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당 엄상섭 형법논집
신동운.허일태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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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를 수놓은 또 한 사람 영걸. 호당 엄상섭은 ① 처음에는 법전편찬위원회 형법각칙 기초자로서, ② 중간에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정부초안에 대한 법사위 주심으로서, ③ 마지막에는 국회 본회의 형법전 독회 석상에서 법안설명에 임하는 법사위원장 대리로서 우리 형법전 제정과정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책 vi쪽).

그 논문과 논설은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읽어도 유효한 대목이 많고 깨닫는 바가 큰데, 그야말로 맨바닥에서, 일본 문헌을 경유하긴 하였어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선진이론을 두루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독자적이고도 민주적인 형법전과 형법이론을 세워낸 과정은 참으로 경탄스럽다. 절차형법인 형사소송법의 실질적 민주화라는 과정이 뒤따라야 했지만, 이런 분들의 고뇌가 쌓여 우리는 안주하지 않는 발전의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여전히 개선 여지가 크다고는 보나, 형사법제는 적어도 여전히 후진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미국, 일본과 비교하면 우리의 것이 이제는 나은 점이 더 많다고 본다).

역사를 들여다 본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읽기 시작했다가 예컨대 제1부 제8장 ˝긴급행위에 대한 시론˝ 등은 기대 이상으로 논증이 치밀하고 완성도가 높아서 놀랐다. 깨달음과 논의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끌어올려지지 못했던 시절에, 이런 글들은 가히 우뚝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집권자에 대한 신뢰는 독재화의 첫걸음이다. - P8

신기(新奇)를 좋아하고 이념론의 매력에만 현혹되지 말고 인간의 생태를 토대로 하는 학구적 태도를 가지는 데서만 ‘사람을 해치지 않는 형법이론‘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 P9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하나 생각해 둘 것은 이 형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이미 여러 가지 법률을 제정할 때의 경험에서 잘 아시다시피 형법이라고 하는 것도 법률의 하나로서 이 법률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고 하는 것 - 즉 다시 말하면 사회도 개조하고 혹은 도의관념도 확립시키고 사회악도 모두 제거하고… 그런 여러 가지 무거운 짐을 이 형법에다가 지워가지고는 도저히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형법에다가 지나친 부담을 과했다가는 혹은 "뿔을 고치다가 소를 잡는다"는 것과 같은 결과에 돌아갈 것입니다. - P70

이것은 비근한 예입니다마는 우리가 형법에다가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면 이런 결과가 날 뿐이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치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법학자들이 말하기를 형법의 제2의성이라고도 ‘형법의 보충성‘이라고도 합니다. 형법의 보충성이라고 하는 것을 무시하고 형법만 잘 만들어 놓으면 여기에서 좌익세력도 막아지고 모든 사회문제도 해결된다고 할 때에 형법은 엄하게만 만들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법이라는 것은 그때그때에 일어나는 일을 절대적으로 해결 짓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자... 이 정도로 본다면 국회의원 동지 여러분의 건전한 양식을 가미할 때에는 아까 말씀드린 바 두 가지 원칙의 조화점이 저절로 발견될 줄 압니다. - P71

이는 내란죄와 같은 중대하고 또 정치성이 강한 범죄의 구성요건의 중요부분이 되는 ‘국헌문란‘이라는 개념이 정치력의 영향에 의하여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취의에서 설치된 조문이며, 이는 결국 우리나라처럼 후진성이 강한 국가에 있어서는 민주세력은 거개 야당의 위치에 놓여 있게 될 것이고 소수의 신흥세력이 되기 쉬울 것이라는 예상에서 이러한 민주세력의 좌절을 방지하여 그 육성을 기하기 위함이니 형법 민주화의 하나인 것이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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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개정판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2001년 판에는 통계에서 population이 ‘모집단‘이 아니라 ‘전집‘이라는 생소한 용어로 번역되어 있다. 그 외에도 일반적이지 않은 단어가 선택된 곳이 종종 보이고, 독해에 상당히 방해가 된다(instance를 ‘사례‘가 아니라 ‘범례‘로 옮긴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컨대, version을 ‘번안‘으로, class를 ‘유목‘으로 번역. 그러면서도 ‘집합‘인 set는 번역하지 않고 ‘세트‘로 표기).

Tversky와 Kahneman의 원문인 ˝Judgment under Uncertainty: Heuristics and Biases˝, Science, Vol. 185, Issue 4157 (27 Sep 1974), p. 1127에는 ˝heart attack˝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책에는 ˝뇌일혈˝로 나오는데, 저자들이 책을 내면서 맥락상 지극히 사소한 이 부분을 바꿔쓰기라도 했던 것일까.

아무튼 번역상 의구심이 계속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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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중의 고전이고, 경제학에서는 상식에 가까운 기초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의 법 체계도, 경제활동도 여전히 화폐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번번이 가치를 보정한다는 것이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경우 착각으로 인해 그런 과정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책 156쪽). 아무튼 화폐가치가 늘 변동함으로 인하여 초래되는 사회적 불공정, 사회 불만, 사회적 비효율성이 막대하고(책 132쪽), 합법의 외양을 띤 강탈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책 108쪽). [책에서는 "social injustice"를 "사회적 불공평不公平"으로 옮겼으나, injustice는 '불공정不公正'으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just에 "平"의 의미를 넘는 결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justice도 '정의正義'라 하지, '공평'이라고 하지는 않지 않는가. 번역에 관하여 후술.]


  사람들을 미몽에서 깨우기 위한 글이라, 비유와 예시가 풍부하고 쉽게 읽힌다. 8장 211쪽 이하의 '요약' 부에 책 내용 전체가 명제 식으로 요약되어 있다.


  다만...


  번역되지 않았다면 읽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기에 우선 감사한 일이나, 의구심이 드는 대목들이 있어 몇 군데 원문을 찾아보았고, 번역에 대한 신뢰가 다소 떨어졌다(먼저 확실히 밝혀두자면, 필자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고, 이 책의 옮긴이와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번역 경력이 일천하다). 참고로, 1928년에 나온 책이라 저작권이 만료되었기 때문에 웹상에서 원문 PDF 파일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https://babel.hathitrust.org/cgi/pt?id=mdp.39015020847706&view=1up&seq=7 등.


  예컨대, 8장 첫 문단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We have seen that credit control, even international credit control, is already in process of development. Such control must, in its details at least, be exercised by central banks, not by governments; these may only lay down general rules.

  But there is much more than this that governments may and should do in order that we may at least possess a reliable monetary standard. []


  역자는 아래와 같이 옮기시고는 다음 문단까지를 한 문단으로 처리하셨다(둘째 문단 뒷부분은 생략).

  신용 관리, 심지어 국제적 신용 관리가 이미 발달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신용 관리는 세부사항만이라도 정부가 아니라 중앙은행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전반적인 규약을 마련하는 선에서 끝나야 한다. 그러나 신뢰할 만한 화폐 본위를 갖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다. []


  우선 중앙은행이 하는 통화정책으로서 "credit control"은 "신용 통제"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 "신용 관리"라 하면, 개인이나 기업 관점에서 대출 등에 관한 '신용 등급'을 관리하고,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신용조회, 조사, 평가, 채권추심, 부실채권 처리 등을 통하여 '신용 위험'을 관리한다는 의미의 credit management의 뜻을 강하게 내포하게 된다(단적으로, 신용정보협회에서 시행하는 '신용관리사' 시험은 중앙은행 업무나 통화정책과는 무관하다 http://www.cica.or.kr/ 참조).

  "credit control"을 신용 통제가 아니라 신용 관리로 옮겼기 때문에 그것이 "[must] be excercised" 된다는 것도 "이루어[져야 한다]"로 두루뭉술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신용 통제 정책이) "수행", "시행", "집행", "실시"[되어야 한다] 등으로 번역되었어야 의미가 분명하다. 법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수행"으로 쓰는 경우가 왕왕 있고, 이 문단에서도 어감상 가장 가깝지 않나 싶다.

  '규약規約'이라는 말은 협의에 의한 '약속約束'으로서 규칙을 의미하나, 본문의 "general rules"에서 rules는 (중앙은행과 구체적 역할은 다르더라도) credit 'control'을 위한 것이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lay down"하는 것이므로 "규정"으로 번역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우 "general rules"도 "전반적인 규약"이 아니라 "일반규정"이 된다. 이 글의 맥락과 용법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rule"은 법학에서는 "principle" 또는 "standard"에 대비하여[예컨대, '규정 중심 규제' 대 '원칙 중심 규제';  Louis Kaplow, Rules Versus Standards: An Economic Analysis, 42 Duke Law Journal 557-629 (1992) 등 참조], 또 경제학에서는 "discretion"에 대비하여('준칙주의' 대 '재량주의') 쓰이는 특수한 질을 갖는 용어이기 때문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general"과 함께 쓰이기까지 했으므로, 흔히 쓰이는 "일반규정"으로 번역함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게 되면 정부가 각론을 정하거나 집행하지는 않고 원칙만 세워 (이를테면 법령으로) 성문화하여 둔다는 의미가 된다.

  사소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위 인용문에서 세 번 등장하는 may도 번역문에는 그 의미가 완전히 빠져 있다. "정부는 고작 일반규정을 마련할 수 있을 뿐이다. (문단 나눔) 그러나 우리가 신뢰할 만한 화폐 본위를 가질 수라도 있기 위해서 정부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은 훨씬 많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번역 문제를 더 다루지는 않는다. 뜻만 얼추 통하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학술서적이기 때문에 미묘한 말맛의 차이가 큰 오해를 낳을 수 있다.


  부글북스는 고전 번역의 틈새를 잘 찾아나가고 있다. 스스로도 여러 권 가지고 있고, 특히 애덤 스미스의 『정의에 대하여』나 케인즈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가 출간된 것을 반갑게 생각하고 있었다(아직 읽지는 못했다). 대부분을 같은 역자가 번역하셨기에 찾아보니, 부글북스의 대표로 나온다. 당신께서 직접 출판기획 및 번역 업무를 함께 하시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분량이 길지 않다고는 하여도 평이한 내용도 아닌 책들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 거의 한 달에 한 권꼴로 - 번역해내고 계신 셈인데, 아무래도 완성도를 더 높여 내시려면 한계비용이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목록을 정리하고 나니 '이 책도?' 싶고 더 엄청나서 경외심이 느껴지는데, 이런 분 번역에 관하여 왈가왈부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다. 개역판이 나온 책들이 여럿 있는 것으로 봐서 책을 내신 뒤에 어떤 식으로든 번역을 다시 점검하시기도 하는 것 같다. 아무튼 우리 지식사회와 공론장에 기여하시는 바가 매우 큰 분이심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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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을 다룬 책이 쏟아지고 있다. 알라딘의 [국내도서 > 사회과학 > 통일/북한관계] 분류하에만도 2020. 5. 22. 현재 2,106개의 상품이 등록되어 있고(90년대 이전 책 중에 등록되지 않은 상품도 많을 것이고, 다른 여러 카테고리에 흩어져 있는 책도 있다), 매월 단행본이 10권 꼴로는 꾸준히 등록되는 것 같다. 이전과 다른 것은, 이데올로기적 경쟁 대상 내지 당위적 실천의 지향으로서 북한과 통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실상 자체(인권 문제를 포함하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늘어났다는 점이다(경쟁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북한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세력이야말로 북한 없이는 죽고 못 살고, 북한을 여전히 진지하게 경쟁상대로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이탈주민을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게 된 영향도 있을 것이다. 통일부 집계에 따르면, 2000년대에는 연간 입국 인원이 2,000명~3,000명에 이르렀으나, 최근 들어서는 연 1,000명대로 줄어있다. 김정은 집권 후 국경통제가 늘어난 영향도 있을 테고,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개인의 경제활동과 재산 사유화를 어느 정도 용인하면서 살 만하게 된 사람들이 늘어서일 수도 있다. 이탈주민 다수가 중국에서 잠복기를 가진 뒤에 남한으로 온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분간 입국자는 더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2019년 말까지 북한이탈주민 3만 3천여 명이 남한에 와서 살고 있다. 인구가 늘면서 북한이탈주민 사이에 사기(詐欺), 동업 실패 등 분쟁도 늘고 있다. [통일부 > 주요 사업 > 북한이탈주민정책 > 현황 > 최근현황] https://www.unikorea.go.kr/unikorea/business/NKDefectorsPolicy/status/lately/

  


  최근 전 세계적으로 '난민 문제'가 이슈가 되다 보니,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남한에도 북한 주민이 3만 명 넘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깜짝 놀라며 난민 지위를 부여받는 것인지부터 묻는다. 우리 헌법상 북한도 대한민국 영토이고, 따라서 북한 주민도 특수한 지위를 인정받기 때문에, 법률(「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정원 조사를 거쳐 보호 여부를 결정한 뒤 하나원에서 사회적응교육을 받고, 직업훈련과 생계급여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해주면 무척 신기해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비하여 외국에서는 훨씬 더 남한과 북한을 아예 별개 나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남북이 각자 공식적으로는 통일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대한민국 헌법 제4조, 통일부 존재 등). 하나원 도서관이 정서적(+ 사상적?) 연착륙을 돕기 위하여 책을 사려깊게 갖추어 두고 있다는 이야기나, 중국 어딘가에 숨어 살다가 입국하는 경우가 많아 글말은 몰라도 입말로서 중국어는 익숙해져 입국한 탈북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중국어, 중국 관련 전공을 많이 선택하고, 호기롭게 경제학, 경영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가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는다.[통일부 > 주요 사업 > 북한이탈주민정책 > 현황 > 입국 및 정착과정] https://www.unikorea.go.kr/unikorea/business/NKDefectorsPolicy/status/entry/; 위키피디아 하나원 페이지(영문) https://en.wikipedia.org/wiki/Hanawon 참조.


  분단 체제가 장기화되면서 교류 단절 상태가 오래 지속될 줄 알았더니, 연결, 저장매체의 발달로 남북이 서로의 실상을 간접적으로나마 꽤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책 2장의 "한국 대중가요에 푹 빠진 평양 시민", "한국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시청하는 평양 시민"에서 보는 것처럼, 상당히 많은 북한(평양) 주민들이 남한 컨텐츠를 소비하고 또 동경하는 것 같다(북한이탈주민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분도 지인 소개로 북한에서 남한 드라마를 숨어서 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유학 나가있는 당 간부 자제들은 웹하드, 토렌트 사이트에 가입하여 남한 영화, 드라마, 대중가요를 '불법 다운로드'하여 즐긴다(10년도 더 전에 들은 일이다). 유튜브에서 중국인 등 외국인 관광객이 북한을 여행하고 업로드한 영상을 쉽게 만날 수 있고, 심지어 북한 쪽에서 운영하는 계정들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책이나 영상을 보면 적어도 평양만큼은 전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까지는 아님을 알 수 있다(생각보다 준수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미국에서도, 그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더라도, 특히 트럼프의 카운터 파트너로서 '김정은'에 대한 관심이 늘어있다. 서점에서도 북한 관련서를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국제 학술대회를 가보면 북한의 '장마당'이나 웬만큼 자율권을 갖는 '회사'들에 관한 이야기가 오간다(책 1장 "시장경제의 펌프, 장마당" 등 참조).


  요컨대, 북한은 '자본주의'라고까지는 못해도 '시장경제'를, 어쩔 수 없이, 부분적으로라도 도입하고 있고, 2009년 화폐개혁 실패 후 시장에 대한 통제력은 더욱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대외교역 없이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다(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 분야 전문가는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변화가 임박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다. 1년? 3년? 아무리 늦어도 10년 내에는 올 것이 오리라고 보고 있다. 그 때까지 저 체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독일, 베트남 등 모델이 거론되고 북한의 지하자원에 관하여 많은 기대를 거는 것 같지만, 이 책 328쪽 이하에 나오는 것처럼 과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로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북한도 늙고 있다[책에 인용된 KDI 보고서는 김두얼, 남재현, 김석진, 김영훈, 이상준, 송준혁, "남북한 경제통합 연구: 북한경제의 장기발전전략" https://www.kdi.re.kr/research/subjects_view.jsp?pub_no=13282인 것으로 보인다. 여담이지만, 최근 김정은의 신변을 둘러싸고 벌어진 해프닝으로 주성하 기자가 그런대로 믿을 만한 정보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된 것이었다. 다만, 이 책은 주로 기억에 의존하여 쓴 것인지 디테일에서 빈구석이 보이고(날짜가 궁금한데 책에서 찾을 수 없다거나), 책 특성상 일일이 출처를 들 수 없는 면이 있는 것도 같지만 위와 같은 문헌을 제대로 표시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그래도 지은이가 머리말에서 희망한 것처럼 "북한을 이해하는 데 대표적인 입문서"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발상을 전환하여 북한을 '에스토니아' 모델로 발전시키는 것은 어떨까. IT 기술이 격차를 빠르게 좁히는 묘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최근 미국 정부 발표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 2년간 암호화폐 거래소 해킹 등으로 수십억 달러를 빼돌렸다고 한다. 정상적 경제활동이 막혀있다 보니 이런 식으로 외화를 버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기술자 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Danny Nelson, "미국 정부, '북한 암호화폐 범죄' 목록 공개", Coindesk Korea (2020. 4. 16.) https://www.coindeskkorea.com/news/articleView.html?idxno=70735; Ian Allison, "북한, 암호화폐 이용한 거래로 경제 제재 회피" Coindesk Korea (2020. 4. 9.) https://www.coindeskkorea.com/news/articleView.html?idxno=70685; Sebastian Sinclair, "North Korean Hackers Ramp Up Efforts to Steal Crypto Amid Coronavirus Pandemic," Coindesk (May 11, 2020)].


  빠른 사회 동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법문화의 통합이라고 생각한다. 책 전반에 나오는 것처럼 북한 사회는 현재 '뇌물의 연쇄'로 돌아가고 있고, 공동체를 위해 규범을 지킨다는 의식이나 공감대가 거의 없는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위반자들을 아무리 사형시킨다 한들, 법이 먼저 공정하고 또 일관되게 집행되지 않는 한 규범력은 결코 높아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평양의 법률시장 개방이 임박했다는 소식은 주목할 만하다. 북한사회에 법치주의와 법문화부터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 강한, "(단독) 북한, 사실상 법률시장 개방… 법적 인프라 구축 본격화", 법률신문 (2020. 5. 18.) https://m.lawtimes.co.kr/Content/Article?serial=161567; 강한, "(단독) 한국 로펌, 평양 진출 추진", 법률신문 (2020. 5. 18.) https://m.lawtimes.co.kr/Content/Article?serial=161551 등 참조.


  전 세계가 방역하느라 정신이 없는 시기이지만, 그런 때일수록 더 철저하게 대비하고 움직여야 한다. 어쩌면 많은 나라가 여력이 없는 지금이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국제적 협력, 특히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인심을 쌓아두어야 한다. 중국경제가 어려움을 겪는 시기가 위기이자 결정적 기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 채권에 외국인 투자자가 모이고 있는 것은 호재다. 결국 통일자금은 그렇게 마련해야 한다. 이미 많은 기관들이 나름의 분석과 행동전략을 마련해두고 있지만, 불현듯 닥칠 제재완화와 교류증대의 상황에 먼저 발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각자 처한 위치에서 만반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덧) 133쪽에서 137쪽까지에 나오는 '대동강맥주' 이야기, 특히 1번부터 7번까지 맥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정말 매혹적이다. 현지에서 먹는 맛이 궁금하다!


  주성하 기자는 위 책 이후에도 책을 한 권 더 내셨다.




  북한의 경제와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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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2020-08-0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 글에서 통일부의 ˝북한이탈주민 입국인원 현황˝은 입국자만 집계한 것이어서, 실상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불과 며칠 전에 성범죄 수사 중 재입북한 탈북민에 관한 기사가 언론을 뒤덮기도 하였지만, 끝내 남한에 정착하지 않고(또는 못하고) 제3국으로 가는 인구도 함께 고려에 넣어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성하 기자의 다음 영상을 참조. https://youtu.be/vm2Qz8Zx7Uo

오늘 ˝좋아요˝가 달려서 보니 글에 잘못된 내용이 있음을 깨닫고, 원문을 수정하지는 않고 댓글로 남겨 둔다.
 


  흥미로운 글들을 많이 담고 있다. 2002년에 나온 책으로, 인용된 문헌들은 훨씬 더 오래된 연구들이라, 이 책만 봐서는 최근 20~30년 사이에 눈부시게 발달한 방법론을 전혀 챙길 수 없다(책에 따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은데, 1995년에 정민사에서 같은 책이 나왔던 것으로도 보인다). 현실의 법제도 운용에 곧바로 젹용될 수 있는 실용적 연구들임에도, '실증자료에 입각한 과학적 정책 수립'과는 거리가 먼 우리 문화에서는 '법심리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제대로 크지 못한 채 딴 나라 이야기로 머물러 있다.


[어느 나라나 다소간 그런 경향을 가지고는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정책 결정의 방향을 좌우하는 것은 '진영'이고, 그 진영에 의한 '프레임 선점'이다. 한 번 프레임과 방향이 서고나면 그와 배치되는 어떤 증거도, 전문가들의 우려와 이견도, 덮고 넘어가기 일쑤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bill/main.do에서 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들여다보면, 별다른 근거도 없이 당론에 따라 대충 감으로 만들어지는 법이 얼마나 많은지를 여실히 볼 수 있다. 우리가 깔보는 여러 선진국들은 법을 그 정도로까지 허술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아무리 트럼프 같은 대통령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대중의 관심을 끄는 상징적, 이데올로기적 정책 일부를 제외하고는(오늘날 정치는 거대한 비즈니스이고, 정당도 이익집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정책들은 국가의 예산과 자원, 인사권을 둘러싸고 벌이는 경쟁-선거-에서 대중을 낚기 위한 擬似쟁점(pseudo-issue)이고 미끼들이다), 효과와 부작용에 관한 경제학적 분석, 비용 편익 분석을 당연히 거치고, 다양한 입장과 각도에서 작성된 심도 깊은 논문·보고서가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제출되며(근거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는 게 아니라 정해진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근거를 만드는 경향이 최근 더 뚜렷해진 '정당 산하 연구소'들과는 다르다. 또한 국회의원들이 어떤 자료를 참고하여 법을 만드는지를 알기 어려운 우리와 달리, 입법자료가 온라인에 충분히 공개되어 여러 방식으로 검증받는다), 다른 입장에 선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공청회가 개최된다(누구라도 쉽게 온, 오프라인으로 볼 수 있다). 그 자리에서 의원들은 입장을 열어둔 채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실질상 대다수 법들에서 대통령이나 정당은 문제되지 않는다. 어쩌면 분야별 전문가 풀을 최대한 활용·존중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누가 되든 큰 틀에서 나라가 굴러가는 데는 대차가 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다만, 이번 팬데믹 국면에서 미국은, 대통령의 개인적 성향이 여러 약점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대재앙을 초래하고 있다). 연방제 국가의 경우, 신기술이나 여타 새로운 사회적 현상과 관련한 정책을 수립함에 있어서, 복수의 주(state)가 저마다 일자리 유치 등 다양한 동기에서 다른 버전의 정책을 내놓고, 연방 차원에서는 이들의 정책실험 결과를 본 뒤에 최선의 것을 연방법으로 최종 낙점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미국은 이론상 50 개 이상의 법이 실험될 수 있다). 아무튼 우리 유권자들도 미디어로 보이는 이미지만 볼 것이 아니라 대표자들이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따져 그들의 '유인구조'에 건설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다. 의안정보시스템에 공개된 회의록(특히 소위원회)을 찬찬히 보면, 겉으로는 멀쩡하게 잘 포장되어 있는 정치인들마저 실제로는 얼마나 전문성이 떨어지고 책임 없이 아무 말이나 늘어놓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들에게, 언론에 나갈 '한 방'에만 집중하면 되는 유인구조 이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도 당내 정치, 이미지 관리나 신경쓰고 정쟁에 골몰할 뿐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료와 근거를 따지지 않는 이런 문화를 바꾸려면, '링크'를 허용하지 않는 포털의 기사 제공방식에도 문제를 제기하여야 한다. 우리 이상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에서 주요 언론이 자료를 인용할 때 그 근거를 링크로 달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독자는 기사를 직접 검증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 스스로 더 조사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링크 여부는 민주적 언론 환경의 징표이다. 그런데 우리는 각 언론사가 아니라 포털의 큐레이팅을 통해 뉴스를 접해왔고(네이버는 다음카카오와 달리 기사 선별 정책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독점적 플랫폼으로서 지위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 상황에서는 '클릭장사'에 가장 큰 유인이 놓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론사들이 굳이 더 노력해서 양질의 기사를 생산하려 하지 않는다(다른 나라들에 비해 기사 길이가 짧고 독보적 기자 몇 명을 제외하고는 수준도 얕다. 언론이 대중교육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장기적으로 이는 크게 우려스럽다). 시장이 작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자료를 꼼꼼히 링크로 달아 신뢰성 높고 차별화된 기사를 내는 언론들이, 더 많은 독자, 혹은 절대 독자 수로는 아니라도 기꺼이 구독료를 낼 수 있는 독자를 많이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안타깝게도 충분히 개선되지 못한 지금의 기사들마저 독자를 유튜브에 빼앗기고 있다).]


  돌아와서, 책의 13장 중 12장이 직, 간접적으로 형사법 이슈를 다루는 논문인데, 우리는 실증에는 관심이 없고 규범만 따지느라 범죄학, 범죄심리학, 행형학과 같은 인접학문의 성과들이 법에 충분히 녹아들지 못한 채 따로 놀고 있어 씁쓸할 따름이다. 원자료(raw data)가 충분히 공개되지 않다 보니, 사회과학자들도 우리 사회의 문제는 충분히 분석하지 못하고 나날이 격차를 벌리는 외국 연구만 부럽게 바라보며 손을 빨고 있어야 하는 형편이다.


  어쨌든 법심리학은 우리나라에서 불모의 상태로 남아있는데, 그나마 Wrightsman's Psychology and the Legal System 제8판이 감사하게도 올해 3월 번역되어 나왔다. 제8판은 2013년에 나온 것인데, 미국에서는 한글 번역본이 나오기 2년 전인 2018년 3월 이미 제9판이 나왔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우리 현실이다. 이 책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최신의 지식은 어쨌든 대개 영어로 생산되고, 영어로 직접 읽지 않는 한 최소한 5~10년씩 번번이 뒤처질 수밖에 없다(연구자 풀이 두텁지 못하여 쏟아지는 최신 지식을 모두 소화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국내에서 유명한 대중 강연자 내지 지식소매상의 강연이나 대중서 몇 권을 접하고선 그것이 전부이고 최고라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너무 많다. COVID-19에 대한 상대적 성공만으로 자만하기에는 아직 우리가 이룬 것이 턱없이 적다. 겸손하게 내실을 다져야 한다.


[해외체류 경험이 전반적으로 많아지면서 다행히 예전보다는 우리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 것 같고, 고생 중인 2030세대는 윗세대에 비하여 편협한 자기중심성이 덜한 것 같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이들 세대는 이전 세대가 누렸던 기회를 누릴 수 없을 것이고, 당분간 계속 힘들 것이다. 그러나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이라 불리는 이들 능력자들이 주역이 될 15~20년 후에는 지금 응축한 실력이 분명 빛을 볼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한편 또 그럴 수 있으려면, 타인과 소수자에 대한 배타성부터 뼈를 깎는 노력으로 고쳐야 한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 혐오와 차별적 인식은 '세계가치조사' 등 여러 조사에서 최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부끄럽고 '저질스러운' 모습이다. "조나단, 한현민, 라비 '흑형'이란 말에 상처 받는 이유", BBC News 코리아 (2019. 9. 4.) https://www.youtube.com/watch?v=QnTPdBMLzOo; 세계가치조사 http://www.worldvaluessurvey.org/WVSContents.jsp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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