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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는 둥둥 ㅣ 창비시선 265
김승희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평점 :
한글은 표음문자라고 우리는 배운다. 음을 나타내는 문자라는 것이다. 'ㄱ'이라는 기호는 해당 음을 나타낸다는 것.
그러나, 문자는 음을 전달하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 모양새는 남는다. 잉여처럼.
일반인에게 잉여는 단지 잉여일 뿐이다. 그러나 그 잉여를 가지고, 그 잉여를 기반한 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시를 쓴다.
'낫 놓고 ㄱ 자도 모른다'라는 말처럼, 이제 'ㄱ'은 단지 해당 음을 나타내는 기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낫의 모양이 된다. 그녀의 시를 보자.
사랑은 ㅇ을 타고
사랑은 움직인다
사랑이 동그란 바퀴를 타고 있기 때문에,
당신밖에 할 수 없는 일,
사람에서 ㅁ을 깎아 ㅇ을 만들어서
.....ㅇ....ㅇ....ㅇ.....ㅇ.......ㅇ......
동그란 바퀴는 구르고 움직이며 때로 미끄러지기도 한다,
ㅇ....굴렁쇠......사랑은 누군가의 목을 조이기도 하고
들판 밖으로 나가 굴러 널브러지기도 하고
정착을 모르고 여기저기 쓰러지기도 하지만
깊고 찬 우물, 광야에서 발견한 우물의 ㅇ (중략)
우리는 또 언어의 ‘자의성’에 대해서 배운다. 사람이 영어로는 human인 것은 언어의 형식인 음성과 내용인 의미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고 자의적이라는 것. 그러나 또 시인은, 그 ‘사람’이라는 문자들의 결합에 주목한다. 왜 ‘사람’이라는 단어의 하나 있는 받침은 모난 네모 (ㅁ)일까. 이것을 둥글게 깍으면 ‘사랑’이 된다. 그러면 왜 사람의 받침을 깍으면 ‘사랑’이 되는 걸까. 사랑은 그래서 움직이는 것일까. 동그란 바퀴를 타고!
다음의 시도 이러한 문자의 상상력을 잘 보여준다.
저 산을 옮겨야겠다
저 산을 옮겨야겠다
저 산을 내가 옮겨야겠다
오늘 저 산을 내가 옮겨야겠다
먼저 저 산에서 ㄴ을 빼고
ㅏㅏㅏㅏ
목놓아 바깥으로 아를 풀어놓으면
산은 마침내 ㅅ만 남게 된다
두사람 비스듬 몸 맞대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ㅅ......ㅅ......ㅅ......ㅅ......
저 산이 움직인다
ㅅ......ㅅ......ㅅ......ㅅ......
저 산이 걸어간다
ㅅ......ㅅ......ㅅ......ㅅ......
산을 움직이는 두사람
ㅅ......ㅅ......ㅅ......ㅅ......
사랑하는 두사람이다
김승희의 시를 읽고 나니, 예전에 내가 했던 장난이 생각난다. 외계인 그리기.
요묘요요요요요요요요요묘묘묘묘묘묘묘요요요요요요
외계인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면 컴퓨터? 우주선? 문자들의 이미지. 그 상상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