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들의 놀이터를 표방하고(라고 잡지 어디에선가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발매 중인 악스트가 발간된 이래로 꾸준히 사기는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값이 싸다. 솔직히 말하면 거저라는 느낌이다. 2,900원이라니. 커피보다 싸다.
솔직히 말하면 작가 인터뷰 코너 이외에는 거의 읽지 않는다. 이번에는 듀나라는 작가의 인터뷰가 실려 있어서 그것만 읽고 또 구석에 쌓아두었다.

나는 듀나라는 작가를 전혀 몰랐다. 그런데 어쩐지 고약하고 음흉한 구석이 흡사 나와 닮은 듯 해 관심이 갔다. 물론 무섭도록 지적이고 성실하다는 인상도 받았지만 그것은 나와 닮지 않은 부분으로써 흥미를 느꼈다. 작가는 서면으로 응했던 인터뷰의 내용이 영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내가 느끼기로는 악스트 겨우 이 정도야? 하는 심정으로 읽혔다. 애정이 있다. 편집부 일동이 새겨들을 줄로 안다. 나는 그냥 구석에 쌓아두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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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의 형성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근대국가의 형성에 어떻게 문학이 기여했는지를 논증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 대로 그저 문학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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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 속 고전 - 나를 견디게 해준 책들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나무연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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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스치는 인연이란, 그 표현에서 묻어나는 허무의 정서만큼의 허무도 가늠할 새 없이 깨끗하게 사라진다. 독서의 세계도 근본은 별로 다르지 않아서 우리의 끝 없는 책 읽기 속에서 망각의 저 편으로 넘어가는 책들의 행렬 또한 끝이 없다. 우리는 언제 작별을 한 지 모르는 것처럼 그 만남도 잊는다.
나는 사실 거기에 만남이란 말을 붙이고 싶지 않다. 혹은 꺼려진다. 만남이란 그보다는 훨씬 좁은 문을 통과하기를 요구한다. 만남은 상대를 기억하기를 요구하고, 내 가슴을 휘젓기를 요구하며, 뜨겁고 시린 감정의 충동과 동시에 냉철한 인식을 요구한다. 그 상대가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와 연인이나 친구, 혹은 사제 관계가 될 것이다. 그 상대가 책이라면 아마 나는 거기에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늘 곁에 둘 것이다.

재일조선인 학자이자 교수, 작가인 서경식 선생의 고전도 표현은 다를 수 있지만 가치의 맥락은 잇닿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인연으로 선생의 글을 처음 접하게 되었으나 이미 여러 권의 저서가 국내에도 출간되어 있다.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나와 같이 선생의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이번의 책이 선생의 삶과 정신편력을 들여다보는 데는 무척 탁월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고전의 목록이란 선생의 삶과 가치관에 묵직한 영향력을 끼친 스승이자 벗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 코리안 디아스포라이면서 지식인이기도 한 선생의 고전 목록엔 동류 의식을 공감했을 만한 작가들, 이를테면 에드워드 사이드, 프리모 레비, 루쉰, 이브라힘 수스 등의 저서가 다수를 차지한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전체주의자, 또는 그에 동조하는 반이성적 인간이자 반윤리적 인간들의 잔혹한 탄압 속에서 이성과 양심, 인간의 존엄이라는 보편의 가치를 신념으로 끝까지 투쟁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이 어리석음과의 투쟁의 역사에는 마침표가 없다. 파시스트들의 참극을 경험한 유대인의 역사가 팔레스타인인에게 전가되고, 전범국가로서 인류 앞에 사죄한 일본은 군국주의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 국민을 혼돈과 억압으로 몰고 가는 시대의 재현을 손수 택했다. 이성과 양심과 인간의 존엄을 앞장 서 외치는 이들의 수는 상대적으로 늘 적어 보인다. 그들은 언제나 패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니, 결코 그럴 리 없다는 신념의 기록들이 선생의 정신적 기둥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단한 기둥이라기보다 금이 가고 위태로운 기둥이다.

˝˝이 <망각을 위한 기념>을 나는 20대 후반부터 30대에 걸쳐 글자 그대로 읽고 또 읽었다. (......) 그런 시절에 나는 조국의 동포들이 겪고 있던 고통을 ˝잊고 싶었다.˝ 그래서 루쉰의 이 글을 읽고 또 읽었던 것이다.
이제 이 글을 다시 읽어보니 내 비관의 질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젊었을 때의 나는 ˝밤은 길고, 갈 길 또한 멀다˝는 것을 비관했다. 하지만 지금은 ˝설령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그들을 생각해내고 다시 그들에 대해 말할 날이 오리라는 것˝이라는 부분을 비관하고 있다. 사람들은 희생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과거에서 배우지 않는다. 무서운 속도로 모든 것이 천박해지고 있다. 루쉰 따위는 읽지 않으며, 설령 읽는다 해도 그 부름의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미학자로서의 심미적 욕망 또한 선생의 또 다른 정신적 기둥이다.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관장, 옥스퍼드 대학 교수 등을 지낸 미술 평론가 케네스 클라크의 저서 《그림을 본다는 것》을 다루는 다음과 같은 대목,

˝˝성모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그 움직임 때문에 얼굴의 육감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하나하나의 붓 자국 배후에 보이는 불굴의 의지는 거의 조각가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붓 움직임을 더듬어 가노라면 사람들은 어느덧 그것이 기술적인 확실성의 결과가 아니라 도덕적인 확신의 결과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 기적과 같은 작품(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이 화가의 ˝도덕적인 확신의 결과˝인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누가 안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이런 어투의 상승효과 덕에 작품이 주는 감명을 ˝아무렴, 그렇겠지˝ 하고 납득하게 된다.˝˝

회화에서 비롯되는 심미성에 더해 그것을 아름답고 지적인 문장으로 포착해 서술함으로써 증폭되는 미적 감각 앞에 즐거움을 아끼지 않는다. 나아가 마네와 고야라는 두 거장을 비교하는 케네스 클라크의 글이 있다. 그는 위대한 화가로서 마네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파리 사회 상류 중산계급의 가치관에 지배당했다˝고 덧붙인 뒤 ˝평생 궁정화가로 일했음에도 늘 혁명적이었다˝고 고야를 평가하면서 권위를 증오하면서도 ˝천부적 재주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천재로 치켜세우는데 선생은 케네스 클라크의 이와 같은 글을 ˝최고의 예술에 어울리는 최고의 말˝이라며 감탄한다. 예술 감상의 궁극적 목적이 작품 뿐만이 아니라 작가라는 인간 조건의 격을 통찰하는 데 있음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선생은 책 서문에 단편화 되는 인간이 오늘날 급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히 우려하며 이것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역시 파시즘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의 우경화, 전체주의화로 나타나고 있다고 해석한다. 스스로 의심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려는 노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우려할 수밖에 없는 사태에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달리 어쩌겠는가, 독서라도 권해보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단면`으로 자신만의 `고전`을 찾아내고 그것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과정이야말로 형식화한 지식이 아니라 진정한 지적 태도로서의 교양이며, 인간을 단편화하려는 힘에 맞서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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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인용문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익사》에서 아버지 `조코 코기토`가 장애를 가진 그의 아들 `아카리`와 모종의 사건으로 사이가 멀어진 상황을 두고 조코의 부인이자 아카리의 엄마인 `치카시`가 시누이 `아사`와의 통화 중 남편이자 아들의 아버지를 향한 불만 섞인 속내를 드러낸 대목이다.
소설가인 아버지 조코는 소설가로서 언젠가는 기필코 쓰려고 마음 먹었던 필생의 작품이 만년에 들어 좌초되자 커다란 우울에 빠져 들었다. 그러던 와중 생전에 서로를 깊이 이해했던 친구로부터의 유품으로 친구 자신의 메모가 곁들여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악보를 우편으로 받았다. 때마침 아들의 검진을 위해 병원에 방문해야 했던 조코는 우편으로 받은 소포를 포장 채로 가지고 갔다. 소포의 내용물이 악보라는 것은 병원에서 진찰을 기다리는 대기 중에 확인하고 알게 된 것이다. 조코의 아들 아카리는 음악에 눈부신 재능을 지니고 있고, 이미 클래식 작곡가로서 음반을 냈을 정도의 인물이어서 베토벤의 악보에 관심을 나타낸 것은 당연했다. 조코는 후에 지우개로 지울 생각으로 아카리에게 연필로 악보에 표시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는 심지어 아들에게 그 베토벤의 소나타 악보에서 모차르트 소나타에도 나타나는 공통점을 표시해주지 않겠느냐고 부탁까지 할 정도였다. 그리고 조코는 진료비와 처방전을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데 이때 사고가 일어난다. 악보에 몰두한 아카리에게 관심을 가진 누군가가 자신의 볼펜을 빌려주었고 아카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볼펜을 사용했던 것이다. 조코는 악보에 볼펜 자국을 보고 자신의 아들을 향해 ˝넌 바보구나!˝ 라고 화를 내고 만다. 아카리가 얼마나 깊은 상심에 빠져 있는지, 이 사건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이미 길어진 글이 더 길어질 것이므로 인용된 엄마의 반응으로 유추해주길 부탁드린다.

독서 중 가장 강렬한 깨달음을 얻는 순간은 문장이 독자의 구체적 삶에 대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듯 울리는 때가 아닐까?
인용에 다소 길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정황설명을 덧붙이기까지 한 이유는 결국 내가 이 문장, 정확히 말하자면 소설의 어떠한 맥락 속에서 이어진 이 문장이 주는 울림에 나 자신을 깊이 반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구체적 삶에 관여된 만큼 전적으로 사적인 경험이겠지만 거기엔 언제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환원될 부분이 있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그런 맥락에서 무언가 쓰고 싶어진 것이다.
엄마인 치카시는 아빠로서의 조코 코기토에게 아들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못내 말하기 어려웠던 불만이 있다. 글에는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아버지 조코 코기토는 아들을 대할 때면 늘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대체로 자신의 권위를 바탕으로(조코 코기토는 노벨 문학상까지 수여한 명망 있는 문학가다. 물론이지만 조코 코기토라는 인물은 오에 겐자부로 자신의 문학적 거울상이다) 자연스럽게 아들을 억압한다. 이때의 억압은 음악을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술을 마시고는 혼자서 좋은 생각이랍시고, 아카리가 흥미를 표할 거라고 여기고 새로운 CD를 찾아오거나 하는 짓˝ 정도라고 봐도 좋다(나를 포함한 개중의 누군가는 여기에서 사실 솔직히 말해 어떤 거리감을 느낀다고 해도 좋다. 겨우 그 정도를 가지고, 라는 식의.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하면 치카시라는 여성의 섬세함과 인품에 감탄함과 동시에 차라리 우리의 둔감함을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치카시의 비난을 곱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앞서 언급한 바 있듯 나의 구체적 경험의 세계 속에서 이와 같은 억압을 별도의 반성도 없이 저질러왔다는 깨달음이 피할 길도 없는 홍수처럼 나를 휩쓸어 버린 것이다. 물론 우리는 지도와 억압의 그 모호한 경계를 분명히 구분해야 하기는 할 것이다. 그리고 실상 우리가 우리와 가까운 관계인 상대를 대할 수록 그 경계는 더욱 모호하고 구분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의 경우를 돌아보자면 나는 어디까지나 ˝아카리가 흥미를 표할 거라고 여기고 새로운 CD를 찾아오거나 하는 짓˝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을 역시나 반성 없이 해왔다. ˝음악을 듣는 자유가 지켜져야 하듯 음악을 듣지 않는 자유도 지켜져야˝한다는 ˝기본적 인권˝은 무지의 소산이라는 듯이.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상대에게 주입하려는 파생된 욕망인 동시에, 타자의 위에서 군림하기 위해 자신이라는 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기만적 행동에 불과한 것이라고, 치카시는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아카리에게 그 사람이 화해의 손을 내미는 방법이 표면적이거나 작위적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또 언제나 그런 식으로 화해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아카리에 대한 그 사람의 억압은 늘 존재해왔던 것 아닐까?
지금의, 아카리와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궁지에 몰린 상황을 그 사람이 여태까지 해온 방식으로 수습하려 한다면 나로서는 반대야. 특히 술을 마시고는 혼자서 좋은 생각이랍시고, 아카리가 흥미를 표할 거라 여기고 새로운 CD를 찾아오거나 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아주었으면 해. 아카리의 삶에서 음악은 무엇보다 소중한 요소로 존재해왔어. 그런 음악에 대해 자유의지로 듣는다(강제로 듣지는 않는다)는 원리는, 절대로 지켜져야 해. 음악을 듣는 자유가 지켜져야 하듯 음악을 듣지 않는 자유도 지켜져야 해. 그거야말로 그 사람이 항상 강조하는 `기본적 인권`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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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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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어떤 소설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불멸을 감히 기대하게 만든다. 한 인간의 삶이 격변의 시대라는 노정 위에 놓여 있을 때조차, 역사적 사건이나 추상적 이데올로기로 추렴될 수 없는, 성공과 실패라는 해석의 독단으로부터 늘 춤추는, 결코 완전히 해석되지 않는 동시에 또 타인의 이성과 감성 모두에 공명하는, 그러한 사건의 흐름들을 정제된 언어로 포착해내어 비추는데 성공하는 소설을 읽을 때는 정말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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