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티셔츠
야코프 하인 지음, 배수아 옮김 / 샘터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굳빠이 레닌>이라는 영화가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의 상황 속에서 젊은 청년을 주인공으로 하여 일종의 '성장 영화'를 만든 것이다. 배수아가 옮긴 이 소설도 이와 유사하다. 보다 덜 휴머니즘적이고 훨씬 냉소적인 부분은 차이가 있다.

이 소설을 중반까지 읽을때, 도대체 왜 이런 소설을 쓰는가라고 불평했다. 구동독 사회주의에 대해서 불평불만에 가득찬 소년-청년의 삶. 모순과 허위로 가득찬 공산주의 세계를 비난, 비판, 냉소하는 화자.

어린이도서관에는 동독 코미디언의 레코드가 있긴 했지만 모두 삼십 년은 족히 된 것들이었다. 분명히 이 분야의 재주는 이미 멸종되어 버린 유물로 간주되는 것이 틀림없었다.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라면, 사람들은 그들이 넘쳐나는 행복 때문에 어차피 하루 종일 웃기만 해야 할 테니, 뭔가에 '대해서' 웃을 수 있는 그 특별한 존재란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11면)

이러한 동독에서의 삶은 언제나 감시받고 통제받는 사회이다. 무엇보다도 공산주의 이념은 인민들의 동의와 소통 하에 체제 이념으로 수립된 것이 아니라, '당'과 '당원'들의 일방적인 계몽과 통제 하에 이루어진다. 이러한 폭력적 계몽의 또다른 이름은 바로 파시즘이다.

당원들은 조국의 축제에 함께 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을 매번 기입해 놓았다.                                          몇몇은 그냥 적어놓기만 했지만 또 다른 경우는 초인종을 눌러서 깃발을 다는 것을 단지 잊어버린 것인지, 물어보는 수고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이 나중에 신문이나 백과사전 판매원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 그런 경험은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들이 가버리고 나면 황급하게 숨겨졌던 동독 탈출계획서가 다시 부엌 탁자 위에 펼쳐졌다. (86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맑스의 노동자의 비참한 삶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과 '자본'주의의 무한한 '자본'의 자기 증식의 파국에 대한 지적은 정작 공산주의 국가의 인민들에게는 따분한 '공자님 말씀'에 지나지 않는다. 공산주의의 실천과 함께 노동자 계급의 진정한 벗이 되어야할 당원들과 노동자계급을 위한, 그들에 의한 '당'은 인민의 증오와 야유를 받는다.

무언가 많이 들어본, 많이 보아온 광경이 아닌가. 노동자 계급 또는 인민을 '시민'으로 바꾸고 '당'을 '정권'으로 '당원'을 '정치인'으로 바꾼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 아닌가. 오늘 아침 평택에 '특공대'를 투입하지를 않나, '시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언제나 조롱거리가 되는 국회의원의 모습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이제 그래도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뒷다마 정도는 어느정도 '대놓고'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고, 일상적인 규율권력 또한 '그들' 앞에서 조롱되고 무시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중후반 동독은 아직 그러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80년대 중후반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때의 일부 '진보적'인 대학생 지식인들은 '장벽' 너머의 세계에 유토피아가 있다고 믿었다. 북한에 '정통성' 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곳의 인민들은 순박하고도 행복할 것이라 믿었다.

서독 텔레비전의 모든 것들은 더 아름다워 보였고 모조리 더 좋아 보였다. (124면)

'진보적 청년'들은 일어판 자본론을 열심히 읽었고, 달력 뒷장으로 제본한 '주체 사상'들을 탐독했다. 그들은 억압적인 파시즘 정부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고, 이러한 정부에 비판점을 마련할 수 있는 지점들을 마련하기 위해 '저쪽'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이것을 절대적으로 맹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불법적인 팸플릿들과 <<1984년>>을 읽었고 라이프찌히에서 열리는 펑크 페스티발에도 갔다. 서서히 우리의 외모가 달라져갔다. 머리카락은 점점 더 길어지고 색색으로 물들었으며 신발은 발목이 점점 더 올라가고 점점 더 더러워져갔다. 자신의 운명을 발견한 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인민경찰 한 명으로부터 나는 '반사회주의적 외모'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181면)

70년대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던 그들. '반사회주의적'과 '반사회적' 사이의 거리와 그 유사성!

세 사람 이상이 모이는 것은 '비밀집회'로 간주되고 있었다. 체포는 관공서 용어로 '수송'이라고 불렸다. 어떤 사실이 확증 될 때까지는 무조건 24시간 동안까지는 경찰서에 수송되어 있을 수 있었다. 대개 우리는 어딘가의 관할경찰서로 끌려가고 그들이 우리 소지품을 샅샅이 뒤질 수 있도록 옷을 벗어야 했다. 진술서의 내용은 하나하나의 사실 여부가 모두 검토되었으며 카세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청취되었다. 그 사이에 우리는 그 옆에서 거의 다 벗은 채로 서 있어야 했고. (187~188면)

지금 작가는 80년대 중후반 동독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유신시절이나 전두환정권의 '대한민국'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 소설 중후반까지 읽어가면서,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종의 '불편함'이었다. 학부시절부터 나에게 '진보'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의미했다. 자본주의 비판은 당연한 것이었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라고 믿어졌다. 동구권의 몰락과 북한의 인권문제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아프리카 문제 등등과 비교해 볼 때, '같은' 층위의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한쪽만 부각시키는 '부르주아 언론'에 대해서만 공격했다.

그러나, 내 태도 또한 편향되어있었다는 생각이 요즘에서야 들기 시작한다. 둘 다 함께 비판되어야 한다는 것을.

<굿바이 레닌>을 보았을 때도,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나에게 한가지 고민이 생겼다. 구소련에서 온 유학생들과, 베트남, 중국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나는 집요하게 그들의 현실을 물었고, 중국을 여행하면서도 지금 '인민'들의 삶의 '행복지수'가 그래도 대한민국보다는 괜찮지 않는가 생각했다.

그러나 젊은 유학생들은, 나와 의견을 달리했다. 그들은 모택동을 읽지 않았고, 맑스는 너무 오래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에게 '진보'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였고,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였다. 나는 우리도 이를 갖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어쩌면 이는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오래된 속담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회주의라는 이상향을 세워놓고 우리의 단점들을 비판하고, '그들'은 이제는 붕괴되어버린 공산주의 체제를 딛고 일어나기 위해서 '자본주의'라는 '저쪽'에서 어쨌든 굴러가고 있는 체제를 이상향으로 삼는다고...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로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라고 인정하고 말면,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숙제다. 왜 국가 사회주의는 몰락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땅의 인민들은 왜 그렇게 체제에 넌더리를 내는지, 그럼에도 왜 나는 아직 '맑스'를 좋아하는지, 그럼에도 최근의 '자율주의'등의 '맑스주의'에는 동의할 수 없는지. 어떻게 우리는 새로운 '진보'를 말할 수 있는지. 숙제를 내어준 책이라는 점에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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