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 중·단편 대표 소설 선집
채만식 지음, 방민호 엮음 / 다빈치 / 2000년 12월
평점 :
품절


 금년 읽은 한국 소설 중 가장 감동적인 작품이다. 이는 '채만식' 개인의 심리를 면밀히 드러내고, 그에게 호감이 있는 독자인 나에게 그를 동일시하게끔 하였다.


본 소설은 어찌보면 일제 부역행위를 하였던 채만식의 자기 변명과 같은 글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변명'의 측면도 물론 다소 보이지만, 소설의 서사를 따라가다보면 화자의 '뉘우침'에 깊게 감동하게 된다. 어찌할 수 없는 한 집안의 가장이자 소시민인 그에게(용맹하지도 못한 동시에 영리하지도 못한 나는 결국 본심도 아니면서 겉으로 복종이나 하는 용렬하고 나약한 지아비의 부류), 어찌할 수 없는 소시민 독자인 나는 감동한 것이다.


스스로 '해방의 투쟁을 꾀할 생각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서, 오직 저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데까지밖엔느 궁리가 뚫리지 못한' '약하고 용렬한 사람 됨됨이'를 말하며 자신은 '내 발로 걸어나아가' 일제 부역 행위를 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나는 나 자신이 야속하고 또한 슬펐다'라고 힘없이 자조하면서, '나다웁게 용렬스런, 기만한 도피행일 따름이었다'라고 하며 스스로를 비꼬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유치장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일제의 비판도 행한다. '정복자란 것이 피정복자의 앞에서는 도야지만치도 명색이 없는 것만은' '분명하였다' 라고 하며 카프 사건도 총독부 경찰의 조작 사건임에 틀림없다고, 자신이 속하지는 않았고 다소 갈등관계도 존재했던 카프를 두둔하기도 한다.


끝부분에 이르러 P사에서 '윤'에 의한 비판이 나오는데, 윤군에 대해서 '문장과 구성이 생경하고 서투른 혐의는 없지 못하나 사상만은 대단히 진보적인 것'이라고 은근히 비꼬면서 그의 사상은 인정하고 있다. 사실 화자는 자신을 두둔한 '김'보다 오히려 '윤'의 말이 백번 옳다고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윤'이라는 작자의 말이 옳기전에 그가 별로 마음에 들게 설정되어 있지는 않다. 이를 통해서도 채만식은 은근히 자신을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전상국의 '이인국 박사'와는 전혀 다르게, (물론 채만식과 이인국은 전혀 다른 성격의 친일 행위를 했고 친일 후에 친일에 대한 태도도 다르다) 오히려 친일을 매도하는 이에 대한 조롱적 부정적 시선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이분법적인 '친일:악/친일을 하지 않은 이:선'이라는 도식에 대해서 보다 세밀하게 층위를 나누는 사유를 전개하게끔 하도록 해준다.


물론 민족적인 견지에서 보았을 때 당연히 친일은 악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선이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더 많은 층위들과 '이유'들을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에 P사를 나와서 화자가

"죽기만 많이 못한가 보이"라고 하였을 때

'이왕 깨끗했을 제 분사를 못했을 바엔, 때가 묻어가지고 괴사라니 더욱 치사스러이"라는 '김'의 반응에

"자네가 오히려 시어미로세"라고 하며 '현기'를 느끼는 것은 채만식의 출구 없는 자책과 괴로움을 잘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를 치열하게 자책하며 반성하지만, 이는 이미 일어났던 과거인 것이다. 실로 우리 나라 일제 부역행위자들 중 절반이라도 채만식과만 같았더라면!


화자의 아내는 그래도 희망을 부여해주고 화자를 살게끔 하는 논리로 등장한다. 그래도 화자의 아이들을 위해서, '민족의 다음 세대에다 속죌 하는 정성'으로 살아가자는 이야기.


마지막 조카에게 하는 화자의 일장연설은, 실로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쌓이는 감정이 '언어화'되면 이는 상당부분 심리적 압박에서 풀려난다고 한다. 싸이코드라마나, 독서 치료등은 이를 활용한 방법이다. 화자는 조카에게 일장 연설을 한 후에 '무엇인지 모를 속 후련하고, 겸하여 안심되는 것 같은 것'을 느낀다. 프로이트 식 삼분법으로 말하자면, 화자의 자아는 이드에게 가혹한 채찍질을 받던 것을 언어화 시킴으로서 외부에 객관화 시켜서 비로소 상대화시키고 감정을 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이 소설에서 재미있었던 점은 '김'의 '윤'에 대한 발론 중 농민 중 과연 누가 강연, 소설, 신문을 읽고 우러나는 마음으로 일제 부역 행위를 했겠느냐 하는 것이다. 당대 조선 사람들, 청년들이 '지도자란 위인들'을 '개도야지만두 못 알았'다라는 것은 카프에 대한 내 뿌리깊은 집착과 의문과 애정에 대해 다시금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었다.


한국 근대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카프문학을 공부해야 된다. 김윤식 선생님의 작업도 여기서 출발한다. 임화의 이식문화론도 물론 연구할 가치가 상당한 것이지만, 그것은 나의 선생님의 선생님 뻘 선생님들이 매달린 문제이다. 내가 카프에 주목하는 것. 내가 카프를 풀기 위해서 안달하는 것은, '문예운동'으로서의 카프이다. 실상 나도 '문예운동'으로서의 '문학'을 주장한 적이 있고, 이를 위해 안달을 했었으니까 말이다.


현대 상황에서 이는 옳지 못한 노선이다. 분명하다. 70, 80년대는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물론 여전히 존재하지만, 변혁 운동으로서의 문학은 그 한계가 분명하다. 특히나 대중운동으로서의 문학을 선택하는 이는 없다. 혹은 없어야 한다.


그러면 카프 시대는 어떠했는가. 나는 도대체 이 사람들이 '민중혁명'을 부르짖으면서 왜 '문예'를 가지고 넘어섰는지 해결할 수가 없었다. 조선공산당의 하위조직으로서 당원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여러 운동들에 참여하기 위해서? 이를 믿을 수 없다. 박영희, 김기진, 안함광의 비평들, 임화의 비평과 시들. 이기영의 소설의 진정성을 믿는다. 그들은 실로 문예가 변혁을 할 것이라 믿었고, 이는 마침내 민중혁명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볼셰비키 혁명이 아닌 민중 혁명을, 전위조직으로서 이데올로기 투쟁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혁명'을 말이다.


당연하지만 카프맹원들은 알튀세르 이전이다. 알튀세르 이후에야 맑시스트들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이데올로기 투쟁의 높은 위상을 부여한다. 물론 맑시스트라면 당연히 이데올로기 투쟁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알튀세르 이전의 맑시스트에게 이데올로기란 단순히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았다면 알튀세르 이후에야 '주체를 생성하고 주체를 호명하여 재생하는' 이데올로기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카프맹원들은 그들이 결과상으로는 '이데올로기 투쟁'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의도는 그것이 중심이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바보였던가, 문맹율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민중들에게 문예로 운동을 하려 했다니. 임화의 '양말 속의 편지'나 김남천의 파업 주동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가. 그들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실천을 했으며, 그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당대를 같이 보낸 채만식은 '김'의 입을 빌려 이렇게 이야기한다. 민중들은 지도자들의 강연, 소설, 신문을 '개도야지만도 못'하게 파악했다고. 물론 이는 친일부역 소설, 강연, 신문 이야기다. 그러나 과연 이것의 영향력과 카프의 영향력은 크게 차이가 달랐을까? 카프는 민중들에게 '개도야지' 정도 수준은 됬을까? 카프가 주장했듯 민중에 밀착된 문제를 서술했기 때문에? 당대 농민들은 이기영의 <<고향>>을 읽고 희준에게 감탄했을까?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를 읽고 노동자들은 분개하고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투쟁의 결의를 다졌을까?


질문들. 질문들. 이에 대해 채만식의 목소리. 한국문학을 더욱 깊이 공부해 봐야 겠다. 그러면 대답이 나올테다. 그 대답이 내가 바라지는 않는 대답일 것이다. 그러면 그 때 되면 또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세상과 우리를 바꾸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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