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사랑 기계 문학과지성 시인선 199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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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주제로 한 식사 1

이를테면 길은
스파게티처럼 포크에 감아 먹을 수도 있지

만 갈래로 쏟아진
여름 뜨거운 길들 위에
검붉은 태양이 쏟아져 꿈틀거리듯
뜨거운 스파게티 국수 위에
검붉은 소스를 끼얹어 먹는 거야
저것 봐, 그녀가 스파게티를 먹다 말고
냅킨을 접어 무언가 끄적거리고 있잖아
너무 뜨거운가봐 눈물까지 머금고 있네
그녀가 앉은 프라이데이 창문 밑으론
이 밤, 붉은 국수 가닥 같은 자동차길
누군가 그 길을 포크에 감아 먹고 있나봐
길이 자꾸만 어디론가 끌려들고 있잖아

아아, 이렇게 길이 엉켜들고 있을 땐
천천히 혼자 스파게티를 먹는 거야
높은 창문 아래 프라이데이 식탁에 앉아
수많은 세기를 기다려
바람이 산등성이를 깎아먹듯
모래가 바다를 마셔버리고 드디어
붉은 소스가 칠해진 모래 접시만 남듯
그렇게 용암처럼 붉은 소스를 끼얹어 꿀꺽 삼키는 거야
먼 그를 그녀가 먹듯 그렇게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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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랑 기계 문학과지성 시인선 199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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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들어온다. 입술을 쫑긋거리는 꽃이. 트럭 한대 가득 실린 꽃이 터널 벽을 쪽쪽 빨아먹는다. 터널이 잠시 빨갛게 익는다. 그가 새싹을 똑똑 꺾어 입 속에 집어넣는다. 두릅이 두릅나무에서 똑똑 떨어져 초장 그릇 속에 빠진다. 한 트럭 가득 두릅이 들어온다. 두릅이 서울의 입 안을 초록으로 물들인다. 가자미가 들어온다. 얼음에 채워진 가자미 천 마리가 모두 기절한 채 들어온다. 동해 바다 한 트럭이 실려 들어온다. 돼지들이 들어온다. 돼지들이 서울의 입술을 꿀꿀 빤다. 그는 돼지 목살 수육을 새우젖 찍어 먹는다. 꿈틀거리는 그의 목구멍은 잡식성이다. 미꾸라지가 흙탕물 개울처럼 밀려 들어온다. 태백산맥이 갈가리 찢어져 꿈틀거리며 들어온다. 설악산 자락의 고냉지밭이 소금에 절여져 들어온다. 트럭 하나 가득 반만 나온 무의 하얀 엉덩이들이 겹겹이 실려 있다. 불켠트럭들이 들어온다. 이빨 사이로 줄지어 들어온다. 트럭들이 터널을 나서면 검푸른 서울의 위액이 트럭을 감싸안는다. 입구를 나선 트럭 중엔 그 큰 눈으로 휘이익 위액의 바다를 헤쳐보는 놈도 있지만 서울의 내장 속 어둠은 짙다. 푸성귀가 자루에 실려 들어온다. 수만 마리의 닭이 오늘 낳은 수만 개의 달걀을 따라 벼슬을 붉히며 실려 들어온다. 코끼리만한 황소들이 눈을 부릅뜨고 들어온다. 서울 사람의 몸 속 길로 황소떼가 떼지어 몰려간다. (-> 계속)-18쪽

그는 오늘밤 소주를 너무 많이 마신다. 소주가 부어지는 이 터널은 길고 어둡다. 소양호를 채우고도 남을 흰 우유가 터널 밖을 나와 밤의 내장 속으로 쏟아진다. 호남평야가 통째로 실려 들어온다. 그러나 터널의 반대 차선으론 정화조를 실은 트럭들이 일렬종대로 늘어서 있다. 술자리를 파한 내가 소주방의 문을 나서자마자 토하기 시작한다. 서울은 같은 문으로 싸고 먹는다. 지렁이처럼 내 몸이 도르르 말린다. 몇 일에 한번쯤, 하늘에서 큰 손이 내려와 흰구름 같은 두루마리 휴지를 펴 서울의 입인 동시에 항문인 터널을 닦아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오늘 저녁, 막차가 터널을 나서자 함박눈이 쏟아진다. 나는 눈을 받아 입안에 처넣는다.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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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2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칼 맑스 지음, 김호균 옮김 / 백의 / 2000년 6월
구판절판


자본이 기계를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기계가 노동자로 하여금 자기 시간의 더 많은 부분을 자본을 위해서 노동할 수 있고, 자기 시간의 더 많은 부분에 대하여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으로 관계하며, 타인을 위해서 보다 오래 노동할 수 있도록 하는 한에 있어서만 이다. 이 과정에 의해서 일정한 대상의 생산을 위해 필요한 노동의 양은 실제로 최소한으로 감축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만 최대한의 노동이 그러한 대상들의 최대한에서 가치 증식되기 위해서일 뿐이다. 여기에서 자본이 -- 전적으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 인간 노동, 힘의 지출을 최소한으로 감축하기 때문에 첫 번째 측면이 중요하다. 이는 해방된 노동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노동 해방의 조건이다.-376쪽

진정한 의미에서의 노동 해방.

농업이 결코 자본이 시작해서 그것의 본원적인 정착지를 건설하는 영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생산 국면 내에서의 이러한 중단(농업에서 생산물이 완성되기 전에 생산 자체 내에서의 노동의 중단 -기인)에 기인한다. 이것은 산업 노동의 첫 번째 기본 조건들에 모순된다. 그러므로 농업이 자본에 귀속되고 농경이 산업화되는 것은 반작용에 의해서이다. 한편으로는 경쟁의 고도의 발전을 필요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학, 기계학 등, 즉 매뉴팩처 공업의 대발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농업이 자본에 선행하거나 자본 자신의 미발전된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 양식들에서는 결코 순수하게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도 발견된다. 방적, 방직 등과 같은 농촌 부업이 농업에 정립되어 있는 -- 그리고 이들 중단에 놓여 있는 -- 노동 시간 사용의 한계를 보완해야 한다. 생산 시간과 노동 시간의 불일치는 일체 노동의 가치 증식, 즉 자본에 의한 잉여 노동의 점취를 직접적으로 방해하는 자연 조건들에만 기인할 수 있다. 자본의 진로에 가로놓여 있는 이 장애들은 당연히 편익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손실을 구성한다. -339-340쪽

농업에 대해

자유 경쟁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은 중간 계급의 예언자들에 의한 자유 경쟁의 찬미나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그것의 저주에 대한 유일하게 합리적인 답변이다. 자유 경쟁 내에서 개인들이 순전히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공동의 이익, 또는 차라리 일반 이익을 실현한다고 하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개인들이 자본주의적 조건하에서 서로 압박하고, 따라서 그들의 충돌 자체는 이 상호 작용이 벌어지는 조건들의 재산출일 뿐이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덧붙여 말하자면 자유로운 개성의 소위 절대적 형태라는 경쟁에 관한 환상이 사라지자마자, 이것은 경쟁의 조건들, 즉 자본에 기초한 생산의 조건들이 이미 제약들로 느껴지고 생각되며, 따라서 이미 제약들이고 갈수록 제약이 된다는 증거이다. 자유 경쟁이 = 생산력의 발전의 마지막 형태이고, 따라서 인간적 자유의 마지막 형태라는 주장은 중간 계급의 지배가 세계사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 물론 그저께의 벼락부자에게는 편안한 생각이다. -318-319쪽

자유주의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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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서는 "이 가난한 평론집을 내 개인의 측으로 볼 때는 내 자신의 문예의 세계에 있어 일본국가의 모습을 발견하는 데 이르는 혼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김윤식 역)라느 서문을 가진 "전환기의 조선문학"이라는 평론집을 낸 바 있다. 1940년 가을부터 신체제운동이 대두되고 익년에 문예지는 "국민문학"(최재서 주재) 하나로 통합되었으며 동년 태평양전쟁, 1942년 5월부터 징집제도가 실시되었다. 1933년 나찌는 비평통제법을 발표하여 비평가란 말을 말살하고 '예술 기술자'라 하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그는 비평의 새로운 길을 보수적인 데 두고 있다. 흄, 엘리어트의 노선을 말하고 일본적 가치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보도연습반' '수석' 등의 창작까지 발표하고 있다. 대체 이토록 철저한 그의 신념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 의문이 마지막으로 남는다. 우리가 이 점을 그토록 해괴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가 그토록 부르짖은 지성 때문이다. 지성 혹은 그가 말하는 숙지란 그러면 대체 무엇이었던가. 이 점은 까다롭고도 지극히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성을 빙자한 허다한 위악과 비극의 가능성을 우리는 지금도 도처에서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개인적 체질이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할 흥미조차 나는 갖지 않는다. 다만 본고와 관련된 부분만에 대해 한마디 발언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의 영문학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신주처럼 모신 흄이 군국주의자로 전사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영문학풍토에서 빛나는 레지스탕스 정신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전통과 질서와 안개와 반달리즘에 대한 문화옹호는 있었을지언정 처절한 연대의식과 조국위기에 대한 자각이 그가 익힌 영문학풍토에선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조국의 위기조차 그들에겐 없었던 것이 아닌가). 그가 진작에 독일이나 프랑스의 지성풍토를 익혔더라면 하는 생각을 불금한다. 지성의 한 변형인 헉슬리의 새타이어가 배부른 지식성에 대한 것이었고, 영국은 그 조국의 역사가 엘리어트의 전통 속에 정통을 줄 수 있도록 넉넉한 것이었다(엘리어트가 Criterion지를 자진 폐간한 사실을 보라). 나는 결코 영문학의 지성이 담담하다든가 이상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 그럴 수 있으랴. 다만 최재서가 영문학지성을 오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터일 뿐, 따라서 최재서 지성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 결여된 사이비지성이라 본다. 그의 비평정신이 영광스런 레지스탕스 문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우리 신문학사상 가장 아픈 한 대목이다. 이 아픈 대목 떄문에 앞으로도 이 방면의 순례자를 위해 누군가가 언어를 낭비할 것이다.

김윤식, '최재서론 -비평과 모더니티', "현대문학", 1966, 3.


선생의 글을 인용해서, 나의 주장의 지지대를 만드는 일은, 사실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압축적으로, 보다 설명력있게, 제시한 선생들의 글은 게으른 나에게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최재서의 수준이 '얕다'라는 것, 또는 그의 '가벼움'. 물론 '얕다', '가볍다'라는 것은 절대적 기준이 아닌 상대적 기준하에서 논의될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절대적 기준'이란 것은 설정하기에 따라서 최재서의 수준이 절대적으로 '얕다', '가볍다'고 논의될 수조차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러한 '절대적 기준'은 자의식의 건강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선의 비평가로서의 자의식. 식민지 시대 조선이라는 특수성을 어떻게 영국의 비평가들의 도움을 받아서 파헤쳐 나가고 이데올로기 투쟁을 할 것인가의 문제. 도대체 왜 지금 '이 짓'을 하느냐의 문제. 혹은 왜 그들은 '저 짓'을 하냐의 문제. 아직은 최재서에게서 그러한 고민의 흔적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최재서라는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가 없다.
자네, 지금 왜 그거 하고 있나.
나는 답을 들을 때까지, 최재서를 읽어내야한다.

앞으로 이를 찬찬히 점검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는 왜 '이 짓'을 하는 것인가.

만약, 질문에 대한 답이 구해지지 않을경우, 그리고 돌연 구해질 경우,
이는 하나의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발견시대, <<문학과 지성>>

제목처럼 이제는 문학창조시대가 아니라 문학발견시대라고 주장하고 있는 글. 주요한과 김동인의 '창조'가 떠오른다. 문학의 힘을 믿고, 문학의 근대화로 조국의 근대화를 꿈꾸었던 초창기 몇몇 천재들의 모험.

독립을 위해 상해로 달려가던 젊은 주요한의 뒷모습...


이제는 1930년대. 경성제국 영문학 전공의 최재서는,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민중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것.. 이라고 외치며

카프 진영에게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 식민지 사회에서, 지식인의 쁘띠-부르주아적 면모란 바로 이런 것... 더 이상 젊은 지식인-문사 집단(계급)은 1910년대말처럼 전위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못하다. 이에는 KAPF라는 집단과 이를 뒷받침하는 조선공산당 때문.


이러한 정세 속에서 최재서는 특이하게도 학생과 비평가의 대화형식으로 글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김윤식 선생의 주객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최재서 자체도 어떤 '객'이 필요했을까. 그의 말대로 '문학 발견'시대에 비평으로서, '학생'과 대화하는 '비평가'의 존재.


글을 읽다보면 그도 '리얼리즘'을 제창하지만, 당대 카프 진영의 '사회적 리얼리즘'은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조적을 자신의 이론을 토대로 현실을 분석한다는 것이 그것. 그래서 그가 주창하는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민중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작기는 자기의 개성을 드려다보지말고 눈을 민중으로 돌리라!

개성의 미를 세련하지말고 민중의 진리를 발견하라!

개성의 예언자가 되지 말고 민중의 노예가 되여라!


라는 구호... 예언자 내지 지도자적 긍지를 버리고 민중의 충실한 발견자 내지 기록자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러나 당연히 공허한 이야기. '있는 그대로'라는 것, '세계관에 의해 투영 변형 된 세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날 현실'이란 것.

그것.. 은 무엇? '물자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최재서는 덧붙인다. '물자체'를 매개할 수 있는 방법.


누구를 표본삼으면 좋을까요?

고대의 이름도 없는 민요작가.

그리고 또 덧붙인다. 

민요는 민중의 집단 창작이라고.


그렇다면 20세기 중반, 민요작가를 본받으라는 이야기는 무엇?

앞서 이야기한 창조의 주요한이 마침내 조선에 돌아와 시도했던 것?

1940년대 국민문학파의 것?


민중의 기록자이면, 민요 채집이나 잘 해 둘 것을.

민요 창작은 또 무슨 수작. 

 

 예언자 내지 지도자적 긍지를 버리고 민중의 충실한 발견자 내지 기록자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

을 '평론'이라는 정론성 강한 글로서 '지도자적 긍지'를 가지고 계몽하려는 최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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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275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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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비는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땅을 쪼으려 내려오다 바닥에 닿기
전에 드러눕는다 자해 공갈단이다
비는 길바닥에 윤활유 들이부은 듯
아스팔트 검은빛을 더욱 검게 한다
하늘에서 내려올 ‹ž 무명 통치마였던
비는 아스팔트 바닥 위를 번칠거리며
흐르다가 하늘을 둘러싸는 여러 다발
탯줄이 된다 아, 오늘은 늙은 하늘이
질퍽하게 생리하는 날 누군가 간밤에
우주의 알집을 건드린 거다 아니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알집 두터운 벽이
스스로 깨져 무너져 쏟아지는 것이다-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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