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lastmarx > 맑스의 ‘이중의 비판’과 매개의 극복
경제학 - 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지음, 강유원 옮김 / 이론과실천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맑스의 ‘이중의 비판’과 매개의 극복
  - 20년만에 새로 번역한 『경제학-철학 수고』 읽기

  1.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한 노트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80, 90년대엔 대학 근처에 한두 개씩 사회과학(전문)서점들이 존재했다. 마찬가지로 사회과학(전문)출판사도 꽤 많았다. 이론과실천사를 그 가운데 대표적인 출판사로 기억한다. 당시 그 출판사는 ‘이론과 실천이 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전’ 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관한 책들’이라며 『자본』 아홉 권을 필두로 『경제학-철학 수고』(1987)와 『경제학 노트』(1988) 등 글자가 작고 행간이 좁은 책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이 책들이야 맑스의 저작이나 노트들이지만 그밖에 문자 그대로 맑스레닌주의의 시각을 가진 이론서, 해설서들도 망라하고 있었다. 책 제목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사/미학사/미학원론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2006년 말, 이론과실천사는 『경제학-철학 수고』(2006) 보도자료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책은 많은 극좌 교조주의자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할 마르크스의 저작이기도 했다. 되돌아보라, 1932년이란 20세기 역사의 어느 즈음에 자리하고 있는가. 사회 정치 이념으로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 스탈린주의가 극점에 달하여 몰락의 길을 재촉하던 때가 아닌가? 극좌 교조주의자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이 책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으리라.” 맑스의 작품들을 제외하고 이 출판사를 포함하여 지난날 사회과학출판사들에서 내놓던 책들이 ‘극좌 교조주의자’들의 공식 교과서들이었는지 그 가운데 일부만 ‘스탈린주의(맑스레닌주의)’였는지 돌아볼 일이다.

  『경제학 노트』에는 세 개의 글이 묶였는데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과 1857/58년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서문>이 나란히 실려있다. 역자 김호균은 2000년에 ‘요강’(백의) 전체를 3권으로 번역 출간한다. 이어 <직접적 생산과정의 제결과>라는 『자본』에 포함하려다 포함하지 않은 연구노트가 들어 있고 끝으로 『임금, 가격, 이윤』(1865) 이라는 강연 원고가 실렸다. 아무튼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작업을 음미하려는 출판사의 각오가 엿보이는 집요한 노력의 산물들이다.

  『경제학-철학 수고』는 매우 난감한 텍스트였다. ‘텍스트’, 지금은 흔히 쓰는 말이지만 돌이켜보면 예전에는 그런 말도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다. 그것은 『공산당 선언』의 깔끔함과 달리 문체가 딱딱했다. 원래 맑스가 대부분의 글을 그렇게 쓴 까닭인지 한국어 최초 번역작업이라서 더욱 읽기 어렵게 된 것인지 당시에는 판별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박종철출판사) 1권에 실린 발췌본을 읽었을 때엔 훨씬 읽을 만 했다. 맑스의 모든 글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용도에 따라 달랐지만 하여간 원전 자체가 어렵고 거친 번역도 한몫했다. 그 텍스트는 맑스가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은 자기 이해를 위한 수고手稿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저작선집 맨 앞에 실린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을 함께 보면 청년시절 맑스의 문체가 난공불락의 스타일임은 분명하다.

  2.  20세기 초 『경제학-철학 수고』의 출간 이후

  1844년에 작성된 이 노트는 1932년에야 출간된다. 19세기 이 작업은 맑스가 철학 비판에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넘어가는, 즉 그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정리였다. 훗날 정치경제학 비판의 주요 텍스트들인 ‘요강’, ‘자본’, ‘잉여가치학설사’ 등으로 확대재생산 될 시초축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20세기에 수많은 맑스주의 학자들이 이 『경제학-철학 수고』를 주목하고 자신을 새롭게 발견했다며 지적 소동을 벌이게 될 것을 결코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맑스학과 맑스주의 연구사에서 『경제학-철학 수고』 만큼 중요하게 거론되는 작품도 많지 않다. 가령 알뛰세르는 『맑스를 위하여(1965)』(백의, 1996)에서 ‘청년 맑스’와 ‘성숙한 맑스’를 가르는데, 그는 1844년까지의 작품들을 ‘청년 맑스의 저작들’이라 규정하고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들>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절단기의 저작들’로 분류하고 이후의 작품들을 가리켜 ‘성숙기의 저작들’과 ‘이론적 성숙기의 저작들’과 ‘완숙기의 저작들’이라 불렀다.

  알뛰세르는 “맑스가 『1844년의 초고』에서 헤겔로의 급작스럽고 총체적인 회귀 속에서, 포이어바흐와 헤겔의 이 천재적인 종합 속에서 … 가장 근본적인 ‘전복’의 시련 속에서 … 비상한 이론적 긴장 속에서” 이 노트가 작성된 것이라며 맑스는 “헤겔주의자가 아니라 우선 칸트-피히테주의자였고 나중에는 포이어바흐주의자였다”고 설명한다. 이 노트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 음미하고 대결하면서 알뛰세르는 『자본』을 새롭게 읽으려고 분투한다.

  게오르그 리히트하임 Georg Lichtheim은 『마르크스에서 헤겔로(1971)』(문학과지성사, 1987)에서 “인간학적 자연주의와 엥겔스 및 플레하노프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논리적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다”라며 “맑스의 자연주의가 형이상학적 유물론으로 변형된 것은 엥겔스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있어서 논리적 필요 때문이 아니라, 실제적 필요 때문이었다는 것을 명심하면, 전체적 혼동의 이해가 가능하다. <맑스주의>는 응집적 세계관으로, 즉 먼저 독일 노동 운동을 위한 세계관으로, 그 다음엔 소비에트 인텔리겐차를 위한 세계관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인간학적 자연주의’ 또는 ‘자연적 인간주의’는 『경제학-철학 수고』에 나타나는 맑스의 유물론이다.

  리히트하임은 그 책의 <변증법의 새로운 왜곡>이란 글에서 “철학을 버릴 때 실증주의로 회귀함은 필연적이나, 구조주의는 콩트적 전통과 잘 조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 맑스주의자들에게 특히 매력적이었다. 또한 구조주의는 현대 인류학 · 심리학 · 언어학의 명성에도 의존할 수 있다. 더욱이, 이미 보았듯이, 맑스 자신은 시대에 앞선 구조주의자라는 주장까지도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관념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할 능력을 상실한 타락한 헤겔주의의 교정책으로서의 이러한 알뛰세르 사고는 타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알뛰세르는 합리주의 모델을 역사 현실에 적용할 때 직면하는 어려움을 낮게 평가한 것 같다. 역사의 논리 같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 그리고 지난 200년 동안 철학은 이 주제에 적합한 모델을 탐구해 왔다 ― 헤겔주의를 어마어마한 착오로만 생각하는 사상가는 그런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한다.

  한편, <역사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이란 글에서 “1930년대에도 맑스의 『파리 초고』는 출간되었었다. 하지만, 후에 『자본』이 된 원고, 1857~58년의 『요강』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었다. 그런 까닭에 (호르크하이머의) 『비판 이론』은 『자본』의 저자가 과학적 연구를 통해 뛰어난 철학적 인간학을 구체화한 휴머니스트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칼 뢰비트는 『헤겔에서 니체에로(1939)』(민음사, 1985, 헤겔에서 니체로 2006)에서 “맑스는 노동의 분석을 현실적 생존 관계의 표현이라 할 경제 문제에 집중하고, 그것을 동시에 헤겔 철학의 보편적인 노동 개념에 있어서 비판적으로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 결과로서 생긴 것이 고전적 국민 경제학과 헤겔 철학에 대한 이중의 비판이다. 루게에 있어서는 인생 문제에 머무를 것이 맑스에 의하여 과학적으로 철저하게 상술된다. 그의 경제이론과 헤겔 철학과의 본래의 관계를 인식하기 위한 주요한 자료는 1844년의 국민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초고이다. 그것은 『독일 이데올로기』를 합친 헤겔 이후의 철학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다”라고 평가한다.

  그는 “맑스가 1844년 초고에 전개한 이 사상은, 그 시대에는 발표되지 않고 『자본』의 모양으로 되어서도 독일 철학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 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상은 지금까지 어떤 학설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물의를 일으켰다. 레닌의 맑시즘과 러시아의 노동자 국가는 사상적으로 맑스의 헤겔과의 대결에 기초하고 있다. 획득과 소외의 분석을 더욱 완수함에 있어서, 맑스는 노동 문제를 순전히 경제적으로만 파악하고 노동을 임금과 이윤과의 연관에 있어서 상품의 사회적 실질로 정의하였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확정되어 특수화된 노동개념, <노동량>을 산정하여 자본에 대한 그러한 관계에서 <잉여 가치>를 규정하는 이 노동 개념 때문에 우리들은 그러나 그처럼 논의된 이 경제 학설의 본래의 기초가 헤겔의 정신 철학과의 대결, 너무나도 지나치게 간과된 그 대결이라는 것을 오인해서는 안된다”고 덧붙인다.

  3. 맑스의 ‘이중의 비판’과 매개 비판

  칼 뢰비트가 지적했듯이 국민경제학과 헤겔철학에 대한 ‘이중의 비판’이 바로 『경제학-철학 수고』 전체를 관통하는 맑스의 관심사다. 맑스가 직접 붙인 것은 아니지만 책 제목을 분석해보면 ‘경제학’은 국민경제학(정치경제학)이고 ‘철학’은 헤겔의 변증법과 철학 일반이다. 이 동전의 앞뒷면을 각기 장식하는 이데올로기들의 비판을 위해 맑스가 읽고 연구하고 논평하며 기록한 결과가 바로 『경제학-철학 수고』다.

  ‘이중의 비판’에 대해 해석자들의 매개를 거치지 말고 맑스의 주장을 직접 살펴보자. 맑스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헤겔은 근대 국민경제학자들의 입장에 서 있다. 그는 노동을 인간의 본질, 자기를 확증하는 인간의 본질로 파악한다. 그는 노동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볼뿐 부정적인 측면은 보지 못한다”(192쪽)라고 지적한다. ‘노동’을 인간의 본질로 파악하는 것은 국민경제학자들과 헤겔의 공통점인데 마찬가지로 그들은 정치경제학과 철학에서 진실을 은폐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국민경제학은 노동자(노동)와 생산의 직접적인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안에 있는 소외를 은폐한다”(88쪽)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화폐’와 ‘정신’을 매개로 하여 설명하는데 맑스는 이러한 매개를 극복하고 벗어나야 한다는 입장이다. 먼 훗날 『자본』에 구사된 가치형태에 대한 탐구는 ‘매개’에 대한 매개형태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기도 한데 이는 20세기 정치경제학 비판 연구에서는 주목되었으나 맑스주의 철학 연구에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아마도 맑스처럼 ‘경제학-철학’을 동시에 비판하지 않는, 현대 학문의 분화 추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맑스는 “무신론은 종교를 지양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매개된 인간주의이고,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지양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매개된 인간주의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매개를 지양함으로써 비로소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는 적극적 인간주의가 생성된다”(208쪽)라고 정리한다. “논리학 ― 정신의 화폐”(188쪽)이듯, 헤겔의 ‘정신’ 현상학은 다시 말해 스미스와 리카도에겐 상품의 화폐 즉 ‘자본’ 현상학이다. 맑스가 그들의 작업을 발전시켜서 ‘노동가치론’을 완성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성립했다는 식의 해석은 매개를 지양하려고 분투했던 맑스의 문제의식에 대한 무지다. “무지가 증명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맑스). 또한 그것은 맑스에게 ‘이중의 비판’이 왜 중요한지 모르는 이들의 즉 맑스 이전에 머무르는 맑스주의자들의 끈질긴 ‘정통’적 전통이기도 하다.

  4. 오늘날 왜 『경제학-철학 수고』를 읽는가?

  헤겔과 맑스가 ‘사람들은’으로 문장을 시작할 때는 대체로 상식에 편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판 대상의 발상과 주장을 비판할 때다. 오늘날 『경제학-철학 수고』를 찾고 읽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의문이 냉소의 차원은 결코 아니다. 사람들은 그리고 우리는 21세기에 『경제학-철학 수고』를 왜 읽는 것일까?

  맑스의 대표작은 『공산주의 선언/공산(주의)당 선언』과 『자본』이다. 육상의 꽃이 100미터 달리기와 마라톤이라고 하듯이 ‘선언’과 ‘자본’은 맑스를 생각할 때 반드시 거론해야할 작품들이다. 그 두 작품은 맑스가 살아 있을 때 출판했고 출판을 목적으로 집필한 것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출판이 어려워지자 “원고를 쥐들더러 갉아먹고 비판하라고 주어버렸다. 우리의 주된 목적- 자기 해명 -은 이루었기 때문에, 더욱더 기꺼이 주어버렸다”라며 끝내 방치한 작품이다. ‘요강’의 경우 ‘1859년의 서문’과  ‘자본’ 등의 출판으로 이어졌고 자본의 ‘초고’로 간주되지만 그 자체를 출판하려고 정리한 것은 아니다.

  『경제학-철학 수고』는 맑스가 자기 이해를 위해 연구하고 정리한 그의 노트로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니다. 맑스학을 하려는 전문가도 아니고 맑스주의의 전화나 재구성을 도모하는 학자나 이론가도 아니라면 맑스가 자기 이해를 위해 작성한 노트를 꼭 읽어야 할까? 또한 읽을만한 텍스트일까? 이 작품은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읽어볼만한 고전일까? 워낙 유명한 저작- 그런데 정말 유명한 것일까? -이니까 다양한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볼 수 있겠다. 20여년 만에 새로 출간되므로 그 노고를 생각해서 구입하고 읽어볼 수도 있겠다. 맑스의 다른 주요 작품들을 섭렵했는데 이 노트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읽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이 책을 반드시 필독해야할, 읽어보라고 추천할만한 이유로 공감되지 않는다.

  『공산당 선언』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본』 1권을 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른바 ‘프랑스혁명사 3부작’으로 회자되는 <1848년부터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1850),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1852), <프랑스에서의 내전>(1871)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굳이 이 문제작을 먼저 읽을 이유는 없다. 절판될 수 있으니 출간 즉시 사 두는 것도 가능하지만 놀랍게도 잘 팔리고 있으므로 서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왜 많이 팔리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주문하고 구입해서 펴보는 것일까?

  만약 맑스를 더 많이 이해하고 그의 연구방법을 더 깊이 추적하고 그의 초기 정치경제학 학습의 흔적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변하는 사람이 그런 이유로 『경제학-철학 수고』를 읽고 또 읽자고 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는 ‘자본’을 읽기 전에 혹은 읽고 나서 반드시 ‘요강’을 전부 통독해야 한다는 것에도 반드시 동의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필요성이라면 맑스의 박사학위논문의 의의 역시 『경제학-철학 수고』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맑스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세부적’ 차이를 통해 천체에 대한 생각, 세계관의 차이 즉 전체의 차이를 분별하는 것 그리고 훗날 ‘자본’에서 상품이라는 세포의 해부를 통해 자본주의 전체의 운동과 운명을 파헤친 방법론 역시 박사학위논문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철학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5. 『경제학-철학 수고』의 주요 내용과 새 번역의 특징

  『경제학-철학 수고』에는 정치경제학 노트, 소외된 노동, 화폐, 헤겔 등의 내용이 있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한 텍스트를 충분히 섭렵하고자 한다면 ‘요강’, ‘1859년 서문’, ‘자본’, ‘잉여가치학설사’ 등을 봐야 한다. 참고서로서 알뛰세르의 『자본 읽기』, 벤 파인의 『마르크스의 자본론』, 로스돌스키의 『마르크스 자본론의 형성』 등을 보면 되겠다. 맑스의 화폐론에 유달리 흥미를 갖는다면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긴 <화페에 관한 장>과 ‘자본’의 언급들을 살펴야 할 텐데 원전에 충실한 로스돌스키의 ‘맑스의 화폐 이론’에 대한 논문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맑스가 읽은 정치경제학에 서적들과 그 국민경제학자들에 대한 논평을 보고 싶다면 ‘요강’과 ‘자본’에 널려 있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관련 연구, 자료, 초안으로서의 노트들은 『경제학-철학 수고』를 시작으로 해서 1850년대의 방대한 노트들- 그것은 ‘요강’으로 재정리, 결집, 집대성 된다 -과 1860년대의 노트들로 이어지는데 결국 같은 주제, 같은 관심이 반복되는 텍스트들이다. 스미스, 리카도, 세이, 제임스 밀에서 점점 더 연구가 다양해지고 더 최신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새롭게 천착한 주제들의 선행연구자, 언급자들이 추가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스미스와 리카도이다.

  맑스는 1850년과 51년에 52명의 경제학자들의 책을 인용한 초록을 작성했다. 그는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경제학이 싫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기본적으로 이 과학은, 종종 극단적으로 미묘한 특수한 문제들에 대한 고찰들이 제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스미스와 리카도 이후로는 어떠한 진전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물론 프루동을 중심으로 한 당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과 혐오가 전 텍스트에 걸쳐 지속된다. ‘요강’과 ‘자본’에 이르면 제임스 밀 대신 그의 아들 존 스튜어트 밀이 비판의 대상으로 대체된다.

  『경제학-철학 수고』의 내용 가운데 다른 텍스트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주제는 소외된 노동과 헤겔에 대한 맑스의 생각일 것이다. “노동은 …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강제노동이다”(90쪽),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자연’을 ‘유(類)’를 ‘인간적 본질’을 소외시키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를 낳게 한다. “그러므로 사유재산은 외화된 노동, 자연과 자기 자신에 대한 노동자의 외적 관계의 산물이요, 성과이며, 필연적 귀결이다”(99쪽). “노동임금과 사유재산은 동일한 것”이므로 “한 쪽이 몰락하면 한 쪽도 몰락하지 않을 수 없다”. “사유재산에 대한 소외된 노동의 관계에서 귀결되는 것은 사유재산 등에서, 노예 상태에서 사회의 해방이 노동자 해방이라는 정치적 형식으로 표명된다”. “노동자의 해방 속에 보편적 · 인간적 해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100~102쪽)

  1987년판 이론과실천의 『경제학-철학 수고』에 비해 2006년에 등장한 새 번역서는 모든 면에서 나아졌다. 편집, 책 만듦새 등도 좋아졌고 무엇보다 술술 읽힌다. 그것은 맑스의 작품들과 맑스주의 이론서들을 읽는 독서 수준이 나아지고 독서량이 20여 년 동안 보다 많이 쌓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원전 자체의 난해함이나 문체의 낯설음은 변한 게 아니지만 우리의 역량이 조금이라도 나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1987년판은 마치 대부분의 문장이 비문처럼 보인다. 눈은 글자들을 읽어나가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정리되지 않는다. 물론 정신을 집중해서 수수께끼 퍼즐을 맞추듯 응시하면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는 느낌은 생긴다. 그런데 2006년판은 맑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보다 쉽게 이해된다. 번역자가 “원전의 난해함은 번역본에서도 유지되어야 하며, 그 어려움은 별개의 해설서나 연구서 등을 통해 해소되어야 할 것이므로 윤문을 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내용의 훼손 없이 훨씬 읽기 편해진 것은 분명하다. 어떤 책이든 역자가 텍스트의 내용과 배경과 맥락을 더 많이 파악할수록 좀 더 명료하게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 법이다. 이전 번역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것이다. 그 시간에 새 번역을 처음 만나는 마음으로 즐기면 된다.

  맑스는 “철저하게 관철된 자연주의 또는 인간주의가 어떻게 해서 관념론 및 유물론과 구별되며 동시에 이 양자를 통합하는 진리인지를 알게 된다”(198쪽),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로서, 완성된 인간주의=자연주의로서 존재하며,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충돌의 참된 해결이며, 실존과 본질, 대상화와 자기 확인, 자유와 필연성, 개체와 유(類) 사이의 싸움의 진정한 해결책이다”(128쪽)라고 한다. 그는 ‘요강’ <서설>에서도 “자연주의적 유물론”에 대해 언급하는데 예전에는 이것을 진화론적, 기계적 유물론으로 해석하곤 했다. 『경제학 노트』(1988)에서는 이 메모가 있는 서설의 마지막 부분이 빠졌는데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백의, 2000)년의 서설에는 들어 있다.

  끝으로 이미 새 번역을 읽기 전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 문제작으로부터 비롯한 논란과 관련된 숙제를 생각한다. 어이하여 같은 텍스트를 놓고 알뛰세르는 맑스에게 헤겔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는 징후가 보인다고 독해했으며, 수많은 20세기 초반의 맑스주의자들과 로스돌스키는 헤겔과 더욱 가까운 인간적인 맑스를 이 노트를 통해 확인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마찬가지로 왜 어떤 이들은 당시 새로 출현한 ‘요강’을 보며 반헤겔주의의 실마리를 찾게 되고, 왜 어떤 사람들은 ‘자본’에서 숨겨진 논리전개방식이 ‘요강’에서 노골적으로 헤겔적인가를 확인하게 되었는가.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보았는가? 맑스는 1859년에 “인류는 언제나 자신이 풀 수 있는 문제들만을 제기한다”고 했는데 맑스가 시도했던 ‘이중의 비판’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인 것일까.

  20세기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많은 맑스 해석을 둘러싼 논쟁에 함부로 뛰어들어 자신들이 숭배하는 맑스주의 학습안내자 즉 매개자를 변호하고 흉내 내고 그들의 해설서 몇 개 읽고 다른 입장들을 논박하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우선 맑스의 작품들을 차분하게 읽어보라. 팸플릿 몇 개 읽고 세상을 변혁하겠다고 김남주의 <슬픔>이라는 시처럼 당장에 “칼을 품고” 거리로 나설 게 아니라면, 그런 급박한 시대가 아니라면 굳이 원전 텍스트 전에 그에 대한 해설서들을 먼저 읽을 이유는 없다. 맑스보다 더 어렵게 글을 쓰기도 하는 그 이데올로그들의 현학과 심오한 말장난을 즐기는 게 취미가 아니라면.

  새로 나온 『경제학-철학 수고』를 읽고 나니 맑스의 나머지 작품들의 첫 번역이 또 나오면, 완역본이 나오면 그리고 절판되거나 오래 전에 번역되어 이젠 읽기 힘든 것들이 다시 번역되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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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칼 마르크스 외 지음, 박종철출판사 편집부 엮음, 김세균 감수 / 박종철출판사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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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 또한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된다. 이론은 대인적對人的으로 증명되지마자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되자마자 대인적으로 증명된다. 근본적이라 함은 사태를 뿌리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뿌리는 인간 자신이다. 독일 이론의 근본주의에 대한 명백한 증거, 그러므로 독일 이론의 실천적 에네르기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그것이 종교의 결정적이고 확실한 지양에서 출발했다는 것에 있다. 종교의 비판은 인간은 인간에게 지고한 존재라는 가르침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종교의 비판은 인간이 천대받고 예속되고 버림받으며 경멸받는 존재로 있는 모든 관계들을 전복시키라는 정언 명령으로 끝나는데, 이 관계는 견세犬稅가 구상되고 있을 때의 어떤 프랑스 인의 다음과 같은 외침에 의해서보다 더 잘 묘사될 수는 없다: 불쌍한 개들아! 사람들이 너희를 인간처럼 취급하려고 하는구나!-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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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칼 마르크스 외 지음, 박종철출판사 편집부 엮음, 김세균 감수 / 박종철출판사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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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민족들이 그들의 전사前史를 상상 속에서, 신화 속에서 체험한 것처럼 우리 독일인들은 우리의 후사後史를 사유 속에서, 철학 속에서 체험하였다. 우리는 현대의 역사적 동시대인들이지 않은 채, 그 철학적 동시대인들이다. 독일 철학은 독일 역사의 이념적 연장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실질적 역사의 미완성작들 대신에 우리의 이념적 역사의 유작, 즉 철학을 비판할 때, 우리의 비판은 현대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그 문제들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이다. 선진 민족들의 경우에는 현대적 국가 상태와의 실천적 반목인 것이, 이 상태 자체가 부재한 독일에서는 무엇보다도 이 상태의 철학적 반영과의 비판적 반목이다.-6-7쪽

독일의 법철학 및 국가 철학은 공식적인 현대적 현재와 동급으로 서 있는 유일한 독일 역사이다. 따라서 독일 민족은 이러한 자신의 몽사夢史도 자신의 현존 사태들에 덧붙여야 하며, 이러한 현존 상태들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상태의 추상적인 계속도 비판에 부쳐야 한다. 독일 민족의 미래는 자신의 실질적 국가 및 법의 상태들의 직접적 부정에도 제한될 수 없고, 자신의 이념적 국가 및 법의 상태들의 직접적 실행에도 제한될 수 없다. 왜냐하면 독일 민족은 자신의 이념적 상태들 속에 자신의 실질적 상태들의 직접적 부정을 가지고 있고, 결국 이웃 민족들에 대한 관조 속에서 자신의 이념적 상태들의 직접적 실행을 이미 거의 재유실하였기 때문이다.-7쪽

헤겔 법철학 비판이지만, 헤겔적인 사유가 눈에 띈다. 맑스는 끊임없이 '현대'를 고민했는데, 그 '현대'라는 것은 유럽의 현대일 것이고, 더 좁게 말한다면 '영국'으로 대표되는 현대일 것이다. 산업은 영국, 정치는 프랑스, 철학은 독일이 바로 현대였다.
이러한 '현대성'에 대한 강박. 철학(사유)-역사를 동급으로 보며, 철학이 조금 일찍 올 수도 있고, 역사가 조금 늦게 올 수도 있고, 거꾸로 일 수도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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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칼 마르크스 외 지음, 박종철출판사 편집부 엮음, 김세균 감수 / 박종철출판사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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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인간적 본질이 아무런 진정한 현실성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인간적 본질의 환상적 현실화인 것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그 정신적 향료가 종교인 저 세계에 대한 투쟁이다.
종교적 비참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지양은 인민의 현실적 행복의 요구이다. 그들의 상태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그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포기하라는 요구이다. 따라서 종교의 비판은 맹아적으로, 그 신성한 후광이 종교인 통곡의 골짜기에 대한 비판이다.-1-2쪽

비판은 사슬에 붙어 있는 가상의 꽃들을 잡아뜯어 버렸는데, 이는 인간이 환상도 위안도 없는 사슬을 걸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슬을 벗어 던져 버리고 살아 있는 꽃을 꺾어 가지고 위해서이다. 종교의 비판은 인간을 미몽에서 깨워 일으키는데, 이는 인간이 각성된, 분별 있는 인간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자신의 현실을 형성하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그리고 그의 현실적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종교는 단지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환상적 태양일 뿐이다.-2쪽

그러므로 진리의 피안彼岸이 사라진 뒤에, 차안此岸의 진리를 확립하는 것은 역사의 임무이다. 인간의 자기 소외의 신성한 형태가 폭로된 뒤에, 그 신성하지 않은 형태들 속의 자기 소외를 폭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역사에 봉사하는 철학의 임무이다. 이리하여 천상의 비판은 지상의 비판으로, 종교의 비판은 법의 비판으로, 신학의 비판은 정치의 비판으로 전환된다.-2쪽

명문. 니체와 맑스의 문체. 한 문장, 한 문장, 한 비유 한 비유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한문을 쓰듯이 공들여서 단어를 선택하고 배열한 것일까, 아니면 일필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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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lastmarx > 맑스 읽기Ⅲ : 맑스의 작품들

맑스 읽기 Ⅲ : 맑스의 작품들


 

  칼 맑스(Karl Marx)는 1818년에 독일 남부 트리어에서 태어나 1883년 영국 런던에서 죽었다. 그와 평생의 동무 엥겔스는 책을 쓰고 급진적인 신문과 잡지를 만들었으며 쉴 새 없이 기고했다. 맑스의 주장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출판된 것이든 노트로 남아 있다가 훗날 세상에 공개된 것이든 20세기 사상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맑스·엥겔스 저작들의 출판 상황


  20세기에 흔히 MEW로 지칭되는 『맑스·엥겔스 저작집』(Marx/Engels. Werke)이 출판됐는데 총 39책 41권과 2권의 보충판으로 구성됐다. 이 저작집에는 1835년부터 1895년 사이에 작성된 맑스와 엥겔스의 책, 글, 노트와 편지들이 실려 있다. 또한 MEGA로 불리는 『맑스·엥겔스 전집』(Marx/Engels. Gesamtausgabe)의 출간이 진행 중인데 편집위는 그 완간 시기를 대략 2030년으로 잡고 있다. 전체가 몇 백 권이 될 지 확실치 않으며 재정상의 문제로 발간이 지속될 것인지도 의문이다. MEW를 전집, MAGA를 총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한국에서는 수많은 출판사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책들을 번역하여 펴냈다. 어떤 저작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는지를 정리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체계가 없고 중복되고 난잡한 실정이다. MEW 가운데 『자본』이 이론과실천에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 백의에서 나왔고 박종철출판사에서 6권의 『맑스·엥겔스 저작선집』을 냈다. MEW나 MAGA의 한국어판 번역이 기획, 실행되지 않는 한 번역의 일관성도 주요 저작의 빠짐없는 출간도 희망하기 어렵다. <공산당 선언> 등의 인기 있는 상품만 계속 나오고 『독일 이데올로기』 같은 훌륭한 작품의 완역본은 출간 된 적이 없다.


  맑스의 주요 작품들


  1835년 17세의 맑스는 <직업 선택을 앞둔 한 젊은이의 성찰>이란 글에서 “우리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고 믿는 지위를 마음먹은 대로 차지 할 수 없다. 우리가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회적 관계가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법률가가 되기 위해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고 나중에 철학 교수가 되고자 했으나 결국 급진적인 저널리스트로 일하게 됐다. 곳곳에서 추방당했고 망명 생활을 했으며 그런 가운데 국제적인 공산주의 운동가, 이론가, 지도자가 되었다.


  맑스의 대표작은 ‘정치경제학 비판’ 『자본』이고 가장 널리 읽힌 글은 <공산주의 선언>이다. 이 글에서는 맑스의 글, 노트, 책 가운데 17개의 주요 작품들을 선정하여 집필 시기 순으로 소개하고 그 내용 일부를 음미할 것이다. 각 인용 문장은 참고한 책의 번역문을 그대로 가져왔다. 몇 개의 이름과 지명 등은 통일시켰다. 그 인용문들이 맑스 저작을 즐겨 읽어온 사람들에겐 익숙한 문구들이겠지만, 낯선 사람들에게 맑스의 작품은 이러이러한 게 있고 각 작품에서 이런 말들을 했다고 안내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1. 맑스의 박사학위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Über die Differenz der demokritischen und epikureischen Naturphilosophie』(1841)

: 1841년 맑스는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철학논문을 제출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그 동안 서양철학사에서 철저히 이단시 되고 온갖 비난을 받아오던 에피쿠로스를 새롭게 조명한다. ‘원자와 천체’를 아우르며 원자에 대한 세부적 차이가 천체라는 세계관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을 논증하는데 그의 이러한 통찰은 훗날 ‘상품과 자본주의’를 다루는 『자본』의 분석방법에서도 재현된다.


  …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학 사이의 하나의 본질적인 차이, 가장 미세한 곳까지 관통하는 그 차이가 증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값진 일이 될 것이다. 작은 것 안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은 더 큰 차원의 관계들이 포착되는 곳에서는 더욱 쉽게 보여질 수 있지만, 반대로 아주 일반적인 고찰로부터 [시작할 때는] 그 결과를 개개의 것들에서 확증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나 공허한 가정들이 아니라, 우리가 혼동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2. ‘헤겔 법철학’ 비판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

(1843)

: 이 글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의미와 혁명적 역할을 처음으로 논한다. 독일의 상황을 독일 특유의 사변적 화법으로 비판한 셈이다. 맑스는 청년헤겔학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상가였다.


  종교적 비참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철학이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그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듯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철학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 무기를 발견한다.

  모든 내적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독일 부활의 날은 갈리아의 수탉의 울음 소리에 의해 고지될 것이다.


* 이 글의 비판 대상인 헤겔은 1820년에 출간한 『법철학』의 <서문> 마지막 부분에서 “철학이 회색에 회색을 칠한다면, 생의 한 형태는 노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회색에 회색으로써는 생이 갱신될 수 없고, 다만 인식될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어둑어둑한 황혼에야 비로소 날개를 편다”라고 했다. 맑스가 이 <서설> 마지막 문장에서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를 ‘갈리아의 수탉’으로 비유한 것은 ‘미네르바의 올빼미’에 대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올빼미의 ‘황혼’과 달리 수탉은 ‘새벽’에 운다.


3.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수고)>/<파리 수고>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 1932년에야 세상에 알려진 이 노트들은 파리에서 작성되었다고 해서 ‘파리 수고’라고도 불린다. 이 노트에서 맑스는 처음으로 정치경제학 범주들을 연구하며 ‘소외된 노동’이라는 주제를 논했다. 맑스의 머리와 손을 통해 ‘고전 경제학’과 ‘헤겔 철학’이 동시에 비판된다. 이때의 문제의식들은 평생에 걸쳐 다듬어진다. 


  국민경제학은 노동자와 생산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내부의 소외를 은폐한다.

  화폐는 만물의 현실적 정신이다. … 화폐는 눈에 보이는 신이며, 모든 인간적 자연적 속성의 그 반대의 것으로의 전환이요, 사물의 보편적 혼동과 전도이다. … 화폐는 인류의 외화된 능력이다.


4. 『신성 가족』/『신성 가족, 혹은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에 반대하여』

『Die heilige Familie』(1845)

: 엥겔스와의 최초의 공동 저작인데 당시 더 유명했던 엥겔스의 이름이 앞에 나온다. 엘리트들이 아니라 민중이 역사의 창조자라는 것을 주장했고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를 표명했다.


  국민 경제학의 모든 설명 전개는 사적 소유를 전제로 삼고 있다.

  이념은 결코 낡은 세계 상태를 넘어설 수 없으며, 항상 단지 그 낡은 세계 상태의 이념들을 넘어설 수 있을 뿐이다. 이념들은 일반적으로 아무것도 실현할 수 없다.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는 실천적인 힘을 모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5.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1845)

: 맑스가 기록한 11개의 테제들로 엥겔스가 발견해 1888년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엥겔스는 “새로운 세계관의 천재적인 맹아를 간직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이라고 평했다.


  6)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용해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체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ensemble이다.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6. 『독일 이데올로기』/『독일 이데올로기.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슈티르너로 대표되는 최근의 독일 철학과 그 다양한 예언자들의 독일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Die deutsche Ideoloie』(1846)

: 1932년에야 세상에 알려진 이 걸작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로 유명하고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언급도 보인다. 이때 이데올로기의 뜻은 허위의식이다. 독일에서 헛소리하는 이들에 대해 비판한다는 뜻이다.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조건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 


7. 『철학의 빈곤』/『철학의 빈곤. 프루동 씨의 「빈곤의 철학」에 대한 응답』

『Das Elend der Philosophie』(1847)

: 프랑스의 소시민적 사회주의자 Proudhon이 1846년에 출판한 『빈곤의 철학』을 공격하기 위해 작성했다. 맑스는 이 책의 내용으로 독일노동자협회에서 강연했다.


  영국인이 인간들을 모자들로 바꾸어 놓는다면, 독일인은 그 모자들을 이념들로 바꾸어 놓는다. 그 영국인은 부유한 은행가이자 탁월한 경제학자인 리카도이며, 그 독일인은 베를린 대학의 단순한 철학 교수인 헤겔이다.

 

8. <공산주의당 선언>/<공산당 선언/공산주의 선언>

(1848)

: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으로 작성한 선언문으로 당시에는 작성자의 이름을 넣지 않았다. 마지막에 쓰인 구호는 이후 맑스와 엥겔스가 주도하는 모든 국제 노동자 운동에서 변함없는 슬로건으로 사용된다.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 부르주아의 결혼이 사실상 아내 공유제이다. /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 한 시대의 지배적 이념은 항상 지배 계급의 이념이었을 뿐이다. /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자리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9. <임금노동과 자본>

(1849 → 1891년 엥겔스가 수정)

: 1947년 브뤼셀에서 강연 했던 내용을 기초로 작성한 것이다. 엥겔스가 훗날 맑스의 연구성과를 반영해 일부 표현을 수정했다. 가령 ‘노동’을 ‘노동력’으로 고쳤다.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 면방적기는 면방적을 하는 기계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

  자본 또한 하나의 사회적 생산 관계이다. 그것은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 즉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 관계이다.


10. <1848년부터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1850)

: 파리에서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 입헌군주제 대신 공화정이 선포됐다. 맑스는 <신라인신문 정치경제 평론>에 이 혁명의 의미와 사태의 진전에 대해 연재했다. 원래 1849년까지만 다루었는데 1850년 ‘보통선거권 폐지’ 후에 비판한 글까지 하나로 묶었다. 국가, 혁명,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견해를 밝혔고 화려한 문필력과 박학다식함으로 반동들을 규탄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는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의 처지를 아주 조금 개선하는 것조차 부르주아 공화국 내부에서는 하나의 공상이며, 이 공상은 자신을 실현하려 하자마자 범죄가 되고 만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다.

  착취자는 동일하다 : 자본. 개별 자본가들은 저당권과 고리 대금업을 통해 개별 농민들을 착취하고, 자본가 계급은 국가 조세를 통해 농민 계급을 착취한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이다.

  헌법은 포위한 자들을 보호할 뿐 포위된 자들을 보호하지 않는 요새이다!


11.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1852)

: 대통령이던 루이 보나빠르뜨가 1851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맑스는 즉시 분석에 들어갔다. 동시대에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 맑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이 그런 정세와 상황을 발생시킨다는 관점으로 서술한다.


  로마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의 비용으로 살아갔던 반면, 현대 사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용으로 살아간다.(1869년 제2판 서문)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하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하에서 만든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꿈속의 악마처럼, 살아 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12.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1857~8)

: 맑스는 이 수고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정치경제학 비판’이라고 메모했는데 그 시절에 쓰던 모든 글은 다 그 주제로 분류된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노아의 방주 이전에 적어도 개요나마 명확히 하기 위해서 나의 경제학 연구를 요약하는 데 밤새 작업하고 있네”라고 했다. 여기에서 이 노트의 전체 제목을 따왔다. 이 노트들이 최초로 출간된 것은 1939년이었다. 이 작품에서 맑스는 처음으로 ‘잉여 가치’, ‘잉여 노동’, ‘불변/가변 자본’ 등의 범주를 사용했다.


  인간의 해부는 원숭이의 해부를 위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에 반해 하급 동물류에서 보이는 보다 고차원적인 것들에 대한 암시는 고차원적인 것 자체가 이미 알려져 있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경제는 고대 경제 등에 대한 열쇠를 제공해 준다.(서설)

  자본은 필연적으로 자본가이다. 그리고 자본은 필요하지만 자본가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몇몇 사회주의자들의 견해는 전적으로 오류이다.

  프루동은 가치 법칙에 따라 가치가 노동과 교환되는 것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점, 즉 이자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자본 자체를, 교환 가치에 기초한 생산 양식을, 그러므로 임노동도 지양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13.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1859)

: ‘요강’을 작성하고 『자본』을 출판하기 전에 맑스는 이 글을 통해 정치경제학 비판의 주제들과 자신의 연구 경로 등을 밝힌다. <서문>에서 ‘상부구조와 토대’라는 비유를 사용하며 유물론적 역사 파악의 핵심을 간결하고 힘차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처음으로 화폐 학설을 포함해 가치 이론을 체계적으로 서술한다.


  생산 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 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재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14. 『임금, 가격, 이윤』

『Wages, Price and Profit』(1865 → 1898)

: 1865년에 맑스가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서 영어로 강연할 때의 원고다. 1898년에 그의 막내딸 엘레노어가 서문을 달아 출판했다. 이 짧은 원고에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2년 후에 출판될 『자본』의 연구성과와 결론들이 모두 압축되어 있으며 이해하기 쉽다.


  …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것이나, 물이 극히 연소되기 쉬운 두 가지의 가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역설이다. 우리를 현혹시키기 쉬운 사물의 외양만을 포착하는 일상적인 경험으로 판단할 경우, 과학적 진리는 언제나 역설이다.

  “공정한 노동에 공정한 임금을!”이라는 보수적 표어 대신에 그들(노동자들)은 “임금제도 철폐!”라는 혁명적 구호를 자신들의 기치에 써넣어야 한다.


15. 『자본』/『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Das Kapital』/『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ekonomie』(1867)

: 맑스는 20여 년 동안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해 1,500여권의 책과 자료를 읽었고 노트로 옮겼으며 그 가운데 800여 권을 이 저작에 인용, 언급했다. 맑스는 『자본』을 가리켜 “부르주아지(지주를 포함하여)의 머리로 날아갈 가장 효과적인 미사일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고전 정치경제학을 지적으로 파괴하는 프로젝트’였는데 맑스는 이 책이 “예술적 총체를 이루고 있다”고 자부했다. 맑스는 1권만 출판했고 2권(1885년), 3권(1894년)은 엥겔스가 출판했다.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최종 목적이다.

  자본가는 오직 인격화된 자본에 지나지 않는다. … 자본은 죽은 노동인데, 이 죽은 노동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흡수함으로써만 활기를 띠며, 그리고 그것을 많이 흡수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활기를 띠는 것이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서 있을 때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하면 총자본[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노동자는 여기에서는 노동시간의 인격화에 불과하다.

 

16. <프랑스에서의 내전>/<프랑스 내전.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담화문>

(1871)

: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요청에 따라 맑스가 작성한 글로서 협회 회원들에게 보내는 담화문(격문) 형태로 발표되었다. 처음에 영어로 작성됐고 1871년 5월 30일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13일 출간됐다. 


  꼬뮌에게 내려진 해석의 다양함과 꼬뮌에 표현된 이해관계의 다양함은 이전의 모든 정부 형태가 분명하게 억압적이었음에 반해 꼬뮌은 철저하게 확장적인(expansive) 정치 형태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꼬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었다. 꼬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으며, 전유 계급에 대한 생산 계급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17. <독일 노동자 정당 강령에 대한 평주>/<고타 강령 비판>

(1875 → 1891년 발표)

: 1875년 5월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과 전독일 노동자 협회가 고타에서 통합 당대회를 가졌다. 그때 준비된 강령의 퇴보에 대해 맑스가 매우 격렬하게 비판한 글이다. 맑스는 주요 지도부에게 회람 후 돌려달라고 했다. 1891년 <신시대>를 통해 출판됐는데 엥겔스가 당시는 필요했지만 훗날에는 불필요한 표현들을 생략했다.


  권리는 사회의 경제적 형태와 이 형태가 제약하는 문화 발전보다 결코 더 높은 수준일 수 없다.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속류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를 본받아 (그리고 이를 다시 본받아 일부 민주주의자들은) 분배를 생산 방식과는 독립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 그렇게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는 주로 분배를 중심 문제로 하고 있다는 듯이 서술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의 시기가 놓여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으니, 이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맑스 읽기’를 마치며 : 비판과 실천


  지금까지 세 개의 글을 통해 ‘맑스 읽기’에 대해 논했다. 첫 글 <그들은 왜 맑스를 읽어왔나>에서 오늘날 맑스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20세기에 그들- 맑스주의자, 맑스의 후예 혹은 문예비평가 -이 맑스로부터 어떤 영감과 영향을 받았는지 살펴보았다. 두 번째 글 <맑스로 가는 길>에서는 맑스(주의)를 탐구하는 세 가지 길을 논했다. 철학사를 통해 내려오거나, 동시대의 유행 사상을 살피거나, 전기와 작품을 통해 이해하기 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연재에서 맑스의 주요 작품 17개를 선별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맑스가 썼던 글에서 인용하여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맑스학Marxology을 수행하는 맑스 전문가, 맑스주의 문헌학자가 아니라면 그의 전 저작을 집필 순서대로 통독할 필요는 없다.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경우 맑스뿐만 아니라 엥겔스, 레닌 등 고전적 맑스주의자들의 저작들을 두루 찾아 읽긴 하지만 맑스의 박사학위논문이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등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들이 현실 운동에 직접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경제학, 정치, 사회학 등의 분야의 맑스주의 학자들도 맑스의 전 저작을 고루 섭렵하진 않는다. 학자의 양심이나 성실의 문제라기보다는 오늘날 전 세계의 학문적 풍토가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학적인 탐구나 전문가로서의 기초를 다지는 게 아니라 교양 차원에서 맑스와 친해지고자 한다면 이 연재에서 추천했던 전기들과 함께 <공산주의 선언>,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임금, 가격, 이윤> 정도 읽으면 될 것이다.


  결론이 나진 않은 주제


  ‘정치경제학 비판’과 관련한 책과 노트들은 분량이 방대해서 쉽게 권하기 어렵다. 또한 이름 높은 당대 최고라는 맑스주의 전문가들 수천 명이 달려들어 지난 세기를 다 소진하며 논쟁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다. 결론이 나지 않는 쉽게 결론 낼 수 없는 주제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전문가들도 포기하거나 더 연구해야겠다며 물러서는 난제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람들은 종종 ‘쉬운, 얇은, 일목요연한, 단순명료한’ 입문서/해설서를 찾곤 한다. 분량이 많든 적든 내용이 현학적이든 세속적이든 저자가 그 주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자기 이해를 거쳐 결론을 내지 못한 상황에서 세상에 내보내는 그런 결과물들은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스피노자로부터 맑스가 가져왔던 것처럼 ‘무지가 증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고전들을 통해 지혜를 익힌, 철학과 역사를 통해 이치를 깨달은, 문학예술을 통해 글을 볼 줄 아는, 비록 자본주의 안에 살고 있지만 대안의 공동체를 희망하는 사람들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삶의 자세와 여정 속에서 만난 맑스라면 그의 대표작 『자본』에 그 모든 인류의 지혜가 ‘노아의 방주’처럼 집결되고 농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예술적 총체’는 맑스와 그 가족들이 부르주아적 출세와 풍요 그리고 건강을 포기한 채 만들어낸 피눈물의 결실이기도 하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맑스는 대학을 떠나면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나 공허한 가정들이 아니라, 우리가 혼동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와 엥겔스는 평생 경제학자들과 사상가들,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를 조롱하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자신들에 대해서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그’라고 표현한 적 없고 자신들의 사상이 위대한 ‘공산주의(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정초한 것이라고 회고한 적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라는 표현과 뜻이 맑스의 적대자들과 계승자들 모두가 이해하는 공용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식의 발상과 어의語義변화와 전도顚倒는 20세기의 서글픈 현상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죽은 맑스,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즉 이데올로그로 세계 곳곳에서 경외의 대상으로 되었다. 공동묘지에 묻힌 맑스, 바다에 뿌려진 엥겔스의 죽음과 대조적으로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일삼으며 그들의 동상을 세웠다가 무너뜨렸다.

  그들이 그렇게도 증오했던 물신숭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폐해들을 돌아보라. 이데올로기를 지양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허위의식들의 바벨탑을 건설했던 게 아니겠는가. 맑스를 읽었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의문이지만, 그 역시 지배 계급의 사상이 그 사회의 지배적 사상으로 군림하고 억압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맑스를 읽는 까닭은 당대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그것에 아첨하는 이데올로그들의 감언이설에 현혹된 채 길을 잃지 말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맑스의 비판(Kritik)과 실천(Praxis)만큼 감동적이고 유익한 나침반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오창엽 : 69년생. 청년진보당, 사회당에서 활동했고 진보매체 기자로 일했다. lastmar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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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대문화(komun.net) 9, 10, 12월호 학술연재의 마지막 글로 최종 작성일은 2006년 11월 24일이다.

맑스 읽기Ⅰ : 그들은 왜 맑스를 읽어왔나

☞ 맑스 읽기Ⅱ : 맑스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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