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

​야속한 시간,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두려움을 자아내는가?
너는 존재한다ㅡ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ㅡ그러므로 아름답다.

_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중에서​ - P7

106 책에서는 감정 중에 전염성이 가장 큰 것은 외로움이라고 해요. 외로운 친구를 곁에 두면 외로워질 확률이 무려 40~65퍼센트나 높아진다는 거예요. 외롭지 않은 사람을 세 번 거쳐야만 외로움의 전염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 P106

117-8 이 책에서 소개하는 ‘SNS 중독에서 벗어나는 열 가지 방법‘도 첨부합니다.

1. 포스팅을 하고 나면 페이스북에서 로그아웃하라.
2.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의 모든 푸시 알람을 꺼라.
3, 잠자리에 들기 전 노트북을 끈 다음 스마트폰과 함께 다른 방에 두라.
4. 앞에 있는 사람에게 온전히 관심을 기울이고 그 사람에게도 그렇게 요구하라.
5. 목욕을 하라. 단 스마트폰은 밖에 두고.
6. 페이스북 확인을 하루에 세 번, 총 30분만 하라.
7.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으로 주말에 여행을 떠나라.
8. 식탁 위에 바구니를 두고 식사 시간에는 스마트폰을 넣어두라.
9. 밤 아홉 시 이후에는 어떠한 전자기기도 사용하지 마라.
10. 오프라인 우정을 유지하는 데 똑같은 시간을 할애하라. - P117

207 자극적이지 않은 본연의 맛, 재료의 숙성에서 나오는 축적된 시간의 맛이 점점 더 좋아집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처음부터 과도한 관심과 친절로 다가오는 사람보다는, 평범한 미소와 부드러움으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더 편안하잖아요.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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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 성리학 성리총서 5
진래 / 예문서원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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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대 나흠순에 이르러 주희가 정립한 이론체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난다. 나흠순의 사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주자학과 차이를 보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달라진 것은 본체론이다. 즉 리(理)를 유일한 실체로 여기던 기존 관점에서 기(氣)만을 실체로 여기는 이론체계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이는 기존의 주자학에 대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던 모순점들을 해결하고, 이를 기반으로 불교 및 심학에 대항하여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고자 하는 나흠순의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전에는, 동일한 유학의 테두리 안에서 여러 이론체계가 등장하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유학의 근본 목표와 정신은 선진 시대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동일하다. 시대에 따라 달라진 것은 본질적 가치를 더욱 잘 보존 및 실천하도록 하기 위한 요구에 따라 건립되었던 이론체계일 뿐이다. 이러한 다양한 체계들은 결국 ‘시대마다 맞닥뜨린 문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유학의 핵심 가치를 보존하고 실천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각각의 시기를 살아가던 유학자들이 고뇌하여 내놓은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론 체계가 시대마다 달라진다는 점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유학은 본질적으로 어느 시대에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는 사상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대에 따른 이러한 체계 변화가 사상의 본질을 가리거나 왜곡하게 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시대정신과 본질적 가치를 조화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체계 건립은 극도의 섬세함과 정교함을 요하는 작업이어야 할 것이다.

이번 기회에 이론체계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명대 이후 현대까지 어떠한 유학 이론체계들이 등장하였는지 탐구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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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자연과 인간의 정신 작용에는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그럼에도 평정심(ataraxia)에서 살아야 할 이유는 있는가?

A.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받아들여, 세계가 기계론적으로 설명된다고 하였다. 이는 ‘과거의 어떤 사건이 원인이 되어 미래의 어떤 사건이 그 결과 사건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인과적 결정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발생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정신 작용에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윤리학적 물음이다. 윤리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공하고자 한다. 나는 윤리학의 물음이 성립 가능하려면 반드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이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차피 숙명론적으로 흘러가는 세계에서라면 인간도 정해진 대로 행동할 것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답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평정심(ataraxia)‘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표라고 주장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국 에피쿠로스가 세계에 대한 목적론적인 관점을 거부한 까닭은 그가 자신의 윤리학을 주장할 때 맞닥뜨린 문제점들 때문이었다. 즉 자유의지의 존재는 에피쿠로스가 평정심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도록 그에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그의 자연학 체계에서 자유의지의 존재를 원자의 일탈 이론에 근거하여 설명하고자 하였다.

 여기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철학이 차이를 갖는 지점이다. 스토아학파는 결정론적 세계를 상정하고 그 세계 하에서 이성은 정해진 법칙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활동한다고 하였으나, 동시에 ‘부동심(apatheia)’의 경지를 이상으로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모순이 있다. 이는 중국철학사에서 위진현학을 다룰 때 살펴보았던 왕필과 곽상의 이론적 차이와 유사하다. 왕필은 제도는 인위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당위와 목적 추구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곽상은 애초부터 제도는 무위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성에 스스로 만족하는 것’과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하는 것’이라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동시에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스토아학파와 곽상은 결정론적 철학 속에서 이론적 근거 없이 자유의지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주장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정합적이지 못하다.

 주제로 돌아와서, 이제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은 성립 가능하다. 에피쿠로스적 삶의 목적(Telos)은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혼란에서 벗어나서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리는 일종의 평정심을 찾는 것이다. 이들에게 평정심이란 이상적인 삶의 모습으로서, 불쾌감으로부터 해방된 일종의 정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러한 평정심에서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자연과 인간의 정신 작용에 목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쾌를 좋아하고 불쾌를 싫어하는 특성상 쾌감을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도한 쾌락 추구로서의 방탕함은 역효과를 낳는다. 또 한편으로 인간은 오로지 쾌감만 경험할 수는 없으며,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도, 살면서 불쾌감 역시 불가피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가령, 현실적으로 즉시 실현될 수 없는 욕구는 불쾌감을 낳는다. 이 때 에피쿠로스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보다는, 내면적인 마음가짐을 다스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즉 고통 앞에서도 침착할 수 있게 하며, 과도한 욕구 앞에서도 안정적일 수 있게 하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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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민음사 사서四書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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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배우기를 좋아하면 지혜로움에 가까워지고, 힘써 좋은 일을 실천하면 어짊에 가까워지며, 부끄러움을 알면 용맹스러움에 가까워진다. 이 세 가지를 알면 어떻게 자신을 수양해야 할 지를 알게 된다.

40 다른 사람이 한 번에 제대로 한다 하더라도 나는 (한 번에 안 되면) 백 번이라도 하고, 다른 사람이 열 번에 제대로 한다 하더라도 나는 (열 번에 안 되면) 천 번이라도 한다. 진실로 이러한 방법대로 실행할 수 있다면, 비록 어리석을지라도 반드시 밝아지고 비록 유약할지라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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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 미션

제1장
하늘이 명령한 것을 본성이라 하고,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하며, 그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으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삼가며, 다른 사람이 듣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한다.
(잘못하는 일이) 은밀한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세미한 곳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드러나더라도 모두 적절한 정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가장 큰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리이다.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면 하늘과 땅이 바르게 되며, 만물이 제대로 생기고 자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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