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중의 고전이고, 경제학에서는 상식에 가까운 기초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의 법 체계도, 경제활동도 여전히 화폐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번번이 가치를 보정한다는 것이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경우 착각으로 인해 그런 과정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책 156쪽). 아무튼 화폐가치가 늘 변동함으로 인하여 초래되는 사회적 불공정, 사회 불만, 사회적 비효율성이 막대하고(책 132쪽), 합법의 외양을 띤 강탈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책 108쪽). [책에서는 "social injustice"를 "사회적 불공평不公平"으로 옮겼으나, injustice는 '불공정不公正'으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just에 "平"의 의미를 넘는 결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justice도 '정의正義'라 하지, '공평'이라고 하지는 않지 않는가. 번역에 관하여 후술.]


  사람들을 미몽에서 깨우기 위한 글이라, 비유와 예시가 풍부하고 쉽게 읽힌다. 8장 211쪽 이하의 '요약' 부에 책 내용 전체가 명제 식으로 요약되어 있다.


  다만...


  번역되지 않았다면 읽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기에 우선 감사한 일이나, 의구심이 드는 대목들이 있어 몇 군데 원문을 찾아보았고, 번역에 대한 신뢰가 다소 떨어졌다(먼저 확실히 밝혀두자면, 필자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고, 이 책의 옮긴이와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번역 경력이 일천하다). 참고로, 1928년에 나온 책이라 저작권이 만료되었기 때문에 웹상에서 원문 PDF 파일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https://babel.hathitrust.org/cgi/pt?id=mdp.39015020847706&view=1up&seq=7 등.


  예컨대, 8장 첫 문단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We have seen that credit control, even international credit control, is already in process of development. Such control must, in its details at least, be exercised by central banks, not by governments; these may only lay down general rules.

  But there is much more than this that governments may and should do in order that we may at least possess a reliable monetary standard. []


  역자는 아래와 같이 옮기시고는 다음 문단까지를 한 문단으로 처리하셨다(둘째 문단 뒷부분은 생략).

  신용 관리, 심지어 국제적 신용 관리가 이미 발달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신용 관리는 세부사항만이라도 정부가 아니라 중앙은행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전반적인 규약을 마련하는 선에서 끝나야 한다. 그러나 신뢰할 만한 화폐 본위를 갖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다. []


  우선 중앙은행이 하는 통화정책으로서 "credit control"은 "신용 통제"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 "신용 관리"라 하면, 개인이나 기업 관점에서 대출 등에 관한 '신용 등급'을 관리하고,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신용조회, 조사, 평가, 채권추심, 부실채권 처리 등을 통하여 '신용 위험'을 관리한다는 의미의 credit management의 뜻을 강하게 내포하게 된다(단적으로, 신용정보협회에서 시행하는 '신용관리사' 시험은 중앙은행 업무나 통화정책과는 무관하다 http://www.cica.or.kr/ 참조).

  "credit control"을 신용 통제가 아니라 신용 관리로 옮겼기 때문에 그것이 "[must] be excercised" 된다는 것도 "이루어[져야 한다]"로 두루뭉술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신용 통제 정책이) "수행", "시행", "집행", "실시"[되어야 한다] 등으로 번역되었어야 의미가 분명하다. 법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수행"으로 쓰는 경우가 왕왕 있고, 이 문단에서도 어감상 가장 가깝지 않나 싶다.

  '규약規約'이라는 말은 협의에 의한 '약속約束'으로서 규칙을 의미하나, 본문의 "general rules"에서 rules는 (중앙은행과 구체적 역할은 다르더라도) credit 'control'을 위한 것이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lay down"하는 것이므로 "규정"으로 번역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우 "general rules"도 "전반적인 규약"이 아니라 "일반규정"이 된다. 이 글의 맥락과 용법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rule"은 법학에서는 "principle" 또는 "standard"에 대비하여[예컨대, '규정 중심 규제' 대 '원칙 중심 규제';  Louis Kaplow, Rules Versus Standards: An Economic Analysis, 42 Duke Law Journal 557-629 (1992) 등 참조], 또 경제학에서는 "discretion"에 대비하여('준칙주의' 대 '재량주의') 쓰이는 특수한 질을 갖는 용어이기 때문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general"과 함께 쓰이기까지 했으므로, 흔히 쓰이는 "일반규정"으로 번역함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게 되면 정부가 각론을 정하거나 집행하지는 않고 원칙만 세워 (이를테면 법령으로) 성문화하여 둔다는 의미가 된다.

  사소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위 인용문에서 세 번 등장하는 may도 번역문에는 그 의미가 완전히 빠져 있다. "정부는 고작 일반규정을 마련할 수 있을 뿐이다. (문단 나눔) 그러나 우리가 신뢰할 만한 화폐 본위를 가질 수라도 있기 위해서 정부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은 훨씬 많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번역 문제를 더 다루지는 않는다. 뜻만 얼추 통하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학술서적이기 때문에 미묘한 말맛의 차이가 큰 오해를 낳을 수 있다.


  부글북스는 고전 번역의 틈새를 잘 찾아나가고 있다. 스스로도 여러 권 가지고 있고, 특히 애덤 스미스의 『정의에 대하여』나 케인즈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가 출간된 것을 반갑게 생각하고 있었다(아직 읽지는 못했다). 대부분을 같은 역자가 번역하셨기에 찾아보니, 부글북스의 대표로 나온다. 당신께서 직접 출판기획 및 번역 업무를 함께 하시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분량이 길지 않다고는 하여도 평이한 내용도 아닌 책들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 거의 한 달에 한 권꼴로 - 번역해내고 계신 셈인데, 아무래도 완성도를 더 높여 내시려면 한계비용이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목록을 정리하고 나니 '이 책도?' 싶고 더 엄청나서 경외심이 느껴지는데, 이런 분 번역에 관하여 왈가왈부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다. 개역판이 나온 책들이 여럿 있는 것으로 봐서 책을 내신 뒤에 어떤 식으로든 번역을 다시 점검하시기도 하는 것 같다. 아무튼 우리 지식사회와 공론장에 기여하시는 바가 매우 큰 분이심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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