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릴은 관조적인 사상이 목적적인 사상에 이어 나온다는 가설 아래, 목적적인 장자가 관조적인 노자보다 시간적으로 앞선다고 주장했던 대표적인 학자이다. - P106

실천-참여-정치는 한 무리의 행동으로 서로 분리될 수 없음에도 단어 속의 ‘숨어 있는 경험’ 때문에 각기 다른 내포를 지니게 된 것이다. - P109

‘모든 중국철학은 정치철학’이라는 에티엔 벌라주의 철학을 말할 필요도 없다. 서구의 경우처럼 철학과 정치가 분류된 상황과 동아시아의 전통은 다르다. 서구의 경우도 그리스 시절에는 철학이 곧 정치인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철학은 점차 순純철학의 길을 가게 된다. 동아시아가 논리학이나 형이상학과 같은 순철학을 현실과 유리된 것으로 취급한 것과는 반대된다. - P126

(곽상은) 마소가 사람에게 부림을 받는 것이 인위가 아니라 운명이라는 것이다. - P169

이러한 시각으로 보았을 때, 곽상의 제1명제로 취급되는 ‘그윽한 곳에서 홀로 되어 간다’(獨化於玄冥之境)는 주장의 진의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데가 있는 것이다. 전체 속의 개인이라는 점에서 조화와 협조를 내세우고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전체 속에 녹아나는 개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구호인 ‘모두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모두를 위하여’(All for one; One for all)라는 말은 결과적으로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불과한 것처럼, 곽상은 ‘현명玄冥’이라는 전체의 구조 속에 ‘독화獨化’라는 개별자의 역할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장자와 곽상의 차이이다. 장자가 추구하는 개성의 함양과 곽상이 추구하는 전체 속의 조화가 이곳에서 달라진다. 장자는 개체가 자신의 본성을 이상적으로 실현하길 희망하고 있지만, 곽상은 개체가 자신의 본성보다는 사회의 질서 속에서 현실적으로 적용되길 바란다. 장자의 명제는 능동태이지만, 곽상의 명제는 수동태이다. 장자에 171 서는 ‘내’가 있지만, 곽상에게는 ‘나’란 없다. 장자의 ‘나’는 독립적이지만, 곽상의 ‘나’는 의존적이다. 곽상에게 주체적인 ‘나’란 제도 속의 나일 뿐이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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