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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 -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미국 소도시 여행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미국 아이오와 주에서 태어난 저자가 영국으로 건너간 뒤, 중년이 되어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일주한 후에 쓴 글이다.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책일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보다도 2년 전에 먼저 나온 책이다. 물론, 우리 나라에는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보다 1년 늦게 출판되었다.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는 우리 나라에 8종이 번역되었다.
순서대로 정리해보면, 미국의 아이오와 디모인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넘어간 작가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이 태어난 미국이라는 나라를 전부 돌아다니며 쓴 책이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횡단기>이며, 이후에 20년 전 고교 동장 가츠와 다녀온 유럽을 20년만에 혼자 다녀오는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이다. 그리고 20년간의 영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영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한 후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을 썼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 바로 그 카츠와 함께 애팔래치아 일주를 하고 나서 <나를 부르는 숲>을 썼다. 그 후 20년만에 돌아온 미국이 자신이 떠날 때와 너무나 달라져 있는 것으로 인해 당황해하며, 미국 특유의 문화에 대해 날카롭게 묘사한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을 썼고, 이후 호주를 여행하며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를, 국제구호단체 CARE의 제안으로 아프리카를 방문하여 <빌 브라이슨의 아프리카 다이어리>를 썼다.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책을 썼고, 그 책은 우리 나라에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으로 출판되었다가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산책>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의 여행책 중 가장 먼저 나온 책이며, 내가 읽는 마지막 책이기도 하다. 저렇게 죽 늘어놓고 보니, 빌 브라이슨도 나이가 먹는 탓인지, 젊었을 때의 책의 경우에는 때로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글감을 비틀어대는 반면, 상대적으로 나이가 들고 나서 쓴 책들에서는 비틀기보다는 간질이는 느낌이다. 하지만 어떤 여행책을 읽든 이 책이 빌 브라이슨의 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빌 브라이슨의 글 특유의 촌철살인과 유머는 여전하다.
I. 동부로 가다
1. 나는 아이오와 주 디모인 출신이다. 누군가는 그래야 했으니까. 디모인 출신이라면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름이 대충 바비쯤 되는 디모인 아가씨와 같이 디모인에 자리를 잡고 파이어스톤 타이어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어 평생을 죽을 때까지 디모인에서 살든지, 아니면 청소년기 내내 무슨 이런 쓰레기 하치장 같은 촌이 다 있냐고 동네를 뜨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노라 투덜댄 다음에 바비라는 디모인 아가씨와 같이 디모인에 자리를 잡고 파이서스톤 타이어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어 평생을 죽을 때까지 디모인에서 살든지.
내가 어린 시절 살던 땅으로 돌아가 과장하기 좋아하는 작가들이 '재발견 여행'이라고 부르길 좋아하는 그런 걸 하고 싶었던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 데는 이런 괴롭고 별난 배경이 작용했다. 거의 1만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다른 대륙에서 중년을 맞이했고, 아버지가 최근에 돌아가시면서 나의 한 부분까지 같이 가져가셨다는 걸 깨달았을 즈음에, 나는 조용히 나를 압도하는 향수에 사로잡혔다. 나는 어린 시절의 마술 같은 곳에, 매키낙 섬, 로키 산맥, 게티즈버그 등지에 다시 가 보고 싶었고, 이들이 내 기억처럼 지금도 근사하게 남아 있는지 보고 싶었다. 반딧불이도 보고, 강렬한 매미 소리도 듣고 싶었다. 저 뜨겁고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무더위 속에 몰입하고 싶었다. 줄줄 흐르는 땀은 당신의 속옷을 온몸의 구멍과 틈 속으로(이를테면 엉덩이랄지) 쑤셔 넣은 다음 쫙 달라붙은 쫄쫄이로 만들어 버리고, 온화한 성품의 사내들마저도 술집에서 권총을 꺼내 총성으로 밤을 밝히게 만드는 8월의 날씨 속에 대책 없이 몰입하고 싶었다. 니하이 콜라와 버마 셰이브 면도 크림이 그려진 광고 표지판을 찾아보고, 야구 경기장에 가고, 대리석 상판을 깐 탄산 음료수대에 앉아보고, 영화 속에서 디애나 더빈과 미키 루니(각각 북미의 유명 여자배우와 남자배우)가 살았을 것 같은 작은 마을들을 차로 다녀보고 싶었다. 여행하고 싶었다. 미국을 보고 싶었다. 집에 오고 싶었다.
2. 나는 오스카루사, 프레몬트, 헤드릭, 마틴스버그를 지나 동쪽으로 계속 갔다. 이름들은 친숙했지만 그 타운들에 얽힌 어린 추억은 별로 떠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엔 여기까지 오면 나는 대개 너무 지루해서 거의 기절 상태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선 15초 간격으로 소릴 질러댔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언제 도착해요? 심심해요. 토할 거 같아요. 얼마나 더 가야 돼요? 언제 도착해요?" 캐폭 부근 도로의 커브가 희미하게 기억났다. 우리는 거기서 폭설을 만나 네 시간 동안 발이 묶인 채 제설차량이 오기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누나가 토하고 싶다고 해서 차를 세웠던 곳들도 눈에 들어왔다. 누나는 마틴스버그의 주유소에서는 그야말로 차에서 굴러 떨어져서 주유원의 발목을 향해 아낌없이 먹은 걸 확인해주었다.(갑작스러운 토사물 세례에 화들짝 놀란 그 주유소 직원이 어찌나 춤을 추던지!)
3. 그리고 이제 나는 벌써 일리노이에 들어섰다. 어딜 봐도 옥수수뿐이며 지루한 광경이다. 머릿속에서 어린애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도착해? 심심해. 집에 가자. 언제 도착한다고?"
4. 나는 아침에 퀸시에서 미시시피 강을 건넜다. 강은 내 기억만큼 크거나 장엄하지는 않았다. 다소 웅장하고 위압적이긴 했다. 강을 건너는 데는 몇 분이 걸렸다. 그런데 어쩐지 무미건조하고 밋밋했다. 날씨도 구질구질했으니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주리는 일리노이와 똑같았고, 일리노이는 아이오와하고 똑같았다. 유일한 차이라면 차량 번호판의 색깔뿐.
5. 켄터키는 남부 일리노이와 비슷했다. 산이 많고 햇살이 좋고 매혹적이었지만 여기저기 흩어진 집들은 북부만큼 단정하거나 풍요로워 보이지 않았다. 숲이 우거진 계곡들과 굽이치는 개울을 가로지른 철교들, 그리고 노면에 붙어 떡이 된 짐승들이 많았다. 계곡마다 작고 하얀 침례교회가 있고 도로변에는 이제 '예수쟁이' 지대에 들어섰다는 걸 알리는 표지판이 즐비했다. "예수가 구원이다. 주를 찬양하라. 그리스도는 왕이시니."
켄터키 주를 빠져나오면서도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켄터키 주는 서쪽으로 갈수록 점점 가늘어져, 주 경계 쪽은 폭이 고작 60여 킬로미터에 불과했다. 미국식 여행 시간을 기준으로 보자면 진정 눈 깜짝할 새에 나는 테네시 주에 들어와 있었다.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주를 하나 떨어내는 일은 흔치 않은데, 그나마 테네시 주마저 머지않아 작별이다. 테네시는 모양이 묘하게 생겨서, 가로로 길쭉한 콘크리트 블록 같다고나 할까. 동서로는 길이가 800킬로미터나 되는데 남북으로는 160킬로미터가 고작이다. 경치는 켄터키나 일리노이와 거의 비슷해서 강과 산, 종교적인 열성이 찬란한 부정형(不定形)의 농장지대였는데, 잭슨에서 버거킹에 들렀을 때는 날이 너무 더워서 놀랐다. 길 건너편에 있는 드라이브인 은행의 간판에 따르면 기온이 28도가 넘었다. 그날 아침 카본데일의 기온과 거의 10도 차이가 나는 셈이다. 나는 여전히 '예수쟁이' 지대의 심장부에 있었다. 옆에 있는 교회 마당의 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나님(아무래도 뒤에 '맙소사'가 빠진 게 분명하다)이 답이다."(답이라, 그렇다면 질문은 물론 이거겠다. '망치질 하다가 엄지를 찧었을 때 하는 말은?') 버거킹에 들어갔다. 여종업원이 물었다. "어뜨케 돠 드리까이?" 나는 다른 나라에 와 있었다.
6. 나는 테네시 주 그랜드 교차로 바로 남쪽에서 미시시피와 이어지는 주경계선을 넘었다. 고속도로변의 표지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미시시피에 오신 것을 환영하빈다. 우리는 아무나 쏴죽입니다."아, 당연히 내가 지어낸 거짓말이다. 최남부지방(Deep South, 조지아, 앨러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주 등)에 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지만 들어설 때부터 예감이 불길했다. <이지 라이더><밤의 열기 속으로><폭력 탈옥><도전><서바이벌 게임>등 남부를 배경으로 한 그 모든 영화들이 그들을 살인자에 근친상간을 일삼는 촌무지렁이 극우 보수로 묘사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이곳은 진정 다른 나라다.
7. 콜럼버스는 주 경계선 바로 안쪽에 있어 그곳을 떠난 지 20분 만에 앨라배마 주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이설스빌과 코랄파이어와 리폼을 거쳐 더스컬루사로 가는 길이었다. 고속도로 곁의 표지판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앨라배마를 아름답게 가꿉디다." 나는 명랑하게 대답했다. "좋았어, 그럽디다."
8. 사바나는 매혹적인 도시여서 나도 모르게 몇 시간이나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이곳에는 유서 깊은 건축물이 천여 개나 되고, 그중 상당수가 아직도 가옥으로 이용되고 있다. 미국에서 내가 가본 도시 중에 뉴욕을 제외하고 사람들이 도시에서 실제로 '사는' 곳은 여기가 처음이었다. 아이들이 길에서 공놀이를 하고 제 집 현관에서 줄넘기를 하는 광경은 도시에 얼마나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는가. 나는 오글소프 애비뉴의 조약돌이 깔린 인도를 따라 콜로니얼 공원묘지까지 산보를 나갔다. 묘지에는 허물어져가는 기념비들과 조지아 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유명인사들의 묘비가 가득이었다. 조지아 주 최초의 주 의회 의장 아치벌드 블록, '선도적 사업가' 제임스 하버섐, 독립선언문의 서명자 중 한 사람으로 미국에서 유명한 버튼 귀네트 등. 버튼 귀네트는 또한 식민 역사에서 가장 우스운 이름을 가진 인물로도 유명하다. 사바나 주민들은 잠시 부주의하던 순간에 옛 버튼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설명에 따르면 그는 지금 내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묻혀 있을 수도 있고, 모퉁이 어딘가에 있거나, 아니면 완전히 엉뚱한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까 종일 돌아다니면서 버튼을 밟더라도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9.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지루했다. 나는 급한 마음에 26번 주간고속도로를 탔다. 이 도로는 나른한 담배밭과 연어색 토양뿐인 단조로운 풍경을 사이로 300킬로미터가 넘는 긴 대각선으로 주를 가로지른다. 《자동차 여행 가이드》에 따르면 이제부터는 최남부가 아니라 중부 대서양 지역의 주들이란다. 그런데 더위와 눈부신 햇살은 남부의 것이며 주유소며 카페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억양도 남부 말씨였다. 라디오의 아나운서들조차 억양은 물론 태도까지 남부인의 색채가 완연했다. 한 뉴스에 따르면 스파르탄버그의 경찰이 '백인 여자'를 강간한 두 흑인 남자를 찾고 있었다. 남부가 아닌 곳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말이다.
노스캐롤라이나와의 경계선에 가까워지자 마치 무슨 포고령이라도 내린 듯이 밋밋한 경치가 갑자기 끝났다. 갑자기 시골 풍경이 나타나더니 장엄한 곡선을 그리며 월계수와 철쭉과 종려나무 따위 낮은 덤불이 잔뜩 펼쳐졌다. 산등성마루마다 블루리지(애팔래치아 산맥의 일부이다)로 이어지는 아스라한 풍경이 펼쳐졌다. 애팔래치아는 앨라배마에서 캐나다까지 3360여 킬로미터에 걸쳐 뻗어 있는데, 히말라야보다 더 높았던 적이 있었다가(이 말은 언젠가 성냥갑 껍데기에서 읽었는데 언제고 써먹으리라, 몇 년 동안 벼르던 참이다) 지금은 작고 둥글둥글해졌다. 극적이라기보다는 어딘지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다. 그 기나긴 능선을 지나는 동안 애팔래치아는 애더론대크스, 포코노스, 캣스킬스, 앨러게이니즈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바뀐다.
10. 미국에서 백인들이 가난하기란 진짜 힘든 일이다. 물론 여기서 가난이란 미국인의 가난이며 백인들의 가난이니 다른 곳의 가난과는 다르다. 터스키지의 가난과는 비슷하지도 않다. 린든 존슨(미국의 36대 대통령)이 1964년에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그 초점이 애팔래치아였던 것도 이곳이 너무 가난해서가 아니라 너무 백인 지역이기 때문이라는 냉소 섞인 지적도 있엇다.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당시의 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 중 40퍼센트는 차가 있고, 그 가운데 3분의 1은 새 차였다. 1964년이면 잉글랜드에 살던 내 미래의 장인에겐 그곳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아직도 첫 차 장만이 요원한 일이었고, 장인은 지금까지도 새 차는 한번도 사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가난하다고 하거나 크리스마스에 뜨개실이나 공짜 밀가루를 보내준 일은 없다. 그렇다 해도 미국의 기준으로 볼 때 지금 내 주변에 여기저기 널려 있는 판잣집들이 단연코 허름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마당에 위성 안테나도 웨버 바비큐 그릴도 없고, 진입로에 스테이션왜건도 없었다. 감히 말하자면 가련한 그들의 부엌에는 전자레인지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미국인 기준으로는 대단히 가난한 것이다.
11. 기다란 젤리 모양의 언덕들과 구불구불한 도로, 단정한 농가의 풍경을 가르며 운전을 했다. 하늘엔 바다 그림에서 늘 볼 수 있는 복슬복슬한 큰 구름이 가득이었고, 스노플레이크, 팬시갭, 호스패스춰, 메도우스오브댄, 채리티 등 여러 타운의 이름도 흥미로웠다(각각 눈송이, 화려한 계곡, 말 방목장, 댄의 초원, 자선의 뜻). 버지니아 주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버지니아는 폭이 640킬로미터쯤 되는데, 도로가 하도 구불구불해서 체감 거리는 거기에 적어도 150여 킬로미터는 더해야 했다. 어쨌든 지도를 볼 때마다 티도 안 나는 거리밖에는 오지 못했다.
12. 워싱턴은 작은 도시처럼 느껴진다. 광역도시로 치면 워싱턴은 인구 300만 명의 미국에서 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고 바로 곁에 있는 볼티모어를 합하면 인구는 500만이 되지만, 워싱턴 시 자체는 인구가 63만 7000명에 불과하니 인디애나폴리스나 샌안토니오보다 더 적다. 워싱턴은 쾌적한 지방도시 느낌이 나다가도, 모퉁이만 돌면 FBI나 세계은행, IMF(국제금융기구) 등의 본부가 떡하니 눈에 들어오니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깨닫게 된다. 그중에서도 제일 놀라운 것은 백악관이다.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백화점 쇼윈도의 고급 넥타이나 속옷 따위를 구경하다가 모퉁이를 돌면 바로 그 자리에, 시내 한복판에 백악관이 있는 것이다. 쇼핑하기엔 정말 편리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워싱턴은 예상보다 훨씬 작다. 모두들 그렇게 말한다.
워싱턴에서 301번 고속도로를 타고 애나폴리스와 해군사관학교를 지나친 다음, 체사피크 만과 동부 메릴랜드 주를 잇는 길고 낮은 다리 위로 지나갔다. 다리가 건설된 1952년 전에만 해도 만의 동부는 수백 년 동안 고립을 즐겼다. 그 후로 사람들을 외지인들이 물밀 듯이 흘러들어와 반도를 망쳐 놓을 거라고 말해왔지만, 내 눈에 이 일대는 별로 망가지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렇게 유지해준 것도 외지인들인 것 같다. 지역 주민들이 단순하고 순진무구한 믿음으로 편리할 거라 생각하는 쇼핑몰과 볼링장을 가장 극렬히 반대하는 것도 언제나 외지인들이다.
나는 체사피크 만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높은 하늘, 점점이 흩어진 농장과 이름 모를 작은 타운들에 매료된 채 낮고 습지가 많은 평지를 통과했다. 늦은 아침에는 필라델피아로 가는 길에 있던 델라웨어 주에 들어섰는데, 델라웨어는 미국의 여러 주 가운데 제일 애매한 곳이다. 한번은 델라웨어 출신의 아가씨를 만났는데 할 말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궁색하게 물었다. "음, 그러니까 델라웨어에서 왔다고요? 오, 대단하네요. 와우." 그러자 그녀는 얼른 언변이 더 뛰어난(그리고 얼굴도 잘생긴) 다른 남자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국에서 이십 년이나 살고 비싼 교육까지 받았으면서 당시 48개 주 중 하나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는 사실에 한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텔레비전에서 델라웨어가 언급되는 걸 보거나 신문에서 그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는지, 아니면 델라웨어가 배경이 된 소설을 읽어봤는지 물었고, 사람들은 대답하곤 했다. "글쎄, 한번도 없는 거 같아." 그렇게 대답하는 그들도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진 듯 보였다.
나는 델라웨어에 관해 독서를 좀 하기로 작정했다. 다음번에 델라웨어 출신 아가씨를 다시 만나며 재미있고 적절한 말을 할 수 있겠지. 혹시 알아, 그럼 그녀가 나랑 자줄지. 하지만 델라웨어에 관한 글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찾아봐도 고작 두 문단이 전부였는데 그나마도 문장 중간에 끝났던 거 같다. 델라웨어를 지나쳐 운전하는 지금, 차가 지나가면서 우습게도 델라웨어가 내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투명한 비닐을 걷을수록 그림이 지워지는 아이들의 그림판에서처럼. 내 차가 지나가면서 내 뒤쪽의 거대한 투명 비닐이 걷히듯이 서서히 지워지는 것만 같았다. 풍경이 펼쳐질수록 지나쳐온 경험을 지워버리면서. 지금 생각해보니 반(半) 공업지대였던 풍경과 월밍턴 표지판 몇 개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러자 이미 실베스터 스탤론과 레지오넬라 병(레지오넬라균에 의한 악성 폐렴의 일종)을 배출한 필라델피아 외곽이었고, 그것이 유발한 불편한 생각 때문에 델라웨어에 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되었다.
13. 필라델피아는 미국의 다른 어느 도시보다 공공 미술에 더 많은 예산(시 정부 총 예산의 1퍼센트)을 쓴다. 그런 반면 문맹률은 40퍼센트나 된다. 그는 페어마운트 공원 한가운데 있는 호화로운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가리켰다. 이곳은 도시 최고의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지만, 그 이유는 50만 점의 소장 회화 때문이 아니라 미술관 계단이 영화 <록키>에서 실베스터 스탤론이 전력 질주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관광버스를 타고 와서 계단만 한번 쓱 보고, 미술관 안에 들어가 그림 구경은 하지도 않고 가버린다고 한다.
14. 미국에서 장거리 버스란 비행기를 탈 돈이 없거나, 미국 기준으로는 바닥 중에서도 제일 밑바닥을 핥을 만큼 차를 쓸 경제적 여유가 없을 때만 타는 것이다. 미국에서 차를 쓸 수 없을 정도란 플라스틱 헛간살이 바로 직전의 가난함이다. 그러므로 장거리 버스를 타는 이들은 다음 중 하나다. 정신적 결함이 있거나 정신분열이 고속으로 진행 중이거나 마약에 취한 채 무기를 소지한 위험인물이거나 갓 출소했거나 수녀인 것이다.
나는 아직도 뉴욕이 무서웟다. 타임스퀘어로 걸어가는데 이런 위협이 느껴졌다. 뉴욕이 나를 겁에 질리게 했다. 살인사건과 거리의 범죄에 대해 너무 많이 읽어서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사람들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나를 죽이지 않아줘서 고마워요"라고 쓴 카드라도 돌리고 싶었다.
타임스퀘어는 대단한 곳이다. 그렇게 많은 불빛과 번잡함은 독자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건물의 벽면들이 모조리 광고로 번쩍이며 물결치고 흔들린다. 전자의 바다에 폭풍이 이는 것만 같다. 돈 좀 쓰라고 유인하는 이런 거대한 전광판이 40개쯤 되는 것 같은데, 그중 둘만 빼고는 다 마이타 복사기, 캐논, 파나소닉, 소니와 같은 일본 기업이었다. 강대한 나의 고국을 대표하는 건 코닥과 펩시콜라뿐이었다. 이봐 양키들, 전쟁은 끝났어. 처량한 마음으로 나는 생각했다.
세계에서 가장 신나고 자극적인 도시 뉴욕에서의 하루도 그렇게 끝났다. 나는 20층 아래 스트립쇼 클럽의 외로운 인생들보다 더 나을 것이 전혀 없었다. 그들만큼이나 외로웠다. 아니, 이 거대하고 비정한 도시에는 나만큼이나 친구도 없고 외로운 이들이 수만 명은 될 것이었다. 얼마나 감상적인 생각인가.
"하지만 이거 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걸?" 나는 두 손과 두 발을 쫙 뻗어 사방의 벽을 한꺼번에 빡 때리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15. 콜럼버스의 날 연휴가 낀 주말이어서 도로가 번잡했다. 나는 미국만큼 성공을 높이 사는 나라에서 콜럼버스를 공휴일로 경축하는 걸 늘 좀 의아하게 여겼다. 한번 생각해 보라. 그는 아메리카 대륙까지 네 번이나 긴 여행을 하면서도, 단 한번도 그곳이 아시아가 아니라는 걸 꺠닫지도 못하고 값어치 있는 것도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탐험가들은 모두 감자랄지 담배, 나일론 스타킹처럼 흥미진진한 새 특산물을 가져왔는데 콜럼버스가 데려온 건 어리둥절해 보이는 인디언 몇 명이 전부였고, 게다가 그는 이들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이봐 친구들. 스모 한번만 해보라니까.")
하지만 콜럼버스의 최대 약점은 나중에 미국이 될 땅을 한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플로리다 땅을 밟은 그가 이렇게 말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오호라, 여기는 리조트에 딱이야." 하지만 그의 여행은 전부 카리브 해와 벌레가 드글드글한 중앙아메리카 해안에서 그쳤다. 내게 묻는다면 차라리 바이킹이 미국에 훨씬 어울리는 영웅이 되었을 것 같다. 우선, 그들은 미국 땅을 진짜로 발견했다. 게다가 바이킹은 남성답고 해골바가지를 잔 삼아 술을 마시며 그 누구의 헛소리도 용납하지 않는다. 미국에 딱 어울린다.
나는 단풍 구경을 하고 싶어 뉴잉글랜드 지역에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 게다가 뉴잉글랜드의 주들은 작고 다양해서, 아름다운 주들을 포함해 다른 주들을 지날 때처럼 그렇게 지겨워 죽을 맛이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뉴잉글랜드의 주들이 너무 작은 것은 맞지만(코네티컷은 횡단해봐야 128킬로미터가 고작이었고 로드아일랜드 주는 런던보다도 더 작다) 이 주들은 자동차와 사람들, 도시들로 붐볐다. 코네티컷은 그냥 작은 교외 지역 같았다. US 202번 도로를 타고 리치필드까지 갔는데, 이 길은 지도에 "절경 코스"라고 표시되어 있었지만 교외보다 조금 더 경치가 낫다뿐이지 절경은 아니었다.
케이프코드는 매사추세츠 주 아래쪽에 튀어나온 길고 가느다란 반도로, 바다로 30여 킬로미터를 뻗어나갔다가 다시 말려들어온다. 반도는 알통을 만들려고 뻗은 팔처럼 생겼다.(정확히 말하면 근육이 없어서 알통이 안 만들어지는 내 팔처럼 생겼다.)
16. 하늘 전체에 분홍빛 새벽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얼른 옷을 주워 입고 리틀턴이 기지개를 켜기도 전에 차를 타고 달아났다. 타운 밖으로 몇 킬로미터를 가서 주 경계선을 건넜다. 버몬트에서는 뉴햄프셔보다 훨씬 더 푸르고 정갈한 풍광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산들은 잠자는 짐승처럼 통통하고 폭신했다. 흩어져 있는 농장들은 풍요로워 보였고, 초원이 구불구불한 산허리까지 올라가 있어 계곡들은 고산지대 같은 느낌이 났다. 태양이 곧 높이 떠오르고 햇살이 따스하게 퍼졌다.
서쪽으로 버몬트를 횡단했다. 산들은 짙고 둥글고 계곡들은 풍요로웠다. 이곳에서는 빛이 더 부드럽고 더 나른하고 더 가을빛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가을빛이 완연했다. 겨자 색과 불그스름한 녹 색깔의 나무들, 황금색과 녹색의 초원, 거대한 하얀 축사들, 푸른 호수들. 고속도로 여기저기에 서 있는 농산물 가판대에는 둥글고 길쭉한 호박과 다른 가을 과일들이 넘쳤다. 천국으로 소풍을 나온 것 같았다. 샛길들을 돌아다녔다. 오두막을 간신히 면한 집들이 놀랍도록 많았다. 버몬트 같은 곳에는 일자리가 별로 없겠지 싶었다. 이 주에는 타운도 산업도 거의 없다. 제일 큰 도시 벌링턴도 인구가 고작 3만 7000명이다.
17. 위층에서는 낯익은 야구 카드들을 발견하고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우리 형과 내가 그토록 정성들여 모으고 분류했던(그러나 우리 부모님이 때아닌 노망이 들어 1981년 봄 대청소 때 다락에서 찾아내 내다 버린!) 바로 그 카드들이었다. 우리는 1959년 야구 카드 세트를 한 장도 빠지지 않은 완벽한 상태로 구비하고 있었는데 그 세트의 현 시가는 1500달러나 된다는 슬픈 얘기다. 미키 맨틀, 요기 베라의 신인 시절, 테드 윌리엄스가 400호를 쳤던 마지막 해의 카드, 1956년부터 1962년까지 매년 뉴욕 양키스 팀 선수 전원의 카드를 보유했건만! 전체 컬렉션은 시가가 모르긴 해도 8000달러는 될 테니 우리 엄마 아버지를 치매 클리닉 단기 치료 과정에는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뭐 그래도 괜찮다. 인간은 다 실수를 하고 살지 않는가. 이런 것들을 내다 버리는 부모들이 있으니 은퇴 후 여생을 일하던 시절에 쌓인 것들을 내다버리는 데 보내지 않는 부모를 둔 행운아들의 컬렉션이 가치가 높아지지 않는가. 어쨌든 옛날 카드들을 다시 보니 기분이 좋았다. 입원한 옛 친구를 문병 온 기분이었다.
아침에 일찍 깨자 가라앉는 늒미이 들었다. 눈을 뜬 순간, 이따금씩 보람을 느끼는 정상적인 하루 대신에 최소한의 기쁨도 없는 하루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느낌 말이다. 오늘은 오하이오 주를 가로질러 운전을 해야 하는 것이다.
18. 나는 헨리 포드와 수집가로서 그의 안목에 대해 불현듯 깊은 존경심을 느끼며 박물관 안을 걸어 다녔다. 그는 깡패 기질이 다분하고 반유대주의자였지만 분명 매력적인 박물관을 만드는 안목이 있었다. 지난 시대의 기념물들만 살펴보며 몇 시간이고 보낼 수도 있었지만 격납고는 박물관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밖에는 유명 미국인 80인의 집들을 모아놓은 온전한 촌락, 아니 타운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집들은 모형이 아니라 실제 그들이 살았던 집이다. 포드가 전국을 누비며, 토머스 에디슨, 하비 파이어스톤, 루터 버뱅크, 라이트 형제, 그리고 물론 그 자신을 포함하여 그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들의 주택과 작업장을 직접 조달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포장해서 디어본으로 가져와 250에이커에 달하는 환상의 땅을 건설한 것이다. 이곳은 미국의 전형적인 스몰 타운으로, 그림처럼 아름답고 시간을 초월한 곳이며, 가구마다 천재성이 빛나는 남성(거의 예외 없이 중서부 출신의 천재적인 백인이자 기독교인 남자)들을 모셔다 놓았다. 녹지가 광활하고, 깜찍한 상점들과 교회가 완벽한 이 마을 주민들을 참 복도 많지. 자전거 바퀴가 고장 나면 라이트 형제를 찾아가고, 우유와 계란이 궁하면 파이어스톤 농장에 가며(하지만 타이어는 아직 아니다. 하비 파이어스톤(파이어스톤 타이어의 창업주)이 아직 업계에 진출을 안 했거든!), 웹스터 사전의 노아 웹스터에게 책을 빌리고,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법률 상담을 받을 수 있다. 물론 링컨이 찰스 스타인메츠(독일 태생 미국의 전기공학자로 에디슨에 버금가는 발명가)의 특허 출원을 신청하거나, 길 건너 조그만 오두막에 사는 조지 워싱턴 카버(흑인 노예 출신의 유명 과학자)를 해방시키느라 너무 바쁘지 않을 때 얘기지만.
정말 매력적인 곳이다. 에디슨의 작업실이나 그의 직원들이 묵었던 기숙사도 세심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집들을 한 곳에 모아놓으니 그 편리함은 사실 부정할 수가 없다. 누가 하비 파이어스톤의 생가를 보러 오하이오 주 컬럼비아나까지 갈 것이며, 라이트 형제가 살았던 데이튼까지 갈 것 인가? 나라면 거기까지 안 간다. 무엇보다도, 이런 집들을 한 곳에 모아놓으니 당시 미국에 발명의 정신이 얼마나 충천했는지, 실용적인 상업적 혁신을 그리고 엄청난 풍요를 가져다 줄 천재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현대 생활의 얼마나 많은 편리와 기쁨이 미국 중서부 소도시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절로 깨닫게 된다. 자랑스러웠다.
포드 박물관에서 느낀 기쁨의 따스한 여파를 간직한 채 미시건 주를 가로질러 북쪽, 그리고 서쪽으로 차를 몰았다. 랜싱, 그랜드래피즈를 지나자 어느새 160여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매니스티 국유림 지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미시건 주는 오븐 장갑처럼 생겼는데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한 적이 많다. 매니스티 삼림은 울창하고 지루했고(천편일률적인 소나무 숲이 끝도 없다) 주를 관통하는 고속도로는 똑바르고 평평했다. 가끔 숲 속 통나무집이나 작은 호수가 보이기도 했는데 나무들 틈으로 언뜻 보이는 정도였고 대개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19. "북 위스콘신 종합병원에서는 여러분의 순조로운 출산을 돕겠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였다. 이런, 세상에. 이것은 내가 미국을 떠난 뒤로 새로 생긴 또 하나의 현상이었다. 병원 광고 시대의 도래랄까. 가는 곳마다 병원 광고다. 누구를 위한 광고란 말인가? 한 남자가 버스에 치인다고 하자. 그러면 그가 "빨리요, 미시건 종합병원으로 데려다 주세요. 거기 MRI가 있던가요?"라고 말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해가 안 간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미국 보건의료체계 전체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외국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 무상으로 치료를 받는 것은 사실 상당히 쉽다. 카운티 병원에 가면 된다. 별로 유쾌한 곳은 아니지만, 아니, 실은 상당히 우울한 곳이지만 NHS(영국 보건의료체계) 병원보다 더 나쁘지는 않다. 무상 치료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미국에는 종합병원에서 진료 받을 수 있는 보험이 없는 인구가 4000만 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행에 돈이 있는데도 공짜로 치료를 받으려고 카운티 병원에 가겠다면? 글쎄, 나는 다만 행운을 빌 뿐이다. 디모인의 카운티 병원에서 1년 동안 일해본 적이 있어서 아는데, 병원 이용자들이 주장하듯이 진짜로 궁핍한지 뒷조사만 담당하는 변호사와 수금 전문가들이 일개 중대나 되니 말이다.
미국 민영 보건의료가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치료의 질이 세계 최고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삼촌은 최고의 치료를 무제한으로 받으셨다.(삼촌의 건강이 회복된 것도 우연은 아니란 말씀.) 독립된 욕실이 딸린 삼촌의 1인실에는 리모콘 작동되는 텔레비전에 비디오와 전화기까지 따로 있고, 병원 전체에 카펫도 깔려 있으며 이국적인 종려나무와 흥겨운 그림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영국에서는 정부 병원에 가면 유일한 카펫이나 컬러텔레비전은 간호사 대기실에 있었다. 그 전 해에 영국 NHS 병원에서 일을 했는데, 한번은 야심한 밤을 틈타 간호사 라운지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나 몰래 들어가 보았다. 과연 어땠는가 하면 여왕의 응접실 같았다. 반질반질한 가구들에 반쯤 먹다 남은 밀크 트레이 초콜릿이 한 박스나 잇었다.
반면, 환자들은 전등갓도 없는 벌거벗은 전구 밑에서 추위에 떨며 소리가 웡웡 울리는 군대 막사 같은 병실에서 잠을 자고, 잰 발걸음으로 2주에 한 번씩 찾아와주시는 고귀하신 의사와 수련의들의 20초짜리 회진을 기다리며 낮이면 피스가 한 50개쯤 모자라는 퍼즐을 맞추며 시간을 보냈다. 아, 물론 NHS가 왕년에 그랬다는 거다. 요즘의 NHS는 그렇게까지 찬란하지 못하거든.
엷은 오후 햇살을 받으며 알려지지 않은 샛길 고속도로를 타고 달렸다. 위스콘신을 건너는 건 끝도 없는 것만 같았지만 너무나 매혹적이고 평온하게 만드는 정경이어서 그래도 좋았다. 연중 그맘때에는, 특히 그날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묘하게 마음을 끄는 흔치 않은 기분이었다. 네시가 되자 벌써 일광이 사라져갔다. 다섯 시가 되자 해는 이미 구름 밖으로 떨어져 돼지저금통에 동전이 쏙 들어가듯 아득한 산 너머로 들어갔다. 페리빌이라는 곳에 닿자 갑자기 미시시피 강이 나를 맞았다. 그 광경에 숨이 멎는 듯했다. 강은 너무도 넓고 아름답고 우아하게, 평평하고 고요하게 누워 있었다. 지는 해 속의 미시시피 강은 액상 스테인리스 스틸 같았다.
어머니를 알아본 것은 직진을 하는데 우회전 신호가 계속 깜박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대개 차고에서 차를 꺼내자마자 깜빡이를 켠 다음 거의 하루 종일 켜놓고 다니신다. 이런 점을 예전에는 지적했지만 어느 순간 어쩌면 그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운전자들에게 나는 운전에 완전히 자신 없는 운전자요, 알아서 피해 가쇼 하고 알려주는 셈이니까.
아침 10시 38분이었고 34일 전 집을 나선 후부터 1만 1011킬로미터를 달렸다. 나는 이 숫자에 동그라미를 친 다음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곤 집으로 활기차게 걸어 들어갔다. 어머니는 이미 안에 계셨다. 뒤쪽 창문을 통해 어머니가 부엌에서 흥얼거리며 장 본 물건을 정리하시는 게 보였다. 어머니는 언제나 노래를 흥얼거리신다. 나는 뒷문을 열고 가방을 내려놓곤 저 가장 미국적인 네 단어를 말했다. "하이 맘, 아임 홈!(엄마! 저 왔어요!)"
II. 서부로 가다
20. 나는 네브래스카로 가는 길이었다. 이것은 할 수만 있다면 가급적 말하고 싶지 않은 문장이다. 네브래스카는 미국 여러 주 중에서도 제일 재미없는 주이기 때문이다. 네브래스카에 비하면 아이오와는 천국이다. 아이오와는 적어도 비옥하고 푸르며 산이 있지 않은가. 네브래스카는 약 19만 4250평방킬로미터에 걸친 메마른 황야와 같다. 주 한가운데는 플라트라는 강이 있는데 이 강은 1년에 몇 번은 폭이 3~5킬로미터 정도로 넓어진다. 사람들은 이 강이 상당히 장엄하다고 생각하지만, 깊이가 고작 6.5센티미터 정도다. 그러니까 휠체어를 타고도 강을 건널 수 있다는 얘기다 솟아오른 곳이나 내려앉은 곳이 없는 땅이다 보니 플라트 강은 식탁 위에 흐른 음료처럼 그냥 그 자리에 놓여 있다. 그리고 네브래스카 주에서 제일 흥미진진한 것은 이것뿐이다.
날씨에 관한 한 중서부는 두 극단을 한 몸에 간직한 곳이다. 겨울에는 바람이 면도날처럼 매섭다. 북극에서부터 훑어 내려온 바람은 살을 에는 추위가 된다. 바람은 울부짖는 소리로 회오리치며 집을 강타한다. 눈 더미와 뼈가 시릴 정도의 추위를 불러온다. 11월에서 3월까지는 심지어 실내에서도 20도 각도로 몸을 숙이고 다녀야 하며, 외출 전이면 차가 좀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눈 더미에서 차를 파내거나 마치 초강력 본드로 차 유리창에 붙여놓은 듯 떨어지지도 않은 얼음을 긁어내는 게 평생 일과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봄이 온다. 눈은 녹고 외투를 안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고개가 해를 따라다니게 된다. 얼마쯤 그러다 보면 예고도 없이 봄은 가고 어느새 여름이다. 여름날은 또 신이 하늘의 거대한 발전소에서 레버를 당긴 것만 같다. 날씨는 이제 반대쪽 극단인 저 아래쪽에서 온 열대의 기운이 맹렬하게 돌진해 들어온다. 마치 뜨거운 담벼락 같다. 여섯 달 동안 숨 막히는 더위가 퍼붓는다. 얼굴에 흐르는 것은 땀이 아니라 기름이다. 온몸의 땀구멍이 쩍 갈라진다. 풀은 갈색으로 시든다. 개들은 곧 죽을 것처럼 헐떡인다. 시내를 걷다 보면 신발 바닥을 통해 아스팔트의 열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돌기 직전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가을이 오고, 그러면 2~4주 정도는 공기가 온화하고 자연은 다정하다. 그러면 또 겨울이 와서 같은 주기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결심한다. "어른이 되면 바로 뜰 거야. 여기서 아주 머나먼 곳으로."
21. 이럴 줄 알았어야 했다. 나는 콜로라도는 산이 전부인 줄로만 알았다. 캔자스를 떠나는 순간 눈 덮인 로키 산맥과 노란 미나리아재비가 한들거리는 고지대의 초원들 한가운데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신선한 셀러리처럼 파삭한.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완전히 평평하고 색도 우중충하니 갈색이고, 스윙크, 오드웨이, 맨자놀라 등 이름부터 후줄근한 작은 시골 마을들만 잔뜩 이어졌다.
22. 아침에 TV 일기예보를 보니 "헐랭 전선" 때문에 로키 산맥에 눈이 많이 오겠다고 했다. 기상예보관은 이 소식이 반가운 듯했다. 눈빛이 반짝이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기상도에는 서부 거의 전역에 걸쳐 불쾌함이 저주처럼 걸쳐 있는데도 말이다. 도로가 폐쇄될 것이며 폭설주의보가 발효될 거라 말하는 그의 입 꼬리가 고소하다는 듯 살짝 올라갔다. 텔레비전 기상예보관들은 왜 늘 그렇게 악의가 가득해 보일까? 이들은 진정성을 보이려고 노력해도 가면일 뿐이다. 그 표면 아래 어린 시절 곤충들의 날개를 잡아 뜯고, 지나가는 차에 깔리는 다른 아이를 보고 낄낄대던 사람이 숨어 있다는 걸 조금만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갑자기 나는 남쪽으로, 별다른 기상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뉴멕시코 주의 메마른 산지를 찾아 가기로 결심했다. 산타페의 작고 배타적인 칼리지에 다니는 조카딸이 있는데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했다. 이 지저분한 뚱보 삼촌이 먼지 낀 싸구려 똥차를 대고 튀어나와 조카딸을 덥석 포옹하는 꼴을 캠퍼스의 모든 친구들에게 보여주면 아이는 좋아할게 틀림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곧장 그리로 갔다.
이른 오후에 뉴멕시코로 들어선 게 이날의 절정이었지만, 콜로라도와 똑같이 별로 자극이 없어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라디오를 켰다. 어디를 기점으로 해도 너무 먼 곳이라 주파수가 잡히지 않아 지직거리기만 했는데, 그나마 잡히는 방송은 몽땅 스페인어로 된 채널이었다. 축 늘어진 콧수염에 커다란 솜브레로(챙이 넓은 멕시코 전통 모자)를 쓰고 "아이 아이 아이" 어쩌고 하며 어슬렁거리며 노래하는 가수들이 부르는 그런 노래 말이다. 왜 고등학교 선생들이 결혼 30주년 기념일에 마누라를 데려가는 좀 있어 보이려고 불 위에 음식을 내오는 그런 종류의 식당에서 늘 만나는 멕시코 밴드들 있잖은가. 서른여섯 해를 살아오면서 멕시코 음악을 즐기려고 듣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이곳에서는 여남은 개나 되는 방송국에서 바로 그 음악을 빵빵 틀어대고 있었다. 각 노래가 끝난 다음에는 디제이가 나와 스페인어로 1, 2분 동안 지껄이는데, 그 소스라친 말투는 암만 들어도 어쩌다가 불알이 서랍에 낀 사내의 목소리다. 그 다음에는 잠시 광고가 나오는데, 이 광고남의 목소리는 디제이보다도 훨씬 더 다급하고 흥분되어 있다.(불알이 서랍에 끼는 사고를 그 순간에도 연속해서 겪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다음엔 다른 노래가 이어진다. 아니, 내가 듣기론 같은 노래를 다시 트는 게 분명하다. 그게 바로 멕시코 음악가들의 불운이다. 그들은 아는 곡조가 단 하나뿐인 것 같다. 필시 그 떄문에 B급 레스토랑 말고 다른 곳에선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성 프랜시스 성당(대단히 아름다웠다)과 총독 관저(아주 지루했다. 총독들에 대한 문서만 잔뜩 있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로레토 채플의 계단까지. 이 계단은 위층 성가대 좌석까지 이중 나선으로 된, 그러니까 두 번 꼬인 6.5미터 높이의 계단이다. 놀라운 것은 계단이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서 있다는 점이다. 꼭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인즉, 이 채플의 수녀들이 계단을 만들어줄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더니 이름 모를 목수가 나타나 여섯 달 동안 계단을 만든 다음, 돈도 받지 않고 처음 왔을 때 그랬듯이 어느 날 갑자기 수수께끼처럼 홀연히 사라졌더라는 것이다. 수녀들은 100년 동안이나 이 이야기를 있는 대로 우려먹더니 몇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어떤 민간 회사에 이 채플을 팔아버렸다고 한다. 이 회사는 이제 영리 목적으로 이 채플을 운영하며 입장료를 50센트씩 받고 있다. 이 이야기는 나를 씁쓸하게 했을 뿐 아니라, 수녀들에 대한 나의 존경심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물론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언제나 위험한 말이다) 미국인들은 어딘가 돈이 숨어 있을 때만 과거를 숭상하며, 그렇다 해도 에어컨이라든가 무료 주차라든가 다른 필수적인 편의가 없는 생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거를 그 자체로서 보존하는 일은 그다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정서적 가치 따위를 고려할 여지는 없다. 누군가 수녀들에게 다가와 상당한 돈을 제시하며 계단을 팔라고 하면 그들은 "절대 안됩니다. 저 계단은 신성한 성소입니다. 예수님이 보낸 살짝 건장한 수수께끼의 특사가 지었지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묻는다. "얼마 줄 건데요?" 그리고 제안 받은 돈이 충분하면 그 돈으로 더 큰 부지에 에어컨과 주차 공간, 게임 룸이 있는 새 수도원을 짓는다. 수녀들이 이런 면에서 다른 미국인들보다 더 심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전형적인 미국식으로 행동할 뿐이다. 나는 그게 슬프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뭐든 한 세대를 넘겨 살아남기 어려운 것도 무리가 아니다.
23. 그랜드캐니언을 무덤덤하게 맞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랜드캐니언에 대해 얼마나 많이 들어보았든, 사진을 보았든, 막상 가보면 숨이 턱 막힌다. 이런 규모의 어떤 것도 다룰 능력이 없는 당신의 정신은 그냥 닫혀 버리고, 세상에서 저토록 광대하고 저토록 아름다우며 고요한 것이 있다는 데 깊고 형용할 수 없는 경이만을 느끼며, 당신은 오랫동안 말도 숨도 잇지 못한 채 진공 상태가 된다.
글렌캐년 댐의 고장인 애리조나 주 페이지에서 나는 유타 주로 들어섰고, 풍경은 곧바로 개선되었다. 산들이 보랏빛 내지 붉은빛으로 바뀌로 사막에 홍조가 돌았다. 몇 킬로미터 더 가자, 산쑥이 뺵뺵해지고 산은 초록도 짙어지고 더 뾰족해졌다. 이상하게도 친숙한 풍경이었다. 그래서 《자동차 여행 가이드》을 찾아보니 할리우드 서부 영화들을 모두 이곳에서 찍었다고 한다. 100여개 이상의 영화와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모두 도로 저편의 케이냅 타운을 현지 촬영을 위한 본부로 썼다고 한다.
24. 네바다는 범죄 및 성범죄율이 전국에서 제일 높은 주이며, 폭력범죄율이 두 번째(간발의 차이로 뉴욕에 밀렸다), 고속도로 사고 치사율 1위, 임질 발생률 2위(영과으이 트로피는 알래스카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외지 인구 유입 비율이 1위인(네바다 주 거주자의 80퍼센트가 다른 곳 태생이다) 주이다. 부패의 역사가 길고 조직범죄와 강력히 연계된 주이기도 하다. 그리고 네바다 주에서 제일 유명한 연예인은 웨인 뉴턴(라스베거스에서 주로 활동한 인기 가수)이다. 그러니 유타 경계선을 넘어 네바다로 들어설 때 내가 느낀 불안감을 독자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도박장이 몇 개인지는 모르지만 무지하게 많은 건 분명했다. 지금 이 도박장이 내가 새로 들어온 곳인지, 아니면 같은 도박장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는 건지 확실치 않을 떄가 많았다. 홀마다 같은 풍경이었다. 줄지어 앉은 사람들이 지루하게, 그리고 기계적으로 돈을 잃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최면에 걸린 듯했다. 실로 엄청난 사기였다. 어떤 카지노는 연각 1억 달러의 이익을 낸다는데(이 정도면 규모가 꽤 큰 법인에 맞먹는 액수다) 문만 열어놓으면 그 돈이 벌리는 것이다. 카지노 경영에는 기술도, 지능도, 품위도 거의 필요가 없다. <뉴스위크>에서 읽자니 시내의 호스슈 카지노 사장은 글을 읽는 법도 쓰는 법도 배운 적이 없단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걸 보면 라스베이거스에서 성공에 필요한 지적 수준이 어떤 건지 대충 알 수가 있다. 갑자기 이곳이 싫어졌다. 거기에 넘어가서 소음과 번쩍임에 혹해서 그토록 쉽게 생각 없이 30달러를 잃은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25. 캘리포니아로 가는 가족 여행은 10년 후의 미래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비까번쩍하고 현대적이었다. 쇼핑센터, 차를 탄 채 일을 볼 수 있는 은행, 맥도널드, 미니 골프장,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아이들 등 아이오와에서는 아직 새로운 것들이 캘리포니아에선 이미 오래 전에 자리 잡았다. 지금 이곳에서 그런 것들은 그냥 더 오래되어 보였다. 미국의 타 지역들이 따라잡은 것이다. 1988년의 캘리포니아에는 아이오와에 없는 건 없었다. 스모그만 뺴고. 해변도 뺴고. 그리고 앞마당에서 자라는 오렌지만 뺴고. 차를 타고 통과할 수 있는 나무들만 빼고.
26. 아이다호 역시 거대한 주여서(남북으로 885킬로미터이고, 하단의 폭만 483킬로미터이다) 와이오밍과의 주 경계선 부근 아이다호폴스까지 운전하는 데 그날 남은 시간이 전부 소요되었다. 가는 길에 아르코라는 작은타운을 지나갔는데, 이곳은 1951년 12월 20일에 세계 최초로 원자력으로 전깃불을 밝힌 마을이다.
당시에는 나도 몰랐는데, 이곳의 저장 시설 한 곳에서 플루토늄이 누출되어, 땅속을 통해(아이다호 남부 주민 수천 명의 식수원인) 지하수로 흘러든 사실을 미국 정부가 최근에 인정했다. 플루토늄은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치명적인 물질이다. 한 숟가락 분량의 플루토늄이 일개 도시를 초토화할 수 있다. 일단 만들어진 플루토늄은 25만 년 동안 안전한 곳에 보관해야 한다. 미 정부가 플루토늄을 안전하게 보관한 시간은 채 36년이 못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 사건은 당신의 정부가 플루토늄을 가지고 장난치지 못하게 해야 할 설득력 있는 논거다.
아침에는 서부 이야기를 담은 근사한 동화책의 삽화처럼 그림 같은 경치를 지나 와이오밍으로 차를 달렸다. 눈 덮인 산봉우리, 소나무 숲, 아늑한 농장들, 굽이치는 강물, 잘 어울리는 이름(백조 계곡이었다)의 산골짜기가 그림 같았다.
와이오밍은 미국에서 가장 맹렬하게 서부다운 주이다. 지금도 카우보이와 말, 드넓은 황야의 땅이며, '싸나이는 싸나이답게 살아야 하는'(내가 보기에는 픽업트럭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눈치는 좀 형광등에 행동은 굼뜬) 곳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있고, 거의 모두가 총을 소지한 광경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바로 두어 주 전에, 샤이엔에 있는 주 의회에서는 모든 의원들이 의사당에 들어설 때 입구에 자신의 총을 맡기도록 하는 규정을 마련했다. 와이오밍은 그런 곳이다.
27. 몬태나는 거대하고 텅 빈 주다. 네바다보다도 더 크고,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고 할 만한 곳이 없어 더 텅 비어 있다. 주도 헬레나의 인구라고 해야 고작 2만 4000이다. 몬태나 주 총 면적은 38만 평방킬로미터가 넘는데 주 전체 인구는 80만이 안 된다. 그러나 끝없고, 텅 빈 대초원과 드높은 하늘 덕분에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몬태나는 빅 스카이 지방이라고 불리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나는 언제나 하늘이란 고정되고 어디서나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곳의 하늘은 열 배나 더 큰 것 같다. 이 웅대한 흰 반구 아래 내 차 슈베트는 아주 작은 입자에 불과하다. 이 거대한 하늘 아래서는 모든 것이 작아 보인다.
28. 사우스다코타를 가로질러 계속 달렸다. 얼마나 단조롭고 텅 빈 주인지, 누런 풀만이 끝업이 펼쳐진 초원을 달리면 얼마나 외딴곳 같은지, 얼마나 외톨이처럼 느껴지는지 독자는 아마 모를 것이다.
수폴스를 지나자마자 오후도 중반으로 접어들었을 떄에야 사우스다코타를 마침내 벗어나 미네소타로 들어갔다. 이곳은 이번 여행에서 내가 서른 여덟 번째 만나는 주이며 내가 갈 마지막 주이지만 잠시 남단을 훑었을 뿐이므로 별로 큰 의미는 없다. 3킬로미터만 가며 오른쪽으로 펼쳐진 들판 너머에 아이오와가 있다. 넘실대는 들판과 비옥한 검은 토양의 중서부에 다시 돌아오니 정말 좋았다. 텅 빈 서부에서 몇 주를 보내고 나니, 시골의 갑작스러운 노음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미네소타 주 워딩턴을 지나자 곧바로 아이오와에 들어섰다. 때마침 해사 기다렸다는 듯이 구름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황금빛이 금세 들판 위로 퍼지며 모든 것이 즉시 따스해지면서 봄 같아졌다. 농장들은 모두 정갈하고 풍요로워 보였다. 타운들도 모두 깨끗하고 친절했다. 나는 풍광에 매혹되어 홀린 듯 계속 차를 몰았다. 별다른 것도 없이 넘실대는 들판이 전부였지만 모든 색채가 진하고 생생했다. 푸른 하늘, 흰 구름, 붉은 축사들, 초콜릿 색 흙. 마치 모두 처음 보는 풍경 같았다. 아이오와가 이렇게 아름다운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망연히 어제 경기의 박스 스코어에 눈길이 갔는데, 아는 팀 이름이 하나도 없어 은근히 놀랐다. 그때 이 선수들은 전부 내가 미국을 떠날 때 중학생이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야구 경기의 본질은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며, 어느 선수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 지 아는데 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이제 외국인이었다.
여종업원이 와서 종이 매트를 깔고 나이프와 포크를 놓아주었다. "하이!" 그녀는 인사라기보다는 외침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기분이 어떠세요?"그녀는 정말 마음을 쓰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생각에 그녀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아, 중서부 사람들은 얼마나 근사한지. 그녀는 나비테 안경에 벌집 머리를 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대꾸했다.
여종업원은 의심스러운 듯한, 하지만 친절한 눈길로 나를 옆으로 쳐다보았다. "여기 사람 아니죠, 그렇죠?" 그녀가 물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아닙니다, 아쉽게도." 나는 살짝 생각에 잠긴 채 대답했다. "그런데 이곳이 너무 좋아서 가끔은 여기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습니다."
대략 이것이 나의 여행이었다. 48개 주 가운데 남부 10개주를 제외하고 모두를 방문했고, 2만 2495킬로미터를 뛰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을 거의 다 보고, 보고 싶지 않았던 것도 많이 보았다. 감사한 일이 많았다. 총을 맞지도, 강도를 만나지도 않았다. 차가 고장 나지도 않았고, 여호와의 증인이 다가온 적도 없었다. 아직 68달러와 깨끗한 속옷도 한 벌 남았다. 이 정도면 여행에서 더 바랄 게 없다.
디모인으로 들어갔더니 디모인이 오후 햇살에 거대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주 의사당의 황금빛 돔 지붕이 반짝였다. 집집마다 마당엔 나무 그늘이 짙었다. 사람들은 잔디를 깎거나 자전거를 탔다. 햄버거와 휘발유를 찾아 주간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온 이방인들이 왜 아예 눌러앉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친절하고 점잖고 상냥한 뭔가가 있었다. 여기살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아주 야릇한 기분이었지만 아주 오랜만에 처음으로 나는 거의 평온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