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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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타계한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의 이제 어느 잡지에서도 인용되는 '시뮤라르크' '시뮤라시옹'과 같은 개념들을 굳이 사용하면서 이 책에 대한 감상 내지는 해석을 할 필요조차 못 느낀다.

미국에 대한, 인도계 영국계, 케임브리지 출신 사상사 교수이며 인형제작자이며 스토리 제작자인 솔랑카 교수의 좌충우돌 미국 적응기라고나 할까. '실재'가 가상을 압도하고, 가상이 실재를 변혁하는 스토리. 그 와중에 이 책의 담론 속에는 그리스 로마, 고대 인도 신화에서부터, 현대 팝까지 무수히 많은 텍스트들이 끼여들어 아우성을 지른다.

이런 잡탕죽! 미국이 예전에 '멜팅 팟'이라고 불렸던 것을(요즘은 샐러드 보울이라던데..) 기묘하게 패러디해서 '불끓는'(이 단어와 멜팅 팟의 유사성!) 그리고 방향성 없는(이것도 중요한데, furia는 부정적인 분노 뿐만 아니라 열정의 의미도 있다고 한다. 소설에서 드러나는 열정 또한 방향이 없다.) 분노로 가득찬 포스트모던한 미국을 그리고 있다. 거대담론이 사라진 시대,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는 방법은 종교와 이야기 뿐. 무한히 확장되는 이야기 속에 부유하면서, 자아를 벗어던지는 것도 한 방법이다.

'네트는 광대하다'는 말처럼, 소설 중에 솔랑카 교수가 인터넷에 만든 '세계'는 많은 이들의 참여로 증식된다. 마치 리니지 세계의 서사가 게이머들의 참여로 이루어지듯이. 물론 리니지 세계에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은 자본에 이윤을 가져다 주듯이, 솔랑카 교수의 세계도 매한가지.

이러한 솔랑카 교수의 이야기를 전유해서 '릴리푸트불레쿠스쿠'라는 '걸리버이야기'에서 나오는 가상의 나라의 이름을 혼합시킨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태생적인 건강성은, 이러한 '근대' 모던적인 이성, 계몽, 그리고 이에 기반한 혁명의 폭력성을 비판하는데 있다면, 이를 교묘히 비꼬면서 또는 이용하면서 '폭력'에 대한 반성 없는, 수단에 대한 비판 없는 목적을 위한 행위가 정당한가를 묻는 척한다. 걸리버이야기 또한 당대 정치사에 대한 통렬한 풍자담이라는 것까지 떠올린다면, 이 루쉬디 텍스트의 복잡함이 한층 부가된다.

이러한 '포스트모던함'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대신, 이 소설은 그렇게 소설 속에서 비판하던 미국식 헐리우드 영화처럼 끝이나고 만다. 이를 통해 스스로를 비꼬는 것일까? 솔랑카를 위해 목숨을 버린 여성을 뒤로하고, 혁명은 다국적군!에 의해 진압되고, 솔랑카는 런던에 돌아와서 마치 영화 '샤인'의 한장면처럼, 높게 높게 점프하며 자신의 아이에게 '나를 봐라'하면서 끝나고 만다.

아아.. 차라리, 70년전 보르헤스를 읽는 것이 더 유쾌하다. 굳이 장편으로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잡탕죽을 써야 했을까? 방향성 잃은 분노와 포스트모던적 환경의, 미국 뉴욕에서도 최상류층의 지리멸렬하고 우스꽝스러운 면모들에 대해 이 책은 너무도 '포스트모던'적이게 끊임없이 주절거린다. 솔링카가 소설 속에서 계속 '소음'과 '수다'에 대해서 참을 수 없어 한 것처럼, 이 책은 참기 힘든 주절거림으로 가득차 있고, 이는 결국 방향성 없는 분노보다는, 끊임없이 늘어지는 허무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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