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계절 범우문고 10
전혜린 지음 / 범우사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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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혜린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인지 잘 모르겠다. 천재, 광기, 시대를 앞서간 여인 등등 몇몇의 키워드로만 알고 있었고 정작 전혜린의 글을 제대로 정독하지도 않은 채 본인의 문학적 업적 자체보다 시대적 아이콘으로 더 평가받는 인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2004년 교육방송에서 1950년대 명동의 문인들 이야기를 다룬 명동 백작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전부 다 챙겨보지는 못했다. 짤막짤막한 화면 속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은 배우 이재은이 연기한 전혜린이 절망하며 술을 마시는 장면이다. 당시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는 문인으로서의 참담함보다는 스스로의 감정을 어쩌지 못하는 자의식의 과잉으로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아마도 배우의 연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극본 때문일 수도 있고, 연출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괴로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흔치 않은 경험 때문인지 그 장면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쩌면 그 장면 때문에 전혜린에 대한 내 인상은 그 이후로도 한참 굳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단어 하나만 넣어서 검색하면 마치 가지가 좍 펼쳐지듯이 연관성 있는 글들이 줄줄이 딸려 오는데, 전혜린에 대한 어떤 글을 접하고 난 후 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게 맞지, 광기와 사생활로 회자 되는 것이 아니라’ 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러고 보니 정작 내가 전혜린의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면서 나는 곧바로 전혜린을 검색해 나온 책들 중 번역한 책을 제외한 책들을 주문했다. ‘자신의 문학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번역을 하였는데 어째서 이리 칭송되는지 모르겠어. 직접 자기 이야기를 쓴 책을 읽어봐야 진짜 엄청난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결론내리며 말이다.

전혜린의 글에서 나는 ‘슈바빙’이라는 단어를 접하고 아하, 할 수 있었다. 20대 초반의 대학생 시절, 이미 까마득한 오래 전에 나는 절친한 친구와 유럽 배낭 여행을 했었다. 그때 우리의 일정에는 뮌헨이 포함되어 있었고, 여행 책자에서 뮌헨의 주요 명소로 우리나라의 대학로에 해당한다는 ‘슈바빙’이 있었다. 그게 뭔지도 잘 모르면서 기대에 벅차 슈바빙에 도착한 우리는 크게 실망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 대학생들의 유럽 여행은 최대한 많은 곳을 보되 경비를 아끼기 위해 ‘런던 인 파리 아웃’, 또는 ‘파리 인 런던 아웃’ 두 가지 루트였는데, 뮌헨은 이 루트에서 중간쯤 되는 위치이다. 이미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 도시 전체가 그야말로 문화유산인 로마나 바티칸 등등을 앞뒤로 보고 나면 뮌헨 슈바빙은 처음 봤을 때는 시시하게 느껴지고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아무 것도 기억이 남지 않은 곳이 되었다. 대체 이 곳이 어떤 면에서 우리나라의 대학로와 비슷한 것인지 어떤 경로로 유럽 여행 가이드북에 실려 있었는지 한동안 도무지 알 수 없었는데 이 책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1980년대 후반보다 훨씬 이전에 출판된 이 책을 읽은 당대의 젊은이들은 전혜린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가보지 못한 독일 거리에 대한 동경과 함께 닿을 수 없는 이상에 대한 동경을 함께 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감히 가보지 못할 것 같은 슈바빙에 대한 상상은 닿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는 이상에 대한 추구와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한다. 청년들에게 전혜린의 작품과 인생이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을 훨씬 뛰어넘어 그 청년들은 나이가 먹었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어쩌면 여행 가이드북을 쓰는 작가가 되거나, 출판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 슈바빙이 그 책에 들어가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글을 읽어나가며 청소년기 독자층에 어필할 정도로 감각적인 전혜린의 문장력은 알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겉멋이 든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평범해져서는 안된다 라는 문장에서 나와 있듯이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늘 생각하고 누구보다 여자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실체가 없는 지적 허영심에 매몰되어버렸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그 시대에 비교할 수 없는 지원과 지적 경험을 누리면서도 책상물림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춘기 소녀 감성에 갖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계속 글을 읽어나가고 있을 때, 딸에 대한 글을 읽으며 여태 책을 읽은 느낌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경험이 들었다.

딸 정화가 어른이 된 후에 어느 피곤하고 삶에 실망을 느낀 저녁 때 이 글을 펴 보기를 원하면서 쓴다며 육아일기는 시작된다. 출생을 촉진하기 위한 주사, 출산 시 어떤 말도 비교가 안 되는 창백한 느낌이었다는 산고, 첫눈에 반한 딸과의 만남, 작가에게 주어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딸이라는 찬탄...... 놀랍게도 전혜린은 ‘자기에 대해 성실하게 살아야 하듯 어린 아이에게도 성실할 것, 아이를 물건으로가 아니라 정신으로 알 것, 아이를 수단으로가 아니라 목적으로 알 것’ 이라고 이야기하고 ‘정화가 가엾은 사람에게 울고 동정할 줄 알고 감동할 줄 아는 영혼의 소유자인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다’고 적었다. 이렇게까지 절절하게 딸에 대한 애정을 기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생을 택하지도 살지도 않았으므로 결국 남의 생(아이들의 또는 남편의 생) 속에서 그 보상을 찾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무런 생활도 갖지 않은 어머니가 아이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그리고 환면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며, ‘가장 풍부한 개인적 생활을 가진 여자만이 아이로부터 가장 적은 요구를 한다’는 대목에 있어서는 감탄이 나왔다. ‘자기를 초월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의의를 찾고 실증하고 있는 여인이 가장 겸손한 어머니’이며 ‘여자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생활에 있어서 한 역할을 담당하려는 최근의 일반적인 경향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며, ‘전력을 다해야 하는 직업과 어린 아이의 양육을 양립시킬 수 없는 것은 아직도 너무나 사회의 설비나 그 밖의 노력과 연구가 등한시되어 있기 때문’이고 ‘직장을 가진 어머니’가 늘어날수록 그에 대한 선처가 필요하다는 부분을 읽으며 현재의 나도 정신적인 자극을 받는데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충격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까지도 공감 가능한 지극히 개인적인 그녀의 존재론적 문제의식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면서 정말 오래 살았다면 천재만이 가지는 날카로움, 광기, 번뜩이는 감수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단어와 문장을 넘어서서 남들에게 기억될 정도의 자기업적을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다시 책 앞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읽었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단어 한 단어가 진정이고 작가 자신이다. 과대평가된 작가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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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 전혜린 에세이 2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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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다 다소 산만하기는 하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가 완전한 수필을 모은 글인 반면,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는 편지와 일기를 모은 글이다.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 수필이 아니라 나만 보는 일기, 나와 상대 둘 사이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룬 편지는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되다보니 독자들에게는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전혜린의 글과 인생에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의미있는 책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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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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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들이 사냥 후 가죽을 모아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책임자의 옷을 보니 군인인 것은 알겠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고용된 사냥꾼. 직업 군인들의 집합이 아니기에 부대는 아닌데 그렇다고 해도 아예 민간인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무리. 아마도 미국의 초기 중에서도 초기, 그러니까 나라의 꼴을 갖추기도 전의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아직은 체계가 잡혀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인디언들이 이들을 습격하며 이들은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가까스로 도망친 이들이 가죽의 일부만을 가지고 배에 올랐지만 훨씬 많은 사람은 인디언의 손에 죽고 그보다 더 많은 가죽의 대부분은 뺏기고 만다. 백전노장의 인디언 추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이 있다. 그는 백인에게 딸을 빼앗긴 상태이다. 투생이라는 자가 이끄는 또 다른 백인 무리를 만나 자신들이 가져온 가죽을 그들의 말과 총으로 바꾼 뒤 딸을 되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겨우 목숨을 건져 배를 타고 강을 가고 있는 이들 중에는 대위가 있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글래스라는 이름의 사냥꾼이 있고, 톰 하디가 연기하는 피츠제랄드라는 이름의 사냥꾼이 있다. 글래스는 인디언의 습격을 피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가자고 주장하고 피츠제랄드는 배를 타고 빠르게 내려가자고 맞선다. 일단 가죽을 가지고 가기에는 짐이 많아서 강 주변에 숨겨두고 배를 불태우려 했으나 배를 처리하러 보낸 두 명이 그대로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 버린다.

육지를 따라 목적지인 요새로 향하는 일행은 이제 퍽 줄어들었다. 일행들이 쉬는 동안 주변을 탐색하던 글래스는 곰의 습격을 받고 겨우 곰을 죽이게 되나 치명상을 입게 된다. 말도 할 수 없고 걸을 수도 없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곰에게 물어뜯긴 글래스. 위기 상황에서도 빠른 판단과 타고난 감각으로 여러 사람을 구했던 사냥꾼은 한순간에 일행 전체의 짐으로 전락한다. 겨울이 되어가며 날은 추워지고 아직 요새까지의 길은 멀었는데 글래스는 숨만 쉬었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이다. 무리를 이끌던 대위는 더 이상 글래스 때문에 늦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글래스를 죽이고 다른 일행을 살리려고 했으나 글래스의 아들 호크의 애원으로 마음을 바꾼다. 사례비를 걸고 글래스가 죽을 때까지 지켜줄 3명만 남기고 나머지 인원은 요새로 먼저 떠나기로 한 것이다. 글래스가 죽으면 잘 묻어주라는 명령도 함께 남기고 말이다. 이에 글래스와 인디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아들 호크와 호크의 절친 브리저, 보상금을 노린 피츠제럴드 3명이 글래스를 돌보기 위해 남는다.

호크와 브리저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잠시 떠난 사이 피츠제럴드는 글래스에게 이대로라면 모두 죽을 테니 편안하게 죽는 것을 원하고 싶다면 눈을 깜빡이라고 한다. 한참 눈을 뜨고 있던 글래스가 눈을 감자 피츠제럴드는 글래스를 죽이려 하지만, 막 도착하여 그 과정을 보게 된 호크가 피츠제럴드에게 달려들며 브리저에게 빨리 오라고 소리를 지르자 피츠제럴드는 호크를 찔러 죽이고 호크의 시체를 멀리 끌고 가 버린다. 이 모습을 글래스는 전부 다 보고 있지만 어떤 말도 약간의 움직임도 불가능한 상태이다. 한참 후 도착한 브리저는 호크의 안부를 묻지만 피츠제럴드는 모르는 척을 하고, 다음날 아침 멀리서 수많은 인디언이 다가온다며 자고 있던 브리저를 깨우고 빨리 도망치자고 한다. 브리저는 글래스를 놔두고 갈 수는 없다고 버티지만 피츠제럴드는 어차피 글래스는 죽을 것이라며 구덩이에 글래스를 던지고 흙을 덮어버린다. 브리저는 죄책감에 자신의 물통을 글래스의 몸 위에 던져두고 피츠제럴드와 함께 도망간다.

시간이 지난 후 글래스는 믿을 수 없는 의지로 호크의 시체까지 기어가고, 아들의 시체에서 목걸이를 빼서 걸고 모피와 물통과 도구들을 챙긴 채 기어서 숲속을 지나간다. 죽은 동물의 뼈에 붙은 살점을 뜯어먹고 강가에서 물을 마시며 몸을 회복해가던 중 자신을 뒤쫓아 인디언들의 습격을 피해 강물에 뛰어들어 도망간다. 겨우겨우 연명해가던 중 우연히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이는 인디언을 만나 고기를 얻어 먹는다. 서로 경계하던 그들은 이야기를 하다가 가족을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유대감을 쌓는다. 동행하던 중 글래스의 몸이 약해져 더 갈 수 없어지자 인디언은 천막을 만들어주고 모피와 고기를 남겨두고 나서 떠난다. 환상 속에서 생전 인디언 아내가 불러주던 노랫소리, 뿌리를 단단히 내린 나무로 변해 있는 아들을 보던 글래스가 몸이 회복되어 인디언의 뒤를 쫒던 중, 목이 매달려 죽어 있는 인디언을 발견하게 된다. 인디언은 또 다른 무리인 투생 일행에게 잡혔던 것. 글래스는 몸을 숨겼다가 저녁이 되어 그 무리에 접근하고 그들이 데리고 있던 인디언 여성과 함께 말을 타고 도망간다. 요새를 향해 가던 글래스는 또다시 인디언의 습격을 받게 되고 말과 함께 절벽 밑으로 떨어지나 나무에 걸려 겨우 살게 된다.

인디언 때문에 숨기도 불을 피우기도 어려운 상태의 글래스는 절벽으로 떨어질 때 죽은 말의 배를 갈라 그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가 다시 요새를 향해 떠난다. 부하들과 함께 숲속을 수색하던 대위와 만나게 된 글래스. 대위는 피츠제럴드를 체포하려고 하나 이미 피츠제럴드는 대위가 보관하던 금고까지 털어 도망가 버린 후다. 화가 난 대위는 피츠제럴드를 잡기 위해 떠나고, 대위의 만류에도 글래스는 대위와 함께 피츠제럴드를 잡으러 함께 떠난다. 피츠제럴드의 기습에 대위가 죽고, 글래스는 대위의 시체를 말 위에 올려놓고 자신은 다른 말 위에 탄 채로 지나가는데......... 숨어 있던 피츠제럴드가 글래스를 쏴서 말 위에서 떨어뜨린다. 안도와 기쁨으로 글래스의 시체로 다가가던 피츠제럴드는 숨이 탁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는데 총에 맞은 것은 대위의 시체였고 대위의 시체로 위장해 있던 것이 글래스. 도망가는 피츠제럴드에게 일격을 가한 글래스에게 다시 피츠제럴드가 달려들고......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받으며 겨우 글래스가 간발의 차로 피츠제럴드를 제압했을 때 인디언 무리가 다시 나타난다. 글래스는 피츠제럴드를 강물에 떠나 보내어 인디언들의 손에 죽게 하고, 자신 또한 인디언들의 처분을 가만히 기다린다. 인디언들은 그를 바라보며 유유히 지나가는데, 글래스가 구조했던 인디언 여성이 말 위에 앉아 있다. 바로 그녀가 인디언 추장의 딸이었던 것.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는 글래스의 눈앞에 죽은 아내가 미소를 짓고 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글래스의 얼굴에서 영화는 끝난다.


그야말로 이 영화는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디카프리오의 고생의 향연이다. 특히나 곰에게 물어뜯기는 장면, 인디언에게 쫓기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정말 단 1mg의 간도 되어 있지 않은 퍽퍽한 생고기를 먹는 느낌이다. 사실 영화의 줄거리만 늘어놓고 보면 극한에서 생존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한 남자의 삶이 전부이다. 그 외에 어떠한 이야기도 없다고 볼 수도 있는데 사실 이렇게 요약하면 아주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이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전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이다. 정말 놀랍게도 이 영화는 곰에 물리고도 생존해 돌아온 남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이런 영화는 사실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지루해질 수도 있다. 보는 내내 온 몸에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이유는 연출과 촬영 등의 공이 엄청났을 것이라는 생각을 그쪽 분야에 문외한이 나조차도 할 수 밖에 없다. 이 영화는 중간 중간 나무라는 키워드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 영화의 줄거리는 마치 꼬아지거나 굽어진 부분이 없는, 가지가 다 잘려진 굵은 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뿌리로 튼튼히 버티되, 다른 나무와 접붙이지도 풍성한 곁가지고 없는 그저 직진하는 이야기이다. 그러기에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것은 주인공 휴 글래스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얼굴이다. 여러 번의 재수 끝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아마 그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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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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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혜린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인지 잘 모르겠다. 천재, 광기, 시대를 앞서간 여인 등등 몇몇의 키워드로만 알고 있었고 정작 전혜린의 글을 제대로 정독하지도 않은 채 본인의 문학적 업적 자체보다 시대적 아이콘으로 더 평가받는 인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2004년 교육방송에서 1950년대 명동의 문인들 이야기를 다룬 명동 백작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전부 다 챙겨보지는 못했다. 짤막짤막한 화면 속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은 배우 이재은이 연기한 전혜린이 절망하며 술을 마시는 장면이다. 당시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는 문인으로서의 참담함보다는 스스로의 감정을 어쩌지 못하는 자의식의 과잉으로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아마도 배우의 연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극본 때문일 수도 있고, 연출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괴로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흔치 않은 경험 때문인지 그 장면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쩌면 그 장면 때문에 전혜린에 대한 내 인상은 그 이후로도 한참 굳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단어 하나만 넣어서 검색하면 마치 가지가 좍 펼쳐지듯이 연관성 있는 글들이 줄줄이 딸려 오는데, 전혜린에 대한 어떤 글을 접하고 난 후 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게 맞지, 광기와 사생활로 회자 되는 것이 아니라’ 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러고 보니 정작 내가 전혜린의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면서 나는 곧바로 전혜린을 검색해 나온 책들 중 번역한 책을 제외한 책들을 주문했다. ‘자신의 문학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번역을 하였는데 어째서 이리 칭송되는지 모르겠어. 직접 자기 이야기를 쓴 책을 읽어봐야 진짜 엄청난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결론내리며 말이다.

제 1장 사랑의 찬가를 지나 제 2장 뮌헨의 몽마르트르에 도달하면서 나는 ‘슈바빙’이라는 단어를 접하고 아하, 할 수 있었다. 20대 초반의 대학생 시절, 이미 까마득한 오래 전에 나는 절친한 친구와 유럽 배낭 여행을 했었다. 그때 우리의 일정에는 뮌헨이 포함되어 있었고, 여행 책자에서 뮌헨의 주요 명소로 우리나라의 대학로에 해당한다는 ‘슈바빙’이 있었다. 그게 뭔지도 잘 모르면서 기대에 벅차 슈바빙에 도착한 우리는 크게 실망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 대학생들의 유럽 여행은 최대한 많은 곳을 보되 경비를 아끼기 위해 ‘런던 인 파리 아웃’, 또는 ‘파리 인 런던 아웃’ 두 가지 루트였는데, 뮌헨은 이 루트에서 중간쯤 되는 위치이다. 이미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 도시 전체가 그야말로 문화유산인 로마나 바티칸 등등을 앞뒤로 보고 나면 뮌헨 슈바빙은 처음 봤을 때는 시시하게 느껴지고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아무 것도 기억이 남지 않은 곳이 되었다. 대체 이 곳이 어떤 면에서 우리나라의 대학로와 비슷한 것인지 어떤 경로로 유럽 여행 가이드북에 실려 있었는지 한동안 도무지 알 수 없었는데 이 책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1980년대 후반보다 훨씬 이전에 출판된 이 책을 읽은 당대의 젊은이들은 전혜린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가보지 못한 독일 거리에 대한 동경과 함께 닿을 수 없는 이상에 대한 동경을 함께 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감히 가보지 못할 것 같은 슈바빙에 대한 상상은 닿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는 이상에 대한 추구와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한다. 청년들에게 전혜린의 작품과 인생이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을 훨씬 뛰어넘어 그 청년들은 나이가 먹었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어쩌면 여행 가이드북을 쓰는 작가가 되거나, 출판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 슈바빙이 그 책에 들어가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제 3장 목마른 계절과 제 4장 사랑을 받고 싶은 본능을 읽어나가며 청소년기 독자층에 어필할 정도로 감각적인 전혜린의 문장력은 알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겉멋이 든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평범해져서는 안된다 라는 문장에서 나와 있듯이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늘 생각하고 누구보다 여자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실체가 없는 지적 허영심에 매몰되어버렸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그 시대에 비교할 수 없는 지원과 지적 경험을 누리면서도 책상물림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춘기 소녀 감성에 갖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계속 글을 읽어나가고 있을 때, 제 5장 자라나는 숲을 읽으면서 앞에 네 장을 읽은 느낌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경험이 들었다.

딸 정화가 어른이 된 후에 어느 피곤하고 삶에 실망을 느낀 저녁 때 이 글을 펴 보기를 원하면서 쓴다며 육아일기는 시작된다. 출생을 촉진하기 위한 주사, 출산 시 어떤 말도 비교가 안 되는 창백한 느낌이었다는 산고, 첫눈에 반한 딸과의 만남, 작가에게 주어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딸이라는 찬탄...... 놀랍게도 전혜린은 ‘자기에 대해 성실하게 살아야 하듯 어린 아이에게도 성실할 것, 아이를 물건으로가 아니라 정신으로 알 것, 아이를 수단으로가 아니라 목적으로 알 것’ 이라고 이야기하고 ‘정화가 가엾은 사람에게 울고 동정할 줄 알고 감동할 줄 아는 영혼의 소유자인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다’고 적었다. 이렇게까지 절절하게 딸에 대한 애정을 기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생을 택하지도 살지도 않았으므로 결국 남의 생(아이들의 또는 남편의 생) 속에서 그 보상을 찾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무런 생활도 갖지 않은 어머니가 아이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그리고 환면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며, ‘가장 풍부한 개인적 생활을 가진 여자만이 아이로부터 가장 적은 요구를 한다’는 대목에 있어서는 감탄이 나왔다. ‘자기를 초월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의의를 찾고 실증하고 있는 여인이 가장 겸손한 어머니’이며 ‘여자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생활에 있어서 한 역할을 담당하려는 최근의 일반적인 경향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며, ‘전력을 다해야 하는 직업과 어린 아이의 양육을 양립시킬 수 없는 것은 아직도 너무나 사회의 설비나 그 밖의 노력과 연구가 등한시되어 있기 때문’이고 ‘직장을 가진 어머니’가 늘어날수록 그에 대한 선처가 필요하다는 부분을 읽으며 현재의 나도 정신적인 자극을 받는데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충격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까지도 공감 가능한 지극히 개인적인 그녀의 존재론적 문제의식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면서 정말 오래 살았다면 천재만이 가지는 날카로움, 광기, 번뜩이는 감수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단어와 문장을 넘어서서 남들에게 기억될 정도의 자기업적을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다시 책 앞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읽었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단어 한 단어가 진정이고 작가 자신이다. 과대평가된 작가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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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생크 탈출 SE (2disc) - [할인행사]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 팀 로빈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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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탈리아 여자들이 무엇에 대해 노래했는지 난 지금도 모른다. 사실은 알고 싶지도 않다. 말 안 하고 두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래서 가슴 에이게 하는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 노래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자리의 누군가가 꿈꿀 수 있는 것보다 그 음악은 더 높이 더 멀리 울려 퍼졌다. 마치 아름다운 새들이 새장에서 뛰쳐나와 날갯짓하며 순식간에 벽을 넘어가는 느낌, 아주 짧은 한순간이었지만 쇼생크의 모든 사람들은 자유를 느꼈다."

자유에 대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영화는 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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