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되겠지 - 호기심과 편애로 만드는 특별한 세상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능'이란,

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운 다음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래, 버티다 보면 재능도 생기고

뭐라도 되겠지.

 

뭐라도 되겠지. 책 제목을 보고 나면 묘한 희망이 샘솟게 된다. 표지를 열자마자 바로 보이는 이 글귀. 본문 중 한 부분이며 편집자들로 하여금 책 제목에 영감을 주게 만든 본문의 한 부분을 책 바로 앞에 실어놓았다. 토닥 토닥, 위로를 해 주는 느낌이다.

 

얼마 전 <놀러와>에 출연한 그룹 백두산과 부활을 보고 마음이 짠했다. 나의 전설들은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모텔을 운영하며 카운터에 앉아서 기타를 연습하는 베이시스트와 각종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며 음악 활동을 하는 드러머 얘기를 듣고 있자니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하긴, 요즘 누가 헤비메탈 음악을 듣나. 불러주는 데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을 포기하고 있었다. 시간을 포기하고, 돈을 포기하고, 또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한 다음,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인생은 어떤 것을 포기하는가의 문제다. 선택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포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기로 선택하고, 결국 돈을 많이 벌게 된 사람이 어떤 걸 포기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얼마나 기분 좋게 포기할 수 있는가에 따라 인생이 즐거울 수도 있고 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돈과 성공과 권력을 포기하고(글쎄, 포기하지 않았어도 거머쥐긴 힘들었겠지만) 시간을 선택했다. 바쁘게 사는 대신 한가한 삶을 선택했다. 즐겁게 포기할 수 있었다. 남는 시간에 기타도 칠 수 있으니 부러울 게 없다.

 

이 부분이 참 좋았다. 흔히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저 돈을 벌기 위해 개인적인 시간을 포기했다고 친구 관계를 희생했을 것이라고 독하다고 이야기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배고픔을 감수하는 사람들에게는 안정된 생활을 포기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만, 그 둘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은 신선했다. 보통 어느 한 쪽의 편을 들면서,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평생을 산다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일갈하거나,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좋아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은 한심하다고 평가하며 인생의 어느 한 요소에만 특별히 집중하기 마련인데, 사실 인생이란 수많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어느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진리이며,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이므로 과도한 비판도 주제 넘는 칭찬도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영화 <즐거운 인생>과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생각났다.

 

일본의 동화작가 고미 타로의 책 『어른들(은, 이, 의) 문제야』에는 나처럼 산만한 사람들에 대한 글이 나온다. "저는 마음이란 산란해지기 위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란해지지 않는 마음은 이미 마음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마음 심心이라는 글자를 좋아하는데, 특히 그 글자의 생긴 모양이 시선을 모읍니다. 권權이나 군軍같은 글자는 획들이 모두 확실하게 붙어 있지만 심心은 각각 떨어져 있습니다. 즉 처음부터 산만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마음을 갖지 말라는 뜻이며, 깜짝 놀라고, 두근거리고, 용기 없이 우물쭈물하는 등의 인간적인 감정을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몇십 년 동안 억울하게 뒤집어썼던 누명을 벗어버린 느낌이었다. 산만해도 괜찮다고, 산만한 게 나쁜 건 아니라고, 고미 타로가 나를 위로해주었다.

 

나도 읽는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 들었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잡생각'이라는 단어였다. 책상 앞에 앉아서 잡생각하지 말라고, 공부에 집중할 때 잡생각하지 말라고. 부모님 말씀 덕에 나는 잡생각을 죄악시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 덕에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에 가서 취직해서 밥 먹고 산다. 하지만 간혹, 그 어린 시절에 한없이 뻗어나갔던 잡생각을 가지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가지 탓에 뿌리마저 뒤흔들린 어른이 되었을까. 비록 지금은 뿌리가 튼튼한 어른이 되었다만, 한번쯤 바람에 가지들이 휘둘리고 엉키는 경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이다.

 

물론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이 전부 좋았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 사람의 주장이 위험하다고 여겨진 적도 있고, 때로는 고개를 갸웃하며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책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발명가 김씨'라는, 김중혁이 직접 그린 만화와 함께 이런 저런 발명품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코너가 있는데, "안전벨트를 꼭 매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나의 목숨을 걱정해주는 걸까요? 왜 안전벨트를 매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할까요? 가끔 안전벨트가 그려진 옷을 입어보고 싶습니다."라는 대목에서는 분명히 작가는 웃자고 쓴 말인지 확실히 알겠음에도 불구하고 죽자고 달려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의 편식에 대해 옹호하면서 시행착오를 할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너무 나갔다 싶기도 하고. 다 큰 어른이 편식하는 것보다 오히려 어렸을 때 편식하는 것은 더 치명적이라는 생각과 함께, 공부를 잘하라는 주문도 아니고 반장을 하라는 주문도 아니고 그저 음식을 골고루 먹으라는 그 주문, 어머니의 그 주문을 그냥 감사하게 받으면 안 되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부분들 때문에 이 책 전체의 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김중혁의 산문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따스하며, 발랄하고, 살짝 살짝 발칙한 부분도 있다. 그래서 좋다.

 

마지막으로 책 전체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마지막 부분. 이 부분은 일러스트가 압권이다. 책을 펼지면 두 페이지에 걸쳐 새까만 밤하늘에 별이 총총 떠 있는 배경으로 본문은 흰색으로 인쇄되어 있는데, 괜히 뭉클해진다.

 

<1박 2일>이라는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친구들과 저렇게 놀면 참 재미있겠다 싶다가도 텐트에서 자는 모습을 보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곤 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늘 "밥은 밖에서 먹어도 잠은 집에 들어와서 자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제가 밖에서 좀 많이 잤죠. 어머니), 지금은 그 말의 깊은 뜻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나는 어찌나 예민하신지 잠자리가 바뀌면 쉽게 잠들지 못한다. 텐트에 누워 있으니 어머니의 말씀이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얘야, 어서 집으로 돌아가서 편히 자라."

그러고 싶었으나 그러긴 힘들었다.

텐트에 누워 있으니 우주에 나 혼자뿐이라는 기분이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있는 걸 뻔히 아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모든 문명이 사라지고 역사가 없어지고 미래는 확신할 수 없는, 그런 세상에 덩그러니 나 혼자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예민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호들갑을 떠는 것이겠지만, 외로웠다.

스톡홀름의 한 호텔에 누워 있던 때가 떠올랐다. 아마 스톡홀름 시내에서 가장 싼 호텔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 방에는 창문도 없었다. 고시원 정도의 크기였다. 호텔의 침대에 누워 있으니 내가 이곳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잇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이 모두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창피한 얘기지만, 그때 나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글쎄, 누가 죽인대?)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간 다음(글쎄, 누가 돌아가지 못하게 한대?) 가족들도 만나고 떡볶이도 먹고 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아주 작은 호텔, 그중에서도 창문 하나 없는 작은 방의 코딱지만 한 침대에 누워서 반드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이 캠핑을 떠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나처럼 유치한 마음이야 먹지 않겠지만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이 간섭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난 다음 그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봐야겠다'하는 의지를 되새긴 후 돌아오고 싶은 것은 아닐까.

내가 스톡홀름의 작은 호텔방에서 외로워했던 것처럼 지금 이시간 서울의 어딘가 작은 쪽방에서도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연이야 어떻든 모두들 외로워하며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서울은, 도시는, 야생보다 더욱 무서운 곳일지도 모른다. 자,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남읍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