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서는 "이 가난한 평론집을 내 개인의 측으로 볼 때는 내 자신의 문예의 세계에 있어 일본국가의 모습을 발견하는 데 이르는 혼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김윤식 역)라느 서문을 가진 "전환기의 조선문학"이라는 평론집을 낸 바 있다. 1940년 가을부터 신체제운동이 대두되고 익년에 문예지는 "국민문학"(최재서 주재) 하나로 통합되었으며 동년 태평양전쟁, 1942년 5월부터 징집제도가 실시되었다. 1933년 나찌는 비평통제법을 발표하여 비평가란 말을 말살하고 '예술 기술자'라 하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그는 비평의 새로운 길을 보수적인 데 두고 있다. 흄, 엘리어트의 노선을 말하고 일본적 가치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보도연습반' '수석' 등의 창작까지 발표하고 있다. 대체 이토록 철저한 그의 신념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 의문이 마지막으로 남는다. 우리가 이 점을 그토록 해괴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가 그토록 부르짖은 지성 때문이다. 지성 혹은 그가 말하는 숙지란 그러면 대체 무엇이었던가. 이 점은 까다롭고도 지극히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성을 빙자한 허다한 위악과 비극의 가능성을 우리는 지금도 도처에서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개인적 체질이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할 흥미조차 나는 갖지 않는다. 다만 본고와 관련된 부분만에 대해 한마디 발언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의 영문학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신주처럼 모신 흄이 군국주의자로 전사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영문학풍토에서 빛나는 레지스탕스 정신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전통과 질서와 안개와 반달리즘에 대한 문화옹호는 있었을지언정 처절한 연대의식과 조국위기에 대한 자각이 그가 익힌 영문학풍토에선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조국의 위기조차 그들에겐 없었던 것이 아닌가). 그가 진작에 독일이나 프랑스의 지성풍토를 익혔더라면 하는 생각을 불금한다. 지성의 한 변형인 헉슬리의 새타이어가 배부른 지식성에 대한 것이었고, 영국은 그 조국의 역사가 엘리어트의 전통 속에 정통을 줄 수 있도록 넉넉한 것이었다(엘리어트가 Criterion지를 자진 폐간한 사실을 보라). 나는 결코 영문학의 지성이 담담하다든가 이상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 그럴 수 있으랴. 다만 최재서가 영문학지성을 오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터일 뿐, 따라서 최재서 지성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 결여된 사이비지성이라 본다. 그의 비평정신이 영광스런 레지스탕스 문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우리 신문학사상 가장 아픈 한 대목이다. 이 아픈 대목 떄문에 앞으로도 이 방면의 순례자를 위해 누군가가 언어를 낭비할 것이다.
김윤식, '최재서론 -비평과 모더니티', "현대문학", 1966, 3.



선생의 글을 인용해서, 나의 주장의 지지대를 만드는 일은, 사실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압축적으로, 보다 설명력있게, 제시한 선생들의 글은 게으른 나에게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최재서의 수준이 '얕다'라는 것, 또는 그의 '가벼움'. 물론 '얕다', '가볍다'라는 것은 절대적 기준이 아닌 상대적 기준하에서 논의될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절대적 기준'이란 것은 설정하기에 따라서 최재서의 수준이 절대적으로 '얕다', '가볍다'고 논의될 수조차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러한 '절대적 기준'은 자의식의 건강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선의 비평가로서의 자의식. 식민지 시대 조선이라는 특수성을 어떻게 영국의 비평가들의 도움을 받아서 파헤쳐 나가고 이데올로기 투쟁을 할 것인가의 문제. 도대체 왜 지금 '이 짓'을 하느냐의 문제. 혹은 왜 그들은 '저 짓'을 하냐의 문제. 아직은 최재서에게서 그러한 고민의 흔적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최재서라는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가 없다.
자네, 지금 왜 그거 하고 있나.
나는 답을 들을 때까지, 최재서를 읽어내야한다.
앞으로 이를 찬찬히 점검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는 왜 '이 짓'을 하는 것인가.
만약, 질문에 대한 답이 구해지지 않을경우, 그리고 돌연 구해질 경우,
이는 하나의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발견시대, <<문학과 지성>>
제목처럼 이제는 문학창조시대가 아니라 문학발견시대라고 주장하고 있는 글. 주요한과 김동인의 '창조'가 떠오른다. 문학의 힘을 믿고, 문학의 근대화로 조국의 근대화를 꿈꾸었던 초창기 몇몇 천재들의 모험.
독립을 위해 상해로 달려가던 젊은 주요한의 뒷모습...
이제는 1930년대. 경성제국 영문학 전공의 최재서는,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민중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것.. 이라고 외치며
카프 진영에게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 식민지 사회에서, 지식인의 쁘띠-부르주아적 면모란 바로 이런 것... 더 이상 젊은 지식인-문사 집단(계급)은 1910년대말처럼 전위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못하다. 이에는 KAPF라는 집단과 이를 뒷받침하는 조선공산당 때문.
이러한 정세 속에서 최재서는 특이하게도 학생과 비평가의 대화형식으로 글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김윤식 선생의 주객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최재서 자체도 어떤 '객'이 필요했을까. 그의 말대로 '문학 발견'시대에 비평으로서, '학생'과 대화하는 '비평가'의 존재.
글을 읽다보면 그도 '리얼리즘'을 제창하지만, 당대 카프 진영의 '사회적 리얼리즘'은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조적을 자신의 이론을 토대로 현실을 분석한다는 것이 그것. 그래서 그가 주창하는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민중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작기는 자기의 개성을 드려다보지말고 눈을 민중으로 돌리라!
개성의 미를 세련하지말고 민중의 진리를 발견하라!
개성의 예언자가 되지 말고 민중의 노예가 되여라!
라는 구호... 예언자 내지 지도자적 긍지를 버리고 민중의 충실한 발견자 내지 기록자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러나 당연히 공허한 이야기. '있는 그대로'라는 것, '세계관에 의해 투영 변형 된 세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날 현실'이란 것.
그것.. 은 무엇? '물자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최재서는 덧붙인다. '물자체'를 매개할 수 있는 방법.
누구를 표본삼으면 좋을까요?
고대의 이름도 없는 민요작가.
그리고 또 덧붙인다.
민요는 민중의 집단 창작이라고.
그렇다면 20세기 중반, 민요작가를 본받으라는 이야기는 무엇?
앞서 이야기한 창조의 주요한이 마침내 조선에 돌아와 시도했던 것?
1940년대 국민문학파의 것?
민중의 기록자이면, 민요 채집이나 잘 해 둘 것을.
민요 창작은 또 무슨 수작.
예언자 내지 지도자적 긍지를 버리고 민중의 충실한 발견자 내지 기록자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
을 '평론'이라는 정론성 강한 글로서 '지도자적 긍지'를 가지고 계몽하려는 최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