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 정치의 죽음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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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학자 제임스 재스퍼James M. Jasper는 『부단한 활동의 나라Restless Nation: Starting over in America』(2000)에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100분의 1에 불과하고 그런 이민자들은 남다른 적극성, 야망, 재능을 갖고 있는 특이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정신분석 전문의인 존 가트너John D. Gartner는 『조증躁症The Hypomanic edge』(2005)에서 이 주장에 수긍하면서도 질풍노도의 유전자, 즉 ‘조증Hypomania’이야말로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을 만들고 발전시킨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모국의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타지로 떠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많은 도전 정신과 낙관주의가 필요하며, 그래서 이민자의 유전자를 타고난 사람들은 개척 정신이 뛰어나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도전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트너는 이민자들은 조울증 발병률이 높으며,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미국은 세계 어떤 나라보다도 조증 발병률이 높다면서, 이를 미국인의 기질과 연결시킨다.
가트너는 건국 이래 미국을 줄기차게 이끌어온 성공 요인은 이 같은 ‘하이포마니아Hypomania’라면서, 이는 유독 미국인에게 두드러지는 유전 형질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인들의 피 속에는 실패나 파산을 두려워하지 않는 낙관주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인들이 미국인들의 부, 발명 정신, 창의성 등엔 감탄하면서도 ‘천박한 물질만능주의’와 ‘메시아적 기질’을 손가락질하며 적대시하는 ‘사랑과 증오’의 양면성을 보이는 것이 ‘미국=하이포마니아 국가’임을 말해 주는 좋은 증거라고 말한다.
가트너는 특히 성공한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공통된 기질이 ‘조증’이며 실제로 미국에서 성공한 기업가, 탐험가, 발명가들에겐 ‘살짝 미친’ 듯한 기질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 ABC 방송은 애플의 최고 경영자 스티브 잡스,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 TV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의 성공 비결이 가벼운 조증 기질이라고 밝혔다.
트럼프는 그런 아량을 베풀기엔 좀 중증이었다. 혹 타고난 기질과 더불어 약 때문이었을까? 트럼프는 하루에 3~4시간밖에 자지 않는데다 암페타민amphetamine류의 다이어트 약을 복용했는데, 이 약은 식욕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행복감과 더불어 엄청난 활력을 갖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그로 인한 조증의 증상은 트럼프 회사의 직원들 여러 명의 증언으로도 확인되었다.

“도널드 트럼프 같은 나르시스트들은 언제나 자신이 이 세상의 ‘승리자들’ 중 하나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상대적인 ‘패배자’로 폄하하고 이기려는 경우가 많다. 트럼프가 토론 때, 그리고 공개적으로 발언할 때 쓰는 말들을 관찰해보면, 그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패배자라고 코웃음 치며 자신의 승리자로서의 위치를 반복해서 선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트럼프의 나르시시즘이 다른 나르시스트와 다른 점은 나르시시즘의 실현을 위해 그가 미친 듯이 일을 하는 일중독자라는 점이다. 트럼프의 일중독은 ‘목표 중독’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어느 강연장에서 걱정거리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인생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얘기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는데 나는 다르다. 나는 긍정적인 생각도 부정적인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목표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목표를 구상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 시간에 나는 먼저 실행에 옮긴다. 나는 걱정도, 포기도 안 한다. 내 아버지가 걱정이나 하면서 지낼 시간에 일을 했던 것처럼 나도 그렇다.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있을 시간에 난 일을 끝마치기 위해 땀을 흘린다.”
트럼프는 결코 서류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고 같이 걷는 사람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빨리 걷는다. 늘 시간에 쫒기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의 목표엔 끝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어쩌면 나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지도 모르지요. 일시적으로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곧 다음 목표를 생각하게 되지요.”

사실 공적 영역에선 위선이 필요악必要惡인 경우가 많다.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66은 “사회의 일반적인 의무들은 위선을 필요로 하고, 위선 없는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17세기 프랑스 작가로 풍자와 역설의 잠언으로 유명한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Francois de La rochefoucauld, 1613~1680가 갈파했듯이, “위선은 악덕이 미덕에 바치는 공물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저질러지는 위선일지라도 그 위선은 전체 사회가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선자를 비판하는 이유도 언행일치가 안 된다는 것일 뿐, 그 위선의 메시지 자체를 비판하는 건 아니잖은가.
미국 신학자이자 정치학자인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 1892~1971가 “국가의 가장 현저한 도덕적 특징은 아마도 위선일 것이다”라고 한 것도 바로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의 상층부에 속할수록 위선이 강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니부어가 지적했듯이, “특권계급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위선적인 이유는 특권이 오직 평등한 정의라고 하는 합리적 이상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으며, 그 정당화는 특권이 전체의 이익에 기여한다는 걸 입증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문명사회일수록 광신보다는 위선이 발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위선이 사회적 매너리즘이나 관행으로 굳어져 오래 지속될 경우 위선의 그런 사회적 효용이 수명을 다하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부모와 교사에게서 위선의 관행을 배운다면 흉내 낼 게 분명하다. 그래서 위선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자신의 부모나 선생처럼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거나 광신자로 볼 수도 있다.
이는 결국 냉소주의로 가는 첩경이다. 위선은 전염력이 매우 높다는 점도 문제다. 정직한 정치인은 순진한 몽상가로 몰리고, 헌신하는 시민운동가나 복지운동가는 뭔가 좀 이상한 사람이 되고, 자기 규율이 엄격한 사람은 이상한 금욕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면 낮은 도덕 기준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사라지고 부도덕하거나 비도덕적인 행위도 인간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미국 보수 논객 피터 슈바이처Peter Schweizer는 보수적 위선과 진보적 위선을 구분하면서 후자가 더 해롭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위선은 개인적 삶의 영역에 국한되지만, 후자는 입법과 정책을 통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그간 미국에서 위선은 자유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을 공격하는 강력한 무기였다는 점이다. 미국에선 우파가 도덕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버럴 토크쇼 호스트 앨런 콤스Alan Colmes는 위선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감염될 수 없는 보수주의자들의 질병이라고 주장한다.
트럼프 현상은 그런 ‘위선의 게임’의 전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수적 위선에서 자유로운, 아니 전방위적으로 위악적인 언행을 일삼는 트럼프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위선에 맹폭격을 가하는 전사로 나타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간 기성 매스미디어는 문명의 이름으로 이런 전사들을 초전 박살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워왔다. 그런데 SNS와 인터넷이 그 방어벽을 해체하면서 트럼프의 발판이 마련되었으니 이 어찌 ‘미디어 혁명’이 만든 ‘트럼프 현상’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트럼프 현상은 그렇게 극에 이른 위선의 제도화에 대한 반동으로 사실상 ‘위선의 종언’을 선언하고 재촉하는 현상이기도 하며, 이런 현상은 이미 우리 사회에도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과거엔 은밀하게 사석에서나 나눌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확산으로 공사公私영역 구분의 붕괴 현상과 손을 잡고 공공 영역에 진출하여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지지를 누리는 현상, 이게 바로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트럼프 현상의 본질이다.

이제 우리는 위선의 제도화에 대해 그 어떤 판단을 내리고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 그 어떤 출구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지도자나 책임자가 입으로는 차별에 반대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조직이 엄청난 차별을 저지르는 것을 방관하는 기존 의식과 행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아무리 사회적 차원에서 위선이 어느 정도 필요악이라지만, 지금처럼 집단적 사기극을 계속해나가는 것을 정당화할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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