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이 해피엔딩 - 김연수 김중혁 대꾸 에세이
김연수.김중혁 지음 / 씨네21북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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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은, 대부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다. 고통스러웠거나 민망했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을 머릿속에서 나도 모르게 지워버린다. 기억이 희미하면, 상처를 받아도 쉽게 잊는다. 상처를 쉽게 잊으니 상처를 받는 일도 점점 드물어진다. 사람으로선 놀라운 강점이지만 작가로선 치명적인 약점이다. 상처받지 않는 작가라니,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말이다. 대부분의 예술작품은 인간의 상처와 기억과 용서와 화해를 다루고 있으니, 이런 식으로 평범하게 살아선 <죄와 벌>이나 <위대한 개츠비> 같은 명작을 남기긴 애당초 글러먹었다. Y의 소설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시, 오, 이, 엔, 철자로 입은) 상처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결국에는 그걸 극복해가는 과정을 지나왔기 떄문일 것이다. 나도 더 늦기 전에 많이 상처 입고 (이거 원 기억이 나야지) 더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기억이 안 나) 더 많이 화해해서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에 도전해봐야겠다.

 

이 책은 김중혁과 김연수, 두 절친 소설가가 씨네 21에 연재한 영화 관련 칼럼을 엮은 책이다. 분명히 저자 이름에는 김연수가 먼저 올라와 있지만, 사실 내가 이 책을 읽기로 한 것은 최근 읽은 김중혁의 몇몇 책들이 좋아서였기 때문에 나는 김중혁의 글이 더 궁금했다.

 

대중적으로는 김연수 작가가 좀 더 알려져 있고, 데뷔도 더 빨리 했으며, 더 많은 소설을 썼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김중혁 작가의 글이 내 취향에 맞는다. 두 소설가가 번갈아가면서 쓰는 이 책에서도 나는 김중혁의 글이 더 좋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취향이니까, 김연수 작가의 글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분명히 많을 것이다.

 

늘 그렇지만,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해 쓴 글을 읽는 것은 재미있다. 일단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글 쓰는 이나 글 읽는 이나 어느 정도 긴장을 풀고 접근할 수 있으며, 그러다가 문득, 아, 하면서 순식간에 깨달음을 얻게 되는, 돈오돈수의 순간이 종종 오기도 한다. 독자는 때로 작가에 대해 우월감을 가질 때도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에서도 분명히 두 작가보다 영화를 더 많이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두 작가도 책의 맨 앞에서 특별히 둘 다 영화를 전문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유머러스하게 밝히고 있다. 전문가라면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하고 몇 번이고 마음 속에서 검열을 거치겠지만, 작가나 독자나 비전문가인 것은 마찬가지기에, 작가는 마음껏 영화를 주물러가며 자기 하고 싶은 얘기를 왕창 늘어놓고, 독자는 또 즐겁게 깔깔대면서 읽으면 그만이다.

 

랜디와 잭 블랙 캐릭터의 차이는 뭘까. 랜디는 레슬링에 자신의 모든 것, 100퍼센트를 걸었다. 레슬링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죽어도 좋아, 라는 심정으로 레슬링을 한다. 하지만 잭 블랙은 어떤 일을 하든 스스로에게 모든 것을 건다(완전 '자뻑'이다). 믿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어떤 대상이나 어떤 일에 100퍼센트를 거는 건 위험한 짓이다. 일이 망가지거나 실패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까. 레슬링에 모든 것을 건 랜디는 "링이 나의 진짜 세계"라고 말한다. 멋있어 보이려고 한 얘기인지 몰라도 나는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링도 나의 세계"라거나 "링은 나의 직장"이라거나 했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링이 나의 진짜 세계라니. 레이가 랜디의 대사를 들었다면 이렇게 빈정거리지 않았을까.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염병할 링에서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는 게 말이나 돼? 내가 브리주를 도망쳤듯 어서 빨리 그 빌어먹을 링에서 벗어나라고.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난 정말 살고 싶다고."레이의 말이 백번 옳다.

 

이 부분도, 글의 맨 앞에 인용한 부분도 전부 김중혁의 글 일부이다. 어떤 대상에 전부를 걸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100퍼센트 믿는 잭 블랙의 캐릭터는 김중혁과도 닮았다. 그러기에 당당히 소설가로서는 치명적인 단점(?)인 자신의 기억력 부족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않나. 그의 글은 멋있어 보이지 않으려고 하기에 매력적이다. 김중혁 작가의 글이 명태를 얼렸다 말렸다를 되풀이하여 노르스름한 겉은 꾸덕꾸덕하고 안은 포슬포슬한 황태와 같다면, 김연수 작가의 글은 명태의 알집을 소금에 절이고 발효하여 고소하고 짭짤해진 연분홍빛 명란젓 같다. 그래서인지 확실히 남녀상열지사를 다루는 소설은 김연수의 소설이 재미있는 것 같다.

 

나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가 참 좋다. 그분이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라는 건 소리와 빛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 일부분도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다. 낭만주의자가 될 때, 나는 일상의 소리와 빛에 민감해진다. 비행기 소리라거나 바람 소리, 혹은 도로로 흘러내리는 빗줄기에 되비치는 거리의 불빛들에 나는 끌린다. 그러므로 낭만주의자는 일상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비 내리는 청두 거리라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센티멘탈해진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서도 그처럼 센티멘탈해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바라보는 일상은 너무 큰 소리와 아름다운 빛으로 왜곡돼 있다. 그리고 이 왜곡은 의도적이다.

"연수 씨 작품에는 신파가 있어요"라는 말을 지난주에 들었다.(물론 그 문학평론가는 아니다.) 항변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통속을 좋아하고, 신파를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통속과 신파는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감추는 데 실패한 자의 것이다. <호우시절>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장면은 물론 판다들이 등장하는 부분이었겠지만(기다려라, 청두의 판다들이여, 반드시 찾아가서 말을 걸어보고야 말겠다), 가장 가슴이 아팠던 부분은 메이가 남편의 영정 앞에 돼지내장탕면(너도 기다려!)을 바치고 구슬프게 울 때였다. 메이처럼 예쁜 여자가 그렇게 울면 그게 어떤 장면이든 나는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나서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앉아서, 그 장면에서 메이가 운 건 아무래도 죽은 남편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그 남편의 영정이 웬수처럼 보였기 때문이리라고 짐작하니 더 가슴이 아팠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을지 모르지만, 여행이 끝난 뒤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여행은 사후에 낭만적으로 변형된다고 믿는 나는 동하가 한국으로 떠난 뒤, 다시는 연락하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났어도 좋았겠다고 생각햇다. 그러고 보면 정말 동하는 모든 여자에게 잘해주는 것 같다. 결혼하기 쉽지 않겠다.

 

<호우시절>에 대한 김연우의 글 중 일부이다.  나 또한 이 영화를 참 좋아했다. 낭만, 신파, 통속... 그런 부분이 때로는 김연우의 글을 매력적으로 만들고 때로는 내가 소화하기에 과하다고 느끼게 하기도 하는 것 같다.

 

나에게 영화보기란 귀를 후비는 것과 비슷하다. 더 잘 듣기 위해 귀에 상처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귀지를 긁어내듯, 더 맛있게 먹기 위해 오동통한 생선살을 다치지 않고 가시만 깔끔하게 발라내듯, 나는 내 심장이 잘 뛰게 하기 위해 영화를 보며 핏속의 불순물을 제거해왔다. 내게 영화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매년 1월이 되면 새로운 각오를 다지면서, 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더 많은 상상을 하기 위해, 영화를 열심히 보려고 했던 것 같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김중혁이 쓴 글이다. 목적이 아니라 수단, 나 또한 그랬다. 특정 장르, 특정 감독, 특정 배우에 심하다싶을 정도로 좌우되는, 영화에 대한 내 호감도는 대체 내게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하나 할 정도로 의문이 들 때도 있었고, 때로는 다양한 스토리를 넘나들며 영화를 좋아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는 나는 영화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는 사람이야, 하는 착각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김중혁의 이 글을 보는 순간, 옳다구나 했다. 나는 영화를 수단으로 보는 사람이었다. 특별할 이벤트가 있을 때, 위로받고 싶을 때, 우울할 때, 기분전환을 하고 싶을 때, 생각하고 싶을 때, 머리가 텅 빈 것 같을 때, 내 자신이 지나치게 냉정하게 느껴질 때, 감성을 채우기 위해,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영화를 열심히 보려고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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