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교육 기간이 늘어나고 결혼 연령과 첫 자녀 출산 연령이 계속 높아지면서, 커플인 남녀가 서로 다르게 받는 이런 압박은 더욱 강해진다. 그래서 30세 전후에 안정적인 커플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여자는, 출산이라는 중요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남은 시간이 겨우 몇 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여자는 남자보다 커플 관계에 더 의존적이며, 따라서 남자는 여자를 성적으로 지배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여자가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이유는 이것이 커플을 이루기 위해 여자가 지닌 수단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성관계를 맺는 것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점점 더 중요한 수단이 되어왔다. 반면에 남자는 이런 계획 없이 여자와 잔다. 어떤 남자 주변에 안정적인 커플을 이룰 것을 기대하면서 그와 성관계를 맺는 여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남자는 아무하고도 커플이 되지 않는 게 유리하다. 적어도 남편감으로 여겨지는 남자들의 경우에는 그렇다. 일자리가 없거나, 너무 가난하거나, 아무 매력이 없거나, 너무 늙어서 성매매 여성과의 성관계로 만족해야 하는 남자의 경우는 이와 전혀 다르다. - P96

그런데 역설적으로, 남자는 자신이 애착 없는 섹스를 추구하면서도 애착 없는 섹스를 추구하는 여자, 이른바 ‘창녀’를 욕한다. 테레즈 아르고는, 십 대 남자들이 먼저 나서서 또래 여자들을 ‘창녀’로 낙인찍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자는 섹스할 기회를 잃지 않을 뿐 아니라, 섹스 면에서 그 어떤 도전도 직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애착 없는 섹스를 추구하는 여자들은 다른 여자들보다 성 체험의 강도에 훨씬 더 민감하다. 그래서 남자는 자신에게 사물처럼 주어지는 존재가 아닌 동등한 파트너를 상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 애착 있는 섹스를 추구하는 여자들 때문에 남자들이 여자와 더불어 ‘섹스하는’ 대신 계속 여자를 ‘따먹을’ 수 있는 것이다. - P97

성별에 따라서 여자는 애착 있는 섹스, 남자는 애착 없는 섹스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불평등이 생길 뿐 아니라 남녀 모두의 성 경험이 빈약해진다. 남자는 되도록 많은 섹스를 하려고 하고, 이 때문에 이성애 관계의 섹스는 성적 학대-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줄기차게 규탄해온 가학적인 관계-나 소비 행위에 가까워지지만, 여자는 성행위를 자신이 하는 그 행위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의 조건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남자는 기대 수준이 높은 성 파트너를 만날 가능성이 없어지고, 여자는 쾌감의 진정한 주쳊체가 될 기회를 못 얻는다. 남녀가 제도의 기대에 부응하는지 여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 제도의 특징은 우리의 인식과 ㅁ정, 기대에 ‘젠더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 규범과 법 규범은 애착 없는 섹스와 이런 섹스를 확산시킬 만한 모든 것을 끊임없이 비난한다. 그래서 성매매, 포르노그래피, 커플이 아닌 사람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는 행위를 비난한다. 성적 서비스를 구매하는 일은 이제 금지되어 있고, 나머지 두 행위는 미성년자를 오염시키고 타락시키고 그들이 장래에 할 성생활을 해친다는 이유로 특정한 사람과 더불어,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시간에만 이루어지도록 제한된다. 페미니스트 움직임에서와 마찬가지로 공권력 99 에서도 여성이 구상한 가족의 계획에 맞추어 남성의 성을 ‘문명화’시키기 위해 애착 있는 섹스의 편을 든다. 공권력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여성이 애착 없는 섹스를 할 때 부각되는 타락한 여성의 모습, 남성의 욕망에 전적으로 부응하는 여성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로 애착 있는 섹스를 추구하는 여성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쾌락을 커플의 계획에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커플 제도는 커플 바깥뿐 아니라 커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의 모습 또한 빚어낸다. 19세기 커플 관계와 달리 현대 커플 관계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성적 욕망인데, 이 욕망을 장기적으로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자가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자녀가 있는 커플이 헤어질 때 여러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파트너를 결합해주던 욕망이 사라져도 이 커플 관게를 쉽사리 깰 수 없다. 성적으로 행복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강하지 않다면 이런 상황이 크게 심각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즉,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가 아니고, 커플이 각기 애인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 평생 일종의 금욕 생활을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혹시 커플 중 한 사람이 잠간 애인을 사귀는 일이라도 생기면 ‘배신당한’ 파트너는 당연히 끔찍한 위협을 느낀다. 간통은 커플의 기반과 커플 관계에 따르는 모든 약속을 뒤흔들며, 많은 경우 커플을 갈라서게 만든다. 성 혁명 이전에는 간통 때문에 커플 관계가 깨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커플은 사회 제도로서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간통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 그런데 오늘날의 커플은 욕망이나 감정 같은 참으로 불안정한 정황으로 두 사람이 결합한 것이기 때문에, 간통이란 사건을 견딜 만큼 강력하지 않다. 바로 이런 이유로 폴리아모리polyamory(동시의 여러 명의 성애 대상을 가질 수 있는 것. ‘비독점적 다자연애’라고도 부른다-옮긴이)와 폴리피델리티polyfidelity(성애로 맺어진 3인 이상이 공동생활을 하는 것-옮긴이) 같은 방식이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폴리피델리티는 커플을 취약하게 만드는 주요 요소를 제거하되 사실상 커플 개념을 유지한다. 이런 공동생활이 장기간 유지되는 경우가 아주 드물게 보이긴 하지만, 이는 공동체의 한 사람이 강자의 위치에서 보다 약한 파트너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한 결과다. - P98

서로를 성적으로 욕망하는 관계라는 이상적인 커플의 모습 101 과 실제 현실 간의 이러한 불협화음으로 인해, 감정 있는 섹스라는 개념은 결국 터무니없는 모순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몇 년이 지나면 배우자에 대해 지녔던 ‘사랑’과 동시에 욕망이 꺼지기 때문이다. 이때에야 두 파트너는 자신들이 ‘사랑’이라 부르던 것이 실제로는 가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일시적인 불장난 상대에게 느낄 만한 성적 욕망보다 더 강한 욕망을 덮어주던 가면, 또는 모성 프로젝트를 이루기 위한 커플의 이해관계를 가리던 가면 말이다.
 요컨대, 커플에게 섹스는 몇 년 후면 섹스 때문에 헤어지고 말 사람들을 결합하는 역할밖에 해주지 않는다. 헤어지는 데 성공할 수 있는 운 좋은 사람들한테는 말이다. 만일 커플 사이에 종속 관계가 생기고 이로 인해 배우자를 멸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벌어지면, 경찰과 사법 당국이 나서서 옛 연인들을 갈라놓는다. 섹스가 커플을 결합할 때에는 다른 모든 사람이 배제된다. 커플이 제삼자를 관계에 끌어들일 때, 이는 대체로 소비 행위와 같은 감정 없는 섹스라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 제삼자와 맺는 관계가 혹시라도 애착이나 감정 있는 관계가 되면, 커플은 종말을 고한다. - P100

그런데 최근 몇 년 전부터 부부 커플은 더욱 파괴적인 다른 힘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이 힘은 섹스를 도구 삼아 사람들을 분리시킬 뿐 아니라 커플 제도 자체를 끝장내려 한다. 그렇다. 바로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처음에 형법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부부 커플 관계를 강화하려 했지만, 결국 커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족의 살점을 다 먹어치우고 이제 자신의 살점을 뜯기 시작한 괴물처럼 말이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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