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한국의 지성 ‘금서’가 키웠다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한국의 지성 ‘금서’가 키웠다
[경향신문 2007-04-29 18:12] 

◇ 국내서적

지식인들이 뽑은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외 저술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이른바 ‘금서목록’에 올랐던 책들이 주류였다. ‘해방전후사의 인식’(23명)과 ‘자본론’(18명), ‘전환시대의 논리’(15명)는 대표적인 금서였으며 ‘태백산맥’(10명)은 불과 2년 전까지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계류돼 있었다. 79년 10·26 사태를 열흘 앞두고 한길사에서 출간됐던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은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한국현대사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준 교과서였다.

송건호·오익환·백기완·진덕규 등이 참여해 ▲해방의 민족사적 의미 ▲분단의 배경과 과정 ▲친일파 문제를 다뤘다. 대다수 응답자들이 “대학시절 지하 이념서클의 의식화 교재로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현 시점에서 보면 이 책 내용은 상식적이다. 그러나 발간 당시는 상식이 불온하던 시절이었다.

김언호(한길사 사장)는 “애초 송건호 선생과 책을 기획할 때는 ‘한 5000권 나가려나’ 예상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40여만권이 나간 초특급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책에 실린 생각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였어요. 진덕규, 임종국 같은 필자들도 대부분 이데올로기와 관계 없는 분들이었죠. 그런 책인데도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1차적으로 독자들이, 즉 시대가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땐 정말 대단했어요. 10·26이 터져 책이 판금될 때까지 열흘 만에 4000권이 나갔으니…. 판금됐다고 그 책을 안 읽었겠어요. 판금시키면 오히려 복사본이 더 많이 나돌던 때였죠.”

해전사가 한국현대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줬다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깨우쳐 준 책이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으로 드러난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한 본질을 폭로하고, 중국사회주의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렸다. 냉전 이데올로기 교육을 받았던 대학생 김동춘(성공회대 교수)으로 하여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줬으며 김세균(서울대 교수)이 “밤 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던” 그 책이다.

이 책은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의 ‘우상과 이성’(2명)과 함께 “사회과학도로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 준 고마운 책”(신광영 중앙대 교수)으로 기억되고 있다. 신광영은 “이 저술로 인해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이 가능함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조정래(소설가)의 ‘태백산맥’에 대해 이광일(성공회대 교수)은 “지식인 사회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준 책은 태백산맥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195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냉전의 족쇄를 깨는 데 일조했다”고 평했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소련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항한 우파-전통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 보편성을 획득한 솔제니친이 있다면, 한국에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한 좌파-민족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한 조정래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복거일(소설가·미래문화포럼 대표)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태백산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2000년대에 나온 책으로는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임지현(한양대 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3명), 임지현·권혁범·박노자·임은실 등이 함께 쓴 ‘우리 안의 파시즘’(2명)은 민족주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문제 제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 해외서적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해외 저술로 가장 많은 지식인들이 꼽은 ‘자본론’(18명)은 1980년대 후반 과학적인 변혁이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 첫 한글 번역본이 나온 87~89년 이전에도 일본어 번역본 등의 형태로 은밀하게 유통됐지만 본격적으로 학생들 손에 쥐어진 것은 87년과 89년 강신준(동아대 교수)과 김수행(서울대 교수)이 잇달아 번역본을 내면서부터이다. 고병권(수유+너머 대표)은 “87년 이후 첫 10년간이 지식사회가 마르크스주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그 후 10년간은 마르크스주의에 회의하거나 그것을 전환시키려 시도했던 과정이 아니었나 한다”고 말했다.


87년 민주화 직후 서울대 교수 김수행을 통해 자본론 1~3권을 번역해낸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자본론은 지금도 해마다 1000여권씩 나가는 스테디셀러”라며 “다만 책의 결론에만 줄 치는 운동권식 독법보다는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논리를 따라가는 자본론 읽기가 더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81년 미국에서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6명)은 번역도 되기 전에 널리 읽히며 냉전체제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 현대사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 중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종문(한신대 교수)은 “우리를 옥죄어 온 냉전체제를 뒤집어보게 해 준 의미를 높이 살만하다”고 했다. 김원(서강대 연구교수)은 “냉전적 시각, 빈약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한국현대사 해석을 하던 한국학계에 ‘지적인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8명)은 98년 서울대 교수인 한상진·박찬욱에 의해 번역돼 한국 사회에 ‘실용주의’와 ‘중도론’뿐만 아니라 ‘사회적 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됐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얘기되며 대안적 진보이념을 갈구하던 시점에 소개돼 큰 영향을 미쳤다. 진보진영은 공개적으로는 기든스를 비판하면서, 자기 방에서는 몰래 정독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책이 소개된 90년대 후반을 거쳐 최근 와서 대안적 진보이념으로 사회국가, 사회투자 국가, 사회서비스 국가, 사회연대 국가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거의 모두 기든스식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일종의 ‘거명되지 않는 영향력, ‘스텔스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조효제는 “푸코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저술은 권력과 담론에 관한 인식 전환의 계기를 줬다”면서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한국적 문제의식의 지형에 맞지 않았음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설적”이라고 지적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로마인 이야기’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등 대중 서적들이다. 김만흠(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대중사회 수준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소설, 성공학 번역서들이 미치는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전영평(대구대 교수)은 “지식인 집단보다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측면으로 파악한다면 해리포터가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일 것”이라고 말했다.

〈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용자 분석
데니스 맥퀼 지음, 박창희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199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용자 분석'에 대해서 90년대까지의 기존 논의들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보려면 참고할 수 있는 책. 그러나 현대의 '뉴미디어'환경이 이 책이 구상되고 쓰여진 90년대 초 중반과는 확연히 다른 면들이 꽤 있어서, 현대 뉴미디어 환경 속의 수용자 분석에는 현장감이 떨어진다.

번역도 그리 매끄럽지 않으나, 일종의 '수용자 분석' 교과서 내지 연구사검토로 참조한다면, 그렇게 나쁠 것도 없다. 보다 두껍고 실제 연구의 예들도 많이 들어있는 '수용자 분석' 교과서(?)가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 수용자 형성과 지속성의 원리

5.1 미디어 이용의 이유

수용자 측면 - 개인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미디어 측면 -내용, 표현, 환경 등의 어떠한 요인들이 수용자의 주의력을 끌고 유지하는가

개인적인 동기에 관한 질문은 미디어 생산물과 내용에 관한 언급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두 측면간에 정확한 구분을 할 수 없다.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미디어 경험은 특이하고 다양하며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5.2 수용자 형성에 대한 구조적 접근

미디어 이용이 사회 구조와 미디어 구조의 일정한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미디어 이용의 구조적 모델 111p)

한 개인이 특정한 만족을 얻기 위하여 동기가 부여되었을 경우(예를 들어, 스포츠 뉴스의 특정한 항목), 미디어 구조에 따른 영향을 덜 받는 반면, 미디어에 관심이 적은 수용자는 특정한 내용과 그 구성에 따라 영향을 더 받는다.

미디어 체계는 사회에 주어진 사실들(예를 들어,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지리적 조건들)을 반영하면서 사회적 배경에 관한 요인들과 부분적으로는 특이하고 우연적인 것들에 의해 결정되는 수용자 요구에 반응한다.

*주체와 구조. 어느 쪽으로만 강조해도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나온다. ‘경향성’이라는 것으로 발화해야 한다. 혹은 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어떠한 효과를 발생시키는지를 물어야 한다. 설명력, 파급력, 설명할 수 있는 분야 범위.

5.3 기능주의적 모델: 이용과 충족 접근

중심 문제는 사람들이 미디어를 <왜> 이용하며 무엇을 위하여 이용하는가 하는 점이다. 기능주의 사회학은 미디어를 결속, 문화적 지속성, 사회 통제, 공공 정보의 광범위한 유통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욕구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또한 개인의 지침, 휴식, 적응, 정보 정체성 형성 등과 같은 관련된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미디어를 이용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5.3.1 재발견된 이용과 충족

기본적 가정

1. 미디어와 내용 선택은 이성적이고 특별한 목표와 만족을 위해서 이루어진다(수용자는 능동적이고 수용자 형성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2. 수용자 구성원들은 동기에 따라 표현할 수 있고 개인적이고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환경에서 나타나는 미디어와 관련된 욕구를 인식하고 있다.

3. 개인적 유용성이 수용자 형성에 있어서 미학적이거나 문화적 요인보다도 더 중요한 결정요인이다.

4. 수용자 형성과 관련된 대부분의 요인들(동기, 인지되거나 획득된 만족, 미디어 선택, 배경 변수들)은 원칙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

5.3.2 비평

이러한 접근이 내용에 대한 특별한 형태, 예를 들면 정치적인 내용, 뉴스나 에로물에 대한 선별적인 주의력을 가장 잘 설명한다 하더라도, 미디어 선택과 이용에 있어 성공적인 예측이나 인과관계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일반적으로 미디어에 대한 태도와 미디어 이용의 실제적인 행동간에 연관성이 별로 없으며, 그러한 관계의 예측 방향에 있어서도 불확실하다.

5.3.3 기대-가치 이론

미디어 이용에 있어 개인적인 동기에 관한 이론적 본질은 미디어가 과거 경험을 기초로 하여 수용자의 잠재적인 구성원들이 기대하는 보상을 제공한다는 생각이다.

5.3.4 미디어 이용의 비기능주의적 대안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의 의미 있는 것으로 미디어 이용을 설명하려고 시도.

5.4 수용자 선택의 “실용적” 모델

5.4.1 “수용자측” 요인들

사회배경과 환경, 개인적 속성, 미디어와 관련된 욕구, 개인적 취향과 선호, 여가시간 동안 미디어 이용에 대한 일반적인 습관과 특정한 시간에 이용하는 수용자 유효성, 유효한 선택과 소유한 정보의 양 및 종류에 대한 인식, 이용의 특정상황, 기회

5.4.2 “미디어측” 요인들

미디어 체계, 미디어 규정 구조, 이용 가능한 내용 선택, 미디어 선전, 적절한 시간과 표현

5.5 취향, 선호 그리고 관심

수용자는 개인적 선호의 뚜렷한 특징에 따라 선택. 이는 정확하게 설명될 수 없으며, 사회배경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특이하고 예측이 불가능.

5.6 수용자 흐름

수용자의 “흐름”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세가지 의문

1. 한 프로그램에서 즉시 그 다음 프로그램으로의 수용자 일부분이 이동하는 <승계 효과>

2. 매일 혹은 매두 동일한 시청자가 연속물이 또 다른 에피소드를 시청하는 <반복 시청>

3. 시청자가 한 채널의 프로그램을 불균형하게 시청하는 채널 <충성도>

5.7 결어

134p 참조. 결국 확실한 것은 없고, 수용자는 파악하기 힘들고, 따라서 연구하기도 힘들다. 기존 연구들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하다. 라는 소리.

6. 수용자 실천: 미디어의 사회적 이용

6.1 미디어 이용과 일상생활

“수용자”가 문화적, 사회적인 실천에 대해 잘 알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 대중 수용자가 조작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시각에 반대, 수용자 주의력을 얻음으로써 그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개념에도 반대.

6.2 미디어 이용의 잘못된 모델

미디어 초기 형태는 특정 사회 집단의 생활방식(직장, 가정, 여가활동)에 적합하도록 그리고 잠재적인 수용자의 열망과 태도에 부응하여 발전.

6.3 미디어 이용의 공적, 사적 영역

어떠한 조건하에서든지 수용자가 된다는 것은 광범위한 사회생활 속에서 의미를 공유하는 한편, 다른 상황에서 친구 및 가족원의 소집단에 의해서 완전하게 개인적이거나 혹은 공유되는 경험을 의미함. 중요한 것은 수용자 경험의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공적이거나 사적으로써의 의미에 대한 정의.

6.4 하위문화와 수용자

미디어 이용이 하위 집단의 정체성을 나타내며 강화하는데 중요한 역할.

6.5 생활방식

“생활방식”은 일상적인 태도와 행동을 나타내는 일부분. 사회적 지위의 변수, 행동(미디어 이용과 다른 여가시간 그리고 소비실천 등), 태도, 취향 그리고 가치에 관한 광범위한 것들을 포함. 생활방식은 미디어 취향이 사회계급과 교육에 따라 결정된다는 가정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제공. 생활방식은 자기가 임의로 선택한 행동이자 미디어 이용.

(* 이 ‘임의’라는 것. 현상을 어떻게 포착하고 있는가? 똑같이 이를 상당부분 경제/문화 자본에 따른 아비투스 문제로 볼 수 있지 않은가?)

미디어 이용에 대해 사회적, 심리적 기원에 관한 연구 결과로써 사회 공동체적 활동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는 유형: 한가로운 주부, 외향적인 활동가, 자제하는 활동가, 노동계급의 야심가. 태도와 신념의 형태에 따라 미디어 이용을 적절히 구별했으며 또한 중요한 성차이를 보여줌. (*실제 그래서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는 일언반구도 없음)

6.6 소수민족과 미디어 이용

6.7 성별화된 수용자

6.8 사교성과 미디어의 사회적 이용

미디어 이용 행위에 지나치게 중독된 수많은 개인들이 실제로 존재하지만, 매스미디어 이용의 결과로서 사회적 접촉이 감소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음.

어린들의 텔레비전 시청과 사회적 상호작용간에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있음.

수용자가 되는 것이 ‘비사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교적’인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 옳다.

(*뭔 소리? 그러니까 매스미디어에 의해 ‘자폐된’ 개인들이 존재는 하지만, 이들이 ‘매스미디어’ 이전에도 어짜피 그럴것인 사람들이고, 이 매스미디어 때문에 사회적 접촉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라고? 노동시간 단축은 이제 매스미디어 ‘이용시간’으로 환원된 것? 통시적인 분석이 아쉽다. 애들이 매스미디어를 매개로 친구먹는다는 것. 그럼 매스미디어 전에는 어떻게 친밀했고, 더 친밀했는지 등을 따져봐야지, 이를 비역사적으로 있는 사회구조 자체를 전제하고 분석하는 것은 ‘매스미디어’의 효과를 따지기 힘들게 한다. 노동시간 단축과 교육질의 향상에 따른 여가시간과 창조적 활동에의 가능성.....

다른 요소들에 대한 분석이 없다. 답답하다. 나열하되, 입증하려는 시도는 조금도 없다. 그냥 이런저런 연구들이 있었다로 밀어붙임.)

6.9 수용자 수용과 의미 협상

6.10 사회적 병리현상으로서의 미디어 이용

6.11 미디어 이용의 규범적 틀

미디어에 관한 규범적 관심은 원하지 않은 영향력(특히 청소년과 폭력, 성)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생기고, 또 미디어 이용 자체가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미디어에 대한 죄의식은 여가와 기분전환보다는 일을 중요시하는 문화 속에서 사회화 과정에 있어 이해할 수 있는 결과.

(* 또 이런식으로 끝.)

6.12 내용을 위한 규범

6.13 결어

*이 또한 연구가 쉽지 않다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미디어 이용과 내용선택에 있어 개인적인 가치에 대한 영향력은 복잡하고 절대적이며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연구를 통하여 알기는 쉽지는 않다.

(결국 수용자 분석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위해 이 책은 쓰여졌다. 그리고 수용자는 단순한 바보가 아니라는 것은 계속 주장하기는 한다. 그래, 이 책의 ‘수용자’인 나는 바보가 아니라서 이 책을 읽으니까 열받는다.)

*미디어란 무엇인가?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등) 미디어는 media 매개이다. 어떤 작용을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전달하는 매개자(체). 그러면 모든 것은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내 육체 또한 ‘나’에게 미디어이고, 상대방의 육체도 나에게 미디어로서 작용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lastmarx >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
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송병헌 외 옮김 / 책세상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1. 로자와 레닌

일주일 전에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책세상, 2002)를 읽었다. 그리고 곧바로 두꺼운 『레닌』(시학사, 2001)을 집어들었고 일주일만에 완독했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초에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두 혁명가의 삶과 사상을 연달아 살피다보니 잠시 나의 감각도 백여년 전으로 돌아간 듯 하다. 그때의 사상가들은 지금 우리보다 불행했을까. 그들이 싸워야했던 적들과 배신자들은 지금의 우리의 경쟁자들보다 상대하기가 수월했을까. 훨씬 세련되어보이고 숫적으로도 늘어난 베른슈타인의 후예들이 맑스와 맑스주의를 조롱하는 이 시대에도 로자나 레닌같은 열정과 확신을 지닌 투사들은 여전히 생겨나고 조직하고 반란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던 로자와 ‘국가권력’을 장악했던 레닌에게 그것은 타도와 획득의 대상이며 시기와 방법의 문제였지만, 우리에게도 그러한 관점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로자가 레닌에 비해서 정치적 수완이 부족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혁명적 순수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레닌처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당파의 권력을 성장시키는 것을 로자가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지 않았기에 그들의 명암이 갈렸다고 생각한다. 레닌의 시신은 통치이데올로기의 상징물로 전시되었지만 로자의 시신은 강물 속에서 썩어갔다.  

2. 로자와 베른슈타인 

1871년에 태어나 1919년에 살해된 Rosa Luxemburg는 『Sozialreform oder Revolution?』(1899)로 Eduard Bernstein의 주장들을 비판한다. 이 책의 1부는 <사회주의의 여러 문제(베른슈타인, 1896-97)>에 대한 비판을, 2부는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과제(베른슈타인, 1899)>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1908년에 재판을 찍었고 로자는 몇몇 구절들을 고쳤다.  

로자는 “임금체계를 폐지한다는 최종 목표(10쪽)”를 갖고 있으며,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폐기함으로써 사회주의적으로 분배하고자 한다”(84쪽)라고 주장하고 “자본주의의 종양을 제거”하여 그 생명을 연장시키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제거하는 것”(95쪽)을 목적으로 한다. 로자의 생각은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전체적으로 해체해야 한다”(99쪽)는 주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에 반하여 로자가 파악한 베른슈타인의 소망은 “자본과 노동의 적대 완화(23쪽)”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자본주의 사회개혁으로 대체하는 것(101쪽)”이다. 둘 다 “사회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던 당원동지(?)였지만 로자와 베른슈타인은 전혀 다른 목적, 그에 따라 전혀 다른 방법으로 무장된 사상가들이다.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비판은 가능한 것일까. 그리하여 비판은 상대를 설득하여 우리 편으로 만들려는 차원이 아니라 독일사회민주당 내에서 비판 대상을 추방하기 위하여 진행된다.  

베른슈타인의 고민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과 로자의 비판에 동의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너무 먼 거리가 있다. 하여간 로자처럼 명민하고 날카로운 비판자를 맞이한 베른슈타인이 가엾게 느껴지지만, 그 후로 로자가 아닌 베른슈타인의 후예들이 더욱 번성했다는 것이 그들의 위안일 것이다.  

3. 인용 노트 

이론적 논쟁이 결국 ‘학자들’의 일이라는 주장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가장 저열한 모욕이며 악의에 찬 비방이다. … 현대 노동운동의 전체 힘은 이론적 인식에 근거한다. - 13쪽 

노동조합은 임금 법칙을 철폐시킬 수 없다. 노동조합은 최선의 경우에라도, 특정 시점의 ‘정상적’ 한계를 자본주의적 착취에 부과할 수 있을 뿐이며, 결코 그 착취 자체를 점진적으로라도 철폐할 수 없다. - 39쪽 

분명 민주주의의 형식은 전체 사회의 이해관계를 국가 조직 속에 표현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반면에, 그것은 여전히 단지 자본주의 사회, 즉 자본가의 이해관계가 결정적으로 지배하고, 그 이해를 표현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형태에 있어서는 민주주의적인 제도일지라도, 내용에서는 지배계급의 도구가 된다. - 51쪽 

팔랑스테르Phalanstere 체제를 건설함으로써 지구상의 바닷물을 모두 레모네이드로 바꾸겠다는 푸리에Charles Fourier의 생각은 매우 공상적이다. 그러나 쓰디쓴 자본주의의 바다에 사회개량주의의 레모네이드 몇 병을 넣어 자본주의의 바다를 사회주의의 단물로 바꾸겠다는 베른슈타인의 생각은, 더욱 어리석은 것이며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덜 공상적이지 않다. - 53쪽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제껏 사회 개혁은 어떤 전술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그 결실은 공허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기 때문에, 다음에 이어질 논리적인 결과는 사회 개혁에 대한 환멸이다. - 57쪽

한마디로 베른슈타인의 적응 이론은 개별 자본가의 사고방식을 이론적으로 일반화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표현할 때 이 이론은 부르주아 속류 경제학의 본질이고 특징적인 표현일 뿐이지 않은가? 이 학파의 모든 경제적 오류의 근거는 바로 개별 자본가의 눈을 통해 본 경쟁이라는 현상을 자본주의 경제 전체의 현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 63쪽

 마르크스가 발견한 추상적-인간 노동은 결국 그것이 발전하면 화폐라는 형태를 띨 뿐이다. - 75쪽

 … 이러한 종류의 사회주의를 바이틀링이 이미 지난 50년 전에 얼마나 더 많은 힘과 정신과 명예를 가지고 대변했던가! 그러나 그 천재적인 재단사는 아직 과학적 사회주의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오늘날 {누군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조각처럼 조각난 생각을 운 좋게도 다시 기워 맞춰서 독일 프롤레타리아에게 과학의 마지막 단어로 제공할지라도, 그는 기껏해야 그저 재단사에 불과할 뿐, 천재적인 재단사는 아니다. - 86쪽

사회주의 운동의 운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민주주의 발전의 운명이 사회주의 운동에 연결되어 있다. - 91쪽

마르크스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평화롭게 실행하는 것이지, 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자본주의 사회 개혁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 101쪽

4. 그밖에

로자와 껄끄러웠던 레닌은 1922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독수리는 때로는 닭보다 낮게 날지만, 닭은 결코 독수리의 높이에 이를 수 없다. 그녀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독수리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150쪽) 이미 『국가와 혁명』을 통해 맑스의 생각에 더욱 근접한 레닌은 카우츠키의 “배신”보다 로자의 “결함”을 더 소중하게 평가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녀의 결함”은 무엇이었을까? 

스파르쿠스단은 반란에 실패하고 그 지도자들은 살해당했다. 반면에 볼셰비키는 권력을 장악했다. 니콜라스 황제와 그 가족들은 이파테프 하우스에서 갇혀 지내다가 1918년 7월 18일 지하실로 끌려 내려가 모조리 총살당했다. 부부와 네 명의 딸과 아들과 여러 하인들까지. - 『레닌』(648쪽, 시학사) 그 일이 있기 30여년 전, 레닌의 형 알렉상드르 울리야노프는 1887년 5월 8일 교수형을 당했다. 테러에 반대하고 폭력혁명에 찬성한 사람들은 테러에 의해 죽었고, 폭력혁명을 위해 테러도 불사한 이들은 그들의 권력을 유지했다.  

책세상문고의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꼼꼼한 번역과 적절한 <해제>를 갖추고 있다. 『대중파업론』과 마찬가지로 로자의 글이 재미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논쟁과 비판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통쾌한 느낌은 들지만 레닌의 대부분의 저작이 그러하듯이 특정 상대를 공격하고 정치적 효과를 얻기 위해 쓰여진 글들은 지나치게 논쟁적이고 호전적인 요소가 강하게 들어가기 마련이다. 물론 로자의 비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훨씬 품위가 있다. 

지난날과 더불어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도 기회주의의 실천과 수정주의의 이론은 지속적으로 출현하고 시대의 유행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난다. 그럴수록 우리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을 다시 되새겨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지속을 위해 투쟁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설 것인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의 원칙들은 무엇이고 핵심적인 정신들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실천은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인가. 그러한 것들에 대한 지혜가 꼭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맑스, 레닌, 로자가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며 그들 역시 앞선 선배들의 비판과 투쟁을 책을 통해 배웠다.  

2002년 4월 1일

오창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문학위기론과 한국소설

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

경향신문(07. 04. 28) 문학위기론과 한국소설

얼마 전에 9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의 하나로 우리 문학을 풍요롭게 했던 소설가 고 김소진을 추모하는 단행본 ‘소진의 기억’이 발간되었다. 1991년 등단 이후 1997년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주로 서울 길음동 산동네 판자촌의 기억을 자신의 소설적 소재로 삼아왔던 이 작가는 80년대 노동소설의 관념주의와 구별되는 그 특유의 따뜻한 민중적 공감을 소설 속에 자주 표출해왔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동료들과 후배들이 시와 소설을 싣고 작가와의 추억을 회고하는 장을 마련한 이 추모집은 한 시대의 종말과 그를 애도하는 감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소진이 죽은 해인 1997년을 역설적인 의미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으로 규정하는 후배 작가 김연수의 글이 특히 그러했다. 1993년 이십대의 나이로 등단한 뒤 이렇다 할 작품을 쓰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던 김연수는 1997년 5월 생애 처음으로 넥타이를 매고 직장에 출근하는 삶을 살게 된다. 곧이어 일산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오랫동안 사귀어온 여자친구와 결혼을 한다. 1997년 이전이라면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IMF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으로 마감되는 1997년은 그에게 오랜 예술가-낭인 생활을 접고 생활인이자 한 집안의 가장으로 구속되는 결절점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닌 어떤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1997년을 우리 문학사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는 없을까. 1997년, 1963년생 소설가 하나는 조용히 한 생을 접었고, 1970년생 소설가 하나는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을까봐 불안감에 시달리며 어쩔 수 없이 직업의 세계 속으로 투항해 갔다. 어쨌든 그 이후의 한국문학이 그 이전의 그것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달라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몇몇 스타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초판 3000부를 소화하기도 버거운 우리 출판시장의 침체는 말할 것도 없고 영화나 텔레비전과 같은 영상매체 및 컴퓨터 사이버 매체의 약진에 힘입어 점차 소멸해가는 장르의 하나로 스스로를 규정할 수밖에 없게 된 저간의 사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1997년 이후 한국문학은 이제까지 문학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가정되고 또 당연히 그러리라 요구되어 왔던 모든 전제들이 무시되거나 폄하되는 새로운 문학 환경 속으로 뛰어들게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 사태를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말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로 대표되는 근대문학은 공감의 공동체, 즉 네이션의 기반이다. 소설이 단순한 읽을거리들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소설은 그 스스로 철학이나 종교보다 더 심원한 인식론적·도덕적 기능을 떠맡음으로써 근대적 국민국가를 상상하는 주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우리가 소설을 근대의 역동적 힘이 살아 움직이는 가장 현실적이고 진실한 허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 특유의 능력은 오늘의 문학적 현실 속에서는 더 이상 발휘되기 어렵다. 1950년대 미국소설에서 시작해 1990년대 일본소설, 그리고 1990년대 말의 한국소설들에 이르는 과정은 이 사실을 말의 의미 그대로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해 일본소설이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는 것이 이즈음 일본문학계의 현실이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근대소설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다만 협소한 형식 속에 안주한 오락물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한 이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진단에 우리마저 쉽게 주눅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한국소설 역시 일본의 전철을 많은 부분 그대로 밟고 있는 듯 보인다. 현재 소설 시장의 대부분은 일본번역소설들이 차지하고 있다.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장르소설에서부터 다양한 형식의 본격문학에 이르기까지 일본소설이 한국 독자들의 감수성에 미치는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사태가 이런 식으로 계속 흘러간다면 우리 소설 시장 역시 더 이상 일본식 소설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소설 시장 역시 이미 일본풍 소설에 의해 잠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시장과 독자를 상대로 근대소설의 이상만을 강조할 수 없을 것이다. 가라타니가 이야기한 대로 소설은 이제 그 이전의 자신의 규준 대신 새로운 시대적 이상을 표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시내 대형 서점에 달려가면 이 모든 사태를 그대로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소설이 지금 당장 그간의 전통과 결별하고 오로지 가벼운 상업주의와 내통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문학의 위기, 근대문학의 종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야기들은 때로 우리 소설이 진흙 속에서 펼치고 있는 이 움직임에 다소 인색한 경향이 있다. IMF의 경제적 여파보다 그로 인해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는 어떤 사태에 휘말려 버린 자신들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더 불안해하던 김연수 또래의 작가들은 선배들의 소설이 끝나는 곳에서 자신들의 소설을 다시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우리 소설이 이룬 성과들은 이들 세대의 불안감을 기반으로 꽃피워진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들은 선배들의 고답적 문학 형식을 거부하는 한편, 그들의 문학정신은 그대로 이어받고자 했다. 김연수를 비롯하여 김영하, 김경욱, 천운영, 윤성희, 강영숙, 조경란, 김중혁, 박민규, 천명관, 편혜영, 이기호 등의 소설적 성취가 말해주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소설을 근대소설의 외양과 다르다고 해서 쉽게 배척하는 것은 근거 없는 문학위기론으로 문학을 대체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이기 쉽다. 가라타니의 말처럼 소설이 더 이상의 비판적 정치 기능을 상실했다면 문학이 아니어도 그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은 많을 것이다. 이라크 반전운동을 펼치고 있는 오수연이나 생태 환경운동에 헌신하는 최성각, 베트남이나 몽골 작가들과의 연대를 기획하는 방현석과 전성태 등은 한국소설에 불어닥친 이 딜레마를 구체적인 사회운동과의 접맥을 통해 해결해나가려는 움직임을 대표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소설계엔 황석영과 같은 근대소설의 적자가 현재까지도 여전히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오랜 영어생활에서 해방되자마자 그간의 침묵을 보상하려는 듯 ‘오래된 정원’에서부터 ‘손님’을 거쳐 ‘심청’에 이르는 해원의 길을 모색해나가고 있는 그의 움직임은 한국소설의 현재를 웅변한다.

우리는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일된 국민국가를 이룩하지 못했다. 한국소설은 아직 한 번도 이 정황을 잊어본 적이 없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 조건은 우리 소설을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적 현실로부터 결코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 근대문학의 종언론이 때로 배부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식 속물주의가 멀리 수평선 저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시장의 이름으로 우리 소설의 형질 변경을 요구하고 나선다. 지금 우리 소설에 불어 닥친 대중문화담론들은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문학은 이 경계에 있다. 한편에는 동아시아의 정치적 모순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속물적 소비주의가 있다. 우리 소설이 이 가운데 어느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한국소설의 미래가 동아시아의 미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소설은 여전히 근대문학의 정언명령에 충실한 것 아닐까. 한국소설은 아직 근대적 기획의 열정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이다.(신수정|문학평론가)

경향신문(07. 04. 28) 근대소설 희망을 본다

황석영의 ‘심청’은 심청전의 구조를 빌려 온몸으로 동아시아 근대를 살아내야 했던 한 여자의 운명을 재현하고 있는 소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심청은 전근대적 효(孝)이데올로기의 화신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봉건사회의 균열을 방지하고 지배질서의 우위를 확인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황석영은 이 심청의 이야기를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황석영의 심청은 단순한 희생물이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형식을 선보이는 근대의 전복적인 힘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단지 자신의 몸 하나를 자본으로 중국 남경, 일본 등 19세기 말 동아시아 일대를 주유하는 심청의 여정은 근대적 풍랑에 내던져진 한반도의 운명에 대한 하나의 은유에 가깝다.

이에 비할 만한 젊은 작가의 소설로 김영하의 ‘검은꽃’을 들 수 있다. 19세기 말 봉건조선으로부터 멕시코로 이어지는 이산의 여정은 이 소설에서도 중요한 소설적 구조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신세대의 대표주자로 이야기되는 김영하의 소설적 관심사가 그의 선배라고 할 황석영의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을 가지게 된다.

봉건조선으로부터 근대로 내던져진 19세기 다양한 계급군상들의 근대에 대한 반응양상을 재현하는 작가의 시선은 한국소설의 미래와 관련, 지금 우리 소설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황석영과 김영하가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한국소설의 자장이 근대소설의 영역을 확장하고 변형시키는 장관을 기대해 볼 일이다.(신수정/문학평론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