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를 이토록 아름답고 영웅적으로 묘사한 문장은 처음 읽는다. (물론 내 독서 경력의 가난함 덕분이지만. 흐흐.)

마르크스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서로 관계를 맺게 되면 서로를 위해 생산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하는 행위의 결과물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따라서 내가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됨으로써 즐거움과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너의 필요는 나의 활동을 보장하기에 충분할 것이며, 나는 "너의 생각과 너의 사랑 속에서 확인받게 될 것"이다.
(중략)

마르크스는 묻는다. 너의 필요가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활동을 할 수 있음을 확인해주는 것`이기보다 `내게 권력의 원천이 되는 것`은 왜일까? "(너의 필요가) 나의 생산을 장악할 힘을 너에게 주는 수단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너를 장악할 힘을 내게 주는 수단이 된다."

우리가 인간공동체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이기적인 소유자들로서 서로 관계를 맺는 한, 이와 같은 사람들 간의 도착된 분리가 끊임없이 재생산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결론 내린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의 본성, 그리고 그들이 생산(서로를 위한 생산은 물론 그들 자신을 위한 생산) 속에서 맺는 관계의 성격을 탐구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향해 나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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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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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혹시 과학 만능과 전체주의 세계관의 도래를 디스토피아적으로 묘사한 고전으로 읽는다면 결례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과학의 진실 추구 정신을 무엇보다 경계하며, 전체주의의 중추적 핵심인 뿌리 깊은 불신세력으로서의 전체에 대항하는 암세포 무리가 부재한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기계들의 세계에 떨어진 셰익스피어 덕후 `야만인 존`의 좌충우돌은 돈키호테만큼이나 배꼽을 빼는데 전자나 후자 모두 뼛속까지 체제와 관습의 노예라는 사실에서만큼은 하등 다르지 않다.
소설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16장 이후의 파트는 마치 이반의 대심문관 장면을 연상시키는데 더 정교하고 지금도 결코 낡지 않았다. 차라리 우리는 통제관의 세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무섭게도 팔딱팔딱 살아 있다. 멋진 신세계를 당신이 바라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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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김경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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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나와 같은 독자도 이 책을 읽고난 뒤 `한나 아렌트는 이런 주장을 담은 책들을 써왔군` 하고 아는 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입문서로 크게 나무랄 데 없다. 내용도 문장도 명료하다. 저자는 사상가로서의 한나 아렌트를 좋아하는 게 틀림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좋은 점을 낯선 사람에게 잘 전달하고 싶을 때의 성실함과 친절함마저 느껴진다. 편집도 가독성에 최적화되어 있다.
˝한나 아렌트라고... 한 번 만나 볼래?˝ 한다면 이 책으로 시작하길 주저할 필요는 없다.

다만, 책의 종장에 이르러 전개되는 필자의 주장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한나 아렌트의 저술을 대단히 개괄하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을 무모하게 개괄하자면 반전체주의자로서의 한나 아렌트는 공공의 복수성이 존중되는 무대로서 정치의 담보와 행위(한나 아렌트에게 행위란 의사소통을 통해 상대에게 작용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설득하기와 같은 행동) 하는 인간으로 존재하려는 노력을 무엇보다 우선적인 가치로 둔다. 만년의 한나 아렌트는 사유와 행위의 상관관계, 즉 사유에서 행위로 나아가야만 하는 당위성을 고찰하기 위해 《정신의 삶》을 집필하던 중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 미완의 작품에서 전개되었을 법한 그녀의 사유를 미루어 짐작해 이 책의 저자는 오늘날의 우리가 정치적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논증하고 있는데... 그러한 논증의 배경은 이해 못 할 바 아니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혹시나 그 석연치 않음에 대해 궁금증이 이시는 분은 직접 독서를 하셔도 좋다. 뭐라 해도 한나 아렌트의 입문서로는 읽어도 아깝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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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한 도형의 세계 - 이야기로 배우는 기하학의 원리
안나 체라솔리 지음, 박진아 옮김, 김인강 감수 / 에코리브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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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위 `수포자`라 불리는 유형에서도 그 전형에 속하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플라톤은 그가 운영한 학교인 아카데메이아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출입을 금지한다는 푯말을 써붙였다는데, 나는 플라톤의 권고를 무시하고 철학에 기웃거렸다. 하지만 플라톤이 맞고 내가 틀렸다.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기하학을 모르고는 철학의 중심부로 들어갈 수가 없다. 아무렴 그렇더이다 플 선생. 그럼 수포자인 내게 누가 기하학을 가르쳐줄 것인가!

단적으로 얘기해서 나는 순도 높은(?) 수포자이기 때문에 수포자가, 그것도 때 늦은 시기에 수학에 대한 관심을 갖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 책은 그런 수포자들의 때 늦은 구애를 위한 최상의 베르길리우스다. 시리즈도 여러 개 있다. 저자에게 영광 있으라.

덧) 어디까지나 순도 높은 수포자의 입장에서 내린 평가이니 유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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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2-26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학을 머리 쓰면서 공부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수학을 눈으로 보면서 천천히 이해하는 것은 좋았어요. 물론 저도 고등학생 때 수포자였습니당 ㅎㅎㅎ

2016-02-26 17:43   좋아요 0 | URL
눈으로 보면서 천천히 이해하는 수학의 즐거움이 뭔지 저도 이 친절한 책을 통해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는 수포자로서 수학이 사실 즐거울 수도 있다는 경험 때문에 즐겁습니다. ^^

깊이에의강요 2016-02-2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포자에게 희소식이네요^^
수학은 일찍이 포기했으나
그 즐거움은 항상 느껴보고 싶었거든요~~


2016-02-27 13:51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그런 입장이어서 이 책이 고맙더라구요. ^^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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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프리모 레비라는 작가의 책을 읽기 전에 그에 대한 소개를 방송에서 들은 적이 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작가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으며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자 증언자로서 대단히 훌륭한 글을 썼다는 것, 그리고 결국은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 결말이 당시의 내게는 충격이었다. 청취를 중단하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세상에... 나는 추상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채로 라거(당시에는 이 용어를 몰랐다) 자체가 지옥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인간이 만들어낸 지상의 지옥으로써 그만한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그리고 하고 있다). 그런데 지옥에서도 살아남았던 이가 연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세상에...

도쿄케이자이 대학의 서경식 교수는 부록으로 실린 해설에서, 자신은 이 책을 읽고난 뒤 작가가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썼다(이는 예언적 성격의 발언은 아니다. 당시 프리모 레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했다. 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이해했다고 썼다. 프리모 레비는 라거 내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했다. 자살은 인간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적 삶을 강요받고 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자살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이 책의 8장인 <독일인들의 편지>를 읽다가 나 자신이 프리모 레비의 미약한 희망과 심대한 고통과 명철한 이성으로 엮인 이 분석적 증언을 역사적 당사자들의 입장과 얼마나 큰 시차를 두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비단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내내 그것을 경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대가 지날 수록 역사의 무지와 망각으로 인한 간극의 확장에서 어떤 절망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 내 마음에 닿은 그 뒤부터 마음이 편치 않다. 나는 한 사람의 자살에 관해 말할 때면 언제나 자신이 없지만, 적어도 일본의 전체주의화가 도드라지게 확산되고 있는 현상에 일갈을 아끼지 않는 서경식 교수가 십분 이해했다는 작가의 자살에, 앞서 말한 종류의 절망이 손길을 내밀었다고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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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1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1 16:14   좋아요 1 | URL
이 책의 6장인 <아우슈비츠의 지식인>은 그 장 아메리에 대한 공감이자 비판의 장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유레카님의 언급 덕분에 다시 한 번 그 장을 읽다가 장 아메리의 자살을 두고 프리모 레비가 이렇게 논한 대목이 있어서 옮겨 봅니다.

˝온 세상과 `주먹다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을 순 있지만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곧 패배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10년이 되지 않아 같은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줄을 작가 자신이 예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장 아메리는 프랑스 작가로 살기를 원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프리모 레비는 쓰고 있네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장 아메리의 본명은 한스 마이어로 오스트리아의 독일 합병 당시 조국을 떠나면서 스스로 개명했다고 합니다.

2016-02-11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2-11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비와 아메리는 살아 남아 있었어도 죽을 때까지 수용소 안에서 지내는 기분이 들었을 겁니다.

2016-02-11 19:51   좋아요 0 | URL
공감합니다. 프리모 레비의 경우 오히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소명의식으로써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