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내가 전혜린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인지 잘 모르겠다. 천재, 광기, 시대를 앞서간 여인 등등 몇몇의 키워드로만 알고 있었고 정작 전혜린의 글을 제대로 정독하지도 않은 채 본인의 문학적 업적 자체보다 시대적 아이콘으로 더 평가받는 인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2004년 교육방송에서 1950년대 명동의 문인들 이야기를 다룬 명동 백작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전부 다 챙겨보지는 못했다. 짤막짤막한 화면 속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은 배우 이재은이 연기한 전혜린이 절망하며 술을 마시는 장면이다. 당시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는 문인으로서의 참담함보다는 스스로의 감정을 어쩌지 못하는 자의식의 과잉으로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아마도 배우의 연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극본 때문일 수도 있고, 연출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괴로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흔치 않은 경험 때문인지 그 장면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쩌면 그 장면 때문에 전혜린에 대한 내 인상은 그 이후로도 한참 굳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단어 하나만 넣어서 검색하면 마치 가지가 좍 펼쳐지듯이 연관성 있는 글들이 줄줄이 딸려 오는데, 전혜린에 대한 어떤 글을 접하고 난 후 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게 맞지, 광기와 사생활로 회자 되는 것이 아니라’ 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러고 보니 정작 내가 전혜린의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면서 나는 곧바로 전혜린을 검색해 나온 책들 중 번역한 책을 제외한 책들을 주문했다. ‘자신의 문학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번역을 하였는데 어째서 이리 칭송되는지 모르겠어. 직접 자기 이야기를 쓴 책을 읽어봐야 진짜 엄청난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결론내리며 말이다.

제 1장 사랑의 찬가를 지나 제 2장 뮌헨의 몽마르트르에 도달하면서 나는 ‘슈바빙’이라는 단어를 접하고 아하, 할 수 있었다. 20대 초반의 대학생 시절, 이미 까마득한 오래 전에 나는 절친한 친구와 유럽 배낭 여행을 했었다. 그때 우리의 일정에는 뮌헨이 포함되어 있었고, 여행 책자에서 뮌헨의 주요 명소로 우리나라의 대학로에 해당한다는 ‘슈바빙’이 있었다. 그게 뭔지도 잘 모르면서 기대에 벅차 슈바빙에 도착한 우리는 크게 실망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 대학생들의 유럽 여행은 최대한 많은 곳을 보되 경비를 아끼기 위해 ‘런던 인 파리 아웃’, 또는 ‘파리 인 런던 아웃’ 두 가지 루트였는데, 뮌헨은 이 루트에서 중간쯤 되는 위치이다. 이미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 도시 전체가 그야말로 문화유산인 로마나 바티칸 등등을 앞뒤로 보고 나면 뮌헨 슈바빙은 처음 봤을 때는 시시하게 느껴지고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아무 것도 기억이 남지 않은 곳이 되었다. 대체 이 곳이 어떤 면에서 우리나라의 대학로와 비슷한 것인지 어떤 경로로 유럽 여행 가이드북에 실려 있었는지 한동안 도무지 알 수 없었는데 이 책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1980년대 후반보다 훨씬 이전에 출판된 이 책을 읽은 당대의 젊은이들은 전혜린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가보지 못한 독일 거리에 대한 동경과 함께 닿을 수 없는 이상에 대한 동경을 함께 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감히 가보지 못할 것 같은 슈바빙에 대한 상상은 닿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는 이상에 대한 추구와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한다. 청년들에게 전혜린의 작품과 인생이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을 훨씬 뛰어넘어 그 청년들은 나이가 먹었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어쩌면 여행 가이드북을 쓰는 작가가 되거나, 출판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 슈바빙이 그 책에 들어가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제 3장 목마른 계절과 제 4장 사랑을 받고 싶은 본능을 읽어나가며 청소년기 독자층에 어필할 정도로 감각적인 전혜린의 문장력은 알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겉멋이 든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평범해져서는 안된다 라는 문장에서 나와 있듯이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늘 생각하고 누구보다 여자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실체가 없는 지적 허영심에 매몰되어버렸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그 시대에 비교할 수 없는 지원과 지적 경험을 누리면서도 책상물림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춘기 소녀 감성에 갖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계속 글을 읽어나가고 있을 때, 제 5장 자라나는 숲을 읽으면서 앞에 네 장을 읽은 느낌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경험이 들었다.

딸 정화가 어른이 된 후에 어느 피곤하고 삶에 실망을 느낀 저녁 때 이 글을 펴 보기를 원하면서 쓴다며 육아일기는 시작된다. 출생을 촉진하기 위한 주사, 출산 시 어떤 말도 비교가 안 되는 창백한 느낌이었다는 산고, 첫눈에 반한 딸과의 만남, 작가에게 주어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딸이라는 찬탄...... 놀랍게도 전혜린은 ‘자기에 대해 성실하게 살아야 하듯 어린 아이에게도 성실할 것, 아이를 물건으로가 아니라 정신으로 알 것, 아이를 수단으로가 아니라 목적으로 알 것’ 이라고 이야기하고 ‘정화가 가엾은 사람에게 울고 동정할 줄 알고 감동할 줄 아는 영혼의 소유자인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다’고 적었다. 이렇게까지 절절하게 딸에 대한 애정을 기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생을 택하지도 살지도 않았으므로 결국 남의 생(아이들의 또는 남편의 생) 속에서 그 보상을 찾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무런 생활도 갖지 않은 어머니가 아이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그리고 환면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며, ‘가장 풍부한 개인적 생활을 가진 여자만이 아이로부터 가장 적은 요구를 한다’는 대목에 있어서는 감탄이 나왔다. ‘자기를 초월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의의를 찾고 실증하고 있는 여인이 가장 겸손한 어머니’이며 ‘여자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생활에 있어서 한 역할을 담당하려는 최근의 일반적인 경향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며, ‘전력을 다해야 하는 직업과 어린 아이의 양육을 양립시킬 수 없는 것은 아직도 너무나 사회의 설비나 그 밖의 노력과 연구가 등한시되어 있기 때문’이고 ‘직장을 가진 어머니’가 늘어날수록 그에 대한 선처가 필요하다는 부분을 읽으며 현재의 나도 정신적인 자극을 받는데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충격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까지도 공감 가능한 지극히 개인적인 그녀의 존재론적 문제의식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면서 정말 오래 살았다면 천재만이 가지는 날카로움, 광기, 번뜩이는 감수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단어와 문장을 넘어서서 남들에게 기억될 정도의 자기업적을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다시 책 앞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읽었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단어 한 단어가 진정이고 작가 자신이다. 과대평가된 작가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쇼생크 탈출 SE (2disc) - [할인행사]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 팀 로빈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그 이탈리아 여자들이 무엇에 대해 노래했는지 난 지금도 모른다. 사실은 알고 싶지도 않다. 말 안 하고 두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래서 가슴 에이게 하는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 노래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자리의 누군가가 꿈꿀 수 있는 것보다 그 음악은 더 높이 더 멀리 울려 퍼졌다. 마치 아름다운 새들이 새장에서 뛰쳐나와 날갯짓하며 순식간에 벽을 넘어가는 느낌, 아주 짧은 한순간이었지만 쇼생크의 모든 사람들은 자유를 느꼈다."

자유에 대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영화는 또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도널드 트럼프 - 정치의 죽음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사회학자 제임스 재스퍼James M. Jasper는 『부단한 활동의 나라Restless Nation: Starting over in America』(2000)에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100분의 1에 불과하고 그런 이민자들은 남다른 적극성, 야망, 재능을 갖고 있는 특이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정신분석 전문의인 존 가트너John D. Gartner는 『조증躁症The Hypomanic edge』(2005)에서 이 주장에 수긍하면서도 질풍노도의 유전자, 즉 ‘조증Hypomania’이야말로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을 만들고 발전시킨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모국의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타지로 떠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많은 도전 정신과 낙관주의가 필요하며, 그래서 이민자의 유전자를 타고난 사람들은 개척 정신이 뛰어나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도전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트너는 이민자들은 조울증 발병률이 높으며,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미국은 세계 어떤 나라보다도 조증 발병률이 높다면서, 이를 미국인의 기질과 연결시킨다.
가트너는 건국 이래 미국을 줄기차게 이끌어온 성공 요인은 이 같은 ‘하이포마니아Hypomania’라면서, 이는 유독 미국인에게 두드러지는 유전 형질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인들의 피 속에는 실패나 파산을 두려워하지 않는 낙관주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인들이 미국인들의 부, 발명 정신, 창의성 등엔 감탄하면서도 ‘천박한 물질만능주의’와 ‘메시아적 기질’을 손가락질하며 적대시하는 ‘사랑과 증오’의 양면성을 보이는 것이 ‘미국=하이포마니아 국가’임을 말해 주는 좋은 증거라고 말한다.
가트너는 특히 성공한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공통된 기질이 ‘조증’이며 실제로 미국에서 성공한 기업가, 탐험가, 발명가들에겐 ‘살짝 미친’ 듯한 기질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 ABC 방송은 애플의 최고 경영자 스티브 잡스,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 TV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의 성공 비결이 가벼운 조증 기질이라고 밝혔다.
트럼프는 그런 아량을 베풀기엔 좀 중증이었다. 혹 타고난 기질과 더불어 약 때문이었을까? 트럼프는 하루에 3~4시간밖에 자지 않는데다 암페타민amphetamine류의 다이어트 약을 복용했는데, 이 약은 식욕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행복감과 더불어 엄청난 활력을 갖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그로 인한 조증의 증상은 트럼프 회사의 직원들 여러 명의 증언으로도 확인되었다.

“도널드 트럼프 같은 나르시스트들은 언제나 자신이 이 세상의 ‘승리자들’ 중 하나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상대적인 ‘패배자’로 폄하하고 이기려는 경우가 많다. 트럼프가 토론 때, 그리고 공개적으로 발언할 때 쓰는 말들을 관찰해보면, 그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패배자라고 코웃음 치며 자신의 승리자로서의 위치를 반복해서 선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트럼프의 나르시시즘이 다른 나르시스트와 다른 점은 나르시시즘의 실현을 위해 그가 미친 듯이 일을 하는 일중독자라는 점이다. 트럼프의 일중독은 ‘목표 중독’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어느 강연장에서 걱정거리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인생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얘기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는데 나는 다르다. 나는 긍정적인 생각도 부정적인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목표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목표를 구상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 시간에 나는 먼저 실행에 옮긴다. 나는 걱정도, 포기도 안 한다. 내 아버지가 걱정이나 하면서 지낼 시간에 일을 했던 것처럼 나도 그렇다.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있을 시간에 난 일을 끝마치기 위해 땀을 흘린다.”
트럼프는 결코 서류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고 같이 걷는 사람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빨리 걷는다. 늘 시간에 쫒기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의 목표엔 끝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어쩌면 나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지도 모르지요. 일시적으로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곧 다음 목표를 생각하게 되지요.”

사실 공적 영역에선 위선이 필요악必要惡인 경우가 많다.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66은 “사회의 일반적인 의무들은 위선을 필요로 하고, 위선 없는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17세기 프랑스 작가로 풍자와 역설의 잠언으로 유명한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Francois de La rochefoucauld, 1613~1680가 갈파했듯이, “위선은 악덕이 미덕에 바치는 공물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저질러지는 위선일지라도 그 위선은 전체 사회가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선자를 비판하는 이유도 언행일치가 안 된다는 것일 뿐, 그 위선의 메시지 자체를 비판하는 건 아니잖은가.
미국 신학자이자 정치학자인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 1892~1971가 “국가의 가장 현저한 도덕적 특징은 아마도 위선일 것이다”라고 한 것도 바로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의 상층부에 속할수록 위선이 강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니부어가 지적했듯이, “특권계급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위선적인 이유는 특권이 오직 평등한 정의라고 하는 합리적 이상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으며, 그 정당화는 특권이 전체의 이익에 기여한다는 걸 입증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문명사회일수록 광신보다는 위선이 발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위선이 사회적 매너리즘이나 관행으로 굳어져 오래 지속될 경우 위선의 그런 사회적 효용이 수명을 다하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부모와 교사에게서 위선의 관행을 배운다면 흉내 낼 게 분명하다. 그래서 위선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자신의 부모나 선생처럼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거나 광신자로 볼 수도 있다.
이는 결국 냉소주의로 가는 첩경이다. 위선은 전염력이 매우 높다는 점도 문제다. 정직한 정치인은 순진한 몽상가로 몰리고, 헌신하는 시민운동가나 복지운동가는 뭔가 좀 이상한 사람이 되고, 자기 규율이 엄격한 사람은 이상한 금욕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면 낮은 도덕 기준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사라지고 부도덕하거나 비도덕적인 행위도 인간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미국 보수 논객 피터 슈바이처Peter Schweizer는 보수적 위선과 진보적 위선을 구분하면서 후자가 더 해롭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위선은 개인적 삶의 영역에 국한되지만, 후자는 입법과 정책을 통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그간 미국에서 위선은 자유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을 공격하는 강력한 무기였다는 점이다. 미국에선 우파가 도덕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버럴 토크쇼 호스트 앨런 콤스Alan Colmes는 위선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감염될 수 없는 보수주의자들의 질병이라고 주장한다.
트럼프 현상은 그런 ‘위선의 게임’의 전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수적 위선에서 자유로운, 아니 전방위적으로 위악적인 언행을 일삼는 트럼프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위선에 맹폭격을 가하는 전사로 나타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간 기성 매스미디어는 문명의 이름으로 이런 전사들을 초전 박살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워왔다. 그런데 SNS와 인터넷이 그 방어벽을 해체하면서 트럼프의 발판이 마련되었으니 이 어찌 ‘미디어 혁명’이 만든 ‘트럼프 현상’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트럼프 현상은 그렇게 극에 이른 위선의 제도화에 대한 반동으로 사실상 ‘위선의 종언’을 선언하고 재촉하는 현상이기도 하며, 이런 현상은 이미 우리 사회에도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과거엔 은밀하게 사석에서나 나눌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확산으로 공사公私영역 구분의 붕괴 현상과 손을 잡고 공공 영역에 진출하여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지지를 누리는 현상, 이게 바로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트럼프 현상의 본질이다.

이제 우리는 위선의 제도화에 대해 그 어떤 판단을 내리고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 그 어떤 출구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지도자나 책임자가 입으로는 차별에 반대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조직이 엄청난 차별을 저지르는 것을 방관하는 기존 의식과 행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아무리 사회적 차원에서 위선이 어느 정도 필요악이라지만, 지금처럼 집단적 사기극을 계속해나가는 것을 정당화할 정도는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연애의 행방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사람이 쌓아온 사회적인 성숙을 올려다보며 나 또한 그와 동등한 높이까지 배우고 발전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사랑의 기본 중의 기본일 것이다. 상대의 잘못을 어디까지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느냐는 것은 상대를 향한 사랑의 진실성에 대한 가늠자가 된다.
-- 히가시노 게이고의 <연애의 행방> 옮긴이의 말중에서 --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
놀랍도록 재미가 없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이 책 전체에서 건질 것이라고는 옮긴이의 말의 이 구절 뿐이라고 하면 넘 잔인한 평일까?

사람 취향이야 천차만별이니, 궁금하다면 한번 속는 셈 치고 읽어보는 것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키스를 부르는 그림 ㅣ Culture & Art 1
안현신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인간의 가장 밑바닥, 저 깊은 심연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을까? 일상의 세세한 감정들과 군더더기들을 모두 제거했을 때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남겨지는 것, 결코 제거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거기에서 비롯되는 해결할 길 없는 불안과 공포일지 모른다.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의 작품들은 우리들 모두의 내면 가장 밑바닥 어딘가에 있을 그 숙명적인 불안과 공포를 건드린다. 모든 군더더기들을 생략하고 본질적인 내면의 뼈대만을 남겨, 우리도 사실은 모두 이렇게 불안한 존재들이지 않은가를 되묻는다. 인간 실존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의 시선. 뭉크의 그림에선 19세기 말 북구의 음습한 분위기와 더불어 자신의 개인적인 질병과 날카로운 감수성, 어린 시절부터 마주해야 했던 죽음의 공포와 내면적 갈등을 그림을 통해 집요하게 표현해낸 한 예술가의 집념이 보인다.
뭉크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을 알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나의 그림들은 곧 나의 일기이다”라고 뭉크는 말했었다. 그만큼 뭉크의 그림은 그의 인생 향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으며 그의 자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죽음과 질병, 광기의 세계에 유난히 노출되어 있었던 어린 시절은 평생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노르웨이의 로텐에서 테어난 뭉크는 다섯 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로부터 10년 뒤 누나도 같은 병으로 목숨을 잃는 비극을 경험했다. 이상 성격을 가진 의사였던 아버지와 남동생도 뭉크의 성장기에 사망했으며, 누이동생은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뭉크 자신도 정신적, 육체적 질병에 오래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뭉크는 늘 죽음과 질병 가까이에 있었고, 자연히 삶에 대한 불안과 질병이 그의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이 문제들과 직접 대결하고 자신의 상처를 응시하며 그렇게 그 공포와 상처를 통과해 나아갔던 것이다.

‘생의 프리즈’ 중에서 ‘사랑’ 연작으로 제작된 이 그림 <키스>에도 이와 같은 뭉크의 성장 배경과 예술적 특성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서로에게 녹아들어 하나의 덩어리로 일체화된 두 몸뚱이는 마치 하나의 짐승 같은 모습이다. 홀로 버티기 버거운 존재들이 서로의 경계를 강하게 침투해보지만 그 몸짓은 오히려 불안하고, 채워질 길 없는 사랑의 갈망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붉은색 계열의 색감으로 칠해진 얼굴의 느낌이 어두운 배경이나 푸른 색조와 대비되면서 남녀의 묘한 흥분감과 불안감을 드러낸다. 어쩌면 강하게 포옹하고 있는 남녀는 서로에게서 두려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를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이다. 상대방의 강한 침투가 나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두려움은 또 있다. 나 혼자 혹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두려움. 두 남녀가 속해 있는 어두운 실내는 창밖의 강한 빛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성은 그림 전체에 긴장감을 가져온다. 두터운 윤곽으로 처리된 벽에 의해 두 사람은 보호받고 있는 셈이나, 바깥 세계로부터의 끊임없는 위협이 언제 닥쳐올지 모를 파국을 이미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공포와 불안을 표현한 예술가, 뭉크. 하지만 죽음에 대한 강박적인 공포는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강한 의지이며 생명의 에너지에 대한 뿌리 깊은 애착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사랑을 주제로 한 그의 작품들도 마찬가지이다. 바탕에 깔려 있는 불안과 고통의 정서를 한 겹만 들춰보면 사랑의 에너지, 생명에 대한 갈구가 요동치고 있다. 그래서 뭉크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기쁨과 고통의 동시성, 삶과 사랑과 죽음의 불가분성 같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사랑은 불안을 잉태하고, 불안은 고통을 가져오며, 고통은 죽음을 야기한다. 어쩌면 사랑 안에는 이미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뭉크는 ‘사랑’을 그릴 때조차도 그저 어떤 단순한 사랑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유한한고 불안한 존재자로서의 고독한 인간의 사랑, 뭉크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뭉크의 그림에서 정면을 향해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는 클로즈업된 남자의 모습은 강한 자의식의 상징이다. 그것은 뭉크 회화의 두드러진 특색들 가운데 하나인 내면에 대한 응시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항상 자신의 내면을 탐구했던 뭉크는 자화상을 매우 많이 그리기도 했지만, 이렇게 자화상이 아닌 다른 그림에서도 끊임없이 자아를 드러냈다. 그런데 이 그림 속 남자의 표정이 재미있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에서, 분노나 배신감보다는 어쩐지 안도하는 듯한 낌새가 느껴지지 않는가?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을 확인하듯, 올 것이 왔음을 받아들이는 듯, 남자의 얼굴은 담담하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긴 했던 걸까? 혹시 한편으로는 여자가 떠나가게 된 상황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던 뭉크는 그림 속에서 여성을 요부 혹은 흡혈귀와 같은 이미지로 많이 그렸다. 뭉크의 그림 속에서 대개 여자들은 성적으로 강하고 공격적이며, 남자들을 괴롭히거나 자신에게 흡입하려 하는 파괴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이는 뭉크 자신의 여성관이 강하게 반영된 모습이다. 뭉크는 성적으로 강하게 여성에게 끌리면서도 동시에 여성의 파멸적 성향을 몹시 두려워했다. 여성이 자신과 자신의 예술을 방해하고 파괴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뭉크에게는 늘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병적 소질들 때문에 결혼을 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범죄라고 생각했던 뭉크에게 여성은 가까이 있으면 가까이 있는 대로, 멀어지면 멀어진 대로 힘든 존재였음이 틀림없다.

이 작품보다 이전에 그려진 <질투>(1895)와 <질투I>(1896)에서는 관람자를 향해 있는 남자의 모습이 프시비지예프스키와 매우 닮게 그려져 있고, 그 남자의 표정은 명백한 분노의 감정으로 격렬하게 이글거리고 있다. 또한 그 작품들에서 뒤쪽의 남녀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들고 있는 아담과 이브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전반적으로 그림에는 강렬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흐른다. 그보다 1~2년 후에 그려진 이 작품 <질투II>(1907)에 이르러서는 배경이 현대의 어느 실내로 옮겨지고 남자의 표정도 다소 희화화되면서 연극의 한 장면 같은 드라마틱한 분위기가 더욱 강해진 반면, 그림의 분위기는 훨씬 여유롭고 담담해졌다.
예술의 강한 치유력을 믿었던 뭉크이기에, 작품 속에서 자신의 문제들과 직접 대결하면서 상처받고 마침내 회복되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 아닐까 생각된다. 자신의 현실적 삶에서 생기는 견딜 수 없는 감정의 짐을 뭉크는 예술이라는 승화된 형태로 옮겨놓았고, 동시에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하고 극복해갔던 것이리라.
뭉크에게 있어 사랑이 주는 행복은 결코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은 언제나 죽음이 시작되는 지점이요, 고통인 동시에 형벌이기도 하다. 죽음이 삶의 일부이듯이, 질투와 고통은 사랑의 한 형태인 것이다. 사랑은 매혹으로 시작하여 이별로 끝나게 마련이며, 어쩌면 질투는 사랑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자가 곧 질투하는 자이고 고통 받는 자이다. 언제나 삶 속에서 죽음과 불안과 두려움을 물끄러미 응시하듯이, 뭉크는 이렇게 사랑 속에서 질투와 고통을 함께 본다.

I. 신혼 시절의 일이다. 어느 날 나는 혼자 집에 있었다. 아내는 친구와 함께 시내에 볼일을 보러 외출 중이었다. 초인종이 울려 나가보니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내와 함께 외출 중인 친구의 남편이었다. 그는 우리 집에서 자기 부인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한번도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사이였기에, 그는 내게 점잖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는 매우 고상하고 품위 있는 상류층 인사였다. 나는 그 방문객을 집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러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그가 응접실로 들어서는 순간 발로 그의 등을 냅다 걷어찼다. 깜짝 놀란 그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둘러 그에게 의자를 내밀었고, 그 역시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의자에 앉았다.
II. 어머니는 막내 동생과 함께 방을 쓰고 계셨다. 내가 열두 살 때의 일이다. 한밤중에 잠에서 깬 동생은 어머니가 안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들을 깨웠다.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머니는 어디에도 안 계셨다. 그런데, 집 앞 계단과 보도블록 위에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어머니의 발자국은 밖으로 향해 걸어간 흔적을 남겨놓고 있었고, 그 발자국을 따라 간 우리들은 마침내 그 지역에 흐르던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다다랐다. 어머니는 강물에 뛰어들어 익사하셨다.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 어머니의 얼굴은 잠옷으로 뒤덮여 있었다. 어머니가 강물에 뛰어들기 전에 두려운 마음 때문에, 혹은 다른 어떤 이유에서 일부러 잠옷을 뒤집어쓰신 것인지, 아니면 소용돌이치는 강물의 흐름 때문에 그리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III. 위의 개인적인 사건과 기억들은 이 그림 <연인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IV.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불가해한 것,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현실 세계가 바로 그 자체로 미스터리이다. 사람들은 종종 내 그림을 보며 묻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미스터리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내 그림의 이미지들 또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알 수 없고 설명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이 불가해한 세계에 대해 나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눈에 보이도록 시각화하며, 그림을 통해 나의 생각을 교류할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는 사람이기 이전에 생각하는 사람이고 질문하는 사람이다. 그 불가해함 없이는 세계도, 생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하나의 대상을 보며 나는 그 뒤에 감춰져 있을 수많은 타자(他者)들을 생각한다.
V. 입맞춤을 끝내고 얼굴을 가린 베일을 벗기고 나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만 같은 낯선 사람이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당황한 당신은 돌연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지만 당신의 낯선 연인 또한 대답을 찾을 길이 없다. 혹은 그 낯설음을 참으며, 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오래된 연인들처럼 친밀함을 가장한 대화를 나눌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는 다시 익숙한 태도로 제각기 주어진 ‘고독과 권태의 자루’를 뒤집어쓸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낯설고도 오랜 연인의 매우 달콤하고 다정한 입맞춤의 광경이며 돌연한 두려움의 순간이다.

매우 독특하고도 철학적인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작품들은 우리의 익숙한 감각을 뒤집고 사회의 선입관이나 이미 결정된 관습과 상식을 공격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그 상징적 의미를 찾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자신의 작품에서 상징적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그 이미지가 지닌 고유의 시정(詩情)과 신비(神秘)를 놓치게 된다며, 이런 태도에 대해 별로 환영하지 않았다. 위에 언급한 일화들은 실제로 마그리트에게 일어났던 일이며, 특히 어머니의 자살 사건은 그의 작품에서 얼굴에 베일을 뒤집어쓴 이미지들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말하지만, 마그리트 자신은 개인적인 과거의 반영이나 심리학적인 투사로 자신의 작품이 해석되고 환원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

처음 책을 읽을 때에는 강력한 표지에 끌렸다. 책의 첫 장을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흔하디 흔한, 시중에 넘치는, 대중적인 예술서를 빙자한 에세이인줄로만 알았다. 챕터를 넘기면서 점점 책의 내용이 깊어진다고 할까. 다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마음은 가볍지만 눅진하지 않고 보송보송하다. 어쩌면 미술에 대한 조예가 얕을 수록 이 책을 더 높게 평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철저하게 비전문가인, 그러나 기웃거릴 정도의 관심이 있는 나에게는, 예술과는 전혀 무관한 분야에서 특히 요즘 들어 고된 하루살이를 하고 있는 나에게는,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 땀이 산뜻하게 말라버리는 느낌이었다. 달게 낮잠을 자고 난 뒤의 개운함이라고 할까. 읽는 동안 완벽한 휴식이 되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스페인, 노르웨이, 프랑스 등등의 온갖 유적지며 관광지를 돌아다녀도 정작 화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간 적은 없다는 것도 이제 오니 큰 아쉬움이다. 니스의 샤갈 미술관,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 브뤼셀의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 언젠가 꼭 가보리라 다짐하며 꾹꾹 눌러가며 글을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