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유미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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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이 끝났다. 1권이 2002년 5월에 처음으로 나왔고 이 책이 2015년 4월에 나왔으니 13년만이다. 2013년 7월에 77권으로 완간되었다는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보면, 혹시 이 책 뒤로도 또 출판될 책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러 기사를 비롯해서 트위터에 황금가지 출판사 관계자들이 올린 글을 보니 진정 이 책이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3년간의 노고를 단 몇 달만에 내가 홀라당 다 읽어버린 것이 한편으로는 죄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걸 내가 다 읽었구나, 결국 해냈구나 하는 생각에 내 자신이 뿌듯해지기도 한다.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얻어진 여유시간이었지만, 내 평생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크리스티의 모든 소설을 한번씩이나마 읽어봤겠나, 생각하면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예기치 못했던 지금의 pause가 시간이 흐른 후 어쩌면 감사하게 여겨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만약 그렇다면 나는 크리스티 여사에게 상당한 빚을 진 셈이다. 견디기 힘들었을 이 시간이 반짝반짝 빛나게 해 준 몇 안 되는 요소들 중 하나가 크리스티의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이 책의 원제는 Short Story Collection: The Adventure of the Christmas Pudding이다. 78권의 원제는 Short Story Collection: The Affair at the Victory Ball이었고, 78권이 Short Story Collection 1, 79권이 Short Story Collection 2이다.

 

참고로 76권은 Short Story Collection: Agatha Christie Omnibus 2 였고, 77권은 Short Story Collection: Agatha Christie Omnibus 1이었다. 75권이 애거서 크리스티의 후기 작품이자 토미와 터펜스 부부의 마지막 등장 작품이었던 <운명의 문>으로, 장편이었다. 아마도 뒤의 4권에서는 전집에 다 실리지 못한 남은 단편들을 모아서 책으로 만든 듯하다.

 

그 동안의 전집에도 단편집은 있었다.

1. <빛이 있는 동안> (1997, 유작 단편집)

6. <열세가지 수수꼐끼> (1932)

15. <쥐덫> (1925)

21. <파커파인 사건집> (1934)

23. <신비의 사나이 할리퀸> (1930)

37. <뮤스 가의 살인> (1937)

41. <부부탐정> (1929)

45. <푸아로 사건집>(1924)

51.<헤라클레스의 모험> (1947)

76. <리스터데일 미스터리>

77. <검찰 측의 증인>

78. <빅토리 무도회 사건>

79.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마지막 네 권은 따로 출판 연도가 없었던 것으로 볼 때, 다른 단편집들과는 달리 한 권으로 묶여서 출판된 적이 없는 것 같다. 단편이라면, 잡지나 신문 등에 연재되었을 수 있고, 그 것이 어느 정도 분량이 모아지면 책으로 내고 그랬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은 크리스티가 책으로 묶어서 내겠다는 의지가 강하지 않았던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고, 독자들에게 다른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광적인 지지를 덜 얻었다는 말도 될 수 있겠다. 말하자면, 다른 단편들보다는 수준이나 재미가 좀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크리스티의 모든 소설을 다 읽는다는 점에서, 그 점 하나만으로도 79권인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은 의의가 있는 책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표제작인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은 1권 <빛이 있는 동안> (1997, 유작 단편집)에 수록된 '크리스마스 모험'과 동일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노란 아이리스'는 61권 <빛나는 청산가리>와 여주인공의 이름까지 동일하다. 아마도 단편을 먼저 쓰고, 그것을 더 발전시켜 장편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성역'은 핵심 아이디어가 22권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와 동일하다. 역시 단편을 먼저 쓰고 나서 장편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를 읽으면서 소설이 좀 헐겁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빛나는 청산가리>의 경우 동일한 사건을 시점을 달리하여 반복하여 서술하였고, 아마도 등장 인물 5~6명이 자기 입장에서 사건을 회상하는 방식이 반복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정작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소설 전체 분량이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꿈'에서 나오는 젊은 의사 스틸링플리트는 67권 <세 번째 여인>에 등장하는, 바로 세 번째 여주인공이 정신과 환자가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입증하면서 결국 나중에 그녀와 이어지는 바로 그 사람이다. 브라운이나 앤더슨과 같은 이름이었다면 동일한 사람이었어도 눈치 못 채고 넘어갔겠지만, <세 번째 여인>을 읽을 때 스틸링플릿이라는 이름이 워낙 독특하여 기억이 났다. 개인적으로 크리스티 소설에서 이런 부분을 발견할 때 반갑다. 단편에서 조연으로 쓰인 인물을 장편에서 주조연으로 쓴다거나 하는 것들을 볼 때.

 

워낙 지은 소설이 많다 보니,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아 리뷰를 쓸 때 상세하게 기록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내 기억력에 한계가 있다보니 그것으로도 부족하지 않을까? 이 모든 과정을 다시 반복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힘들 것 같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서 한 번 더 이런 휴식시간이 주어진다면 전집을 다시 한 번 반복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다. 물론, 힘들겠지만.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제가 도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아가씨는 여러분과 함께 부엌에서 웃고 얘기하면서 크리스마스 푸딩을 젓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푸딩은 그릇 속에 들어 있었고 그 아가씨는 루비를 푸딩 그릇 중 하나에 넣었죠. 그 푸딩은 크리스마스때 먹을 푸딩이 아니었으니까요. 크리스마스에 먹을 푸딩은 틀이 아주 특이해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을 겁니다. 그 아가씨가 반지를 넣은 푸딩은 새해 첫날 먹게 되어 있던 푸딩이었죠. 그 아가씨는 새해가 되기 전에 이 집을 떠날 준비를 모두 끝낼 거고. 그러면 그 아가씨와 함께 푸딩도 사라졌을 겁니다. 하지만 운명이 어떻게 인간사에 개입하는지 보십시오. 크리스마스 아침에 생각지도 못했던 작은 사고가 일어났죠. 특이한 틀에 들어 있던 크리스마스 푸딩이 바닥에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겁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현명한 로스 부인이 다른 푸딩을 꺼내서 식탁에 내놓은 거죠."


 

<그린쇼의 저택>-마플 양

 

"내 말은 네가 그린쇼 양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는 거야. 네가 그 저택에 가서 만났던 그린쇼 양이 그보다 며칠 전에 레이먼드가 만났던 그린쇼 양과 동일한 인물이었다는 보장은 없지 않니? 아! 나도 알고 있어."

 

"누군지 궁금하지? 「신데렐라에게 키스를」이라는 연극에서는 경찰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단다. 내트 플레처는 무대에서 입었던 의상을 빌려 입었던 거야. 그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일부러 주유소로 가서 차에 기름을 넣으면서 시간을 물어보았지. 12시 25분에 말이야. 그런 다음 급하게 차를 몰아 저택 모퉁이에 차를 세워 놓고 경찰 제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자신이 맡은 역할을 했던 거지."

"그럼 왜,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죠?"

"가정부의 방문을 밖에서 잠글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지. 그린쇼 양의 목에 화살을 꽂을 사람도 필요했고. 진짜 활에 맞은 것처럼 보이려면 아주 힘이 센 사람이 화살을 목에 찔러야 했을 테니까."

"그럼 두 사람이 이 사건의 공범이라는 건가요?"

"맞아. 내 생각은 그렇다. 두 사람은 아마 모자간일 게다."

"그린쇼 양의 동생은 오래전에 죽었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플레처 씨는 분명히 재혼을 했을 거야. 재혼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 아이도 죽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지금 조카라고 나선 사람은 아마도 두 번째 부인이 낳은 자식일 거야. 그렇게 되면 그린쇼 양하고는 아무 관계도 아닌 셈이지. 그 여자는 가정부로 위장하고 그 저택에 들어가서 집 안을 염탐했을 거야. 그런 다음 자기가 그린쇼 양의 조카인 것처럼 편지를 보내고 방문하겠다고 했던 거지. 농담처럼 경찰 제복을 입고 가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왜 하필이면 화살을 사용한 걸까요? 굳이 화살을 쓸 이유는 없었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단다, 조앤. 알프레드는 궁술 클럽 회원이었으니까. 그들은 알프레드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울 속셈이었던 거지. 알프레드가 12시 20분에 술집에 있었다는 사실이 불행하게도 그들의 계획을 어긋나게 해 버린 거야. 알프레드는 항상 자기가 나가야 할 시간보다 일찍 저택을 나갔어. 그게 이번에는 그 사람에게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 된 거지."

마플 양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행동은 도덕적으로는 올바르다고 할 수 없지. 하지만 게으른 덕분에 목숨을 구한 셈이 되어 버렸어."

 

 

<약자>-푸아로

 

"루벤 애스트웰 경이 열흘 전에 살해당했습니다. 그저께인 수요일에 그의 조카 찰스 레버슨이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아가씨가 아는 한 그에 관해서 불리한 사실은...... 제가 하는 얘기 중에 틀린 점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죠, 마드무아젤. 루벤 경은 그의 비밀 서재인 탑방에서 늦게까지 글을 쓰고 있었죠. 레버슨 씨는 밤 늦게 빗장열쇠를 이용해서 그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그의 삼촌과 말다툼하는 소리를 집사가 들었습니다. 집사의 방은 탑방 바로 밑에 있었죠. 말다툼 하는 소리가 그치더니 갑자기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나고 숨이 넘어갈 듯한 비명이 들렸습니다.

집사는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서재로 올라가 보려고 했죠. 그런데 몇 초 후에 레버슨 씨가 휘파람을 불면서 방에서 나오는 걸 보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스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하녀가 책상 옆에 쓰러져 있는 루벤 경을 발견한 겁니다. 그는 어떤 무거운 물건에 맞아 쓰러진 것 같았습니다. 집사는 즉시 경찰에 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 같은데요, 마드무아젤?"

 

"아가씨가 자발적으로 찾아온 건 아니라는 거로군요."

작은 남자는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는 거군요."

릴리 마그레이브는 다시 장갑의 구김살을 펴기 시작했다.

"푸아로 씨, 저는 지금 무척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저는 애스트웰 부인에 대한 충성을 지켜야 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저는 부인에게 고용된 도우미에 불과하지만, 부인께서는 저를 친딸이나 조카처럼 더없이 친절하게 대해 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인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부인의 행동을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얘기가 선생님이 사건을 조사하실 때 선입견을 갖게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에르퀼 푸아로가 선입견을 가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선생님의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저를 너무 추켜세우시는군요. 하지만...... 그렇기는 하답니다. 지금 제가 맡고 있는 사건이 워낙 많다 보니."

"저도 그러실 거라고 짐작은 했어요."

릴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스트웰 부인께는 제가......."

그러나 푸아로는 일어서지 않았다. 대신 의자에 등을 기대고 그 아가씨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급하게 가시려고 하죠, 마드무아젤? 잠깐만 더 앉아 계십시오, 부디."

그는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마지못해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가씨들은 너무 성급하단 말이지. 저 같은 늙은이들은 결정을 내리는 것도 느리다는 걸 이해해 주셔야죠. 아가씨는 제 말을 오해한 것 같군요. 전 아직 애스트웰 부인에게 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영국인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키가 크고 창백한 안색에 자신의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성격이었다.

"젊은 아가씨는 아주 흥미로운 존재들이야, 조지."

푸아로는 다시 안락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머리가 좋은 아가씨들은 특별히 더 흥미롭지.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부탁하면서 동시에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인데 말일세. 대단한 수완이 필요한 일이지. 그 아가씨는 아주 능수능란했어...... 대단했다니까...... 하지만 이 에르퀼 푸아로도 그 아가씨에 뒤지지 않는 특별한 머리를 타고 났지, 안 그런가, 조지?"

(중략)

푸아로가 연극조로 대사를 늘어놓다가 말을 멈추자 조지의 목소리가 미안한 듯이 끼어들었다.

"양복도 쌀까요, 나리?"

푸아로는 측은한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언제나 자네 할 일에만 주의를 기울이는군 그래. 자네는 내게 정말 훌륭한 친구일세, 조지."

 

 

<꿈>-푸아로

 

"첫번째 의사는 모두 음식 문제라고 했어. 나이가 꽤 든 의사였지. 두번째는 신식 학교를 나온 젊은 의사였네. 그 의사는 내가 어렸을 때 하루 중 특정한 시간, 3시 28분에 일어난 어떤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했어. 그가 말하기를 내가 그 사건을 기억하기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이 자살이라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거라고 하더군. 그의 설명은 그랬어."

"그럼 세 번째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푸아로가 말했다.

"그 의사도 젊은 사람이었어. 그 의사는 황당한 이론을 늘어놓더군! 내가 사는 걸 지겨워하고 있다는 거였어. 사는 게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의도적으로 삶을 끝내기를 원하고 있다고 했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면 본질적으로 내가 실패자라는 걸 인정하는 게 되기 때문에 깨어있을 때는 그런 진시를 직시하기를 거부한다는 거야. 하지만 자고 있을 때는 그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내가 정말 하기 원하는 행동을 한다는 거지. 내 삶을 끝내는 것 말일세."

"그 의사의 생각은 그러니까 어르신이 무의식적으로 자살하기를 원한다는 건가요?"

 

"꿈속에 나온 장면을 직접 보고 싶군요. 탁자하고 시계, 권총, 그런 것 말입니다."

"좋아, 내가 옆방으로 안내하리다."

노인은 몸에 걸친 가운의 앞섶을 여미면서 의자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니야. 거긴 아무것도 볼 게 없어. 이미 거기 있는 것에 대해 다 얘기했잖은가."

"하지만 제가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팔리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의 생각은 다 들었으니 이제 됐네."

푸아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시다면 할 수 없지요."

푸아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게 됐습니다, 팔리 씨."

베네딕트 팔리는 앞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쓸데없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시게."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사실대로 얘기해 줬어.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군. 이제 이걸로 끝냅시다. 상담료 청구서나 보내시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푸아로가 딱딱한 어조로 말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잠깐만."

백만장자가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그 편지는...... 내게 돌려주게나."

"비서분이 쓴 편지 말인가요?"

"그렇네."

푸아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접혀 있는 종이를 한 장 꺼내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노인은 편지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머리를 끄덕이고 옆에 있는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에르퀼 푸아로는 다시 문으로 걸어갔다. 그는 속으로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에 들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중에도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그를 성가시게 건드리고 있었다. 그것은 베네딕트 팔리의 잘못이 아니라 푸아로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 아가씨는 마음에 들더군요. 배짱도 있고 머리도 좋은 것 같았어요. 제가 그 아가씨에게 작업을 건다면 사람들은 저를 재산을 노린 사기꾼으로 몰아가겠죠?"

"한발 늦었네. 그 아가씨는 벌써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가 있어. 아버지가 죽었으니 그 아가씨에게 행복의 문이 활짝 열린 셈이지."

"그 아가씨한테도 고약한 아버지를 살해할 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었던 건 사실이잖아요."

"동기와 기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범죄를 저지를 만한 기질이 있어야지."

"탐정님이 범죄를 저지른다면 어떨까요?"

스틸링플리트가 말했다.

"교묘하게 잘 빠져나갈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탐정님한테 그런 일은 식은 죽 먹기일 테죠. 제 말은 그렇게 뻔한 일은 자존심이 상해서 안 하실 거라는 뜻입니다."

"그건 전형적인 영국인의 생각이로군."

푸아로가 말했다.


 

 

<노란 아이리스>-푸아로

 

"4년 전 오늘 밤 뉴욕에서 만찬이 열렸습니다, 푸아로 씨. 그 자리에는 제 아내와 저, 워싱턴 대사관의 스티븐 카터, 그 당시 우리 집에 몇 주일 동안 묵고 있던 앤터니 채플, 그리고 세뇨라 발데즈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그 무렵 뉴욕시에서 명성을 날리는 댄서였죠. 여기 있는 폴린......."

그는 폴린의 어째를 가볍게 두드렸다.

"제 처제는 그때 겨우 열여섯 살이었지만 파티에 참석하게 했습니다. 기억하지, 폴린?"

"네, 기억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흔들렸다.

"푸아로 씨, 그날 밤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드럼이 울리고 쇼가 시작되었을 때였습니다. 불이 꺼졌습니다. 플로어 가운데 잇는 스포트라이트만 빼고요. 불이 다시 켜지고 나자, 푸아로 씨, 제 아내가 테이블에 엎드린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내는 죽어 있었습니다. 완전히 숨이 끊어져 있었죠. 아내의 포도주 잔에서 청산가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약을 싼 종이가 아내의 핸드백에서 발견되었죠.

"자살하신 건가요?

 

"조용히 하게, 토니. 내 얘기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죽인 거야. 지금도 그 확신은 변함없어. 누군가 어둠을 틈타서 반쯤 남은 청산가리를 싼 종이를 아이리스의 핸드백에 넣은 거야.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나는 알아.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단 말이야."

 

<두 번째 종소리>-푸아로

 

"제가 탄 기차가 연착되었습니다. 우리 앞 선로에서 사고가 났거든요."

"아, 그래서 만찬이 지연된 거군요."

조앤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이 재빨리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기분 나쁠 정도로 사람을 꿰뚫어보는 시선이었다.

"아주 드문 경우인가 보죠?"

 

"그럼 시작해 볼까요. 저는 런던에서 리챔 로체 씨가 보낸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리챔 씨는 거액의 돈을 사기당한 것 같다고 썼습니다. 가정적인 이유로 경찰에 수사를 요청하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제게 와서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물론 승낙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집에 온 겁니다. 리챔 로체 씨가 원했던 시간에 오지는 못했습니다.다른 볼일도 있으니까요. 리챔 로체 씨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분이 영국의 왕은 아니니까요."

 

"아니겠죠. 그렇게 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럴 듯한 설정이죠.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될 수 없었던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당신이 7시에 갯개마취를 꺾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여기 있는 마드무아젤이 제게 해 준 얘기입니다."


 

 

<성역>-마플 양

 

"이번 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줄리언에게 물어보기도 그렇고. 줄리언은 너무 강직한 사람이라......."

마플 양은 그녀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은 듯이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우리 여자들은 다르지. 너는 사건의 사실만 얘기했지만 나는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구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회에 쓰러져 있던 남자는 성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어요. 그 남자는 줄리언이 말하던 것처럼 말했어요. 제 말은 그 남자가 박식하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 같았다는 뜻이에요. 만일 그 남자가 자살한 거라면 억지로 몸을 끌고 교회에 와서 '성역'이라는 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성역은 쫓기는 사람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안전하다는 뜻이에요. 교회 안에 들어가면 쫓아오던 사람이 접근할 수 없어요. 예전에는 법률로 접근할 수 없게 정했잖아요."

 

"아, 보통 사람들이 세례명으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건 저도 알아요. 윌리엄이라는 셰례명을 가지고 있어도 '포기'나 '홍당무' 같은 별명으로 부르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월터라는 이름이 버젓이 있는데 누이가 윌리엄이나 빌이라고 부르는 건 좀 이상하잖아요?"

"네 말은 그 여자가 죽은 남자의 누이가 아니라는 거니?"

"네, 전 아니라고 확신해요. 그 사람들은 둘 다 인상이 좋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이 목사관에 찾아온 건 죽은 남자의 물건을 찾고 죽기 전에 그가 남긴 말이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어요. 제가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고 하자 그들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나타나는 걸 똑똑히 봤어요. 저는 그 남자를 쏜 사람이 바로 에클스 부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애의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그 소식을 듣고 탈출해서 낡은 옷장에서 이 가방을 찾아 들고 왔던 거예요. 그 남자나 그의 아내가 옷장 안에 넣어두었겠죠. 이 보석이 정말 그 애의 어머니 물건이었다면 이제 그 아이를 위해 써도 되겠군요."
(중략)

다음 날 아침 번치는 새로 꺾은 국화를 들고 교회로 갔다. 동쪽 창문으로 다시 햇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번치는 강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햇살을 받고 서 있었다. 그녀는 나직하게 혼자 중얼거렸다.

"당신 딸은 잘 지낼 거예요. 제가 잘 돌봐 줄게요. 약속해요."

그녀는 교회를 청소하고 긴 의자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잠시 기도를 드렸다. 그러고는 이틀 동안 집을 비운 탓에 잔뜩 쌓여 있는 집안일을 하기 위해 목사관으로 돌아갔다.

 

 

<마플 양의 이야기>-마플 양

 

"병에 걸리면 두 의사의 견해를 듣게 되죠. 전문의의 견해와 주치의의 견해입니다. 전문의의 의견을 중요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저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의는 자기 분야에 대해서만 경험이 많으니까요. 주치의는 지식은 전문의보다 적을지 모르지만 넓은 분야의 경험을 쌓았다고 봅니다."

나는 패트릭 씨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어. 그즈음에 내 조카 하나가 자기 아기가 피부병이 나자 그 아기를 주치의에게 데리고 가지 않고 유명한 피부과 전문의에게 데리고 갔단다. 주치의가 너무 늙어서 구식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그런데 그 전문의는 엄청나게 돈이 많이 드는 치료를 했단다. 나중에 아기의 병이 약간 변종된 홍역이라는 게 밝혀진 거야.

얘기가 딴 데로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 애기를 한 건 패트릭 씨의 견해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그가 왜 그런 얘기를 꺼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단다.

"로드스 씨가 편찮으시다면......."

나는 말을 꺼내려다가 그만 중단하고 말았단다. 그 불쌍한 남자가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거야.

그는 이렇게 말했어.

"나는 몇 달 후 목 매달려 죽을 겁니다."

 

"당신은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녀가 부인의 방에 들어가는 것도 나오는 것도 곁눈으로 슬쩍 보았을 뿐입니다.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 여자는 같은 여자가 아니었죠. 커피를 마시고 있던 사람들도 하녀가 들어갔다가 나오는 걸 봤을 뿐입니다. 전기공 역시 마찬가지였죠. 그 하녀가 아주 아름다운 여자였다면 남자들이 그녀의 얼굴을 신경 써서 보았겠죠. 그게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하지만 그 여자는 평범한 중년 여자였습니다. 당신이 본 건 하녀의 옷뿐이었죠. 그 여자를 본 게 아니에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그랜비 양보다 캐러더스 양 쪽으로 심증이 간다고 했는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거죠? 두 사람 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그건 g자 때문이었어요. 그 여자가 g자를 빼벅는다고 했죠? 책에서 사냥하는 사람들이 많이 그렇게 한다는 건 읽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죠. 더구나 60세 이하인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없을 거예요. g자를 빼먹는 건 그 여자가 일부러 위장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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