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계절 범우문고 10
전혜린 지음 / 범우사 / 1994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전혜린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인지 잘 모르겠다. 천재, 광기, 시대를 앞서간 여인 등등 몇몇의 키워드로만 알고 있었고 정작 전혜린의 글을 제대로 정독하지도 않은 채 본인의 문학적 업적 자체보다 시대적 아이콘으로 더 평가받는 인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2004년 교육방송에서 1950년대 명동의 문인들 이야기를 다룬 명동 백작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전부 다 챙겨보지는 못했다. 짤막짤막한 화면 속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은 배우 이재은이 연기한 전혜린이 절망하며 술을 마시는 장면이다. 당시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는 문인으로서의 참담함보다는 스스로의 감정을 어쩌지 못하는 자의식의 과잉으로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아마도 배우의 연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극본 때문일 수도 있고, 연출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괴로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흔치 않은 경험 때문인지 그 장면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쩌면 그 장면 때문에 전혜린에 대한 내 인상은 그 이후로도 한참 굳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단어 하나만 넣어서 검색하면 마치 가지가 좍 펼쳐지듯이 연관성 있는 글들이 줄줄이 딸려 오는데, 전혜린에 대한 어떤 글을 접하고 난 후 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게 맞지, 광기와 사생활로 회자 되는 것이 아니라’ 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러고 보니 정작 내가 전혜린의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면서 나는 곧바로 전혜린을 검색해 나온 책들 중 번역한 책을 제외한 책들을 주문했다. ‘자신의 문학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번역을 하였는데 어째서 이리 칭송되는지 모르겠어. 직접 자기 이야기를 쓴 책을 읽어봐야 진짜 엄청난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결론내리며 말이다.

전혜린의 글에서 나는 ‘슈바빙’이라는 단어를 접하고 아하, 할 수 있었다. 20대 초반의 대학생 시절, 이미 까마득한 오래 전에 나는 절친한 친구와 유럽 배낭 여행을 했었다. 그때 우리의 일정에는 뮌헨이 포함되어 있었고, 여행 책자에서 뮌헨의 주요 명소로 우리나라의 대학로에 해당한다는 ‘슈바빙’이 있었다. 그게 뭔지도 잘 모르면서 기대에 벅차 슈바빙에 도착한 우리는 크게 실망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 대학생들의 유럽 여행은 최대한 많은 곳을 보되 경비를 아끼기 위해 ‘런던 인 파리 아웃’, 또는 ‘파리 인 런던 아웃’ 두 가지 루트였는데, 뮌헨은 이 루트에서 중간쯤 되는 위치이다. 이미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 도시 전체가 그야말로 문화유산인 로마나 바티칸 등등을 앞뒤로 보고 나면 뮌헨 슈바빙은 처음 봤을 때는 시시하게 느껴지고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아무 것도 기억이 남지 않은 곳이 되었다. 대체 이 곳이 어떤 면에서 우리나라의 대학로와 비슷한 것인지 어떤 경로로 유럽 여행 가이드북에 실려 있었는지 한동안 도무지 알 수 없었는데 이 책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1980년대 후반보다 훨씬 이전에 출판된 이 책을 읽은 당대의 젊은이들은 전혜린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가보지 못한 독일 거리에 대한 동경과 함께 닿을 수 없는 이상에 대한 동경을 함께 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감히 가보지 못할 것 같은 슈바빙에 대한 상상은 닿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는 이상에 대한 추구와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한다. 청년들에게 전혜린의 작품과 인생이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을 훨씬 뛰어넘어 그 청년들은 나이가 먹었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어쩌면 여행 가이드북을 쓰는 작가가 되거나, 출판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 슈바빙이 그 책에 들어가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글을 읽어나가며 청소년기 독자층에 어필할 정도로 감각적인 전혜린의 문장력은 알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겉멋이 든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평범해져서는 안된다 라는 문장에서 나와 있듯이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늘 생각하고 누구보다 여자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실체가 없는 지적 허영심에 매몰되어버렸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그 시대에 비교할 수 없는 지원과 지적 경험을 누리면서도 책상물림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춘기 소녀 감성에 갖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계속 글을 읽어나가고 있을 때, 딸에 대한 글을 읽으며 여태 책을 읽은 느낌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경험이 들었다.

딸 정화가 어른이 된 후에 어느 피곤하고 삶에 실망을 느낀 저녁 때 이 글을 펴 보기를 원하면서 쓴다며 육아일기는 시작된다. 출생을 촉진하기 위한 주사, 출산 시 어떤 말도 비교가 안 되는 창백한 느낌이었다는 산고, 첫눈에 반한 딸과의 만남, 작가에게 주어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딸이라는 찬탄...... 놀랍게도 전혜린은 ‘자기에 대해 성실하게 살아야 하듯 어린 아이에게도 성실할 것, 아이를 물건으로가 아니라 정신으로 알 것, 아이를 수단으로가 아니라 목적으로 알 것’ 이라고 이야기하고 ‘정화가 가엾은 사람에게 울고 동정할 줄 알고 감동할 줄 아는 영혼의 소유자인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다’고 적었다. 이렇게까지 절절하게 딸에 대한 애정을 기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생을 택하지도 살지도 않았으므로 결국 남의 생(아이들의 또는 남편의 생) 속에서 그 보상을 찾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무런 생활도 갖지 않은 어머니가 아이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그리고 환면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며, ‘가장 풍부한 개인적 생활을 가진 여자만이 아이로부터 가장 적은 요구를 한다’는 대목에 있어서는 감탄이 나왔다. ‘자기를 초월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의의를 찾고 실증하고 있는 여인이 가장 겸손한 어머니’이며 ‘여자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생활에 있어서 한 역할을 담당하려는 최근의 일반적인 경향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며, ‘전력을 다해야 하는 직업과 어린 아이의 양육을 양립시킬 수 없는 것은 아직도 너무나 사회의 설비나 그 밖의 노력과 연구가 등한시되어 있기 때문’이고 ‘직장을 가진 어머니’가 늘어날수록 그에 대한 선처가 필요하다는 부분을 읽으며 현재의 나도 정신적인 자극을 받는데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충격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까지도 공감 가능한 지극히 개인적인 그녀의 존재론적 문제의식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면서 정말 오래 살았다면 천재만이 가지는 날카로움, 광기, 번뜩이는 감수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단어와 문장을 넘어서서 남들에게 기억될 정도의 자기업적을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다시 책 앞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읽었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단어 한 단어가 진정이고 작가 자신이다. 과대평가된 작가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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