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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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만들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는 스토리, 그리고 스타일일 것이다.

 

정유정 작가는 누가 뭐래도 스토리에 탁월하다. 7년의 밤도 그랬고, 28도 그랬다.

이 소설 또한 그렇다. 정신 병원에 있는 동갑내기 환자가 병원에 입원한 생활을 그려내며, 그들의 이야기와 회상을 통해 과거를 풀어내고 결론까지 도달한다.

 

하지만 읽는 내내 더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정유정 작가의 스타일 때문이겠지. 예를 들면,

 

334P의 “그럼 우리는 이수명씨의 첫 비행을 지켜본 사람들인가요?”

 

336P의 “수명아. 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간 입원해 있던 병동의 사람들이 흡연실 창가에 붙어 있었다. 잘 가리고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하늘에는 석양이 번지고 있었다.붉은 하늘 어딘가에서 승민이 충동질했다. 우리 모처럼 트위스트 한번 출까 ... 컴온 에브리바디 .클랩 유어 핸즈 컴온, 렛츠 트위스트 어게인, 라이크 위 디드 라스트 서머....”

 

와 같은 부분들은 읽는 순간 오글거린다고 해야 하나, 일부러 작가가 감동을 주려고 멋을 부린 부분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좀 더 담백하게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평범한 문장이 어디에 배치되느냐에 따라서 묘한 감동을 주는 법인데, 작정하고 이 부분에서는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느낌이랄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인지 그 말에 지치는 느낌이었다. 또 두 주인공에 접근하는 방법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좀 더 인물에 깊이 집중하면 어땠을까, 두 인물이 하는 행동뿐만 아니라 정신병 환자의 생각을 좀 더 보여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그러고나서 생각해보니, 맞다, 이 작가 이 작품 이후에 7년의 밤과 28을 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작가는 자기 스타일을 찾아가고 있는 중인지도. 따뜻하고 보드랍게 품어주는 것이 아니라 차갑고 냉정하게 급소를 찌르는 게 이 작가의 장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기작에서는 부디 그 장기를 살려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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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 스무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
박정석 지음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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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두 종류의 나를 만난다. 책에다 밑줄을 긋는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다.

 

1)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멋진 문장을 만났을 때

2) 내가 원하는 문장을 만났을 때

 

“내게 독서란 단순히 작가의 생각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온 세상을 여행하는 행위다”라고 했던 앙드레 지드의 말을 긍정하며 독서를 여행에 비유한다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비로움을 느끼는 것은 1)의 경우일 것이고, 낯선 장소에서 익숙함을 발견하는 것은 2)의 경우일 것이다. 여행에서는 1)과 2) 모두 중요하다. 1)로만 가득한 여행은 쉽게 지칠 수 있으며, 2)로만 점철된 여행은 여행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방문일 것이다.

 

책을 읽을 때에도 두 가지가 곁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의 문장들은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을 준다. 아, 이 사람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었구나. 반면에 1)의 문장들은 우리의 생각을 넓혀준다. 절대 건너지 못할 것 같은 냇가에서 징검돌 역할을 해준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2)의 문장들만을 찾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2)의 문장만을 찾게 된다면, 독서는 쉽고 간편해진다. 새로운 걸 찾을 이유는 없다. 알고 있는 걸 확인하면 된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증거를 찾기만 하면 된다. 책을 읽는 것이 발목을 잡게 된다.

 

소설가 김중혁이 위즈덤하우스 문학 연재 블로그에 연재했던 글의 일부이다.

 

 

이 책은 나에게는, 전적으로 2)에 일치하는 책이었다. 읽으면서 마치 내 생각을 그대로 뒤집어놓은 것 같은 문장, 미처 알고는 있었지만 말로는 표현 못했던 것들을 남이 써 놓은 문장으로 확인할 때 사이다같은 청량함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치려다가 포기했던 것은 이 책이 밑줄로 점철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고, 정작 책을 다 읽고 나서 며칠이 지난 지금은 신기하게도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 책에서 내가 감탄했던 문장들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처음에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제목 때문이었다. 화내지 않기, 그리고 핀란드까지.

아직 핀란드를 다녀온 지 만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일상에 점점 희미해지지만 사진을 꺼내 보면 다시 그 때의 감동이 생생히 되살아나는 시기. 구태여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최근 개봉한 공유와 전도연이 출연한 영화 ‘남과 여’의 영향이었다. 영화 예고편을 보면서 내가 겪어보지 못한 핀란드를 겪고 싶다는 생각과,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교차하다가,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이 책을 집어들었고, 목차에 나온 저자의 여행 목록에서 핀란드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들이라는 생각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편안했다. 깊이 행복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들인데도 그곳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놀랍게도 익숙했다. 마치 내가 다녀와서 쓴 것처럼. 그리고 안도했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어. 그리고 놀랍게도 책을 다 읽고 나서 내 머릿속을 오랫동안 꽉 잡고 있는 문장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희미하게 내용이 떠오르는 것 같기는 한데, 구체적인 단어나 묘사는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든 비 오는 날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익숙한 그리움, 친숙한 외로움으로 평화로웠다. 그리고 물론 화도 내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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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함에 대하여 - 악에 대한 성찰 ㅣ 철학자의 돌 2
애덤 모턴 지음, 변진경 옮김 / 돌베개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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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책의 원제는 '악에 대하여'라고 한다.

책의 제목을 살짝 바꾼 것은 워낙 비슷비슷한 이름의 책들이 많아서였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잔혹함과 악은 분명히 구분되는 개념이기에 잘못 붙였다고 볼 수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책의 제목이 '악에 대하여'였다면 확 끌리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잔혹함, 이라고 하면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이미지가 있다.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 훼손된 시신. 주로 '그것이 알고 싶다'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자주 보았던 이미지들이다.

 

그런데 악, 이라고 하면 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잔혹함 만큼이나 구체화를 띄고 있는 개념이 아니라서 이 단어를 접하고 나면 손에 잡히지 않는 실체만 어둑어둑 먹구름이 눈앞에 쳐져 있는 느낌이다.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 때문에 선뜻 이 책을 손에 집어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책은 책의 외적인 형태도, 내용도 훌륭하다. 책의 표지는 이 책의 목차이다. 빨간색으로 쓰어진 목차를 아이보리색 표지와 배치하고, 거기서 '악'이라는 단어는 음각으로 처리한 것은 섬뜩하면서도 아름답다는 느낌을 준다. 책 안으로 들어가보면, 저자가 예로 든 책, 영화, 역사전 사건에 대한 사진 자료들이 과하지 않게, 하지만 부족하지도 않게 배치되어 있고, 달려 있는 설명과 주석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서 좋다. 또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별도의 설명과 함께 참고자료가 덧붙여져 있다.

 

어쩌면 여기 나오는 내용들은 한번씩은 들어봤을 내용인지도 모른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주장, 연쇄살인마에 대한 프로파일러의 해석,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세계 테러에 대한 수많은 입장들. 그러나 이 책만큼 공정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텍스트는 보지 못한 것 같다.

 

결정적으로 이 책을 구매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이 책에서 들고 있는 수많은 자료들이다. 소설, 영화,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신문 기사나 논문, 학술서 등등. 이 책을 바탕으로 수많은 독서가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의지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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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여자의 공간 - 여성 작가 35인, 그녀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들
타니아 슐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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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한 번 끌렸고, 목차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목록을 보고 사기로 결정했습니다. 분량상 한 작가에 배당되는 쪽수가 많지는 않겠지만, 이 책으로 인해 이 책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책을 읽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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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 아웃케이스 없음
이윤기 감독, 임수정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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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이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곧 개봉하는 전도연, 공유 주연의 남과 여 때문이었다.

핀란드라는 미지의 세계(나에게 완벽한 미지의 세계는 아니다. 나는 핀란드를 다녀온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미지란 것은 먼 북쪽 나라이자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는 나라인 핀란드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작년에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북유럽 여행을 다녀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좀 아쉬웠다. 다녀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마음껏 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고, 어떻게든 실재가 그 상상을 뛰어넘기는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를 배경으로 한 남과 여의 사랑. 아, 이미 내가 밟아버린 땅이라는 게 아쉽다.

 

아무튼,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보다가 감독이 멋진 하루와 여자 정혜의 이윤기감독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본 그의 두 영화는 어떤 면에서는 닮았지만, 완전히 구별되는 영화이다. 오히려 동일한 감독이 아니라, 비슷한 성향의 두 감독이 각각 만든 영화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러고보니 두 영화에 대한 리뷰를 내가 쓰지 않았다. 멋진 하루를 보면서 하정우라는 배우에 대해 감탄하고, 역시 전도연이구나 하고 느끼며 원작 소설까지 찾아보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언젠가 포스팅해야지.

 

이윤기 감독의 영화 중 러브 토크는 엄청 보고 싶지는 않은데, 이 영화와 한효주 주연의 아주 특별한 손님은 참 궁금했다. 아마도 주연 배우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겠지만. 이미 수많은 포스트로 인해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데다가 이윤기 감독의 스타일과, 예고편을 보았을 때 대략 어떤 식으로 흘러갈 지 짐작은 되었지만. 그러다 오늘, 보게 되었다.

 

비도 안 오고, 이렇게 화창한 날에, 이렇게 영화 내내 비가 오는 영화가 보고 싶어지다니.

나도 내 마음 상태가 궁금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어떤 개인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아, 오늘이... 그래서 내가 이 영화를 갑자기 보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는 차 안에서 시작된다.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 남자는 운전을 하고 있고, 여자는 조수석에 앉아 있다.

여자는 일 때문에 일본에 갈 예정이고, 남자는 김포 공항에 그녀를 데려다 주고 있다.

남자는 도심에 있는 작업실을 정리하고 집에 있는 지하실에서 작업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작업이 있을 때마다 집에 들어오지 못했고, 함께 있을 시간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부실한 기내식을 먹어야 하는 여자를 걱정하고, 외국에 가는 김에 좀 더 기간을 연장하여 놀고 오지 않는 여자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무심히 여자의 남자 동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그를 칭찬한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여자가 입을 연다.

집을 나갈 것이라고. 헤어지자고. 당신도 알고 있는 일 아니었냐고.

 

화면이 바뀌고 비가 내린다.

남자와 여자가 살고 있는 집 안. 여자는 집을 청소중인 것으로 보인다.

청소중인 것으로 보였는데, 짐을 정리하고 있다.

그런 아내에게 맛있는 커피를 타다 주고, 아끼던 그릇을 싸주는 남편.

거기에다가 둘이 함께 마지막으로 먹는 식사를 위해 근사한 레스토랑에 저녁을 예약했다.

꼬치꼬치 캐묻지도, 소리지르지도, 욕하지도, 화내지도 않는다.

너무 착한 것일까, 지은 죄가 많아서 차마 따질 염치가 없는 것일까, 그냥 바보인 것일까.

영화는 끝까지 여기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설명이 없기에, 보는 사람은 스스로 상상하며 과거와 현재의 자신의 상황을 대입하게 된다.

내가 그랬듯이.

 

연애했고, 결혼한 지 5년이 되었고, 아이는 없다.

남자는 건축 관련 일을 하고 있고, 여자는 출판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원래 남자는 설계를 하고 싶어했으나 다른 쪽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보이며,

여자는 요리책을 출판했던 적이 있고, 현재 불륜 관계의 남자는 아마도 일 때문에 만난 사진 작가로 보인다.

남자가 여자에게 만들어 선물했던 인형, 둘이 함께 보고 파스타를 만들었던 요리책 등 짐을 정리하면서 둘 만의 추억이 계속해서 나오고, 끝까지 '나이스'한 모습을 보이지만 언제 폭발하지 몰라 보는 이로 하여금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휴화산 같은 남자와, 그것을 참지 못해 살짝 폭발하려다 말다가 하는, 어린 왕자에 나오는 작은 활화산 같은 여자의 모습이 보여지던 중, 갑자기 빗속에서 길을 잃은 고양이가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남자의 손에 상처를 남기고 집 안 어디론가 숨어 버린다. 이윽고 부부의 집을 방문한 고양이의 주인 부부는 쏟아지는 비로 시내로 나가는 다리가 폐쇄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여자를 찾는 전화가 걸려온다. 아마도 여자의 애인이자 영화 시작할 때 차안에서 남자가 일부러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 여자의 남자 동료는 아직 정리할 게 남았냐고 여자에게 묻고, 비가 많이 와서 다리가 폐쇄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여자에게 그럼 내일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는다.

 

헤어지기 직전의 남자와 여자에게는 하룻밤이 더 남은 상황.

 

고양이 주인 부부는 고양이를 찾게 되면 연락해 달라고 하며 떠나고,

남자와 여자는 예전에 그들이 했던 방식으로 파스타를 만든다.

양파를 썰던 남자가 눈물을 흘리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오던 중 다시 눈물이 솟구친다.

파스타를 접시에 담던 여자 앞에 사라졌던 고양이가 나타나고, 여자는 조용히 중얼거린다.

괜찮다고.

 

극한 상황에 도달해서도 감정을 절제하는 주인공, 길을 잃은 고양이, 쏟아져 내리는 비. 여러 모로 한국 영화보다는 일본 영화에 가깝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본 소설을 영화화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멋진 하루도 일본 소설 원작이었는데. 화차도 그랬고.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에 대한 흔해빠진 소개말. 그러나 그보다 더 정확한 소개말이 있을까 싶다. 가까운 것은 당연히 지리적인 것이고, 먼 것은 역사, 풍습, 문화... 셀 수 없겠다. 그 중 하나는 아마도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정서. 관조적인, 냉정한, 절제하는 정서. 흔히 일본 작가의 작품을 한국에서 극화할 때 실패와 성공을 가르는 결정적인 부분이 이 일본 특유의 고요하고 가라앉은 정서를 어떻게 한국식으로 바꿀 것인가에 사활이 걸려있다고 본다. 흥분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작품에 끌리게 되는 요소이지만, 그것을 그대로 한국으로 가져와버리면 굉장히 우스워지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두 주인공을 바로 옆에서 훔쳐본다는 느낌이 든 것이 아니라, 한 편의 연극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멋진 하루도, 화차도, 손예진과 감우성이 출연했던 드라마 연애시대도, 김명민의 출세작인 하얀 거탑도, 주제의식과 내용과 소재는 그대로 가져오되, 그것을 한국식으로 토착화시킴으로써 어딘지 모르게 신선한 느낌이 들면서도 내 직장 동료, 어릴 때 친구, 대학 동창의 이야기처럼 친숙한 느낌을 동시에 주었는데, 이 영화는 아무래도 그런 면에서 실패한 것 같다. 만추나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했던 두 주연 배우를 생각하면 이 영화의 어색함은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사람의 잘못 같기도 하고, 동일한 감독에 역시 일본 작가 원작 소설을 영화화했던 멋진 하루에서 하정우와 전도연의 찰진 앙상블을 생각하면 연기자의 미숙함 때문일 것 같기도 하다.

 

"폭우로 고립된 집, 갑자기 침입한 고양이, 비 새는 집 등의 상징은 초급자용 퀴즈처럼 영화 여기 저기에 속출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긴시간 미동없는 카메라의 묵직함을 지탱하기 어려워보인다."

 

이 영화를 평가한 한 잡지의 편집장의 이 문장을 보고 바로 무릎을 쳤다.

 

P.S. 남과 여의 예고편을 보다가 작년에 다녀온 핀란드 여행 사진을 보게 되었다.

높은 산은 하나도 없고, 큼직큼직한 건물이나 도로도 거의 없으면서 온통 풀밭과 나무로 끝없는 녹색 평지가 펼쳐진 모습이 한없이 아득했던, 착륙하기 전에 점점 다가왔던 핀란드의 모습, 저녁 9시 반에 도착했는데도 백야 현상으로 대낮 같았던 헬싱키 공항, 단 두 시간의 어둠 후 서서히 해가 떠오르던 호텔 앞 호수의 새벽 4시 반의 모습, 지구상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하고 감탄했던 기억, 동화책의 그림에서만 보았던, 몸통은 하얗고 잎은 파란, 하늘 끝까지 솟아 있는 것 같은 삐쩍 마른 나무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을 쏟아질 것 같이 눈부셔서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는 돌아다니기 힘들었던 날들. 끝없이 펼쳐진 선명한 녹색을 바라보며 이곳의 겨울은 어떨까 궁금하고 그리웠던 날들. 아, 기억이 생생해진다. 이제 남과 여를 보러 가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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