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 - 페미니즘과 문화전쟁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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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의 상식 기준’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정치인을 평가할 땐 위험한 기준일 수 있다. 필요 이상의 정치 냉소와 혐오를 낳는 주범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동물로 보는 게 옳다. 정치인을 비하하는 게 아니다. 정치가 아무리 더럽고 고약해도 누군가는 정치를 해야 하는데, 정치라는 직업의 속성은 ‘보통 사람의 상식 기준’으론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하는 동시에 평가의 근거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은 갈등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는 이상 욕을 먹는 건 피해갈 수 없다. 남에게 욕먹지 않고 사는 걸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형벌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정치를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정치를 하려면 그 어떤 비판과 비난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렇긴 하지만 ‘의연’과 ‘무시’, ‘소신’과 ‘아집’의 차이를 구분하긴 쉽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엔 징그러울 정도로 미련한 독선, 오만, 아집에 사로잡힌 정치 지도자일지라도 그 사람은 자신이 숭고한 대의를 위한 의로운 소신을 지켜나간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자신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도 적잖은 만큼 그런 착각이나 환상에서 빠져나오긴 쉽지 않다.

수많은 실험 결과, 권력을 갖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느끼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둔감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정치인들에겐 당연한 일이다. 사실 우리는 정치인에게 상충되는 두 가지 덕목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우리는 정치인에게 민심을 따르라고 말하는 동시에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말라고 말한다. 소통과 경청을 강조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뚝심’을 예찬한다. 권력의지와 맷집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권력욕’은 버리라고 말한다. 낮은 곳에 임하라고 말하면서도 높은 곳에 있기를 바란다. 그런 원초적 모순 상황에서 정치인이 직업적 행동 양식으로 택한 것이 바로 후안무치다. 이는 의도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세월이 흐르면서 형성된 직업적 습속 또는 방어기제라고 보는 게 옳겠다.

사실, 트럼프의 말썽 많은 언행을 정치적 전술이 아니라 정신저인 병적 증상의 발현이라고 보는 분석은 후보 경선이 본격화한 2016년 초부터 이미 제기되었다. 트럼프는 자신이 인생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하루 3~4시간 밖에 자지 않으며 때로는 1시간 남짓 자도 괜찮다고 자랑하고 다녔는데, 그게 바로 ‘수면 박탈sleep deprivation’ 증후라는 것이다.
트럼프의 정신감정 의뢰를 촉구하는 온라인 청원 캠페인도 시작되는 등 트럼프에 대한 정신감정 논란이 과열 양상을 보이자, 미국정신의학회는 성명을 내 ‘개인에 대한 정신감정은 비윤리적’이라며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마리아 오퀜도Maria Oquendo 미국정신의학회 회장은 ‘골드워터 규정Goldwater rule’을 거론하며 “올해 대선은 매우 특이한 상황이고, 따라서 몇몇 사람들은 후보자들에 대해 정신 상태를 분석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이 행위는 비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조했다.
골드워터 규정이란 ‘전문가들이 정신의학적 주제들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개인에 대해 정신의학적 진단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명시한 규정이다. 이 규정은 1964년 미국 대선에 출마했던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 1909~1998 공화당 후보의 이름에서 따왔다. 당시 미국의 한 잡지사에서는 1만 2000여명의 정신과 의사들에게 골드워터 후보에 대한 정신감정을 의뢰한 바 있는데, 약 2400여 개의 응답을 분석한 결과 골드워터의 정신 상태가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후 미국 사회에서는 이 조사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었고, 개인에 대한 정신감정을 금지한 골드워터 규정이 만들어졌다. 미국정신의학협회는 1973년부터 이 규정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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