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2 (완전판) - 다섯 마리 아기 돼지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저는 선생님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어요. 어떤 사건을 맡으셨는지, 그 사건들을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도요. 선생님께서는 심리학에 관심이 있으시죠? 심리학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변하는 게 아니잖아요. 물리적인 것들....... 그러니까 담배꽁초와 발자국, 유리조각은 사라져 버리죠. 더 이상은 그런 것들을 찾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 사건의 모든 증거들을 살펴볼 수 있고, 어저면 그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 볼 수도 있을 거예요. 모두들 아직까지 살아 있으니까.......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의자에 앉아 생각해 보실 수 있잖아요.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으시겠죠."

 

20대 초반의 미모의 여성이 푸아로를 찾아온다. 유명한 화가의 딸로, 다섯 살에 사망한 부모의 유산을 최근 상속받았고 약혼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여성이다. 걱정거리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푸아로를 찾아올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는 여성이다. 놀랍게도 그녀는 16년 전, 아버지를 독살한 혐의로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 받고 1년 후 감옥에서 사망한 어머니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한다. 사망하기 전 어머니가 딸에게 남긴 편지에 자신이 결백하다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재판까지 완료된 사건인데다가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이미 사망한 상태라는 점에서 <누명>이 떠올랐다. 그 작품에서는 크리스티의 어떤 탐정도 등장하지 않았는데, 이미 목격자에 의해 알리바이가 입증된 후,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작품은, 사실 의뢰를 받은 푸아로조차 의뢰인의 어머니가 과연 무죄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이 사건의 재구성을 위해 푸아로는 탐문을 시작한다. 탐문의 내용은 목차만 살펴 보아도 알 수 있다.

 

서장 : 칼라 레마챈트

 

제1부

 

피고 측 변호사

검사

젊은 변호사

늙은 변호사

경찰 총경

작은 돼지 한 마리는 시장에 갔네

작은 돼지 한 마리는 집에 머물렀네

작은 돼지 한 마리는 로스트비프를 먹었네

작은 돼지 한 마리는 아무것도 먹지 못 했네

작은 돼지 한 마리는 '꿀꿀꿀' 울었네

 

제2부

 

필립 블레이크의 이야기

메러디스 블레이크의 이야기

레이디 디티셤의 이야기

세실리아 윌리엄스의 이야기

안젤라 워런의 이야기

 

제3부

 

결론

푸아로, 다섯 가지 질문을 던지다

사건의 재구성

진실

결론

 

칼라 레마챈트는 본명이 캐롤라인 크레일로, 죽은 어머니와 똑같은 이름을 지녔지만 비운의 사건 이후로 캐나다로 건너가 삼촌과 지내며 이름까지 바꾼다. 그녀와의 만남 이후, 푸아로는 당시 재판의 변호사 몬태규 디플리치를 제일 먼저 만난다. 검사였던 험프리 루돌프는 사망했기에, 후임인 포그 검사를 그 다음에 만나고, 그 다음에 젊은 변호사 조지 메이휴를 만난다. 메이휴의 아버지 역시 변호사로, 동료이자 법정에서 꽤 승률이 높았던 디플리치에게 변호를 의뢰했던 것이다. 현재는 고인이 되었기에 아들을 대신 만났지만,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아들은 그 사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대신 크레일 가 전속으로 일하고 있던 변호사로, 지금은 은퇴한 아버지의 지인 조너선을 만날 것을 추천한다. 조너선이 운영하던 법률 사무소는 한 번도 범죄 소송을 맡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메이휴 변호사에게 일임했고, 메이휴 변호사는 디플리치에게 변호를 의뢰했던 것이다. 디플리치의 변론은 훌륭했으나, 정작 용의자였던 캐롤라인이 재판 내내 마치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과 같은 패배주의자적 태도를 보였고, 배심원들의 동정을 사는데 실패하여 결국 유죄 선고를 받게 된다. 그렇게 늙은 변호사와의 만남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푸아로는 퇴직한 경찰 총경인 헤일을 만난다.

 

용의자는 총 다섯 명. 용의자 이전에 당시 사건의 수사나 재판과 관련 있던 사람을 먼저 다섯 명 만나는데 그 다섯 명은 직접적으로 사건과 연관이 없는 사람도 있으므로 일부러 숫자를 맞췄다는 느낌이 든다. 용의자의 딸이 등장하며 사건이 시작되고, 당시 사건을 가장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용의자를 제외한 다섯 명과, 용의자 다섯 명, 그리고 마지막의 푸아로의 마무리. 1-5-5-1 의 대형. 수미상관의 구조인 것 같기도 하고, 축구의 포지션 같다는 느낌도 든다. 어쨌든 수학적으로 대칭을 이루는데, 읽어가는 내내 하나하나 블럭을 쌓아서 거대한 건축물이나 선박의 모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느낌이었다. 일단 블럭이 쌓이면, 왠만한 충격에는 분리되거나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하며, 모든 낱개의 블럭은 딱딱 아귀가 맞지 않는가.

 

푸아로는 이어서 용의자 다섯 명을 차례로 만나러 간다. 재미있는 것이, 용의자에 대한 설명을 초반에 디플리치로부터 들으면서, 푸아로는 마더 구스의 노래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마더 구스의 노래란, 영어권 국가에서 민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노래로, 아이들을 위한 자장가, 속담, 술집이나 병영에서 부르는 노래, 행상인이 외치는 소리, 발라드의 단편, 고대 의식에서 기도할 때 부르던 노래등이 전부 포함되는 것이다. 내용이 잔인한 경우가 많은데, 특별히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tongue twist라고 해서, 일부러 의미 없는 단어를 운율만 맞추고 단어를 적절히 배열하여 어린 아이들이 낱말을 빨리 익힐 수 있는 의의가 있다고 한다. 이 마더 구스의 노래가 등장한 크리스티의 대표적인 소설에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쥐덫>이 있다. 나는 이 두 편에 나온 마더 구스의 노래를 보고 처음에는 크리스티가 온전히 창작해낸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실제로 널리 불리던 노래라고 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섬에 모인 사람과 노래 속 병정은 똑같이 열 명이며, <쥐덫>의 눈 먼 쥐는 세 마리로, 역시 소설 속 특정 상황의 세 명의 인물과 맞아떨어진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 원래 존재하던 마더 구스의 노래와 이 책 속 다섯 용의자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살인 양상이 정확히 마더 구스의 노래와 일치했던 것처럼, 이 소설도 용의자 다섯 명의 캐릭터가 마더 구스의 노래 속 아기 돼지의 캐릭터와 일치한다. 이 소설의 제목이 <다섯 마리 아기 돼지>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다섯 명이 있었다고? 어떤 사람들인가?"

"음, 먼저 필립 블레이크. 그 사람은 크레일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였지. 사건 당시에 그 집에 머무르고 있었어. 지금도 살아 있고 가끔씩 골프장에서 마주치곤 한다네. 세인트 조지 힐에 살고, 주식 중개인이야. 주식 투자를 해서 재미 좀 본 후 꽤 성공해서 부유하게 살고 있어."

"그렇군. 다음은 누구지?"

"그 다음은 블레이크의 형이야. 전형적인 시골 사람이지. 집에만 처박혀 있는 그런 사람이야."

순간 푸아로의 머릿속에 노래 가락이 떠올랐다. 그는 억누르려 했다. 항상 동요 가락이나 떠올리고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최근 들어 시도 때도 없이 동요 가락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직도 그 노래 가락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작은 돼지 한 마리는 시장에 갔네. 작은 돼지 한 마리는 집에 있네.......'

푸아로는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집에만 있었다고?"

"그런 사람이었어. 이것저것 약이랑 약초를 다루는....... 약사처럼 말이야. 그게 그 사람 취미였어. 이름이 뭐였더라? 무슨 문학가랑 똑같은 이름이었는데....... 아, 생각났어. 메러디스, 메러디스 블레이크. 아직 살아 있는지 어쩐지는 나도 모른다네."

"그리고 그 다음은?"

"그 다음? 모든 문제의 원인인 엘사 그리어야."

"작은 돼지 한 마리는 로스트비프를 먹었네."

푸아로가 중얼거렸다.

디플리치는 푸아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아주 부유한 여자긴 하지. 수완이 좋아서 그 사건 이래로 남편을 세 번이나 갈아 치우면서 이혼 법정을 맘껏 들락거렸어. 그래도 매번 더 나은 상대를 고르긴 하더군. 레이디 디티셤이 현재 그녀의 이름이야. 태틀러 지(영국 귀족 사회 소식지-옮긴이) 아무 거나 펼쳐봐도 그 이름을 발결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한 명은 가정교사야.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꼼꼼하고 유능한 여자였지. 톰슨, 존스,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캐롤라인 크레일의 배다른 여동생이었지. 그 때가 열다섯 살 정도였을 거야. 이젠 유명 인사가 됐어. 뭘 발굴하고 먼 오지로 탐험도 떠난다던데....... 그래 워런, 이름이 워런이었어. 안젤라 워런, 요즘 보기 드문 대단한 아가씨야.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다네."

"그렇다면 꿀꿀거리며 우는 작은 돼지는 아니겠군?"

몬태규 디플리치 경은 푸아로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곤 냉담하게 대꾸했다.

"자기 외모 때문에 꿀꿀거리며 울었을지도 모르지! 자네도 알다시피 그 아가씨 외모가 영 볼품없잖아. 얼굴 한 쪽에 길게 흉터가 졌으니. 그 아가씨는....... 아닐세, 자네가 직접 만나보는 게 낫겠지."

 

노래의 순서대로, 용의자를 차례 차례 만나며 그날의 이야기를 듣고, 푸아로는 당시의 일을 종이로 적어 자신에게 줄 것을 부탁한다. 다섯 명의 사람으로부터 푸아로에게 도착한 다섯 통의 편지. 그리고 푸아로는 다시 다섯 명을 차례 차례 찾아가 각각 하나씩 총 다섯 개의 질문을 던진다.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던 사실, 그리고 서로 간에 어긋나는 기억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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