 왜 그럴까? 평범한 우수생이 아니라 특출한 학생을 뽑으려 하기 때문이다.

● 하버드와 다른 점 알아야

100점 만점 시험에서 100점과 90 몇 점은 별 차이가 없다고 보고 학생의 특출한 자질, 열정, 헌신, 성실성, 인간적 성숙도 같은 덕목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대에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 부어도 하버드대처럼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교육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야 자체가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다. 제 못난 것이 3불 때문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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