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장자가 그러한가? 장자는 분명 대붕과 참새를 나누고, 대붕과 참새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작은 앎은 큰 앎에 미치지 못한 172 다’고 한다. - P171

그런 점에서 나는 곽상을 형이상학적으로 풀이하는 것을 반대한다. 형이상학의 결과가 이렇게 잔혹하고 냉정한 것일진대, 무감하고 무력하게 어떤 이의 사고를 받아들이는 것은 철학자가 할 일이 아니다. ‘무심코 형이상학’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사고’는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 P181

그러나 실상은 현학이 추구하고 있는 매우 분명한 ‘문제현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제도냐, 본성이냐?’를 묻는 토론이다. 당시의 표현대로는 ‘명교名敎’와 ‘자연自然’이다. 이는 인간을 어떤 제도 속에서 신분을 지우고 그것에 맞추어 나가게 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본성을 자연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를 따지는 문제였다. - P217

제도는 다름 아닌 이 유가의 천지지심이 드러나는 장소이다. 제도 없이 무나 도가 쓰일 곳도, 천지지심의 발휘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왕필의 궁극적인 결론이었다. 따라서 왕필은 "하늘은 오행을 낳고 만물을 쓰임이 없도록 하며, 성인은 오 224 륜을 행하고 말없이 교화한다"라고 노자의 철학을 정리하는 것이다. ‘만물을 쓰임이 없도록 한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만물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해도 만물은 각기 쓰임이 되는 바를 위해 맞추어 나아간다는 것이며, 성인의 다섯 가르침이란 다름 아닌 유가의 강목인 오륜이 행해지는 제도를 일컫는 것이다. - P223

위의 문제에 대해 곽상은 대략 아래와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 성은 타고난 것으로 운명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성을 바꾼다는 것은 아무나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고, 바로 자신의 성에 맞게 사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는 길이다. 또한 성을 따라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다. 성을 벗어나 산다는 것은 곧 불행과 죽음을 뜻하며 성의 굴레 속에서 안락하고 편안한 생을 추구할 것을 강조한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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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교육 기간이 늘어나고 결혼 연령과 첫 자녀 출산 연령이 계속 높아지면서, 커플인 남녀가 서로 다르게 받는 이런 압박은 더욱 강해진다. 그래서 30세 전후에 안정적인 커플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여자는, 출산이라는 중요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남은 시간이 겨우 몇 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여자는 남자보다 커플 관계에 더 의존적이며, 따라서 남자는 여자를 성적으로 지배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여자가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이유는 이것이 커플을 이루기 위해 여자가 지닌 수단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성관계를 맺는 것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점점 더 중요한 수단이 되어왔다. 반면에 남자는 이런 계획 없이 여자와 잔다. 어떤 남자 주변에 안정적인 커플을 이룰 것을 기대하면서 그와 성관계를 맺는 여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남자는 아무하고도 커플이 되지 않는 게 유리하다. 적어도 남편감으로 여겨지는 남자들의 경우에는 그렇다. 일자리가 없거나, 너무 가난하거나, 아무 매력이 없거나, 너무 늙어서 성매매 여성과의 성관계로 만족해야 하는 남자의 경우는 이와 전혀 다르다. - P96

그런데 역설적으로, 남자는 자신이 애착 없는 섹스를 추구하면서도 애착 없는 섹스를 추구하는 여자, 이른바 ‘창녀’를 욕한다. 테레즈 아르고는, 십 대 남자들이 먼저 나서서 또래 여자들을 ‘창녀’로 낙인찍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자는 섹스할 기회를 잃지 않을 뿐 아니라, 섹스 면에서 그 어떤 도전도 직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애착 없는 섹스를 추구하는 여자들은 다른 여자들보다 성 체험의 강도에 훨씬 더 민감하다. 그래서 남자는 자신에게 사물처럼 주어지는 존재가 아닌 동등한 파트너를 상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 애착 있는 섹스를 추구하는 여자들 때문에 남자들이 여자와 더불어 ‘섹스하는’ 대신 계속 여자를 ‘따먹을’ 수 있는 것이다. - P97

성별에 따라서 여자는 애착 있는 섹스, 남자는 애착 없는 섹스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불평등이 생길 뿐 아니라 남녀 모두의 성 경험이 빈약해진다. 남자는 되도록 많은 섹스를 하려고 하고, 이 때문에 이성애 관계의 섹스는 성적 학대-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줄기차게 규탄해온 가학적인 관계-나 소비 행위에 가까워지지만, 여자는 성행위를 자신이 하는 그 행위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의 조건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남자는 기대 수준이 높은 성 파트너를 만날 가능성이 없어지고, 여자는 쾌감의 진정한 주쳊체가 될 기회를 못 얻는다. 남녀가 제도의 기대에 부응하는지 여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 제도의 특징은 우리의 인식과 ㅁ정, 기대에 ‘젠더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 규범과 법 규범은 애착 없는 섹스와 이런 섹스를 확산시킬 만한 모든 것을 끊임없이 비난한다. 그래서 성매매, 포르노그래피, 커플이 아닌 사람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는 행위를 비난한다. 성적 서비스를 구매하는 일은 이제 금지되어 있고, 나머지 두 행위는 미성년자를 오염시키고 타락시키고 그들이 장래에 할 성생활을 해친다는 이유로 특정한 사람과 더불어,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시간에만 이루어지도록 제한된다. 페미니스트 움직임에서와 마찬가지로 공권력 99 에서도 여성이 구상한 가족의 계획에 맞추어 남성의 성을 ‘문명화’시키기 위해 애착 있는 섹스의 편을 든다. 공권력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여성이 애착 없는 섹스를 할 때 부각되는 타락한 여성의 모습, 남성의 욕망에 전적으로 부응하는 여성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로 애착 있는 섹스를 추구하는 여성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쾌락을 커플의 계획에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커플 제도는 커플 바깥뿐 아니라 커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의 모습 또한 빚어낸다. 19세기 커플 관계와 달리 현대 커플 관계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성적 욕망인데, 이 욕망을 장기적으로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자가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자녀가 있는 커플이 헤어질 때 여러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파트너를 결합해주던 욕망이 사라져도 이 커플 관게를 쉽사리 깰 수 없다. 성적으로 행복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강하지 않다면 이런 상황이 크게 심각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즉,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가 아니고, 커플이 각기 애인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 평생 일종의 금욕 생활을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혹시 커플 중 한 사람이 잠간 애인을 사귀는 일이라도 생기면 ‘배신당한’ 파트너는 당연히 끔찍한 위협을 느낀다. 간통은 커플의 기반과 커플 관계에 따르는 모든 약속을 뒤흔들며, 많은 경우 커플을 갈라서게 만든다. 성 혁명 이전에는 간통 때문에 커플 관계가 깨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커플은 사회 제도로서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간통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 그런데 오늘날의 커플은 욕망이나 감정 같은 참으로 불안정한 정황으로 두 사람이 결합한 것이기 때문에, 간통이란 사건을 견딜 만큼 강력하지 않다. 바로 이런 이유로 폴리아모리polyamory(동시의 여러 명의 성애 대상을 가질 수 있는 것. ‘비독점적 다자연애’라고도 부른다-옮긴이)와 폴리피델리티polyfidelity(성애로 맺어진 3인 이상이 공동생활을 하는 것-옮긴이) 같은 방식이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폴리피델리티는 커플을 취약하게 만드는 주요 요소를 제거하되 사실상 커플 개념을 유지한다. 이런 공동생활이 장기간 유지되는 경우가 아주 드물게 보이긴 하지만, 이는 공동체의 한 사람이 강자의 위치에서 보다 약한 파트너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한 결과다. - P98

서로를 성적으로 욕망하는 관계라는 이상적인 커플의 모습 101 과 실제 현실 간의 이러한 불협화음으로 인해, 감정 있는 섹스라는 개념은 결국 터무니없는 모순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몇 년이 지나면 배우자에 대해 지녔던 ‘사랑’과 동시에 욕망이 꺼지기 때문이다. 이때에야 두 파트너는 자신들이 ‘사랑’이라 부르던 것이 실제로는 가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일시적인 불장난 상대에게 느낄 만한 성적 욕망보다 더 강한 욕망을 덮어주던 가면, 또는 모성 프로젝트를 이루기 위한 커플의 이해관계를 가리던 가면 말이다.
 요컨대, 커플에게 섹스는 몇 년 후면 섹스 때문에 헤어지고 말 사람들을 결합하는 역할밖에 해주지 않는다. 헤어지는 데 성공할 수 있는 운 좋은 사람들한테는 말이다. 만일 커플 사이에 종속 관계가 생기고 이로 인해 배우자를 멸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벌어지면, 경찰과 사법 당국이 나서서 옛 연인들을 갈라놓는다. 섹스가 커플을 결합할 때에는 다른 모든 사람이 배제된다. 커플이 제삼자를 관계에 끌어들일 때, 이는 대체로 소비 행위와 같은 감정 없는 섹스라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 제삼자와 맺는 관계가 혹시라도 애착이나 감정 있는 관계가 되면, 커플은 종말을 고한다. - P100

그런데 최근 몇 년 전부터 부부 커플은 더욱 파괴적인 다른 힘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이 힘은 섹스를 도구 삼아 사람들을 분리시킬 뿐 아니라 커플 제도 자체를 끝장내려 한다. 그렇다. 바로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처음에 형법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부부 커플 관계를 강화하려 했지만, 결국 커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족의 살점을 다 먹어치우고 이제 자신의 살점을 뜯기 시작한 괴물처럼 말이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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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다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댓글은 사람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주고 많은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굳건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를 만들어줍니다. 좋은 정보와 지식을 보유한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내 생각을 풍성하게 해주는 보물창고가 만들어집니다. SNS를 통해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리는 겁니다. 반면 반대하는 의견을 달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 글은 달지 않는 게 좋습니다. 꼭 달고 싶은 경우에도 ‘꼭 필요할까, 꼭 필요할까, 꼭 필요할까.’ 3번은 되뇌어봐야 합니다. 건전한 비평은 298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의견을 반박하는 건 친한 사이에도 매우 조심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니 잘못되었다는 명확한 근거가 있고 마음속에서 거센 반감이 솟아나더라도 일단 참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나는 혹시 지적 우월감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에 이 댓글을 달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이 댓글을 통해 진정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가?’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도 여전히 쓰고 싶다면 최대한 부드러운 표현으로 예의 바르게 생각을 담아냅니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양성은 인류의 일반적인 특성입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상식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류 보편적 도덕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인정해야 합니다. SNS 공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는 태도로 대화하는 사람들은 실제 사회에서도 존중받지 못하고 사람들과 건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디지털 문명에서도 사회성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근본은 실제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세심한 배려와 정제된 언어가 필요합니다. 나의 대화를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공간인 만큼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299 만들어진 네트워크는 내가 오프라인에서 가질 수 없는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제공합니다. 이 기회를 잡을 것인지 버릴 것인지는 오롯이 자신의 선택입니다.
 이렇게 사람에 대한 세심한 배려심을 키우는 것은 사실 다음 단계로의 성장에 매우 중요한 발판이 됩니다. 바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는 능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 P297

최근 애자일Agile 경영이 화두가 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일반적인 기업들은 1년 치 사업계획을 연초에 수립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조직 전체가 열심히 활동합니다. 그리고 연말에 성과를 바탕으롤 사업을 평가하고 다시 차년도 계획을 수립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보편적인 사업방식이고 조직 운영방식입니다. 그런데 시장 환경이 급변하면서 이런 형태의 비즈니스로는 시장에 적응이 어려워졌습니다. 1년 치 계획을 짜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 계획의 가정에 포함된 시장 상황이 크게 달라져버리니 계획 자체가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등장한 것이 애자일 경영입니다. 본부 경영진에서 계획을 세워 하부조직에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 접점에 있는 소규모 팀에게 경영의 전권을 부여하고 고객 반응에 따라 빠르게 움직이며 대응하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미국 기업 중 3분의 1이 연 단위 성과평가 경영방식에서 애자일 방식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객 중심 경영의 철학이 이제 경영방식에도 거대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 P311

EPILOGUE 달라진 문명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이 답입니다
 
 지금까지 포노 사피엔스 문명의 특징과 변화된 모습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장의 변화와 소비 트렌드가 만들어내는 데이터는 지금이 명확한 ‘혁명의 시대’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새로운 문명을 공부해야 하고, 소비자가 만들어내는 데이터를 읽고자 노력해야 하고, 킬러 콘텐츠를 만드는 전문적인 기술도 익혀야 하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과 노력들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사람’입니다. 혁명의 시대, 결국 답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로 이 책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대한민국은 지난 60년 동안 전 세계가 부러워할 만큼 엄청난 발전을 이룬 나라입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TV를 비롯한 가전제품, 자동차, 생활용품,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을 333 자국에서 직접 생산하여 생활할 수 있는, 세계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이웃 나라 강국 일본에도 없는 우리만의 메신저앱(카카오톡)과 국가대표 포털사이트(네이버)도 갖고 있습니다. 디지털 금융 서비스도 몇 가지 규제만 뺀다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우리 콘텐츠 사업은 아시아 최고로 발돋움했고 해외 여러 국가에 팬덤을 확대해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국민소득 100달러 이하에서 시작하여 불과 60년 만에 이뤄낸 것입니다. 게다가 강력한 군사적 대치 상황에 놓인 분단국가에서 말입니다. 세계에 입증한 대한민국 잠재력의 스케일이 이렇습니다.
 
 우리는 늘 이렇게 이야기해왔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오직 사람뿐이라고. 자원도 없고, 축적된 자본도, 기술력도 없는 나라에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오로지 ‘사람’의 힘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에 대해 민감합니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열은 세계 최고이고 남의 일도 내 일처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합니다. 인사로 밥 먹었는지를 물어보는 사회,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는 사회, 어디 사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결혼은 했는지,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고 관심을 갖는 게 우리 사회입니다. 식당에 가면 이모가 있고, 친구 어머니는 내게도 어머니이며, 그렇게 사람과의 관계가 끈끈해서 334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가 대한민국입니다.
 
 포노 사피엔스 시대, 디지털 소비 문명의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시장의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조직문화, 사회의 위계질서, 사내 직원 간의 관계, 심지어 가족의 구성과 그들의 관계까지…. 거의 모든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다시 정립되고 있죠. 소비 패턴의 변화에 따라 기업의 사고방식도, 조직 운영도 모두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카오스 상태에서 새로운 시장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법칙은 ‘고객이 왕이다.’입니다. 이 시대의 왕인 고객을 사로잡는 비법은 ‘사람을 잘 아는 자’만이 찾을 수 있습니다. 달라진 문명 속에서도 여전히 답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부지런히 공감 능력을 키우고 다양한 관계망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 그 감각을 익히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물론 방법은 과거와 다릅니다. SNS를 통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경험을 축적해야 합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달라지는 문화 트렌드도 적극적으로 학습하고 필요한 전문 지식도 빠르게 학습하고 복제해야 합니다. 신문명이 만드는 새로운 언어 체계도 적극적으로 학습하면서 디지털 문명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얻어내야 합니다. 이런 모든 활동에서는 당연히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시간도 낭비하 335 고, 때로는 중독도 되고, 감정과 에너지를 허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작용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문명을 힘껏 활용하며 스스로 펼칠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부작용에서 ‘부’를 떼어내고 혁신의 순작용을 찾아내기 시작하면 어마어마한 기회가 보이는 것이 바로 디지털 문명의 특성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뛰어 놀던 공간이 ‘땅 위’라면, 디지털 문명의 놀이 공간은 ‘무한한 창공’입니다.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준비를 해야 합니다.
 
 ‘혁명의 시대’를 ‘혁신의 기회’로 삼아 모두 함께 미래를 준비한다면, 포노 사피엔스 시대는 확실히 우리에게 기회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재능을 보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디지털 문명의 확산이 돌이킬 수 없이 정해진 미래라면, 여러분은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100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역사적인 기회의 문이 열렸습니다. 혁명의 위기를 넘어, 함께 새로운 기회의 시대로 갑시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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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릴은 관조적인 사상이 목적적인 사상에 이어 나온다는 가설 아래, 목적적인 장자가 관조적인 노자보다 시간적으로 앞선다고 주장했던 대표적인 학자이다. - P106

실천-참여-정치는 한 무리의 행동으로 서로 분리될 수 없음에도 단어 속의 ‘숨어 있는 경험’ 때문에 각기 다른 내포를 지니게 된 것이다. - P109

‘모든 중국철학은 정치철학’이라는 에티엔 벌라주의 철학을 말할 필요도 없다. 서구의 경우처럼 철학과 정치가 분류된 상황과 동아시아의 전통은 다르다. 서구의 경우도 그리스 시절에는 철학이 곧 정치인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철학은 점차 순純철학의 길을 가게 된다. 동아시아가 논리학이나 형이상학과 같은 순철학을 현실과 유리된 것으로 취급한 것과는 반대된다. - P126

(곽상은) 마소가 사람에게 부림을 받는 것이 인위가 아니라 운명이라는 것이다. - P169

이러한 시각으로 보았을 때, 곽상의 제1명제로 취급되는 ‘그윽한 곳에서 홀로 되어 간다’(獨化於玄冥之境)는 주장의 진의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데가 있는 것이다. 전체 속의 개인이라는 점에서 조화와 협조를 내세우고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전체 속에 녹아나는 개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구호인 ‘모두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모두를 위하여’(All for one; One for all)라는 말은 결과적으로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불과한 것처럼, 곽상은 ‘현명玄冥’이라는 전체의 구조 속에 ‘독화獨化’라는 개별자의 역할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장자와 곽상의 차이이다. 장자가 추구하는 개성의 함양과 곽상이 추구하는 전체 속의 조화가 이곳에서 달라진다. 장자는 개체가 자신의 본성을 이상적으로 실현하길 희망하고 있지만, 곽상은 개체가 자신의 본성보다는 사회의 질서 속에서 현실적으로 적용되길 바란다. 장자의 명제는 능동태이지만, 곽상의 명제는 수동태이다. 장자에 171 서는 ‘내’가 있지만, 곽상에게는 ‘나’란 없다. 장자의 ‘나’는 독립적이지만, 곽상의 ‘나’는 의존적이다. 곽상에게 주체적인 ‘나’란 제도 속의 나일 뿐이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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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는 굴러가거나 안 굴러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잘 안 되면 잘되는 연애를 찾아야 합니다. - P127

누가 봐도 톰보다 잭이 더 섹시한데 나는 왜 잭보다 톰을 원하는 걸까요? 잭이 더 많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죠.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누군가에게 이끌릴 때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그가 이룬 성취가 아니라 ‘그것’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이런저런 것(가령 오래된 136 구두랄지 값비싼 에메랄드 목걸이)이 아니라 특정한 ‘그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라캉에 따르면 ‘그것’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인간의 가장 깊은 욕망의 대상입니다. - P135

사춘기가 될 때쯤 우리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인생은 불공평하며 자신이 결코 불굴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뭔가 완전하지 않은 듯한 이 느낌은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고, 알 수 없는 불만감이 일상의 저변을 흐르게 됩니다. 그 강도는 줄어들기도 하고 세지기도 합니다. 그것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 때도 있지만 펄펄 끓는 용암이 되어 우리를 집어삼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아주 잘 숨기고 삽니다.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도 오랜 시간 살 수 있습니다.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관심이 다른 곳에 쏠리는 거죠. 시끄러운 자녀들이 있거나 인생에서 다른 야심이 있다면 그것도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죽이지는 못합니다. ‘그것’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은 만성적으로 슬픔에 젖어 살거나 자살 충동까지도 느낍니다. 이런 사람들은 작가나 심리상담사, 지식인이나 철학자가 되어 실존적 허무를 이해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기도 합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이 공허함을 ‘무’라고 불렀고 라캉은 ‘결핍’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조용한 흐느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부르는 이름은 저마다 다를지 모르지만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정확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내면의 공백에 대처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 형태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백이 생기는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 139 기에 손볼 수도 없습니다. 설령 손볼 수 있다 해도 그 공백을 없앨 방도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치르는 대가니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를 상쇄할 방법을 찾는 것뿐입니다. 커리어를 쌓거나 가정을 일구거나 친구와의 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책이나 잡지, 영화, <아메리칸 아이돌>, 패션이나 골프, 인디 음악, 손뜨개, 도박 등에 재미를 붙일 수도 있습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이나 춤, 음악, 사진, 원예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이고 인터넷의 늪에 빠져 지낼 수도 있고 마약이나 고급 와인, 프렌치프라이, 초콜릿, 컴퓨터 게임, 베스트셀러 책에 빠져 지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존재 안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고 우리는 그 구멍을 채우려는 희망으로 뭔가를 하나씩 채워넣고 있습니다. 명상 수행자나 불가의 지도자들은 이 공백에 정면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이 구멍을 덮으려고만 합니다. - P138

그런데 체리가 필요하긴 할까요? 체리는 겉치레에 불과하지 않은가요? ‘그것’이 그토록 문제가 된다면 없애버리면 그만이지 않을까요? 하지만 여러분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좀 더 복잡하게 답하자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을 황홀한 것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유혹하는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열정은 바로 그렇게 직조된 것이며 바로 그 ‘알 수 없는 무엇’ 때문에 그에게 끌리기 때문입니다. 그와의 관계에는 정직과 성실성,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146 것’의 아우라 또한 필요합니다. - P145

여러분은 아무 남자에게나 공을 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특정 남자에게 투사하는 것은 여러분이지만 여러분의 선택에는 무의식의 논리가 작용합니다. 여러분은 아무 남자나 ‘그것’으로 만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여려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뭔가가 그 남자에게 있어야 합니다. 분명치 않은 이것은 구체적인 특징이라기보다는 분위기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사소한 디테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눈썹의 곡선미라든가 손톱의 모양, 눈빛에서 반짝이는 유머, 섬세한 목덜미, 팔뚝에 불거진 섹시한 힘줄일 수도 있습니다. 벌어진 치아나 조금 비뚤어진 콧등처럼 때로 그것은 어떤 결함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남자의 그 어떤 부분도 될 수 있습니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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