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자연과 인간의 정신 작용에는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그럼에도 평정심(ataraxia)에서 살아야 할 이유는 있는가?
A.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받아들여, 세계가 기계론적으로 설명된다고 하였다. 이는 ‘과거의 어떤 사건이 원인이 되어 미래의 어떤 사건이 그 결과 사건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인과적 결정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발생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정신 작용에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윤리학적 물음이다. 윤리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공하고자 한다. 나는 윤리학의 물음이 성립 가능하려면 반드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이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차피 숙명론적으로 흘러가는 세계에서라면 인간도 정해진 대로 행동할 것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답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평정심(ataraxia)‘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표라고 주장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국 에피쿠로스가 세계에 대한 목적론적인 관점을 거부한 까닭은 그가 자신의 윤리학을 주장할 때 맞닥뜨린 문제점들 때문이었다. 즉 자유의지의 존재는 에피쿠로스가 평정심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도록 그에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그의 자연학 체계에서 자유의지의 존재를 원자의 일탈 이론에 근거하여 설명하고자 하였다.
여기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철학이 차이를 갖는 지점이다. 스토아학파는 결정론적 세계를 상정하고 그 세계 하에서 이성은 정해진 법칙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활동한다고 하였으나, 동시에 ‘부동심(apatheia)’의 경지를 이상으로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모순이 있다. 이는 중국철학사에서 위진현학을 다룰 때 살펴보았던 왕필과 곽상의 이론적 차이와 유사하다. 왕필은 제도는 인위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당위와 목적 추구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곽상은 애초부터 제도는 무위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성에 스스로 만족하는 것’과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하는 것’이라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동시에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스토아학파와 곽상은 결정론적 철학 속에서 이론적 근거 없이 자유의지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주장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정합적이지 못하다.
주제로 돌아와서, 이제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은 성립 가능하다. 에피쿠로스적 삶의 목적(Telos)은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혼란에서 벗어나서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리는 일종의 평정심을 찾는 것이다. 이들에게 평정심이란 이상적인 삶의 모습으로서, 불쾌감으로부터 해방된 일종의 정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러한 평정심에서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자연과 인간의 정신 작용에 목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쾌를 좋아하고 불쾌를 싫어하는 특성상 쾌감을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도한 쾌락 추구로서의 방탕함은 역효과를 낳는다. 또 한편으로 인간은 오로지 쾌감만 경험할 수는 없으며,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도, 살면서 불쾌감 역시 불가피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가령, 현실적으로 즉시 실현될 수 없는 욕구는 불쾌감을 낳는다. 이 때 에피쿠로스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보다는, 내면적인 마음가짐을 다스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즉 고통 앞에서도 침착할 수 있게 하며, 과도한 욕구 앞에서도 안정적일 수 있게 하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참고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